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3장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라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 집중하라 고전3:1~9 2025-04-27
◑서론
1:1~9절은 인사,
1:10~17절은 '지도자가 아니라 주님을 자랑하라'고 권면한 후에
1:18~4장 끝 절까지는 '고린도 교회에 있었던 분쟁과 다툼, 이것을 어떻게 하면 극복할 건가?'
이 목적을 위해서 바울이 교훈하고 있습니다.
1:18~2:5절까지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다'
그래서 '지도자'에게 집중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집중하라는 거죠.
2:6~2장 끝절까지는 '이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으려면, 성령님이 도와주셔야 된다'
그래서 두 번째 주제는 '깨닫게 하시는 성령입'니다.
3:1~4장 끝절은 세 번째 가르침이 나오죠. *오늘 본문 포함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 ... 하나님께서 교회를 자라게 하신다는 거죠.
이것을 바울은 교훈을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의 다툼과 분쟁을 극복하려면, 아래 세 가지 가르침을 반드시
지도자와 성도들은 마음에 새겨야 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이지,
탁월한 영적 지도자가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가 아니라는 겁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하시는 것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지,
탁월한 사역자들이, 복음의 지혜를 깨닫게 하는 것이 아니다...
-세 번째도 똑같습니다. 탁월한 지도자들이 성도들을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라게 하시는 일은, 바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가 분명히 해야만, 지도자들 중심으로 일어나는 다툼과 분쟁을
교회는 극복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 3:1~9절까지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3:1~4절은, <고린도 교회의 미성숙한 모습>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육신에 속한 사람이다' 라는 표현으로 설명하고 natural man
이 '육신에 속한 자'의 증거가 뭔가 하면, '너희 중에 시기와 다툼이 있는 것이다'
이 시기와 다툼은, 지도자들을 추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것이 첫 번째 논지이고요,
3:5~9절은, (이것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되는데)
<도대체 사역자들은 누구인가?> 하는 것을 바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또 지도자들의 상호관계에서
-또 지도자들과 교회의 관계를 통해서 바울이 설명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이 말씀을 마음에 잘 새겨서,
고린도 교회에 나타났었고, 또 한국 교회가 오랫동안 겪어 왔던,
'지도자들이 바뀔 때마다 생겨났던 이 다툼과 분쟁의 문제'를 정말 잘 극복할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육신에 속한 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어린 아이들'과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너희들을 대할 때, 신령한 자 spiritual man 와 같이 대할 수 없어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를 대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1절에 나오는 표현이 조금 혼란스러운 것은,
2:14~15절에도 비슷한 표현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2:14절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2:14에는 누가 등장하나? '육에 속한 사람'입니다. *프쉬키코스
3:1절에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죠. *사르키코스
2:15절, 3:1절에는 '신령한 자들'이 등장을 합니다. *프뉴마티코스
2:14절의 '육에 속한 사람'은 불신자들입니다.
그들 속에 성령이 계시지 않는 자연적인 사람, 불신자들을 나타내는 표현이고,
3:1절부터 계속 등장하는 '육신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사르키코스
이들은 예수를 믿지만, 육신에 져서 육신대로 사는 사람이지요.
2:14절의 '육에 속한 사람'과 비슷하지만, 약간 다릅니다.
2:14절의 프쉬키코스는.. 불신자, 자연인을 뜻하고,
3:1절의 사르키코스는.. 신자이지만, 육신적으로 살며 다툼과 분쟁을 일으키는 자를 뜻하죠.
그리스도인이고, 그들 속에 성령님이 계시는데 문제는 무엇이냐?
성령님이 계시지만, 그들의 생각, 감정, 판단이,
성령의 지배 속에 놓이지 않고, 육신적인 생각과 판단 감정의 지배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을
'육신에 속한 사람이다' 라고 설명을 합니다.
차이를 아시겠습니까? 육신에 속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인데
누구에게 지금 지배를 받고 있느냐?
성령님께 지배를 받지 않고, 육체적인 생각, 감정, 판단의 지배를 받으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그래서 이 사람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이다.'
그런데 여기 어린 아이들은 초등학교 이상이 아니고,
우리로 말하면 영아부와 유치부에 해당하는 아이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주 영유아들처럼, 내가 너희들을 대한다' 라고 이야기합니다.
◑3: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그래서 2절을 보시면, 바로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 이기 때문에
어떻게 그들을 양육했는가?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했다'
'젖'은 무엇이겠습니까? 복음의 가장 기본적인 내용들이죠.
즉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고 또 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보내셨고,
그분은 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이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죄사함을 받게 됩니다.
이런 복음의 가장 기본적인 가르침이죠.
'밥'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복음이 가지고 있는 깊은 함의, 정말 깊은 뜻들이죠.
2:6절부터 설명했던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준비하신 것인데,
이 세상의 어떤 지혜도 이것에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성령님만 이것을 깨닫게 하실 수 있다...
예수님 때문에 죄사함을 받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바로 2장 마지막 절에 나왔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지는 것' .. 이게 '밥'입니다. 3:2
'그리스도의 마음'은 무엇이냐? 그리스도의 마인드라고 했어요.
즉 그리스도의 생각, 그리스도의 삶의 방식, 이것을 가진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다...
그래서 복음이 갖고 있는 깊은 이런 어떤 함의들을
정말 이들에게 잘 말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2절 마지막도 이런 표현이 나오는데
'너희가 감당하지를 못했고 지금도 못하리라'
'지금도 너희들은 감당을 못할 거다'
만약에 우리가 고린도교회 성도들이면, 이런 말을 들으면, 조금 기분 상하지 않겠습니까?
자존심 상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믿음이 어릴 때는, 그래도 이런 복음의 깊은 뜻들을 잘 감당하지 못했다 라고 생각하면
한편으로 이해가 되지만
우리는 나름 성장했는데, 성숙했는데 '지금도 감당 못할 거다' 그러면
조금 교인들의 마음이 상할 것 같아요.
그러면 아마 질문이 생기겠죠.
'아니 사도마을께서 무엇을 근거로 우리를 낮추어서 말씀하십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3절입니다.
◑3:3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그들 고린도 교인들은 스스로 정말 놀라운 지혜를 소유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바울은 '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사람'이다.
3:1절에 등장했던 '육신에 속한 자'가 다시 등장합니다. *사르키코스
왜냐하면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는데,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냐'
그러니까 그들이 육신에 속한 자라는 명백한 증거가 뭐냐?
그들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다는 겁니다.
여기에 나오는 시기와 분쟁은, 예를 들면
갈5:19~21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갈5:20절은, 육신의 소욕을 따를 때 생기는 그 결과물입니다.
20절 중간에 '분쟁과 시기' 가 나오죠. 본문3:3절에는 '시기와 분쟁' *갈5:20절과 같은 헬라어
육신의 소욕을 따르면.. 음란 호색 술취함과 함께 우상 숭배...
특별히 인간관계에서 무엇이 생기나요? 바로 '분쟁과 시기'가 그들 가운데 일어난다는 거죠.
division and strife
또 로마서13:13절도 이렇게 표현합니다.
우리가 벗어버려야 될 어둠의 일이 뭔가 하면
'술 취하지 말고, 방탕하지 말고, 음란호색...' 그다음에 '다투거나 시기하지 마라'
육신의 소욕을 따를 때, 우리가 어둠의 일에 빠져 있을 때,
우리들의 삶의 모습 중에 빠질 수 없는 게 뭔가 하면,
바로 다툼과 시기의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종종 말씀드렸지만,
'한국 사회는 더 이상 배고픈 게 문제가 아니고 배 아픈 게 문제다' 라고 말씀을 드렸어요.
정말 제가 볼 때는, 어떤 지도자도 배고픈 것을 해결할 수는 있겠지만,
이 배 아픈 것을 해결할 수 있는 지도자는... 없을 것 같아요.
창세기에 처음 살인이 일어났을 때, 그것도 가정에서 형제지간에, 뭐 때문에 일어났죠?
바로 '배 아픈 것' 때문에 일어났잖아요.
가인이, 동생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이 받으셨고, 자기 제사는 안 받으셨습니다.
그러니까 배가 아픈 거죠.
만약에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도 안 받고, 아벨의 제사도 안 받았으면,
가인이 동생을 안 죽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거는 안 받았는데, 동생 거는 받는 거죠. 배가 아픈 거죠.
거기서 분쟁, 다툼이 생기는 거죠.
또한 분쟁, 다툼은 무엇이겠습니까?
내 편만 옳다는 것, 정치적으로 하면 '진영 논리'가 되는 거죠.
내가 속한 그룹만 옳고, 다른 사람들은 무시하는... 이게 뭔가 하면 바로 다툼입니다.
'너희 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는데, 어떻게 너희를 보고 지금 신령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육신에 속한 사람이다' 라는 것이죠. 3:3
여러분, 어린아이들을 대부분 다 키우셨으니까, 아이들이 정말 예쁘고 티 없는 것 같지만
아이들은 어릴 때 누구밖에 모릅니까? 결국은 자기밖에 모르잖아요.
저희집 아이들도 어린 시절에 보니까, 그때는 제가 캐나다에 유학 중이었죠.
우리 아이들이 유아원에 가서 첫 번째 배운 영어가 뭘 것 같습니까?
'It's mine, 내 거야!' 입니다.
제가 그 모습을 보면서 '이게 인간이 죄인이구나' 하는 걸 느꼈죠.
어렸을 때 애들이 아마 가장 많이 쓰는 말이 '내 거야!' 일 것입니다.
저도 우리 애들이, 부모들 눈에는 다 착하게 보이니까, 큰 애도 아주 착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태어났을 때, 둘째가 너무 귀여워서
제가 큰 아이를 보고 '야, 동생이 정말 귀엽지?' 그러니까,
큰 아이가 갑자기 저를 딱 보더니 '아빠, 그럼 나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그때 제가, 또 큰 애 마음에 상처를 줄 것 같아서, 잠시 속으로 기도를 했는데,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야, 너는 잘 생겼지' 하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 날부터 서로 이렇게 구분을 했습니다. '동생은 귀엽고, 너는 잘 생겼어!'
이렇게 큰 탈 없이 정리가 됐습니다. 제가 느꼈던 게 뭔가 하면,
제가 교회에서도 청년들을 섬길 때, 그래도 청년들 생일을 제가 거의 다 챙겨줬어요.
그런데 생일 기록도 보면, 음력, 양력 헷갈리잖아요. 그래서 가끔 한 번씩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난리 난리가 나거든요.
그래서 제가 그때 제 노트에 메모를 해놨습니다.
'한 사람도 빼놓지 않고 챙길 자신 있으면 하는데, 그렇게 할 자신 없으면 아예 하지 마라'
'아예 안 하는 것이 낫다'
사실 교회 속에도 '시기와 다툼'이 굉장히 깊이 깔려있어요.
저는 청년들을 섬길 때, 자매들을 보면 둘이 꼭 붙어 다니는 애들이 있어요.
꼭 붙어 다니는 친한 두 사람을 보면, 저는 걔들 사이에는 흉허물이 없고
둘이 정말 한 몸처럼 친한 줄 알았어요. 근데 매일 붙어 다니는 애들 사이도,
서로 암투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둘이 지나가는데, 한 사람한테만 인사하면 난리가 납니다.
두 사람 다 번갈아 쳐다보면서 인사를 해야 뒷탈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시기와 다툼'은, 정말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우리와 동행하게 됩니다. 지금 바울은 이야기하죠.
'너희 중에 시기와 다툼이 있는데, 어떻게 이런 너희를 보고, 신령한 자라고 할 수 있느냐?'
그러면서 4절을 보면, 이 시기와 다툼이 포장을 잘합니다.
◑3:4 '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누군가를 샘내고 하면 사실 천박하게 보이죠. 그래서 항상 포장을 합니다.
무엇으로 포장을 하느냐? 지도자로 포장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나는 바울에게 속했다. 어떤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까, 너희가 육의 사람(사르키코스)이 아니냐?'
여기에 지금 성경은 다 설명하지 않았지만,
'나는 바울에게 속했어' 또는 '나는 아볼로에게 속했어'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서로 '나하고 상종할 생각하지 마!' 한다는 거죠.
자신이 아볼로에게 속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야, 바울에게 속한 사람 너희들은 우리와 같이 놀 필요 없어!
야, 어떻게 아직도 바울에게서 속해서 살아가냐?'
이러면서 자기는 옳고, 자기와 다른 편에 대해서는, 무시하고 때로는 매도하는 그런 모습들이
고린도 교회 가운데 있었다는 겁니다.
4절까지 말씀을 통해, 먼저 기억하셔야 되는 것은,
그럼 오늘날 나 자신은 누구에 가깝습니까?
신령한 자 쪽에 가깝습니까? 아니면 셈이 많은, 시기하고 분쟁하는
'육신에 속한 자'에 가까울 수가 있습니까?
두 번째 기억하셔야 되는 것은, 소위 '시기와 분쟁'은 꼭 무슨 옷을 입나?
지도자들을 추종하는 모습으로, 이 시기와 다툼이 숨겨져서 나타난다는 겁니다.
그런데 재밌지 않습니까? 사전을 보시면,
고린도 교회는 원래 몇 개 그룹(파당)이 있었습니까? 네 개 있었죠.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그런데 지금 본문에서, 두 개(게바파, 그리스도파)는 빠지고,
지금 바울파와 아볼로파만 서로 다투는 것으로, 바울은 언급합니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결국 나머지 두 파는 파생된 겁니다. (그룹이 크지 않습니다)
싸움의 중심은 결국 누구냐? 바로 바울에게 속한 사람, 아볼로에게 속한 사람이죠.
바울은 누굽니까? 고린도교회를 개척했던 사람입니다.
그다음 이어서 바울의 후임 사역자가 아볼로죠.
그래서 전임 사역자 지지파와 후임 사역자 지지파로,
이 두 개의 그룹 사이에 치열한 갈등과 다툼, 시기 분쟁이 일어났다는 거죠.
이 아픔은 한국 교회가 오랫동안 겪어왔습니다.
이땅에 기독교 전래 역사가 140년 가까이 진행이 되고 있는데,
이 140년 진행되는 동안, 정말 어느 교회도 예외 없이
지도자들이 바뀔 때마다, 개척자와 그 후임 사역자 사이에 있었던 그 갈등과 분쟁들...
이것이 얼마나 한국교회를 힘들게 했는가요! 이것은 여러분들이 아마 잘 알고 계실 것 같아요.
저도 한 번씩은 여러 교회에 다니면서 집회 같은 걸 인도했는데,
집회에 한 번씩 갈 때마다, 막 숨이 막힐 것 같은 교회가 있어요. 숨 막힐 것 같은 교회!
그런 교회가 어떤 교회겠습니까?
소위 한국 교회에 배출한 걸출한 영적인 거목들이 계셨던 교회를 가면,
대부분 숨이 막힐 것 같아요. 그분이 소천하신 지가 50년이 되고, 30년이 지났는데도,
그 교회의 모든 표준은 무엇이냐?
바로 앞에 있는 그 목사님처럼 하면... 잘하는 거고, 그게 올바른 거고,
그 목사님과 조금만 다르면... 잘못된 겁니다.
정말 제가 집회 인도하러 갔을 때, 숨 막힐 것 같았던 그런 모습을 느꼈습니다.
저는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앞으로 저희 교회도,
제가 우리교회의 두 번째 목회자이니까요.
저희들도 이런 (갈등의) 시간을 아주 조금 거쳤던 순간도 있었고,
그 다음에 제가 은퇴하고 나면, 또 그 다음 3대 목회자가 올 거고, 또 다음 4대 목회자가 오겠죠.
그러면 저희 교회도 똑같은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통해서 잘 기억해 두셔야 돼요. '도대체 사역자들은 누구인가?'
◑3:5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자 5절부터 한번 보겠는데, 5절부터 바울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역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을 설명을 합니다.
'사역자'
이 번역을 우리 말로 너무 우아하게 했습니다. 원래 원문은 디아코노스입니다.
'식탁 봉사하는 하인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영어로는 minister or servant
식사를 준비해서 요리하고 차릴 뿐만 아니라, 식사 시간에도 그 곁에 서서
언제든지 봉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사역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누구며, 아볼로는 누구냐? 바로 종들이다'
'무엇하라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다양한 은사와 열정 스타일을 주셔서
성도들을 믿게 하라고 하나님이 세우신 종들이다.'
'아볼로와 나는 여러분을 믿게 한 일꾼들이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였을 뿐입니다' (새번역)
바울은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사역자들은 누굽니까?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믿음을 위해서 전도하고 양육하라고 세우신 종들입니다.
그런데 이게 또 조금 왜곡이 돼가지고, 여러분이 저를 부를 때 뭐라고 부르십니까?
'주의 종'이라고 부르잖아요. 주의 종... 요즘 뉘앙스로 아주 우아하잖아요.
그럼 제가 꼭 다시 질문하죠. '여러분은 누구죠?'
'저는 주의 종입니까? 아니면 여러분도 주의 종입니까?'
여러분도 주의 종입니다. 예수님의 종들이죠...
지금 바울이 가르치는 첫 번째, 사역자들은 누구냐?
사역자들은 주의 종입니다. *디아코노스, minister, servant
두 번째는 5절, 6절을 한번 보시죠.
◑3:6~7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6절과 7절에서 두 번이나 반복되는 게 무엇입니까?
바울은 자기를 소개할 때 '나는 심는 자였다' 씨를 심는 사람, 개척자였다는 거예요.
그럼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는 사람입니다.
그 개척했는 교회, 그 씨를 뿌린 곳에 물을 주었던 사람,
성숙을 시키고 또 놀라운 열매 맺도록 물을 주었던 사람은 누구냐? 바로 아볼로라는 거예요.
'그렇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여기에 시제가, '나는 심었다.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이것은 부정과거 과거인데,
어디에 강조점이 있느냐? 순간적인 겁니다. 일시적인 겁니다.
예를 들면, 저희 아버님은 아침에는 과거에 살아계실 때 아침에는 주로 채식을 드셨습니다.
이거는 무엇이죠? 한 번이 아니고 과거에 계속 반복됐던 일입니다.
그런데 혹시 아버님께서 배탈이 났을 때는, 그날 아침은 죽을 드셨습니다.
이것은 반복되는 일이 아니고, 특별히 딱 한 번 일어난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셨다' 라고 할 때, 미완료 과거입니다.
이거는 뭡니까? 계속되고 반복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나와 아볼로는 일시적으로 씨를 심었고, 일시적으로 물을 준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앞으로도 계속 그분은 자라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라는 뜻이죠.
즉 하나님의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할에 비하면,
사역자들의 역할은 미미하다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어요?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에 비하면, 이 사역자들의 역할은 미미한 것이다...
지금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싸우는 것은 '누가 더 우월하냐? 바울이 탁월하냐?
또 아볼로가 탁월하냐?' 이것 때문에 싸우고 있는데,
지금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사람은 도토리 키재기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그거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에게 비하면, 아볼로나 바울의 역할은 지극히 미미한 것에 불과하다'
라고 바울은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우열이 없다는 겁니다.
심는 사람, 물 주는 사람 중에 누가 더 우월한 사람입니까? 똑같은 사람이지 않나요?
그래서 '각자가 일한 대로' 하나님께로부터 상을 받습니다.
사람이 판단할 이유가 없습니다. 가장 정확한 판단과 상을 누가 주시나?
하나님이 주신다는 거죠.
그래서 사역자들도, 누구에게 상 받는 것을 기대해야 되나?
하나님께 상 받을 수 있도록... 교회와 성도들을 섬겨야 됩니다.
자 정리를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역자는 누구인가?
첫 번째 하나님이 세우신 종입니다. 그냥 종입니다.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바로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의 역할에 비하면,
그들의 역할은 미미합니다.
세 번째는 무엇이냐? 그들이 섬긴 대로 하나님이 상을 주시고, 하나님이 평가하실 것입니다.
그 다음은, 사역자들의 상호관계입니다.
바울과 아벨의 상호관계는 어떤가요?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이 구절은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어요. 누가 누구와 동력자라는 건가?
1) 하나님과 우리가 동력자라는 관계를 이야기하는 건가?
2) 아니면 사역자들, 교인들 상호간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건가?
성경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를 놀랍게도 그분과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으로 불러주셨다 라는 가르침도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고린도전서에서 강조점은 후자입니다.
우리는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동력자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나님께 속한 동료 일꾼들이다... 이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다시 6절, 7절을 보시면, 바울이 자기와 아볼로를 소개할 때
왜 농사 이미지를 사용했을까요? 고대나 한국 사회도 그렇고
고대에는 농사 짓는 사람은, 그냥 평민 이하의 사람들이었어요.
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역자였으면,
얼마든지 더 훌륭한 이미지를 사용할 수 있잖아요.
소위 말해서 천상의 계시를 땅에 전달해 주는 위대한.. 이런 식의 이미지에 쓸 수 있잖아요.
그런데 바울은 어떤 이미지를 썼느냐? '그냥 심는 자. 물 주는 자'
즉 농사는, 종들이나 일반 평민들이 하는 일입니다.
왜 이렇게 자신을 묘사했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 보실 때는, 지극히 작은 일, 작은 자라는 겸손인 거죠.
'자기가 감당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 앞에서 지극히 작은 일이다.'
라는 걸 나타내기 위해서 '심는 사람, 물 주는 사람'의 이미지를 사용했어요.
또 하나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느냐?
농사를 짓는데, 씨 뿌리는 사람만 있으면, 농사가 되나요? No
씨를 뿌렸으면, 거기 물 주는 사람이 있어야 되잖아요.
씨만 뿌려놓고 물 주는 사람이 없으면, 열매를 못 맺습니다.
또 씨도 안 뿌렸는데, 물만 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도 미친 사람 아닌가요?
지금 바울이 심는 사람, 물 주는 사람 이미지를 사용한 것은 무엇이냐?
둘은 경쟁 상대가 아니고, 동역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놀라운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함께 긴밀하게 협력해야 될 대상이다 라는 거죠.
또 '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 가지이나' 라고 말씀할 때, 3:8
아까 제가 설명드렸죠. 심는 이가 더 탁월합니까? 물 주는 사람이 더 탁월합니까?
도토리 키재기 아닌가요?
이것은 무엇이냐? 하나님 보실 때는 똑같이 소중한 사역이라는 거예요.
우열이 있는 게 아니라, 똑같이 소중한 사역이다...
자 바울은 설명합니다. 사역자들 상호관계는, 쉽게 생각하면 경쟁관계가 아니고,
서로 협력해야 될 관계다...
물주는 이, 씨를 뿌리는 사람은, 똑같이 하나님 보실 때 작은 일들입니다. *종들이 하는 일
또 서로가 함께 있어야만,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잘 감당할 수가 있어요. *동역이 필요한 일
어떤 어느 것도 우열이 있는 게 아닙니다. 경쟁관계가 아니라 협력하는 관계입니다.
제가 이런 말씀을 드릴게요.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은, 만약에 학교 선생님들이 계신다 그러면
요즘 아이들 상대하는 거 정말 힘드시잖아요. 그렇지만 그만큼 힘든 게 무엇이죠?
같은 선생님들, 직장 동료와의 관계도 어렵지 않습니까?
직장생활 하시는 분들은, 바이어라든가 고객 상대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게 무엇이죠?
같은 부서, 같은 동료들과의 관계가 어렵지 않나요?
그러면 목사님들, 전도사님들이 모여있는 교회 사무실은, 천국에 가까울 것 같습니까? No
큰 교회 사역자들이 모여있는 교역자실의 분위기는 대체로 싸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까지 한국 교회가 어떤 식으로 교회 성장을 이루어왔나 하면,
사역자들을 경쟁을 시켰거든요. 그렇지 않겠어요?
만약에 1교구가 지난 한 해 동안 한 100명 늘었어요.
그러면 2교구, 3교구 사역자는 죽는 거죠. '너희는 뭐했냐?'
이런 식으로 하면, 분위기가 싸해 질 수밖에 없죠.
제가 웬만해서는 특별새벽기도회 할 때, 인원 동원하기 위해서, 특송 같은 거 안 합니다.
왜 특송을 안 하느냐?
만약에 첫날 1교구가 특송할 때 100명이 왔어요.
그 다음날 2교구 할 때는 몇 명 와야 되죠? 최소 101명은 와야 돼요...
그래서 이때까지 한국 교회가 성장하는 데 있어서 무엇을 이용했나? 경쟁을 부추겼거든요.
그래서 사람들을, 사역자들을 경쟁시키면 어떻게 되나? 코피 터지듯이 일합니다.
그래서 뭔가 가시적인 결과는 나올지 모르겠는데, 옆에 있는 동료 사역자들과는 원수가 됩니다.
제가 그래서 여러분들이 보실 때는 불만이 있으실 수도 있는데
저는 성도, 사역자들, 순장님들, 담당자들을, 저는 경쟁시키고 싶은 마음이 없어요.
저는 그것보다는 이상적이죠.
섬기는 마음이 우러나와서, 더 미친 듯이 일해서, 하나님 나라가 부흥되고 확장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교회도, 자칫 잘못하면 세상과 똑같이 경쟁을 부추기는 거죠.
저희 교회가 비전센터 지을 때, 제가 첫 번째 정했던 원칙이 뭐냐?
헌금 액수를 공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이 아마 모르실걸요?
누가 얼마 헌금했는지 모르시잖아요. 왜 그렇게 했을까요?
헌금을 공개하면, 최선을 다해서 헌금했는데도, 정말 초라해지고 비해집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돈이 있는 분이 1억을 하는 거나, 돈이 없는 분이 백만 원을 하든, 더 적은 금액을 하든, 똑
같이 하나님 앞에서는 최선을 다한 거 아닙니까?
그런데 헌금 금액을 가지고 경쟁시키기 시작하면 어떻게 되죠?
결국 남의 눈치 봐서 해야 되는... 이런 비극들이 생깁니다.
그래서 뭔가 경쟁을 부추겨서 교회를 세워왔기 때문에,
그 부차적인 결과물 중에 하나가 뭐냐? 사역자들이 서로 원수가 되어 있어요.
지금 바울이 우리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이런 사역자들은 하나님께 속한 동료 일꾼들이고,
여기에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똑같이 소중한 동역자들입니다.
그래서 사역자들은 서로 경쟁 상대가 아니고, 서로 협력 상대라는 거예요.
협력의 관계가 되어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9절은 성도와 사역자의 관계를 표현합니다.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이것은 바로 5~8절까지 말씀을 요약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심었고, 아볼로는 물 주는 이'로 설명을 했죠.
그런데 또 교회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집'입니다.
이 말씀은, 다음 주에 살피는 3:10~18절까지 등장을 합니다.
이 집은 무엇으로까지 발전하느냐? '성전'으로까지 발전합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집이요, 성전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표현은 무엇이냐?
밭과 집이 아니라 주어가 누구냐는 거죠. 교회는 누구의 소유입니까?
개척하신 목사님의 소유도 아닙니다. 가장 많은 금액을 헌금하셨던 분의 소유도 아닙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소유입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이다' 두 번이나 강조를 했잖아요.
교회의 소유주는 누구인가? 교회의 소유주는 바로 하나님이시라는 거죠.
말씀을 정리하면, 바울은 지도자들 때문에,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해서
시기와 다툼에 빠져있던 고린도 교회에게, 분명하게
'사역자는 누구인가?' 하는 것을 설명해 줬습니다.
저는 성도님들이, 이것을 마음에 새기셔야 됩니다.
먼저 머리로 새겨 놓으셔야 돼요.
1) '사역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종입니다. 종 servant'
그들의 역할은 하나님과 비교할 때, 그것은 미약한 거다. 그들은 하나님이 상 주실 거다...
2) 두 번째, 상호관계는 하나님께 속한 동료 일꾼들, 그들은 동역자들입니다.
그러니까 제발 성도들이, 사역자들을 경쟁시키지 말라는 거예요.
제가 말씀드렸죠. 이런 표현하시면 안 돼요.
'우리 교구 목사님이 최고야!' 이건 안 됩니다.
'우리 교구 목사님은 좋은 분이세요' 이 정도만 하시면 됩니다.
'사역자들 중에 제일'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아요.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냥 '좋은 분들입니다' 정도로 끝내셔야 돼요.
3) 세 번째는 하나님 교회와 사역자의 관계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소유, 하나님의 밭, 하나님의 집을 섬기는 '일꾼'들이 저희들이지
사역자는 추종의 대상이 아닙니다. 심고 물 주는 일꾼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사역자들을 마음껏 활용해서
하나님께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되셔야 되는 거죠.
오늘 말씀을 제가 마무리하면서, 이 말씀이 저한테 첫 번째 주었던 하나의 자유감은 무엇이냐?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여러분과 제가 만나면, 인사할 때 제가 뭘 보겠습니까? 여러분의 얼굴을 보잖아요.
얼굴이 안색이 멀쩡한가, 안 멀쩡한가?
제가 어떤 분을 볼 때, 무거운 짐을 지고 오신 분한테
제 같은 사람이 말씀을 전해서 무슨 힘이 되겠어요?
내가 어떻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문제들을, 삶의 짐들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리는 도움이 드릴 수 있겠어요?
그런데 하나님이 저한테 가장 큰 위로를 주신 거예요.
'야, 자라게 하는 건 내가 하는 거야, 네가 하는 게 아니고 내가 하는 거야'
저는 이 시간에도 말씀을 전하지만,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자라게 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이 자리를 떠나 여러분의 삶의 연장에 가도, 저는 못 보지만,
하나님이 여러분을 자라게 하실 걸 믿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명백하게 드러날 때,
그때부터 사람들은 무슨 대화하겠습니까?
오늘 설교하고 교회를 나가시면서 '야 오늘 목사님 설교 잘하셨어!' 이러면 꽝 되는 거죠.
'오늘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해 나에게 위로하셨고, 나에게 쉼을 주셨고,
새로운 지혜를 주셨어...'
그래서 대화의 주제가 누가 되어야 되느냐? 바로 하나님이 되셔야 되는 거죠.
그래서 교회 속에서 누가 높임을 받으셔야 되느냐?
하나님이 더 높고, 더 크시고 위대한,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서 받으시고,
그래서 하나님은 점점 높아지시고, 사람(사역자)은 점점 작아져야만
교회는 안전할 수가 있습니다.
지도자이든, 평신도 중에 특별한 사람이든,
이런 분들이 자꾸 거목처럼 높아지기 시작하면, 그 교회는 정말 위험한 공동체가 됩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앞으로 소그룹으로 같이 나누실 때
정말 대화의 주어를 '하나님'으로 쓰실 수 있어야 돼요.
하나님이 우리를 자라게 하셨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우리의 과거를 청산해 주셨고,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시고,
천지를 창조주이시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이, 바로 우리와 나를 자라게 하고 계십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높임을 받으시고, 사람은 점점 작아져야 돼요.
그래서 나중에 우리가 주 앞에 섰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야 되겠습니까?
저와 같은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챘다는 책망을 받지 않고,
하나님께 신실했다 라는 상과 칭찬을 받아야 돼요.
여러분은, 사람에게 인정받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비위를 맞춰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놀라운 열매를 맺은 사람으로, 하나님께 칭찬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