카테고리 없음

렘41장 회복을 위해서

LNCK 2025. 5. 7. 05:10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예레미야

20181115새벽-회복을 위해서-예레미야 41장 1~18절- Youtube 


◈회복을 위해서            렘41:1~18          2018.11.15.

하나님이 선포하셨던 징계와 저주의 말씀은 역사가 되었고(그대로 실현되었고), 
그 역사는 폐허로 그들(우리)에게 다가왔고 

우리는 어제 렘40장 말씀을 나누면서 
그 폐허를 회복시키실, 그 폐허를 회복으로 바꾸실 
하나님의 임재와, 또 하나님의 함께 하심을 찾는 것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하다.. 라는 내용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는 
'폐허를 회복으로 바꾸실 하나님'을 찾는 것도 참 중요하지만, 

그러나 반대로 폐허를 혼돈으로 바꾸려고 하는 악한 세력이 있다는 것도 생각하면서 
우리 주위 상황을 주의하여 자세히 봐야 된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폐허 속에서 어쩔 줄 몰라서 난감해 하는 인생이 
그곳에 함께하시는 회복을 주실 하나님을 찾는 것도 참 중요해요. 

그러나 똑같은 눈으로 똑같은 주의함으로 
폐허를 더욱 극심한 혼돈으로 바꾸려고 하는 자, 
그리고 그런 세력들이 (본문에 이스마엘 일당) 우리 주변에는 항상 있다... 
라는 것을 늘 기억하면서, 우리가 그것에도 주목해야 된다고 본문은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의 반란

 

41:1 '일곱째 달에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요 느다냐의 아들로서 
왕의 장관인 이스마엘이 열 사람과 함께 미스바로 가서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 이르러 미스바에서 함께 떡을 먹다가'

어제 본문 렘40장에서 살펴보았던 것처럼 
요하난 장군이 '이스마엘을 조심하라'는 말을, 그다랴 총독에게 해 주었습니다. 40:14~15
'이스마엘은 암몬 자손들의 왕 바알리스의 사주를 받아서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다랴 총독은, 그런 첩보들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사람을 믿는 성격인지, 
이스마엘을 전혀 경계하지 않고, 그는 미스바에서 이스마엘과 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41:1

1절에, 이스마엘은 '왕의 종친 엘리사마의 손자요 느다냐의 아들'이라고 했죠.
그러니까 다윗 왕의 후손이요, 왕족의 먼 자손입니다. 
그러니 그다랴는 더욱 그 이스마엘을 믿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스마엘은, 폐허를 회복으로 바꾸실 하나님과 달리, 
폐허를 더 심한 혼돈으로 바꾸려고 하는 악한 세력입니다.

우리가 방금 읽었던 1절에 보면, 이스마엘이 그다랴와 친교의 떡을 나누고 있음을 봅니다. 
그다랴 총독 앞에서 환하게 웃으면서, 기쁨으로 웃으면서 식탁 교제를 나누었던 것이죠. 

그러나 그 웃음 뒤에는, 그를 죽이려고 하는 살기가 그 속에 숨어있었던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5절과 6절도 한번 보십시오.

41:5~6 '그 때에 사람 팔십 명이 자기들의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몸에 상처를 내고 
손에 소제물과 유향을 가지고 세겜과 실로와 사마리아로부터 와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나아가려 한지라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그들을 영접하러 미스바에서 나와 울면서 가다가 
그들을 만나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에게로 가자 하더라'

같이 웃으면서 그다랴와 식탁의 교제를 나눈 이스마엘은, 
자기 부하들과 갑자기 들고 일어나서, 그다랴를 암살하고, 
물론 그다랴를 지키던 사람들도 죽이고, 바벨론이 남겨두었던
총독 관저를 지키던 갈대아 군인들까지 다 죽였습니다.  41:2~3

총독 그다랴와 함께 웃으며 떡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그의 웃음은 거짓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정반대로 바꾸어, 거짓 울음을 울고 있습니다. :5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던 80명의 순례자들이 있었습니다. 
물론 성전은 이미 폐허가 되었지만, 
그래도 성전 터에 가서 제사하고 기도하려면 무리가 있었죠.

그 80여 명의 순례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만나러 간 이스마엘은, 
그들과 함께 울면서 그들을 맞이했고, 
거짓으로 그다랴 총독을 만나게 해 주겠다고 그들을 유인해서, 
(지금 그다랴를 이미 죽인 상황) 결국 동족 80명의 순례자들을, 다 죽이고 말았습니다. 

아마 이스마엘은, 자신이 총독과 그를 지키던 군인들을 학살한 테러를 일으킨 것을,
마침 그 미스바 근처를 지나던 순례자 80명이 목격하게 될 것을 염려해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순례자 80명까지 덤으로, 그들을 유인해서 
자기 부하들을 통해서, 다 죽여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41:5~7

그들을 유인하기 위해서, 이스마엘이 쓴 방법이 뭡니까?
울었던 것입니다. 순례자들이 울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니까, 
이스마엘이 그들 앞에서 울은 것입니다. 동병상련 하는 척 했던 것이죠.

그러니 이 이스마엘이 얼마나 간교한 자입니까?
그다랴 총독 앞에 나아갈 때는, 웃으면서 함께 식탁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불과 얼마 후에, 80인의 순례자를 만날 때는, 
울면서 그들 앞에 나아간 것입니다.  
마치 카멜레온 처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자신의 색깔을 바꾼 것입니다. 

8절에, 그 80인 중의 10명은 이스마엘에게 '우리가 밀과 보리와 기름과 꿀을 밭에 감추었으니
우리를 죽이지 말라'고 해서, 식량이 부족했던 이스마엘은 그 10명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테러 행위를 저지르고,
이스마엘 무리들은, 암몬으로 도망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마엘은 도망갈 때도, 그냥 가지 않고 
미스바에 있던 동족들을 포로로 붙잡아 끌고 갔습니다.
41:10 '미스바에 남아 있는 왕의 딸들과 모든 백성을 ...
이스마엘이사로잡고 암몬 자손에게로 가려고 떠나니라'
 
어떤 신학자는 해석하기를, 남유다가 다윗 왕의 핏줄로 계속 내려왔는데,
바벨론에게 패망한 뒤에, 다윗 핏줄이 아닌 서기관 사반의 손자 그다랴가 통치를 하니까, 
다윗 핏줄인 자신이 어떤 반기를 들고, 그다랴를 살해한 것이 아닌가? 라고 보기도 합니다.

어쨌든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뜻을 깡그리 무시하고, 자기 인간적인 생각에서
누구 앞에서는 웃고, 누구 앞에서는 함께 울면서, 
그렇게 거짓으로 점철되어서, 
자기 꾀, 자기 생각을 이루기 위해, 엄청난 살인극을 벌인 것입니다. 

▲문제는, 이제 남은 유다 백성들입니다. 
이스마엘 무리들은, 바벨론이 세우고 임명한 바벨론 총독과 미스바 도시를
완전히 죽이고, 초토화 만들고, 거기 사람들을 포로로 붙잡아 암몬으로 도망갔으니,

전후 사정을 잘 모르는 바벨론 왕과 집권 세력은
'남유다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켰다'라고 보게 될 것이고, 
남아 있던 소수의 바벨론 군인들도, 이스마엘 무리가 죽였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반란 세력을 진압하려고 군대를 이끌고 오게 될 것이고,
바벨론이 큰 군대를 이끌고 와서, 남유다를 초토화 시킬 것을
남은 유다 백성들은 염려하게 되었던 거죠.
그래서 그들은, 요하난 장군을 중심으로, 결국은 애굽으로 피난을 떠나게 됩니다...

그것도 예레미야가 '애굽에 내려가지 말라'고 예언을 해도, 
그 예언을 듣지 않고, 애굽으로 도망을 가 버리죠. 지레 겁을 먹고요. 그게 행42장입니다.

▲이스마엘은 왕의 종친입니다. 41:1 
'왕의 종친'을 영어성경은 the royal family and one of the chief officers of the king
즉 왕족이면서, 높은 관직이었다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지금 하나님께서 이 땅에 세우신 지도자는 누구입니까? 
사반의 손자, 아히감의 아들인 그다랴입니다. 그다랴 총독은 왕족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어쩌면 왕의 종친으로서 이스마엘은, 
다윗 가문의 사람도 아닌 사람이, 남유다를 다스린다는 것이 
자기 마음에 들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건 인간적인 판단이었죠.

뿐만 아니라 그다랴는 '바벨론 왕을 섬기자' 라고 이야기하면서, 
정책적으로는 친 바벨론 파였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마엘 입장에서는, 바벨론을 섬기는 것도 싫었을지 모르겠습니다. 
왜냐면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하고는 친했지만, 북방 민족들하고는 적대적이었죠.

그러나 결국은 이스마엘은,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을 무시하고, 따르지 않았던 겨죠.
예레미야의 예언은 결론적으로는 무엇입니까? 
'바벨론의 멍에를 지라'는 것입니다. 
'바벨론의 통치를 받아들이면서, 그 징계를 통해 거룩해지고, 성숙해져라'는 것이,
바벨론의 멍에(포로), 바벨론의 통치를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남유다에 그다랴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미스바에 그다랴를 세우신 분이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바벨론이라는 멍에를 지우신 분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이스마엘은 어떻게 행동합니까? 
하나님이 세우신 권위와, 하나님이 지워주신 멍에를 벗으려고 하는 반역적인 마음으로 
그다랴도 죽이고, 바벨론왕이 세워놓은 갈대아 군사들도 죽이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고대에 '반역'은 큰 죄였습니다. 
자신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까지도 다 몰살되는, 엄청나게 큰 죄목이었습니다.
이스마엘은, 자신과 가족의 목숨을 걸고, 이런 큰 도박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는 거짓으로 가득한 이 인생은, 사실은 하나님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반역하는 것이죠. 

뿐만 아니라 우리가 5절, 6절을 읽었는데 
나라가 망한 이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의 나라가 성전이 훼파된 것을 아파하며 
수염을 깎고 옷을 찢고 상처를 내면서 
하나님께 드릴 제물들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성전으로 올라가서 회개하려고 하는 
80명의 순례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께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며 
이 망한 나라를 위하여 중보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가는데 
이스마엘은 아무 이유 없이 그 80명 중에 70명을 죽여버립니다. 왜 그랬을까요? 
(표면적으로는, 자기의 그다랴 살해가 들키게 되자, 그 목격자들까지 죽인 것이죠)

결국 어떻게 하다 보니, 이스마엘은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 조차 막은 것이죠. 

그러니 자신이 하나님께 반역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막아서는 악한 자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은 이 땅을 폐허로 만드셨지만, 그러나 이제 다시 심고 세우시려고 1:10참조
이 폐허를 회복으로 바꾸시려고 일하시고 계시는데, 

그런데 그 가운데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이 폐허를 앞으로 더 큰 혼돈으로 바꾸려고, 
거짓으로 가득 차서 하나님께 반역하며,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하는 모든 움직임들과 인생들을 죽이는 그런 자였습니다. 

◑인간적으로 살 길을 찾은 요하난

 

또 우리가 살펴봐야 될 어떤 사람이 있는데, 바로 요하난 입니다. 

41:16~17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과 그와 함께 있던 모든 군 지휘관이 
느다냐의 아들 이스마엘이 아히감의 아들 그다랴를 죽이고 미스바에서 잡아간 
모든 남은 백성 곧 군사와 여자와 유아와 내시를 기브온에서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서
애굽으로 가려고 떠나 베들레헴 근처에 있는 게롯김함에 머물렀으니'

요하난이 암몬으로 끌려가고 있는 남은 백성들을 구원해 내었지만 
그러나 17절에 보니까, 요하난이 애굽으로 가려고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미스바에서 끌려갔죠. 아마 노예로 팔아먹으려고 끌고 간 것 같아요.
그런데 요하난 장군과 군 장교들이, 이스마엘을 죽이고, 잡혀가던 동족을 구해내었죠.

그렇게 요하난 장군이 이스마엘의 반란을 진압하긴 하였지만,
바벨론의 보복이 두려워서
남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애굽행을 택한 것입니다. 
결국은 애굽의 다바네스로 가게 되는데, 지금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들레헴에 도착한 상태입니다. :17
 
하나님은 과거 역사에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 할지라도 애굽을 의지하지 마라 
이집트로 다시 돌아가지 말라'고 수없이 말씀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예레미야를 통해서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라'고 예언하셨습니다.
42:10~19절을 읽어보십시오. 그것도 아주 길고 상세하게 예언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인생은 힘들고 어려우면 언제든지 애굽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애굽을 의지하려고 하는 우리의 옛사람이 남아있다는 것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가 이렇게 선택한 이유는, 갈대아 사람들이 두려웠기 때문인 것이죠. 
그게 (바벨론이 보복하러 온다는 것이) 정확한 정보도 아니었습니다. 
그냥 요하난과 백성들이 추측, 짐작을 한 것이죠. '아마 그럴 거야'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일어난 이 혼돈 때문에 
결국 이스마엘이 그다랴를 죽였다는 것을 통해서 
또다시 바벨론 왕이 이곳을 훼파할 것이다, 우리를 죽일 것이다... 라고 생각했던 
그 두려움이 잘못된 선택으로 나가게 했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애굽으로 인솔해 가려고 하는 요하난이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곳을 폐허로 만드시고, 그곳에 함께 하시면서 
그곳을 회복시키시려고 일하시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회복을 위하여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찾고, 
또 그분의 임재하심을 깨닫고, 그분께 주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분께 주목하는 농도 그 자체 그대로, 
우리를 더 혼란스럽게 만들려고 하는, 
즉 우리를 암몬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이스마엘이 있습니다. 
또 우리를 이집트로 데리고 가려고 하는 요하난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이것을 주목해 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결국 이스마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멍에(징계)를 벗게 만들고, 
하나님께 돌아가려고 하는 우리를 막아서는 존재입니다. 

결국 요하난은, 우리를 도와주긴 하지만 
우리로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과 함께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그런 요소들이고, 
그런 사람입니다. 

어느 이 본문이 우리에게 왜 의미가 있을까요? 
우리네 인생은, 하나님께서 회복을 향해 걸어가고 있는, 
어쩌면 지금 이 상황과 거의 방불합니다. 거의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 인생을 자세히 살피면서 
내 주변에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서, 미스바(회복을 상징)를 꿈꾸며 
공간적으로만이 아니라, 그때 (사무엘 때) 일어났던 그 부흥을 꿈꾸면서, 

나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는 사람,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 
그리고 내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말해주는 사람, 
내가 경계해야 될 일(이스마엘)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사람들의 둘러쌓여서 
회복을 향해 달려가는 (본문의) 이 시점에, 

우리네 인생도 자칫 잘못하면, 오늘 이 본문에 나오는 것처럼, 
이스마엘이 주변에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 채 살아갈 수도 있고, 

너무나도 쉽게 순간적인 두려움이나 혹은 고통이 찾아오면 
요하난을 따라서 애굽으로 가려고 하는 그런 부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면한 환난, 고난을 모면하려는 얄팍한 자세)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이 
외적으로는 암몬의 사주를 받은 이스마엘 이라는 대적이 있었고 
내적으로는 우리 편인 것 같지만, 우리로 하나님께 가지 못하게 만드는 요하난이
있었던 것처럼,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여러 대적들이지만 
이스마엘처럼, 우리 외적인 부분에서, 우리 바깥에서 
우리를 끊임없이 혼돈스럽게 만들려고 하는 사단이 있다.라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왜 갑자기 우리 인생에 재난이 닥치는가요? 
왜 갑자기 내 마음에 어두움이 찾아오는가요? 

이것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많은 요인들 중에 하나이긴 하지만, 
그러나 우리도 이스마엘과 같은 대적이, 
우리를 끊임없이 혼돈으로 끌어가려고 하고 있다... 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베드로는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벧전5:8

한 번 넘어져 본 사람의 피 끓는 우리를 향한 호소인 것입니다. 
깨어있어야 될 때 깨어있지 못했던 베드로, 
그건 자연스러운 육신의 피곤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공격이었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서지 못하게 만드는 사단의 공격
이었다는 것을 베드로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의 외부에 분명히 우리로 
암몬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사단이 있다.. 라는 것, 
그래서 근신하고 깨어 있어야 된다는 것을 늘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그것보다 더 어쩌면 강력한 대적은, 우리 속에 있습니다. 
'너희는 너희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사람을 벗어버리라' 
라고 바울은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엡4:22

우리 속에는 끊임없이, 하나님 없이 해결하려고 하는 
우리의 옛 습관들, 옛사람이, 구습을 따르려고 하는 옛사람이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생이 회복을 위해서 달려갈 때에 
그 회복을, 폐허를 회복으로 만드실 하나님께만 집중하십시오. 
예레미야의 예언을 따르고, 성경 말씀의 가르침만 따르십시오.

우리의 외적인 대적과, 내 내면의 대적을 늘 인식하면서 
하나님이 내게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분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고 
그 뜻을 따라 폐허를 회복시키실 그 하나님의 은혜를 마음껏 누리는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같이 한번 기도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