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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4장 십자가의 지혜로 살아가라

LNCK 2025. 5. 23. 10:1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 리더쉽, 목회자

https://www.youtube.com/watch?v=6CO46nZBPGY 정리 

◈십자가의 지혜로 살아가라   고전4:6~13               2025-05-18   

◑고전4:6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바을은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다'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나와 아볼로에게 적용하여 설명하였습니다' : 새번역

이 본의 내용이 결국 뭔가 하면, 앞에 이때까지 살펴본 내용입니다. 

'능력은 지도자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다.  
깨닫게 하는 것도, 바로 탁월한 교사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거다.  

바울과 아볼로는 누군가 하면, 그리스도의 일꾼으로서 심는 사람, 물을 주는 사람이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사역자들은, 성도들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신 귀한 선물들이기 때문에 
그분들을 추종하거나 자랑하는 대상이 아니고, 그분들을 잘 활용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 보실 때, 가장 아름다운 삶이 되도록 만들어 가야 된다. 

그러면 사역자인 저희들, 또 함께 교회를 세워가는  성도님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되는가요? 
판단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최종적인 판단을 염두에 두고 
매 순간마다 교회를 세워갈 때, 금과 은과 보석처럼 썩어지지 않는...
불로 타 없어지지 아니할 재료로, 주님의 집을 교회를 세워가야 된다.'  라고 바울이 교훈했습니다.  
이 일에 대해서 바울과 아볼로는 본을 보였다는 겁니다. 

그런데 본을 보였는데, 두 가지 목적을  더 이야기 합니다. 

1) 첫 번째,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 배워'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꼭 가르쳐주고 싶었던 게 뭔가 하면,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요? 
4:6절 마지막에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게' 되는 거죠.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진다'는 구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교만한 마음을 가지고, 한쪽은 위하고, 다른 쪽은 대적하는' 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no one of you will become arrogant in behalf of one against the other / NASB
no one of you be puffed up for one against another / KJV

▲그러니까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자기의 삶의 본을 통해 
무엇을 가르쳐 주고 싶었나요?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그런데 기록된 말씀은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쉽게는 '구약 성경'입니다. 
사도 바울 당시에는 구약 성경만 있었으니까요. 신약은 쪽복음 형태로 존재했습니다.

그렇지만 더 구체적으로는 고전1:18~ 4:5절까지, 바울이 가르침을 주면서 
'기록되었으되' 라는 표현과 함께 5개의 구약성경 구절을, 사도바울이 인용했습니다. 

그래서 그 인용했던 내용들을 제가 주보 4면에 기록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 인용된 구절을 또 '기록된 말씀'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근데 분명한 것은 무엇이냐? 우리가 어떤 놀라운 영적인 체험을 하든지, 
아니면 우리들의 삶에 어떤 놀라운 성공을 이루었든지,
아니면 사람들이 볼 때 탁월한 그런 지적인 스펙을 가졌든지,  
우리는 기록된 말씀을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더 직접적으로 표현하면, 말씀의 통제 속에 머물러 있어야 됩니다. 
지금 바울은 그 교훈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통제를 결국 벗어나게 되면 어떻게 되나요? 
사람은 교만에 빠지게 되고, 다툼과 분쟁이 그에게, 또는 공동체 가운데 나타나게 됩니다.  
저는 그래서 제가 외국에서 <영성신학>을 공부할 때, 충격을 받았던 것은 
1930~40년대 정도에, 미국에 놀라운 영적인 부흥이 있었습니다. 

 


특별히 오순절 운동이 1930~40년대 정도에 놀라운 부흥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놀라운 부흥과 함께 일어났던 일이 있었습니다. 그게 결국 뭐였는가 하면, 
교회는 성령운동을 통한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는데, 
그만큼 교회는 놀라운 소위 분열을 경험했습니다. 끝도 없이 교회가 갈라졌어요      주1)

아이러니컬하지 않나요? 한편으로는 교회가 놀랍게 부흥을 했는데, 
한편으로는 끝도 없이 교회가 갈라졌어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영적인 지도자들이, 소위 말해서 누구의 통제도 받지 않는... 
'기록된 말씀을 넘어서는 잘못을 범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놀라운 부흥을 주셨을 때, 정말 교회가 하나됨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의 통제를 벗어나서, 수많은 다툼과 분쟁들이 
바로 교회 속에 나타나는 그런 아픔들을 겪었습니다. 

저는 교회가 앞으로, 또 성도들의 삶이 앞으로 
하나님이 보실 때 아름답게 잘 유지되기 위해서는, 꼭 기억하셔야 되는 첫 번째 가르침은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마라' 

언제나 우리는 말씀의 통제 속에 살아가야 된다고 바울은 교훈을 합니다. 

저는 이 4:6절의 가르침이, 제 목회에 있어서도 사실은  큰 교훈을 주어서 
저는 정말 특별한 일이 없으면 거의 "강해 설교"를 합니다. 

근데 안 해보신 분들은 모르는데, 이 강해설교를 계속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습니다. 
생각보다 상당히 어렵습니다.

제가 평생에 좋아하고 또 많이 묵상하고 깨달았던 말씀들은, 이미 다 설교해 버렸고,
앞으로 설교해야 될 말씀들은... 제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이해하기도 어렵고, 설교하기에 힘든 말씀만 남아있어요. 

그런데도 제가 강해설교를 계속하는 제일 큰 이유는 딱 하나밖에 없습니다. 
저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고 '말씀의 통제 속에 계속 머물러 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한 지도자의 개인적인 견해, 성향, 그분의 꿈과 비전,

그것에 바탕을 둔 설교로 좌지우지 되는 교회가 아니라,
(제목 설교, 주제 설교를 하다보면,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될 가능성이 있죠)

성도들과 교회가 말씀의 통제 속에 머물러 있는 교회가 됐으면 좋겠다... 
이것이 제가 강해설교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됩니다. 
'그게 뭐든지, 겸허하게 성경 본문이 말씀하는 내용을... 그대로 듣겠다'는 거죠.

성도님들이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영적인 체험을 했던지...  
어떤 인간적인 성공을 맛보았던지... 정말 어떤 탁월한 지적 스펙을 가졌던지... 
말씀의 통제를 벗어나면 안 됩니다. 그걸 말씀보다 우위에 두면 안 됩니다.
그러면 사실은 끝장나는 겁니다...  

2) 두 번째는 이어지는 7절입니다.

◑4: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여기 3개의 의문사, 3개의 질문이 나옵니다. 

1) 첫 번째 질문은 '누가 너를 남다른 사람으로 만들었느냐?'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사를 우월감의 근거로 
마치 자신들에게 주어진 은사들 조차도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되었나 봅니다. 

그래서 바울이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다르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한테 
'누가 너희를 남다른 사람이 되게 했느냐?'  그런 사람은 없다는 거죠.

또 이 질문을 통해 '누가 너희를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등으로 구분지었느냐'
는 반문을 한 것입니다.

앞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어찌 나뉘었느냐'(1:13)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동일한 자들이 아니냐'(1:2)
라는 권면과 책망을 한 적이 있습니다. 

2) 두 번째 질문은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이냐?' 
즉 '자랑할 수 없다. 우월감을 가질 수 없다'는 뜻입니다. 

문맥을 봐도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이 질문은 '자랑'에 대한 것임을 알 수 있죠.

인간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았기 때문에 
자랑할 만한 아무런 정당성도 가질 수가 없습니다. 

그들이 가진 지식, 혈통, 재산, 생명, 심지어 신앙까지라도 아무 공로 없이 하나님께로부터 
선물로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들의 자랑은 무익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고린도 교회가 받은 은사 때문에, 각자가 자랑한 것인지,
혹은 고린도 교회가 '대도시 교회요, 재력이 있는 교인, 교회라서 자랑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둘 다 일수도 있죠)
이들이 4개 파당으로 나누어서 분열한 배후에는, 이런 자랑이 있었던 것입니다. 

3) 세 번째는 왜입니다. '왜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아니 받았으면 감사하고, 
그 주신 분의 뜻을 따라서 겸손하게 하나님과 이웃을 섬겨야지, 왜 자랑하느냐?'

세번째 질문은 두번째 질문과 유사한 것으로 
'모든것이 하나님께로 부터 받은 것인데 어찌하여 스스로가 잘나서 
그와 같은 것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자랑하고 있느냐'는 거죠. 

바울은 점진적인 질문 방법을 통하여, 그들의 교만이 남들과 비교하는 것에서 출발하여, 
스스로 하나님의 영광을 탈취하는 오만한 자리에까지 이르게 되었음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은사를 포함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로부터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리와 공로를 자랑함으로써, 
파당을 이루고 말았습니다. 

◑4: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7절의 질문에 근거해서, 그들을 향해 책망을 하는 거죠.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이거는 신랄한 책망이죠. '너희가 이미 배가 불렀구나'  

'이미 풍성하다'는 것은.. 부요하다는 것입니다. 
가르침을 받지 않아도 될 정도로, 부요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구나'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래 나는 사실 너희들이 정말 우리와 함께, 하나님 앞에서 
왕 같은 사람이 되기를 정말 갈망했어, 정말 기대했어!'

결국 그들은 엉뚱한 면으로 왕이 되었다는 거죠.
'너희는 너무 쉽게 배가 불러서, 너무 빨리 부요하게 되어서, 너무 빨리 왕이 되어서,
우리(바울과 그의 선교팀들) 없이도 왕이 되었구나'   

'우리 없이 왕이 되었다'는 말은, '누구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만 옳다는 그 확신에 빠져서,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자기 생각대로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져 버렸다는 겁니다.  

'우리 없이 왕노릇 하였다' 이 말은, 고린도 교인들이 지니게 된 영적 지식이 
바울과 같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기인한 것인데, 이제는 그러한 사도들이 없이도 
그들이 모든 영적인 일을 분별할 수 있는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

앞서 2:15절에서 바울은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이렇게 말했죠.

그런데 고린도교인들이, 이런 바울의 가르침을 오해하고, 곡해하면
정말 '우리 없이 스스로 왕노릇 하는' 영적 교만에 빠지게 되는 거죠.

▲결국 7절, 8절 말씀을 통해 바울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1) 정말 기록된 말씀을 넘어가면 안 되죠.  
2) 두번째는, 우리에게 있어야 되는 일은 무엇이냐? 
영적인 가난함, 영적인 가난함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것! 

그래서 이 말씀, 본문의 두 번째 교훈,
영적인 가난함을 회복하고 유지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는 너무나도 중요한 것입니다. 

제가 이것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깨닫게 된 것은 
제 삶에 대해서 가장 큰 교훈은 산상수훈이었습니다.  

특별히 산상수훈에 나오는 팔복이,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예수님이 친히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제가  깨닫고 나서 저는 진짜 오랫동안 기도할 때마다
이 여덟 가지를 하나씩 하나씩 씹으면서, 저는 정말 오랫동안 기도했습니다.

'아 복되도다. 영이 가난한 사람이여, 천국은 그들의 것이다' (영어 어순으로)
제가 아마 기도하면서 가장 많이 부딪혔던 말씀이 바로 이거였어요. 

누가 복된가? 영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영이 가난하다'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이 아니라 피조물입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입니다. 그래서 주님을 간절히 갈망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이것을 깊이 아는 사람들이, 영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영이 가난한 사람들, 그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무엇이냐? '천국이 너의 것임이라'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닙니다. 
오늘날 현실에서,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이 이들에게 주어진다는 거죠. 

너무 당연한 거 아닌가요?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림을 받는 삶을 살려면 
왕의 자리에서 내 자신이 내려와야 되는 거죠. 
내 삶의 왕의 자리에서 내가 내려와야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 천국의 삶이 현실의 내 삶 속에 펼쳐지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교회 속에는 왕이 너무너무 많습니다. 
제가 천주교 교인들 친구하고 대화를 했습니다. 
'도대체 인간 교황이 무오하다니 (오류가 없음) 이게 말이 되냐 말이야?' 

그렇게 제가 공격을 하면, 그 친구들이 했던 말이 
'우리는 교황이 한 명인데 너희는 교황이 교회(교단)마다 있잖아?' 
제가 잊을 수 없는 말입니다. 

근데 목사님들만 왕인가요? 장로님들도 만만치 않습니다.  
특별히 오랜 전통을 가진 교회에서 부교육자를 임명하면, 그들은 쪽지를 받습니다. 
슬픈 쪽지를 받습니다. 그 쪽지에 뭐가 적혀 있는 줄 아세요? 
그 교회 '왕'들의 명단이 적혀져 있어요. 

정말 그분들을 가장 깎듯이 대하고, 모든 예의를 갖춰서 대우해 드려야 되는 
소위 '왕'들의 명단을 줍니다. 거기 장로님, 권사님들의 명단이 포함되어 있죠.  
어떤 쪽지에는 '실세 서열 순서'가 적혀져 있습니다. 
(*유교 문화라서, 이렇게 서열 정리를 확실히 해야, 교회나 부서에 잡음이 없나 봐요)

저는 그런 교회가  왕들이 많아진 것은 쌍방과실 이라고 봅니다. 
목사님들이 거기에 앞장 섰고, 장로님들도 함께 동참했어요. 

(*목사님은 장로님들을 세워주고, 장로님들은 목사님을 세워줍니다.
이게 원래는 좋은 목적인데, 잘못하면 함께 단단한 기득권 층, 지배 계층을 형성해 버립니다)

지금 바울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가 너무 빨리 배불렀잖아? 너무 빨리 부자가 됐잖아? 너무 빨리 왕이 됐잖아? 
왜 아무에게도 말을 듣지 않는 그런 사람들이 돼 버렸냐?' 

저는 '우리 교회가 하나님 앞에 언제까지 쓰임을 받을 것인가?' 생각해 볼 때, 
한 가지는 분명하죠. '영적인 가난함을 유지할 때까지는' 쓰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것,

 

그래서 우리에게 주신 아무리 귀한 것이라더라도,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선물이요, 그래서 이것은 내 자랑의 이유가 아니라, 
하나님과 이웃을 섬겨야 될 은사라는... 이 영적인 가난함을 유지할 때까지, 
심령의 가난함을 유지할 때까지... 하나님은 저희들을 사용하실 겁니다.  


아래 9~13절까지 바울은 '우리'와 '너희'를 계속 대조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선교팀이고, '너희'는 고린도 교인들이죠.

한마디로 요약하면 십자가의 지혜로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이 삶을 통해 
배부름에 빠져있는 고린도 교인들을 책망하는 내용이 9~13절까지 펼쳐집니다.  

◑4: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두 가지 모습, '개선 장군' 과 '전쟁 포로'의 모습이 대조되고 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개선 장군이 돌아오면, 온 로마 시민들이 나와서 막 환호를 지르죠. 

그러면 제일 앞에 개선 장군이 앞서가고, 승리한 군대의 행렬, 전리품이 이어지다가 
그 퍼레이드의 끝에 누가 있습니까? 포로로 잡혀와 곧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들이 있죠. 주2)

두 번째는 원형극장의 이미지입니다. 원형극장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이 누군가? 천사와 사람들이 구경하고 있습니다. 

그 극장에 누가 나오느냐? 사자와 검투사가 나오고, 그들에게 희생이 되는 희생물들, 
전쟁포로들, 중범죄자들이 나오죠.

그러면 그 한 사람, 한 사람들이 사자에게 뜯기고, 검투사에게 죽어갈 때 
사람들은 열광적인 환호를 하게 되죠. 그게 바로 '구경거리'라는 장면입니다. 

바로 우리를 하나님은 천사와 사람들에게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다는 거죠. 
결국 이 비유가 가지는 의미는 무엇이냐? 
가장 비천한 사람이 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고전4: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0절 말씀을 한번 보십시오. 더 풀어서 설명하는데, '우리'와 '너희'를 반복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지만,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지만, 너희는 강하고,
우리는 비천하지만, 너희는 존귀하다...

이런 식의 반어적인 대구는 본절에서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미련함', '약함', '비천함'을 나열함으로써 
앞절에서 말한 구경거리가 구체적으로 자신들에게 어떻게 나타났는가를 설명합니다. 

그러나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도, 
여전히 세상 지혜와 경험을 소유한 것을 자랑함으로써,
마치 자기들만 지혜롭고, 강하고, 존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스스로 세상 지혜에 대하여 무지한 자들이 되었으며(1:17, 21, 3:18) 
이 세상에서 가장 약하고 비천한 자같이 매맞으며 핍박을 당하는 자(11~12절)가 되었으나, 

이에 반해 고린도 교인들은 그리스도를 믿는 까닭에, 

지혜롭고 강하며 존귀한 자가 되었다는 말이죠. *성공주의 신앙을 가졌다는 뜻을까요?
그런데 이 말은 굉장한 역설(paradox) 입니다. 
왜냐면 고린도 교인들이 그리스도안에서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지 못하였으면서도(3:1~2) 
서로 판단하며 사도들 없이 왕노릇하기를 서슴지 않는 것을 신랄하게 책망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해지고, 약하고, 비천해진 것은 
인간의 약함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으며(고후 12:9), 

또한 영광의 기준이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불의한 영광과 세속적 지혜를 비교함에 있어서 자신을 과감하게 낮출 수 있었음을 의미합니다. 

요컨대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를 멸시하는 인간의 지혜를 고발함으로써 
고린도 교인들의 교만이 정당화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입니다.
 
◑4: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바로 이 순간까지 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이것은 가난과 연관된 표현입니다.  
매맞으며.. 신체적으로 학대를 당합니다.  사회적으로 정서적으로 불완전하고, 정처가 없습니다.

 

아래에 성 프란시스의 말을 통해, '모욕' 한 가지만 예를 들었는데,

모욕, 박해, 비방, 헐벗음... 다 마찬가지입니다. 거기서 '고상한 기쁨과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참 기쁨의 근원은.. 모욕을 당할 때.. 자신을 온전히 정복하는데서 옵니다.

구차한 평안을 떨치고 구도의 길에 나서다라는 성 프란시스의 전기에 보면,

레오라는 형제가 진눈깨비를 맞으며 힘겹게 걸어가는 모습을 본

프란시스가 그에게 말합니다.

 

레오 형제, 우리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하고, 귀머거리를 듣게 한다고 해도,

성경을 통째로 외우고, 신학자들의 학설을 모두 통달했다고 해도,

그 안에 진정한 기쁨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절대로 온전한 기쁨의 근원이 아닙니다.”

 

레오 형제가 걸음을 멈추고 물었습니다.

그렇다면 온전한 기쁨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이때 성 프란시스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며 간신히 목적지에 도착하여 문을 두드렸을 때,

집주인이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밖에서 기다리라고 말해도,

우리를 도둑이나 부랑아 취급하며 모욕할 때도,

 

우리가 이런 일들까지 인내와 친절과 사랑으로 모두 참는다면

그제야 우리는 온전한 기쁨의 언저리에 도달한 셈입니다.

이렇듯 자신을 정복하는 데 온전한 기쁨이 있습니다.”


바울은 고백을 합니다. 정말 가난하고 또 신체적으로 학대받고, 
사회적으로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지 못하고, 정말 피곤한 삶을 바울은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당한 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합니다. 

그렇지만 바로 어떻게 살아갑니까? 악을 대할 때, 선으로 악을 대하게 됩니다. 
선으로 악을 대하는...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삶을 사는 것,  

마지막에, 자신들의 상황을 가장 과격한 언어를 통해 표현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에 더러운 것' ... 이거는 쓰레기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쓰레기들처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다... 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9~ 13절까지 바울의 고백을 들으실 때, 어떤 생각이 드시는지요?
'바울이 고생 많이 했구나...' 그러면서
'바울은 뒤끝 작렬이네, 자기가 고생한 걸 이야기하면서, 
정말 이 고린도 교인들 박살내는구나...' 그게 당연히 아니죠.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저는 한 가지를 깨닫게 해주셨어요.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라는 그 근거가 뭔가요? 
내가 지금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으로 살아간다면, 무엇이 이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나요

쉽게 표현하면 성공의 흔적인가? or 십자가의 흔적인가?  
제가 만약에 사역자로서 하나님이 저를 보실 때 '너는 신실한 그런 사역자다' 
그럼 근거가 뭐겠습니까? 

내가 소위 큰 교회를 세워가고 이끌고 있으니까 이게 성공한 사역자의 흔적인가요? 
아니면 사도바울이 말씀한 십자가의 흔적인가요?  

많은 경우 우리가 고민하는 것은 '내 삶에 성공의 흔적이 없기 때문에, 

나는 실패한 그리스도인이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또 반대로 자기 자신은 성공한 그리스도인으로 여깁니다. 
왜요? 내 삶에 성공의 흔적이 있으니까!  

우리들은 오랫동안 기준점을 '외적 성공의 증거가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서 
신실한 그리스도의 일꾼인가/ 아닌가를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다' 라는 것은   
우리 삶에 성공의 흔적, 외적 증거들을 가질 때가 아니라, 십자가의 흔적을 가질 때 :9~13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신실한 일꾼으로 인정받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고후12:12참조

성도님들 가운데, 아마 그런 하소연들 많이 하시죠. 
'저는 정말 한평생 예수 믿고 살면서 수고했는데 
나이 들어서 보니까 별로 가진 것도 없고, 이룬 것도 없고...' 
정말 한없이 자신에 대해서 뭔가 초라함을 가지시는 분들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일꾼으로 살아왔다 라는 표지는, 
성공의 흔적이 아니고, 십자가의 흔적입니다. 

우리가 주님 때문에 얼마나 희생했고, 얼마나 포기했고, 얼마나 견뎌왔고,
우리들 자신을 얼마나 부인하면서 살아왔는가? 
이것이 신실한 일꾼 됨의 표지, 증거가 된다는 거죠

▲제가 이 본문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러면 나는 주님이 보실 때,  
십자가의 지혜로 이 때까지 살아왔나?' 
저도 제 자신을 한번 돌아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되었고, 

나는 과연 이 교회를 섬기면서, 저도  부목사 때부터 포함하면 30년이 됐고, 
담임 목사도 16년이  돼 가는 거죠. '나는 과연 어떻게 살아왔나?' 한 번 되돌아보게 됐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한 때 청년시절에 많은 방황을 했습니다. 
근데 방황했던 이유가 무엇이냐?  죄송한 말씀인데 기독교가 부자들의 종교 같았습니다. 
부자들의 종교! 

잘난 사람들이 큰소리 치는 종교가, 저는 기독교라는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집은 가난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거기에 별로 해당되지 못했고, 
그래서 저는 '열심히 공부해서 내가 교회에서도 한번 큰소리 쳐 보는 사람이 되겠다'
하는 오기를 품게 되었죠.

제 눈에 비췄던 당시 교회는 '부자들의 교회, 성공한 사람들의 교회, 
성공한 사람을 인정해 주는 곳'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청년 시절에, 소위 운동권 학생들, 이런 애들과 부딪히면서 
물론 전혀 다른 배경을 가졌지만 (그들은 신자들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뭔가 가난한 사람들,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섬기겠다.. 라는 마음이 있었죠.
그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저는 정말 혼란이 많이 있었습니다.  


결국 그 가운데에서 저는 '예수님이 어떻게 사셨는가?' 하는 것을 다시금 배우게 되었고, 
그래서 저는 예수님을 만났을 때, 
제 인생이 어쩌면 가장 어두웠을 때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때 주님이 제게 가르쳐 주셨던 최고의 삶은 너무 단순했어요. 
그것은 바로 자기를 부인하는 거였고, 자기를 부인하는 것은 무엇이냐?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을 내려놓고, 바로 내가 가질 수 있는 시간, 
그것들을 남을 위해 사용하는... (그들은 기득권 타도로 인한 분배 정의를 강조했죠)

그래서 내 삶을, 부족하지만 작지만, 남을 위해서 내 삶을 드리는 삶, 
이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정말 1등을 위해서 몸부림쳤던 사람이었어요.
누구보다도 정말 저도 열심히 1등을 위해서 몸부림쳤던 사람이었는데, 
근데 그 1등을 향해 달려갈 때, 아무리 큰 성취가 제 삶에 주어져도 
언제나 제 삶은 불안했습니다. 두려웠고 세상이 무서웠어요. 
왜냐면 나보다 더 잘난 사람들이 등장하는 것이 너무 싫고 두려웠습니다. 이건 피할 수 없죠.

그러다가 저는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바로 내가 1등하는 삶이 아니라 
남을 섬기고 내 삶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드리는 삶을 배우게 되었을 때, 
그때 내 삶에는 과거에는 경험할 수 없었던 기쁨과 평안과 감사와 찬양이 
제 삶 속에 흘러들어왔습니다. 

이제는 '경쟁에서 1등'이란 그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었죠.
왜냐면 예수 안에서 모든 만족, 모든 평안, 모든 승리를 얻었으니까요.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요!

그때부터 주님께서 제게 엄하게 교훈하셨던 것은 결국 무엇이었느냐? 
내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면, 언제나 주님께서 많은 경우 막으셨습니다. 
그러나 내가 남을 위해서 작지만 돕고 섬기는 선택을 했을 때 
주님은 제 삶에 말할 수 없는 기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역자가 되고 나서도, 정말 성도들 위해 군림하는 사역자가 아니라, 
정말 부족하지만  성도들을 높이고 섬길 수 있는 사역자,
특별히 청년들과 다음 세대를 섬길 수 있는... 
말이 아니라 정말 삶으로 그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그런 사역자의 길을 한번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 주셔서, 지금 내일교회를 섬기면서 
제가 돌아볼 때, 그냥 단순하게 말씀드리면, 
저는 제가 목회자가 되어서 담임 목사가 누릴 수 있는 특권, 
그 힘을 빼는 것이... 저는 제가 해야 될 일이다... 라고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부족하지만 제가 가질 수 있었던 것들을 조금씩 조금씩 내려놓으려고 
저는 나름 노력을 했습니다. (도서비, 유류비, 목회 비, 무슨 비, 무슨 비... 이런 걸 정리했어요)

제가  잊을 수 없었던 것은, 다른 교회 분이셨는데 여전도회장이셨어요. 
그분이 저한테 '목사님 이거 한번 보세요' 그러면서 여전도회 회계 장부를 보여주셨어요. 
그걸 보니까 이렇게 되어있었어요. 

 

1월 달.. 담임 목사님 신년 선물, 2월 달.. 목사님 구정 선물  
또 몇 달 지나니까.. 교회 설립일 선물, 5월 달.. 스승의 날 선물
9월 달.. 추석 선물,  10월달.. 목사님 생신 선물

그 목록들이 쭉 적혀져 있는데, 여전도회 예산의 거의 80~90%가 
다 목사님 선물 비용으로 적혀져 있었어요. 저는 그때 그 충격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어요. 
'야 정말 여전도회 분들이 작지만 헌금 모아서 목사님한테 다 갖다바쳤구나' 
이렇게 했던 시절이, 과거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런 것들은 포기하고, 그만두자'
제가 목회자로서 부족하지만, 담임목사가 가질 수 있는 특권들이 많습니다. 
그것을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조금씩 내려놓으려고 저는 노력을 했습니다.  

두 번째 제가 노력을 했던 것은, 저는 조직 위에 군림하는 게 아니고, 
조직의 통제를 받는 목회자로 살아가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목회자가 자칫 잘못하면 조직에게는 수많은 요구를 하지만, 
그 조직에게 요구했던 그 기준에, 자기는 해당되지 않는 사람으로 행하는 경우가  많았어요...

요즘 세상의 특징은 flat-world '편평해진 세상'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과거의 피라미드 조직에서, 이제 팀장 중심으로 조직 구조도 바뀌고 있습니다...

또 하나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저는  성도들이 저한테 맞추기보다는, 
제가 성도들에게 조금이나마 맞추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제가 노력하도록... 하나님이 제게 많이 요청을 하셨어요. 

지금도 아마 목회자들 분 중에 금요일 밤부터~ 토요일 밤까지는 
일절 사람을 안 만나시는 거룩한 분들이 많습니다. 설교 준비에만 전념한다는 것이죠.
아예 기도원에 올라가서 지내시는 분도 있고요.

근데 저는 주말에도 성도님들을 다 만납니다. 저는 별로 거룩하지도 않고요.   
그렇게 영웅적인 헌신의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이 저한테 한번 도전하신 게 그거였어요. '왜 설교 준비를 꼭 토요일에만 해야 되냐?'
토요일은, 성도들이 한 주간 바쁘게 살다가, 그나마 잠시 여유가지는 시간인데,
왜 그 시간에 목회자를 못 만나고, 

'목회자를 만나려면 (상담 등으로) 자기들이 바빠서 정신없는 주중 시간에 
꼭 목회자를 만나야 되느냐?' 주말에는 목사님이 바빠서 안 되니까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설교 준비를 주초에 끝냅니다. 
제가 끝내는 이유가 뭔가 하면, (그렇게 많은 분이 요청하는 건 아니지만) 
제가 주말에, 성도님들을 위해서 시간을 충분히 내기 위해서입니다. 결혼식, 칠순도 있잖아요.

저는 주일 밤부터 PC 자판을 두드리기 시작해요.
셀모임 강의안을 미리 작성해서, 여러분이 셀모임때 나누도록 배려합니다.
그 강의안이, 순장님들이 셀모임 인도할 때 도움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 제가 기꺼이 불편을 감수해야 되죠.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저는 지금도 목회자로서 매 순간마다
'내가 편한 길을 선택해야 되나, 
아니면 나를 부인하고 조금이라도 남을 유익하게 하는 길을 선택해야 되나?'  

그때마다 저는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게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용기를 주십시오.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힘을 주십시오!'   

부목사님들이 가끔 저보고 그런 이야기를 해요. 
'목사님, 제가 보니까 성도들한테 제일 열심히 설교하는 목사님이신 것 같습니다.' 

저는 성도들한테 인사를 할 때도, 가급적 깎듯하게 하려고 나름 애를 씁니다.

어떤 교역자는, 인사하다가 머리 숙이다 보면 머리카락이 흐트러지잖아요.

그래서 고개를 못 숙인다는 분도 있다는 말을 들었어요.

설교할 때, 머리가 딱 단정해야 된다는 거죠.

 

그런데 저는 이게 (고개 숙여 인사함) 저한테는 생활입니다. 청년부 할 때도 저는 그렇게 했고

제가 심방도 많이 못 가는데,

주일날 만큼은 여러분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얼굴이라도 한 번 봐야 될 거 아닙니까?

그래도 인사나누면서, 여러분 표정을 한번 보는 게, 저는 이게 기쁨입니다.

 

그런데 제가 갈수록 체력도 조금 딸리기는 하지만, 제가 하나 느끼는 게 뭔가 하면 
저는 인사하는 게 뭐냐? 저한테는 도 닦는 시간입니다. 무슨 도를 닦느냐? 
성도들한테 고개를 숙일 때, 제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 있어요. 

'야, 너는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고 너는 섬겨야 될 사람이야'  
이거를 붙잡기가 쉽지 않아요.  

그러면 우리가 사람들한테 성김과 대접받는 것 자체를 당연하게 생각하면 
그때부터 우리는 나가떨어지는 겁니다.

그럼 저는 성도들과 인사하는 시간은 '도 닦는' 시간으로 여기죠. 
'그래, 나는 성기는 사람이고 이분들은 누구냐? 성김을 받아야 될 사람들이다'  

저는 우리 교회가 정말 지도자들이 성도들을 대할  
우리 보다 부족한 경험도 많고  신앙을 갓 시작한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가 바로 당신을 숨기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고백하고 그들을 대할 수만 있다면  
우리  교회가 얼마나 아름다워질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말씀을  마무리하면서 
바울이 우리에게 도전했던, 고린도 교회에 책망했던 
'너희가 벌써 배불렀구나 너희가 벌써 부자가 됐구나 너희가 벌써 너희가 왕이 됐구나'

지금 바울이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처럼  
성도들 삶에 있어서 제 개인의 삶에 있어서 
어떤 성공을 경험했다 할지라도 어떤 영적인 통찰력과 체험을 했다 할지라도 
기록된 말씀의 범위를 넘어서지 않고  

두 번째 영적인 가난함을 유지하고,
바로 십자가의 삶을 통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죽이는 십자가의 길을 선택하면서 
다른 사람과 주님을 높이고 섬기는 삶을 살았던 예수님 같이 
우리 성도들도 정말 살아가서  

예수님을 따라 사는 것이 정말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이다. 
가장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길이다. 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교회와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 '성도의 노래'를 다 같이 부르겠습니다. 
「환난 가난과 고난 수고로움 속에도
성도는 그 믿음을 지켰네

주를 섬기는 일에 자신을 다 드리며
진리의 말씀과 성령으로 그 길을 걸었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시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자유케 되었네

우리는 무명하나 유명한 자요
죽음의 위기 속에도 참 생명 가졌고
근심하나 기뻐하며
가난하나 다른 이를 부요케 하는 자로다
모든 것 가진 자로다 모든 것 가진 자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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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미국에 오순절 교단이 생기게 된 계기
원래는 1930~40년대 이전까지는 미국이나 해외에 오순절 교단이 없었죠.
그런데 오순절 운동이 미국 전역에서 일어나면서, 

기존 교회는 '자기들이 뛰쳐나가서 자기들끼리 오순절 교단을 만들었다' 그러고,
오순절 파는 '도저히 방언, 신유, 예언한다고 우리를 못 살게 배척해서, 할 수 없이 나왔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 전역에서, 오순절 운동 Pentecostal movement 하는 교인이나 교회들끼리 뭉쳐서
여러 오순절 교단을 조직하게 되었습니다. 

이 오순절 교단들은 1960년 이전까지는 미국에서 이단 비슷하게 취급을 받았습니다만, 
1960년에 히피 운동이 일어났는데, 이때 기존 교단들이 심하게 쇠퇴하는 반면, 
오순절 교단들이 건재하는 것을 보고서, 1960년대에 이르러서야, 
오순절 교단들은 비로소 분파(이단) 취급의 멍에를 벗고, 
기존 교단들 중의 하나로 인정을 받게 되었지요.

여러 가지 이유로, 지금은 전 세계에 7억명으로, 
세계 개신교회의 약 70~80%를 오순절파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특히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 선교지에서는, 오순절파가 대세입니다.
가톨릭, 정교, 성공회까지 다 합쳐서 계산하면, 전 세계 기독교의 25% 라고 합니다.

2011년 기준으로 미국에 오순절 교단은
100개 이상의 교단과 200개 이상의 신학교들로 구성되어 있다고 합니다.
교인은 7천5백만으로, 전 미국교회의 25%를 차지한다고 합니다.

 

 

주2) 로마 장군이 적진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면, 로마 시내에서 개선행진을 열어 주거든요.

 

근데 퍼레이드 자격이 조금 엄격해요. 내전 상황에서 이기는 건 안 됩니다.

다른 나라를 복속시키고 와야 돼요. 적어도 5천명 이상은 죽이고 와야 돼요.

전리품도 정해진 양이 있습니다. 많이 가지고 와야 돼요.

그리고 영토도, 일정 영토 이상을 확보하고 와야 됩니다.

그러면 그런 사령관을, 로마 시내에서 개선 행진 퍼레이드를 시켜줍니다.

 

어디를 행진하느냐? 로마 포럼(로마 공화정)에서부터

캄피돌리오 광장까지 갑니다.

로마에서 가장 핵심되는 시청 청사가 있는 그곳까지 행진시켜 줍니다.

즉 로마 시내 한 가운데를 행진하게 해줍니다.

 

행진의 모습이 놀랍습니다. 제일 앞에 로마의 관리들과 원로원이 섭니다.

원로원 할아버지들이 먼저 행진합니다.

 

그 다음 그 뒤를 나팔수들이 따릅니다. 승리의 나팔을 불죠.

 

그리고 그 뒤를 따르는 자들은, 전리품을 들고 따르는 종들입니다.

'이만큼 많은 전과를 올렸습니다' 하는 거죠.

 

그리고 그 전쟁에서 쓰인 무기를 사람들이 들고 또 갑니다.

만약에 해전에서 이겼다면, 그 배의 작은 모형을 만들어서 메고 갑니다.

 

그리고 그 뒤를 로마의 제사장들이 따릅니다.

제사장들과 함께 따르는 무리들 중에는, 화동도 있고 여자아이들도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제사장과 함께 다니면서 꽃을 뿌립니다. 그리고 제사장들은 향을 피웁니다.

 

또 하나는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고후2:14

그걸 비유해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얘기한 거예요.

바울이 그 냄새를 얘기한 거예요.

 

그럼 그 냄새가 로마시내 전역에 퍼져나갈 것 아닙니까?

그럼 그 뒤에 제사장과 화동들 뒤에, 4마리 백마가 끄는 화려한 마차에 사령관이 않습니다.

승리를 가지고 온 사령관이.

 

그리고 그 사령관의 마차 뒤에, 사령관의 가족들이 따릅니다. 이게 개선행진입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이거 놀랍지 않습니까?

 

그 개선 퍼레이드의 맨 끝에, '전쟁 포로'들이 또 행진합니다. 전리품과 아울러요.

주로 적국의 왕이나 장군들이죠. 바울은 지금 이 이미지를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