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4장 가인, 왜곡된 데스티니
[데스티니] 3. 가인, 왜곡된 destiny (창 4:1-15) - YouTube
◈가인, 왜곡된 데스티니 창4:1~5
◑복습
여러분들 각자에게는 우리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운명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 있다면, 자기 데스티니를 발견하고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반대로 내 인생이 행복하지 못하고,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낀다면,
그 이유는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에요.
많은 사람들은 그 이유를 환경적인 데서 찾으려고 그래요.
'저 인간 때문에... 아니면 저 인간이 나를 배신했기 때문에...'
뭐 때문에, 뭐 때문에... 하여간 수많은 다른 이유들을 찾아서
왜 내 인생이 행복하지 못하고 불행한가에 대한 이유를 규명하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근본적인 이유가 아니라는 거예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그런 것이 이유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더 근원에 들어가 보면, 그게 진짜 이유가 아니에요.
진짜 이유는, 우리를 만드실 때 정하셨던 데스티니에서, 내가 벗어나 있다는 거예요.
그것을 우리가 '죄'라고 부릅니다.
이 죄가 무서운 이유는, 이 죄는 우리 하나님께서 죄를 미워하시고 싫어하시죠.
근데 우리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이유는,
죄가 하나님한테 무슨 해코지를 해서 그런게 아니에요.
사람들이 오해하는게 있습니다. 죄는 하나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없어요.
왜냐면 하나님은 절대적인 창조주이시기 때문에
마귀도, 사탄도, 어떤 죄도... 우리 하나님한테 해를 입힐 수가 없다는 거예요.
예, 죄가 있건 말건 사실, 하나님은 상관이 없으시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 하나님이 죄를 미워하시는 진짜 이유가 있는데, 그건 왜 그러냐면,
당신의 자녀들이, 죄로 망가지기 때문에 미워하시는 거예요.
그러니까 죄는 우리의 인생을 파괴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파괴하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세요.
왜냐하면 하나님이 가장 아끼시고 사랑하시는 존재가 그분의 자녀들인데,
저와 여러분은, 우리 하나님이 자기 목숨을 주실 정도로 사랑하신 그런 존재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존재들이 죄 때문에 망가지니까, 죄를 미워하신다는 거예요.
근데 이 죄는, 여러분 우리의 데스티니를 망가뜨리고 왜곡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아담의 데스티니를 살펴봤죠.
아담은 첫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한테는 첫 작품이었기 때문에
아담에게 주어졌던 데스티니는,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만드셨는지, 모든 인류를 만드신 목적에 대한 것을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 첫 번째 이유가 뭐예요?
아담을 만드신 이유는 기쁨을 주는 존재로 만드셨다는 거예요.
아담은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존재였고, 하와는 아담의 기쁨이 되는 존재였고,
하여간 우리는 존재하는 것 자체가... 누군가의 기쁨이 되는 존재, 그런 존재로 지음을 받았어요.
그래서 우리가 아이를 낳아서 '응애'하고 우는 아이를 딱 받아보면 너무 기쁘잖아요.
그 간증을 제가 했죠. 저는 아이를 별로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제가 첫 아들을 제 팔에 딱 안았을 때 너무 감격이 돼서 뭐 말을 못 하겠는 거예요.
'근데 내가 왜 이렇게 기쁠까?' 사실 기쁠 이유가 별로 없어요.
얘 때문에 저는 시간도 많이 이제 써야 되고, 밤에 잠도 못 자고... 하여간 인생이 꼬였어요.
얘 때문에 너무너무 힘든데도 불구하고, 이 아이를 키우는게 고통이 아니고 기쁨이에요!
그래서 '이게 도대체 왜 그럴까?' 곰곰이 묵상해보면, 큰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없는데, 이유가 딱 하나예요. 그냥 존재 자체가 '기쁨'인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좇아 지음 받은 저와 여러분은
원래 존재 자체가, 뭘 많은 것을 이루어서, 그게 아니라
그냥 존재 자체가 기쁨이 되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어요. 그게 우리의 진짜 데스티니입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세 번째 데스티니가 기억나세요?
-다스리는 자로 지음을 받았고
-창조하는 자로 지음을 받았고,
-또 친밀함을 함께 나누는 자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데스티니요, 아담의 후손인 우리의 데스티니 입니다.
◑가인의 뒤틀린 데스티니
오늘은 가인의 데스티니를 살펴볼 텐데,
아담에게 주셨던 그 데스티니가 어떻게 망가지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근데 그 사이에 뭐가 있죠? 죄가 있어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을 떠나는 죄를 저지르고, 이 죄로 인해 하나님을 떠나고 나니까
그것을 우리가 '원죄'라고 부르죠. 근데 이 원죄가 시간이 지나면서
우리 가운데 구체적인 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시작해요.
그래서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살인 죄의 모습으로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원죄가 물론 우리의 데스티니를 왜곡하고 망가뜨리는데,
원죄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저지르는 구체적인 죄 하나 하나가,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 놓고, 우리의 인생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에 대해서
가인이 우리에게 샘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가인의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실 때는,
'아 우리가 선택하는 것들이 얼마나 중요한가?' 하는 것을 보실 수 있어야 돼요.
그래서 오늘의 주제는 이제 선택입니다. 잘못된 선택이 우리에게 미치는 결과입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선택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우리 인생의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가요?
여러분이 다 체험하고 계시잖아요.
결혼할 때 그 인간을 선택한게, 지금 여러분의 인생을 이렇게 만들고 있는 거잖아요.
안 그래요?
그 선택이 축복이 되기도 하고, (뭐 저주가 되진 않지만)
하여간 뭐 좀 고생을 더하게 되고... 하여간 뭐 이런 모든 우리 삶의 모습들이
어떤 선택을 했느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거잖아요.
우리는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선택들을 하게 됩니다. 뭐 선택을 피할 수가 없어요.
가장 심플한 선택은 '오늘 뭘 먹을까?'부터 시작해서,
'오늘 아침에 교회 올 때 무슨 옷을 입고 갈까?'
그 중에 중요한 선택도 있죠. '배우자를 어떻게 선택할 것인지, 직장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전공을 어떻게 선택할 것인지...' 등의 여러 가지 선택들을 하게 되는데,
이런 선택 하나에는, 여러분 잘 들으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그 선택의 결과가 있다는 거예요.
'모든 선택에는 반드시 결과가 있다.' 여러분 이것이 무서운 겁니다.
모든 선택에는 결과가 있어요!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결과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신학적인 용어로 '하나님은 공의에 기반을 두고 행하신다' 라고 해요.
만약 하나님께서 우리가 선택한 거에 대한 아무런 결과를 안 주신다고 하면,
그럼 하나님이 공의로우신게 아니죠.
'공의롭다'고 하는 건 뭐냐면, 선택에 대해서 반드시 거기에 합당한 결과를 맺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원리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오늘 무엇을 선택하든지간에, 그 선택이 바로 열매가 곧장 보이진 않을 수도 있어요.
그렇지만 반드시 그 선택에 대한 열매가 있고, 결과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팥을 뿌리면 팥을 거두게 되는 거고요.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게 되는 거예요.
선을 뿌리면 여러분 선을 거두게 돼 있고요. 죄를 뿌리면 거기서부터 비극을 거두게 돼 있다는 거예요.
이것이 오늘 가인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하나님의 창조 원리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우리가 선택하는 것 때문에,
사실은 저와 여러분을 향한 우리 하나님의 데스티니들이
깨지고 망가진다고 하는 것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무엇을 선택해야 될지,
또 그리고 그 선택이 잘못된 선택이라고 하는 건 어떤 건지,
또 그런 잘못된 선택을 왜 내리게 되는지에 대해서, 오늘 함께 살펴보면서
우리의 삶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택들만 계속 이루어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래서 가인의 이야기를 보실 때는, 그것을 보실 수 있어야 되는데
가인의 이야기를 성경에서 볼 때, 쓸데없는 거를 보는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예를 들면, 뭐 가인이 쫓겨났는데, 가인하고 아벨밖에 없었는데,
'뒤에 가서 가인을 죽이려는 사람들이 나타나는데, 이 사람들은 누굽니까?'
뭐 이런 거를 질문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그런데 조금만 생각해 보면, 별로 어려운 질문은 아니에요.
여러분, 아담하고 가인하고 뒤이어 노아홍수 전까지, 사람들은 평균 900살을 살았습니다.
900년이면,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시대 초기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거예요.
태조 왕건 시대에 살던 사람들이 지금 살아 있다는 것은,
그 사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태어나서 살았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보세요.
여러분 가인과 아벨만 낳은 것이 아니라, 그의 동생들을 계속 낳았습니다.
그러면 조선시대의 어떤 아버지와 아들로 시작된 두 사람의 자손이,
지금 몇 명인가 한번 계산해 보실래요? 셀 수도 없이 많아요.
그러니까 가인이 살던 시대에 (그를 죽일) 사람이 많은 건 문제도 아니에요.
'땅에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계속 낳았습니다.
그 자손이 또 계속 낳았겠죠...
▲가인의 원래 데스티니는, 이렇게 땅에서 유리하고 방황하는 자가 아니었어요.
가인의 원래 데스티니는, 우리 하나님이 아담에게 주신 데스티니를 그대로 이어받은 자예요.
그래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자고, 서로 간의 축복이 되는 자,
그래서 가인에게도 가정이 있었습니다.
일을 끝내고 나면 돌아와서 오손도손 얘기할 수 있는, 아버지들과 어머니도 있고
동생 아벨도 있고... 이런 가정이 있었어요.
그런데 가인이 잘못된 선택을 하고 나니까, 가인의 삶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됐습니다.
비극이 찾아왔어요.
그게 여러분이 오늘 읽으신 12절~15절이에요.
거기 보면,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효력을 주지 않고, 땅에서 유리하는 자가 되고...'
또 '다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뵙지 못하게 되고, 또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려고 쫓아오고...'
이런 자가 됐습니다.
이걸 오늘날로 풀어 얘기하면 '쫄딱 망했다'는 거예요.
가인은 누구였냐면 농사짓는 사람이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은, 땅에다 뭐를 심으면, 땅이 그 효력을 내 줘야 돼요.
근데 땅이 다시는 효력을 내지 않는 것은... 아무리 밭에 뭐를 심어도
아무것도 못 거둘 거라는 거예요.
가인이 만약 농사짓는 사람이 아니고, 만약 장사꾼이었다면,
아무리 투자를 해도, 아무 이윤도 안 나올 거라는 거예요. 그런 얘기예요.
그것뿐만이 아니라, 자기 안에 불안함이 찾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해서 도망가야 됐어요.
여호와의 낯을 피해 도망갈 수 있는 것은 아닌데,
하여간 사람들을 피해 도망다니게 됐어요. 집을 떠나야만 했어요.
이것이 가인에게 닥친 비극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비극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하루아침에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자기를 돌봐주고, 자기를 품어 주시는 가정이 없어요.
그냥 혼자 떠나야 되는 거예요.
거기에다가 누가 자기를 죽일지... 늘 불안감이 늘 자기를 좇아다녀요.
이것이 여러분, 가인에게 일어났던 비극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인에게만 일어난 비극이 아니라,
사실은 하나님을 떠나서 죄 가운데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고통이라는 거예요.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비슷한 고통이라는 거예요.
◑가인이 죄를 범했을 때, 그 죄가 가인에게 이렇게 몇 가지 변화를 가져왔는데
▲1. 첫 번째는, 하나님의 축복을 빼앗겼다는 거예요.
땅에다 무엇을 심으면 그 땅이 효력을 내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이었습니다.
근데 더 이상 가인에게 그런 축복이 없다는 거예요.
여러분, 죄가 우리 인생 가운데 무서운 이유는,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뺏어가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여러분은 그거를 꼭 아셔야 돼요.
어떤 사람은 그 인생을 보면, 정말 쉽게 사는 사람이 있어요.
쉽게 산다고 하는 것은, 뭐 크게 노력하지 않았는데도 하나님께서 계속 도와주셔서
정말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있어요.
근데 어떤 사람은, 죽어라고 노력하고 '난 행복하게 살아야 해'
그래서 막 투쟁하고 몸부림 치는데도, 계속 불행한 사람이 있어요.
그걸 보면 참 인생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을 하지요.
근데 이것은 꼭 환경적인 얘기뿐만이 아니라, 사실은 더 내면적인 얘기예요.
말하자면, 그 사람은 내면이 항상 평강한 사람이 있어요.
뭘 해도 마음이 행복하고, 항상 평안가운데 살아요.
근데 반대로 어떤 사람은, 막 죽어라 치열하게 사는데, 행복하지는 않아요.
늘 마음이 불안하고, 어디에 쫓기는 것 같고, 자기 마음에 안정감이 없어요.
근데 이게 여러분 뭐냐면... 하나님의 축복이에요.
여러분이 뭐 인생을 어느 정도 사셨으면 다 아실 거예요.
우리가 열심히 일하며 산다고... 인생을 잘 살게 되는 거 아니잖아요.
생각할 수 없는 변수들이 얼마나 많은지...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수많은 변수들이... 사실은 우리가 그냥 생각 안 하고 사니까 그런 거지,
이 변수들을 다 생각하고 살면요... 머리가 터집니다.
우리가 열심히 산다고, 인생을 꼭 성공적으로, 축복 속에 살아가는게 아니에요.
(수많은 셀 수 없는 변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사실 우리 인생 가운데 가장 중요한 건 뭐냐면, 사실 하나님의 축복이에요.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 이걸 알아요. 예수 안 믿는 사람도 이걸 알기 때문에
사실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게 뭐냐 그러면... 그들은 '운'이라 그래요.
부자된 사람들 보면 '당신은 어떻게 부자가 됐습니까?'
그러면 열심히 노력하고 뭐 다 했는데,
실제 보면, 사실 솔직히 얘기하면 '운이 좋았습니다' 뭐 이거예요.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뭔가가 이루어져서, 돈을 벌어서 부자가 됐다는 거예요.
사실은 세상도 그걸 알아요. 그래서 '운'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렇지만 세상은 그게 하나님으로 인함인지를 모르는 거지요. 그래서 '운'이라 말하는 거죠.
사실 우리처럼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는, 운이 아니고,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걸 놓치시면 안 돼요.
여러분 이거 놓치시고, 정말 미련한게 뭐냐면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는 막아 버리고,
내가 열심히 해서 뭔가를 얻으려고 해요. 이것처럼 미련한 게 없어요.
열심히 한다고 어떻게 되는게 아니라니까요.
뭐 아무리 열심히 열심히 노력해서 여러분들이 뭔가 성공한다고 해도,
여러분이 모아 놓은 집이나 공장에 불 한번 나 보세요. 모아 놓은 것 하루 아침에 다 날라가 버리죠.
여러분이 아무리 열심히 열심히 성공하려고 노력해도,
교통사고 한번 나 보세요. 어떻게 되나요? 한 방에 끝나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열심히 산다고 인생이 꼭 잘 되는게 아니라는 거예요.
아마 조금 살아 보신 분들은 다 아실 거예요.
우리가 인생을 살다 보면 '아~ 꼭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되는 구나'
그러면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축복 가운데, '영적으로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공이란 말이, 꼭 '세상적으로 성공'한다는 뜻은 아닌데
하여간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획하신 데스티니, 그게 이루어지면,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보든지간에... 나는 그냥 행복해요. 예, 행복하고 충만해요.
근데 그런 축복된 삶을 살 수 있지만,
만약 가인처럼, 하나님의 축복이 끊어지게 되면요... 예 그건 진짜 비극이에요.
죄가 무서운 이유는,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를 막아 버리는 거예요.
가인이 뭐라 그랬냐면 '내가 다시는 여호와의 낯을 보지 못하리니'
하나님과의 축복이 끊어져 버렸다는 거예요.
'땅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리니' 하나님이 축복을 닫아 버리신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죄가 무서운 이유는, 축복을 닫아 버리기 때문이에요.
▲2. 두 번째, 축복이 닫히기 때문에 뭐가 찾아오냐면... 불안이 찾아옵니다.
사실 '하나님이 나를 보호하신다'고 하는 이 말씀이 없으면 불안해요.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생길지 어떻게 알아요?
내일 당장 여러분 가정에, 생각하지도 못한 비극이라도 생기면 어떻게 하냐고요?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불안할 수밖에 없어요.
가인을 보면 불안했어요. '내가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방황하고 유리하는 자가 될 텐데,
그러면 도대체 나는 어떻게 되는 거냐, 누가 나를 죽일 수도 있고,
나를 해코지 할 수도 있는데... 그래서 불안한 거예요.
▲3. 죄를 짓고서, 하나님을 떠난 가인 같은 인생의 세 번째 고통이 뭐냐면...유리방황 이예요.
뭘 해야 될지 모르겠는 거예요. 방향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떠돌이가 되는 거예요.
맞아요. 우리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자기 인생의 방향을 잃어버리는 거예요.
내 인생이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될지를 몰라요.
그래서 찾아오는게 뭐냐면 허무함이에요.
여러분, 열심히 살다 보면, 가끔 이렇게 허무하다는 생각이 드신 적 있으세요?
예수님 만나기 전에, 저는 그랬어요.
저는 막 열심히 열심히 살아서,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그래서 성공하면... 내 인생이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에 저한테 뭐가 찾아왔냐면, 뭘 해야 될지를 모르겠는 거예요.
'내가 도대체 왜 이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는 거예요.
'이렇게 해 가지고, 밥 먹고 살다가 죽는가 보다...'
인생을 왜 살아야 되는지를 몰라요.
그것은 여러분 당연한 겁니다. 왜냐면 우리를 창조하신 분의 얘기를 듣지 않는데
어떻게 왜 사는지를 알겠어요?
열심히 열심히 살다가, 조금 한가해지면... 인생이 허무한 거예요.
그러면 이제 이 허무함을 달래기 위해서, 뭔가 엉뚱한 짓을 하든지,
아니면 더 열심히 살다가 몸이 망가져서 죽든지... 이게 우리의 인생 패턴이잖아요.
근데 이것이 이제 가인에게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 가인의 모든 비극이 어디서 시작됐습니까?
예, 잘못된 선택에서부터 시작됐다는 거예요.
이 가인의 비극적인 삶은, 그의 복된 데스티니가 망가져버린 첫 번째 이유는,
잘못된 것을 선택한 거예요. 그의 동생을 죽이는 그 잘못된 선택!
이것이 가인의 데스티니를 망가뜨렸습니다.
이것은 여러분, 가인의 얘기만이 아니라,
오늘 저희가 성경에 나타난 수많은 사람들의 얘기를 살펴볼 거예요.
'그들은 도대체 어떤 잘못된 선택을 했고, 그 대가가 뭐였나?'
그래서 여러분, 이것이 어느 한 사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의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저와 여러분도 매일매일 선택을 하시잖아요.
어떤 건 중요한 선택이고, 어떤 건 좀 덜 중요한 선택이고 그런데...
그런데 덜 중요해 보이는 작은 선택도, 나중에 가 보면 중요해요.
제가 했던 가장 잘못된 선택 중의 하나는 뭐냐면 치즈케익 이었어요.
치즈케익.. 이거를 제가 너무 좋아했거든요.
그래서 치즈케익을 매일 선택해서 먹었는데,
뭐 그까짓 것 하나 먹는다고 내가 당장 죽는 것도 아니고...
근데 한 10년 그렇게 선택하니까, 몸이 망가지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올해 고생을 많이 한 거 아니에요?
여러분 덜 중요해 보이는 선택도, 덜 중요한게 아니에요. 세상에 공짜가 없어요.
우리의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있다고 하는 것을,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우리 옆 사람들한테 한번 말씀해 주세요. "모든 선택에는 대가가 있습니다!"
이거를 여러분은, 꼭 기억하세요.
그래서 아무렇게나 쉽게 선택하시지 마세요.
작아 보이는 선택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선택하셔야 되는 겁니다.
확신 가운데 선택하셔야 돼요. '이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그 확신 가운데 선택을 해야지,
그냥 가볍게.. 또는 주님이 원하시지 않지만, 내가 너무 해야 될 것 같아서
이렇게 내리는 선택들은요... 마지막에 그거에 갑절의 갑절, 아니 몇 십 배의 고통과 후회를
낳는다는 거예요. 이것이 가인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이 가인의 인생은 그걸로 끝났어요. 그 뒤에 가인의 스토리는 없습니다.
그냥 자녀 낳아서 죄 짓고 살았다...는 거 밖에 없어요.
근데 가인이 원래 이렇게 지음받은 사람이 아니에요.
가인은 아담의 데스티니를 이어받은 사람이고,
우리 하나님께서 '통치하는 자로, 다스리는 자로, 땅을 지배하는 자로,
하나님과 함께하는 자'로 지음 받은 자이지,
그렇게 인생을 비참하게 마무리하도록 지음받은 자가 아니었어요.
그런데 그 잘못된 선택 (살인) 하나가, 가인의 영원한 데스티니를 다 바꿔 버렸어요.
예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들이 무엇을 선택하느냐 하는 것이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다 바꿔 버린다는 거예요.
여러분이 선택할 때, 하나님 앞에서 말씀의 원리대로 잘 선택하시기를 축복합니다.
◑가인의 잘못된 선택 뒤에서, 잘못된 태도가 있다
자 그런데, 이런 잘못된 선택을 하게 된 이유가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게 들어가 보면, 왜 가인이 그런 잘못된 선택을 했느냐?
그 내면에 보면 잘못된 태도가 있었어요.
그래서 가인의 두 번째 문제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세 가지 살펴볼 텐데
-첫 번째가 잘못된 선택이고
-두 번째가 잘못된 태도예요. 잘못된 태도가 잘못된 선택을 낳는 거예요.
-세 번째는 잘못된 예배예요. 잘못된 예배가 잘못된 선택을 낳는 거예요.
가인의 하나님을 향한 <태도>가 잘못되어 있었어요.
가인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을 향한 태도와, 사람을 향한 태도가 잘못되어 있었어요.
원래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뭐라 그러셨냐면 (예수님이 가르쳐 주셨죠)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그러셨어요.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올바른 태도예요.
(비록 구약시대지만, 이게 아직 명문화 되지 않았지만, 일반적인 세상 사는 원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해 가져야 될 태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고,
이웃을 향해 가져야 될 태도도, 이웃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게 올바른 태도였는데... 가인은 정 반대되는 태도를 가지고 있었어요.
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내가 섬기고 내가 따르고 내가 순종해야 될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은 나를 축복해 주고, 나를 도와주는 존재'일 뿐이었어요.
그 차이를 아시겠어요?
하나님은 내가 섬겨야 될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섬겨야 될 존재였다는 거예요.
가인은 '나를 위해 하나님이 존재하는' 거예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어요?
가인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근데 어떤 마음으로 제사를 드렸는지 모르겠어요.
농사짓는 자였으니까 이제 곡식을 가지고 제사를 드렸어요.
어떤 사람은 '가인이 양으로 제사를 드려야 되는데, 곡식으로 제사를 드린 그게 잘못 됐어'
그렇지만 여러분, 레위기에 한번 가 보세요.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소제)도 분명히 있어요.
문제는 다른데 있었어요. 하나님께서 괜히 트집 잡으시는 분이 아니잖아요.
뭔가 문제가 있어서... 그래서 하나님께서 가인의 그 예물을 안 받으셨습니다.
그러면 정말 하나님을 섬기는 자였으면, 정말 하나님이 중심인 사람이었으면
어떻게 반응을 해야 돼요? '아 내게 뭐가 잘못됐구나.. 주님 뭐가 잘못된 것입니까?
제가 고치겠습니다.' 이래야 정상이죠.
근데 가인은 '안색이 변했어요.' 화가 났다는 거예요.
'내가 이거 얼마나 열심히 일해서 드린 건데, 이걸 안 받어?'
하나님은 그의 마음의 중심을 아셨지요.
가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중심이 아니에요. 자기가 중심이에요.
그 뒤에 나오는 가인의 반응들도 똑같아요.
가인이 잘못하고 하나님이 징계하셨으면, 회개하고 돌아와야지요. 근데 뭐라 그래요?
'내가 하나님을 떠나면, 누가 나를 보호해 줍니까?' 그 얘긴 뭐에요?
'하나님은 나를 보호하시는 분이잖아?' 이렇게 자기가 중심이고, 하나님은 밀려나 있어요.
△제가 (거듭난 후) 신앙생활을 25년, 30년 가까이 하면서, 참 재밌는 차이를 하나 발견했는데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기독교가 있다는 걸 알았어요.
-하나님을 섬기는 기독교가 있고,
-하나님이 섬기는 기독교가 있어요.
-교회가, 하나님의 종이 모인 교회가 있고요.
-하나님을 종으로 부리는 교회가 있어요.
근데 심각하지만 사실이더라고요. 여러분, 스스로에게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이십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을 섬기시는 분이세요? 그분이 여러분 인생의 중심이세요?
그게 아니라 만약에 '하나님은 나를 위로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나를 도와주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은 나를 축복하시는 분이시고, 내가 기도하면 들어주시는 분이시고...'
물론 하나님은 그렇게 하세요. 왜냐면 우리는 그 분의 자녀니까!
그렇지만 그게 여러분의 신앙의 중심이라면, 죄송하지만 여러분은 가인의 라인에 서 있는 거예요.
근데 제가 요즘은 좀 두려워요.
요즘 이 사람 저 사람 만날 기회들이 있어서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아 이거 한국에는 두 개의 기독교가 있네?' 근데 정말 그게 막 심각하게 제게 느껴졌어요.
똑같이 하나님 얘기를 하고, 똑같이 예수 얘기를 하고, 똑같이 선교 얘기를 하고,
똑같은 신앙 얘기를 하는데... 하여간 말이 서로 안 통해요. 이상해요...
근데 거기에 조금 더 분별력을 가지고 깊게 들어가 보면
'이게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건지, 하나님이 나를 섬기는 건지' ... 딱 갈라져요.
가인 같은 이 잘못된 태도가, 잘못된 가인의 선택을 낳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로 부르심을 받았지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여러분, 내가 하나님을 섬기는 자인지, 하나님이 나를 섬기는지 잘 보시려면,
'여러분이 원하는 그게 안 이루어졌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오나요?' 그걸 보면 압니다.
가인의 반응을 보일 수도 있어요. 정확하게 분별 돼요.
'여러분이 원하는게 안 이루어졌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가요?
내가 원치 않은 사건이 벌어졌을 때, 내가 어떤 반응을 보이는가요?'
이거를 보는 순간, 내가 어느 라인에 서 있는지, 정확히 판정이 나요.
내가 원하는 것이 안 이루어졌을 때, 그때도 내가 하나님 앞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면서 '어차피 주님께서 하시는 일이면, 제가 감사함으로 받겠습니다.
주님의 계획이 있으면 이루십시오!' 그리고 감사하고 순종하고 인내하면서 가는 사람은
맞아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고, 그가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입니다.
근데 '내가 원치 않는 일이 벌어졌을 때' 안색이 변하면서, 주님을 떠나는 사람도 있어요.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래?' 하는 사람은 가인이에요.
가인은 태도가 잘못되어 있었어요.
하나님에 대한 태도... 그의 안색이 변했어요...
▲가인은, 사람에 대한 태도도 마찬가지죠.
사람은 어떤 존재예요? 사랑하라고 주신 거예요.
아담에게 왜 하와를 주셨어요.? 사랑하라고 주신 거예요. 하와도 마찬가지죠.
사람은... 우리가 서로 돕고, 축복하고...
그래서 그 사람의 인생을 성공시켜 줘야 될 존재이지,
그 사람이 내 인생에 박수 쳐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하나님을 떠난 세상의 교육 제도 자체가, 경쟁 시스템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잠재적인 적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자라면서 그렇게 교육을 받았어요...
가인이 열심히 열심히 일 해 가지고서, 뭔가 하나님 앞에 자기가 돋보이는 걸 드리려고 왔어요.
근데 보니까, 아벨이란 놈이 있는데, 하나님이 얘를 더 기뻐하시는 거예요.
이게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거예요.
자기가 이제 하나님한테 좋은 평가를 받고 싶어서 왔는데,
내가 아니고 아벨이 제사를 받으시는 거예요.
그래서 그 결과, 결국 가인이 아벨을 죽이는 잘못된 선택을 하지요.
잘 들으십시오 여러분, 우리 인생은 다른 사람을 이용해서 내 인생이 성공하거나,
다른 사람이 내 인생에 박수 쳐 주는 존재로 그 사람이 존재하는게 아닙니다.
이것은 지극히 타락한 인간의 모습이에요.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 가인이 왜 화를 냅니까?
동생의 제사를 하나님이 받으시면... 그걸 보고 기뻐할 수도 있잖아요.
동생이 잘 되면, 내가 박수쳐 주면 좋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이 아벨의 제사를 기뻐 받으시는 것을 보고, 가인이 화를 냈다는 것은,
'아벨이 평소에 자기를 박수 쳐 주는 존재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거예요.
동생 아벨에 대한 존중심이나, 존경심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니 아벨이 잘 되는 것을 보고, 못 견뎌하고, 화를 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은 뭐냐면, 내 이웃을 사랑하는 거예요.
어떻게 사랑하냐면, '친구가 그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주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라 그랬어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 인생을 위해서 목숨을 주셨어요.
이웃을 향한 우리의 올바른 태도는 뭐냐면?
우리 것을 희생하고, 내 인생의 시간과 관심과 에너지를 쏟아 부어서
그 사람을 축복하는 거예요. 그 사람의 인생이 하나님 앞에 성공하도록 만들어 주는 거예요.
그가 가장 행복한 삶을 살도록 해주고, 가장 축복된 인생이 되도록 해주고...
주님께서 '다 함께 기뻐하도록' 우리를 지으신 거죠. 이게 사람의 원래 창조 원리입니다.
근데 이 태도가 잘못되면... 가인처럼 되는 거죠.
사실 하나님을 떠난 인간들은, 다 이 태도가 잘못되어 있어요.
다른 사람은 다 내 인생에 박수 쳐 주는 사람으로..
다른 사람은 내가 밟고 올라가야 될 사람이고...
다른 사람들은 나의 잠재적인 경쟁자이고...
뭐 이런 잘못된 태도가, 결국 가인으로 하여금 아벨을 죽이는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여러분 그런게 아니에요. 이웃을 사랑하는 거예요.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고, 둘째 이웃을 사랑하는 거예요.
주위를 한번 이렇게 둘러보세요. 이 사람들이 왜 존재한다고 생각하세요?
▲근데 이건 부부간에도 마찬가지예요.
부부싸움에 가장 큰 원인이 뭐에요?
나는 그런 거 기대하고 결혼한게 아니라는 거잖아요.
'너 남편이라며? 남편이 나한테 이런 거 해 줘야 되는 거 아니야?'
'너 아내라며? 아내가 나한테 이런 거 해 줘야 되는 거 아니야?'
이게 맨날 싸우는 주제잖아요. 이게 바로 가인의 잘못된 태도라는 거예요.
제가 결혼 상담을 하다 보면, 거의 100이면 100명 다 그래요.
'너는 왜 그 자매와 결혼하고 싶냐?' 물어보면,
이 얘기 저에게 돌려서 얘기하는데, 결국은 뭐냐면
'내가 그 자매랑 결혼하면, 그 자매가 나한테 잘해 줄 것 같다'는 거예요.
내게 뭔가 만족이 있을 것 같다는 거예요. 철저히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예요.
또 자매도 마찬가지예요. '그 형제가 뭐가 좋아?' 물어보면,
이렇게 저렇게 돌려서 얘기 하는데
결국은 '그 형제가 자기가 원하는 뭔가를 채워 줄 것 같다'는 거예요.
자매도 자기 중심적이고, 이기적이예요.
그렇게 이기적인 두 사람이 결혼해 가지고... 행복할 리가 있나요?
당연히 서로 못 채워 주는 거죠.
제가 지금까지 한 명도, 그런 상태에서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사람을 못 봤어요.
그럼 어떻게 해야 되냐면, 내가 결혼하는 이유는.
'저 형제/자매를 행복하게 하고, 그가 하나님 안에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을 보고 싶어서,
저는 결혼합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은 찾기 어려워요.
근데 처음에는 그게 아니더라도, 결혼 후에 차근 차근 배워가야 돼요.
부부가 점점 더 성숙해 가는 거죠. 서로를 진정으로 사랑하면서, 자기를 희생하는 거예요.
하여간 가인의 잘못된 삶의 태도가, 그가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만들었죠.
그런데 이 잘못된 태도가 나오는 더 밑에 들어가 보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요.
가장 근원적인 이유가 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면, 사실은 잘못된 예배라는 거예요.
◑가인의 잘못된 선택 뒤에는, 잘못된 예배가 있었다
그래서 가인의 스토리를 보면, 이 세 가지의 미스테이크가 있습니다.
-가장 표면적으로는 잘못된 선택을 하죠. 살인이라는!
-근데 그 이면에 들어가 보면, 잘못된 태도가 있어요.
-그리고 그 더 밑에 들어가 보면 잘못된 예배가 있었어요.
가인이 예배를 잘못드렸다는 거예요. 거기서부터 시작된 비극이잖아요.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사를 안 받으셨겠어요?
예배를 잘못 드리니까... 안 받으신 거지요. 성경에 이유가 뭔지 명확히 나와 있지는 않지만,
뭔가 예배를 잘못 드렸으니까... 그의 제사를 안 받으신 거예요.
맞아요. 여러분, 잘못된 예배가 결국 잘못된 태도를 낳고,
그것이 잘못된 선택을 낳고, 그것이 잘못된 인생을 만드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결국 가장 핵심에 들어가 보면 '올바른 예배'가 근본 바탕에 자리잡고 있어요.
근데 '예배'라고 하는 건 뭐냐면, 즉 예배의 본질은
어떤 대상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그 가치를 높이는 것을... 예배라고 불러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한다 그랬을 때는
내가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존중한다는 것이 예배예요.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예배하는 자는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라' 그랬거든요.
우리 마음의 중심으로부터, 정말 그분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정말 순종하고 따라가는 것이 예배라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이 모임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과 임재를 통해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아가야' 돼요. 조금씩 알아가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가는 올바른 예배' 가운데 바로 설 때,
그것이 우리에게 올바른 태도를 낳게 하고,
그 올바른 태도가.. 결국 올바른 선택을 낳게 된다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 우리가 싸우는 싸움의 가장 본질에 들어가 보면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느냐?'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느냐?'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중요하냐?'
이것이 결국엔 우리의 인생을 결정짓는 가장 큰 (예배) 요소입니다.
가인은 여러분, 사실은 하나님을 예배했던 사람이 아니었어요.
만약 그가 하나님을 예배했다면, 하나님이 왜 그의 예배를 안 받으시겠어요?
가인이 예배했던 건, 사실은 자기 자신이었잖아요. 여러분, 이 차이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가인이 예배했던 건 자기 자신이었지, 하나님이 아니었어요.
자기가 어떻게 더 성공적이고, 어떻게 더 인정받고...
하나님께서 내가 드린 제물을 얼마나 더 인정해 주시고...
사람들이 얼마나 자기를 인정해 주기를 원하는... 그 중심이 '자기' 였어요.
정말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물론 그 인생을 하나님이 축복하셔서 성공적인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말 하나님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자기를 높이려고 하지 않아요.
그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이잖아요.
그래서 여러분, 진짜 하나님을 예배하는 강호江湖의 고수들은, 거의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드러난 사람은 다 고수가 아니라는 뜻이다' .. 그런 뜻은 아닙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근데 제가 이렇게 사역을 하면서 보면, 저를 정말 깜짝깜짝 놀라게 하시는 분들이 있어요.
가끔 만나 보면 '야~ 또 이런 분이 있을까?'
근데 그런 분들은 정말 숨겨져 있어요. 거의 안 드러나는 거예요.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그냥 섬기는데
와 근데 그런 분이랑 얘기를 하다 보면, 이게 보통 분들이 아니에요.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하나님을 드러내게 하는 분이라는 거죠,
◑성경에 나오는 잘못된 선택을 한 인물들
가인뿐만이 아니라, 이런 잘못된 선택, 잘못된 태도, 잘못된 예배는,
수많은 성경의 인물들을 망가뜨렸습니다.
▲1. 그 중에 한 명이 게하시 입니다.
엘리사의 제자가 게하시 이에요.
왕하4~6장에 보면, 게하시가 엘리사의 수종드는 '종'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것은 종이란 뜻이 아닙니다. 그의 후계자란 뜻이에요.
성경에 '사환'이라고 나와 있죠. 왕하6:15, 영어로 servant
어떻게 알 수 있냐면, 엘리사가 엘리야의 '수종드는 종'이었어요.
'(엘리사)가 일어나 엘리야를 따르며 수종 들었더라' 왕상19:21
표현이 그렇게 된 것이지, 실제 의미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라는 뜻이에요.
여호수아도 '모세의 시종'이라고 했죠. 실제로 종이 아니라, 후계자란 뜻이죠. 수1:1(개역에)
영어성경에 servant 인데, 후계자란 뜻입니다.
그래서이 엘리사가 항상 게하시를 데리고 다닙니다.
모든 기적과 모든 사역의 현장에 항상 게하시를 데리고 다니고
게하시가 그의 제자로서 일하는 걸 볼 수 있어요.
이제 게하시는, 사실은 엘리야 → 엘리사 → 게하시로 이어지는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의 계보를 이어야 될 사람이에요.
그리고 그만한 자질과 그만한 데스티니를 타고난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게하시가 잘못된 선택을 합니다.
나아만 장군이 찾아왔을 때, 그의 문둥병이 고침 받고 그가 아람으로 돌아갈 때,
먼저 나아만이 엘리사에게 큰 예물을 드립니다. 엘리사가 받지 않아요.
하는 수 없이 나아만은, 그냥 아람으로 돌아갑니다.
엘리사가 그냥 돌려보낸 거죠.
그걸 보고 게하시가 속이 너무 쓰린 거예요.
'우리 스승이 저거 받아서 좋은데 쓰면 얼마나 좋아?
'지금 여기가 선지자 학교를 하고 있는데, 이 학교에도 얼마나 물질이 많이 필요한데...' 왕하5:22
게하시가 엘리사의 태도가 동의가 안 됐어요. 그래서 스승 몰래, 자기 혼자 좇아갑니다.
나아만을 좇아가서 '아 우리 스승님의 마음이 변했습니다. 뭐 조금만 주고 가십시오' 그랬더니
나아만이 게하시가 요구한 거보다 더 많은 걸 주고 가지요.
그러고 게하시가 돌아왔을 때, 엘리사가 그걸 압니다.
'그러나 엘리사는 게하시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너를 만나려고 수레에서 내릴
때에, 내 마음이 너와 함께 거기에 가 있지 않은 줄 알았느냐? 지금이 은을 받고 옷을 받고,
올리브 기름과 포도나무와 양과 소와 남녀 종을 취할 때냐?' 왕하5:26
'그러므로 나아만의 나병이 네게로 옮아갈 것이고, 네 자손도 영원히 그 병을 앓을 것이다.'
이것으로 게하시의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문둥병에 걸렸다는 거예요.
엘리야, 엘리사, 게하시로 이어져야 될 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데스티니가
여기서 끝나버린 거예요.
게하시가 이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분명히 열왕기하의 이야기는
조금 더 다른 방향으로 이어졌을 겁니다.
엘리야, 엘리사에서 끝나지 않았을 거예요. 계속 이어지는 선지자들이 나왔을 거예요.
여러분, 이 잘못된 선택 하나가, 사람의 운명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지 보세요.
이 게하시 이야기뿐만이 아닙니다. 오늘 계속 살펴볼 텐데 무수히 많아요.
이 잘못된 선택 하나가, 어떻게 하나님의 데스티니를 파괴시키고
어떻게 하나님의 데스티니를 지연시키는지 잘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그래서 선택은 함부로 하시는 거 아닙니다. 가볍게 선택하시는 거 아니에요.
그렇다면 왜 게하시가 이런 잘못된 태도를 가졌어요?
게하시가 예배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어요.
결국 게하시가 예배했던 건, 돈님이었지, 하나님이 아니었다는 거예요.
돈이 갖고 있는 힘과, 돈이 갖고 있는 능력과, 돈이 갖고 있는 그 위력을 중요하게 생각한 거지,
하나님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어요... 그 결과, 돈과 함께 망하게 된 거죠.
여러분, 오늘 나는 무엇을 예배하고 있습니까?
이하 후략
▲2. 인내하지 못해서 아들을 얻으려고 잘못 선택한 아브라함과 사라
▲3. 소돔 쪽을 선택한 롯의 잘못된 선택
▲4. 남의 아내를 건드린 다윗의 잘못된 선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