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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14장 진심보다 실력이다

LNCK 2025. 5. 26. 18:1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자아>          ▣영적성장

진심보다 실력이다 | 막 14:30-40 | 금요철야 | 25.3.28 - YouTube

 

◈진심보다 실력이다           막14:30~40              2025.03.28.  

'삶은 계란이 아니고 태도입니다.' 
밤이니까 잠 깨라고, 방금 제가 유머 한 마디 했습니다.

애티튜드 입니다. 제가 이제까지 여러 번 얘기했죠. 태도가 삶의 방향을 결정하는 거에요. 
지금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태도가 중요.한 거예요. 
철야에 나온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태도, 이게 참 중요해요. 

'내가 어떻게 살고 싶은가?' 그 살고자 하는 열망이 또 태도를 만들어요. 
여러분 공부를 잘하고자 하는 열망이 있잖아요. 그럼 태도가 바뀔 수밖에 없어요. 
학교에 가서도 딱 선생님을 향해서 귀를 쫑긋하고... 그럴 수밖에 없죠. 

태도가 잘못되어 있으면, 삶의 방향이 잘못된 거고,
방향이 잘못됐으면, 바른 목표로 향해 우리가 갈 수가 없는 거죠. 

마25장의 '달란트의 비유'를 보면, 태도예요. 
5달란트, 2달란트 받은 사람들은, 주인에 대한 태도가 바른 거죠. 

그런데 1달란트 받은 사람은, 주인에 대한 태도가 안 좋아요. 
주인을 굉장히 곡해하고 있죠. 
주인에 대한 자기의 어떤 선입견이나, 관점이 잘못되어 있으니까 
일을 하고 싶지 않은 거죠. 태도가 바를 수가 없는 거죠. 

그러니까 결국은 한달란트를 땅에 묻어버린 거죠. 
그래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 되어버린 거죠. 
마음의 태도! 겉으로 드러나는 몸의 태도보다, 마음의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여러분 신앙이 뭐냐? 태도를 바꾸는 거예요. 
그래서 신앙 생활을 진짜 잘하려고 하면 태도가 바꿔어져야 해요. 
어떤 태도를 바꾸는 거죠? 하나님에 대한 태도예요. 

탕자의 비유에서 보면, 아버지에 대한 태도가 안 좋죠. 그러니까 거꾸로 가잖아요. 
아버지 집을 떠나는 거죠. 

말씀에 대한 태도, 하나님에 대한 태도, 죄에 대한 태도... 이걸 다 바꾸는 거예요. 
옛날에는 하나님과 등지고 살았는데, 
이제는 하나님께로 정방향으로...

예전에는 말씀과 상관없이 살았는데, 이제는 말씀에 대한 열린 태도, 
죄에 대한 태도가 바뀌었어요. 

신자의 태도가 중요합니다. 이전에는 태도가 삐뚤어져 있었어요.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등지고 있었고, 
죄를 향해 있었고, 또 죄를 지으려고 작정하고, 죄의 방향을 바라보고 살았다는 거죠. 

에베소서2:1~3절에 보면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 너희는 그 가운데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의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그러니까 허물과 죄로 죽었던 자들이고, 불순종의 아들들이었고,
또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았고, 육체와 마음에 원하는 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로 살았다는 거죠. 그러니까 소망이 없는 상태였죠. 

특별히 여기에서 핵심은 뭐냐면 '죄에 대한 태도'예요. 
죄에 대해서 이전에는 매우 적극적이었다는 거죠. 죄를 좋아했어요. 
죄를 싫어한 게 아니고, 죄를 좋아한 거죠. 죄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어요. 

죄 짓는 걸 환영하고, 죄 짓는 일에 꺼리낌이 없고, 죄 짓는 일에 대담했던 거죠. 
옛날에는 우리의 태도가 이랬습니다.

그리고 노골적이었어요. 유혹이 오면 은근히 즐긴 거죠. 유혹을 즐겼어요. 
여러분 사람들 보세요. 얼마나 악한지... 나쁜 짓 한 걸 자랑하기까지 해요. 
이게 옛날에 우리의 과거의 모습이었어요. 죄 짓는 걸 자랑했어요. 
악행한 것을 경쟁해요. 죄 짓는 걸 경쟁해요. '누가 더 악한가? 누가 더 악랄했는지...' 

얼마나 나쁜 짓을 하고도, 무용담처럼, 영웅담처럼 그걸 늘어놓는 사람들... 
그리고 죄 짓는 일을 내가 선택한 거죠. 의지적으로 죄를 지었어요. 계획적으로!

아예 마음을 먹고 죄를 지으려고 작정하고 살았던 거죠.
기회만 없을 뿐이지, 언제든지 죄를 짓고 싶어하는... 

그러니까 우발적이고 돌발적인 죄가 아니에요. 
굉장히 철저하게 계획을 가지고 죄를 짓는 모습... 그게 우리 과거의 삶이었어요. 
그야말로 뼛속까지 죄가 가득 차 있는 모습이었죠. 

여러분. 이게 지금 이 세상의 모습이에요. 
그냥 어쩌다가 죄를 짓는 게 아니에요. 뼛속까지 죄예요. 

마치 사과나무에 사과 열매가 주렁주렁 달리는 것처럼 
죄인이니까 죄의 열매를 맺는 거죠. 

그러니까 이걸 우리는 '죄에 속박된 상태'라고 해요. 죄에 포로된 자! 
죄의 종노릇 한다고 그러잖아요. 죄에 끌려다니는 겁니다. 
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무력한 거예요. 죄의 힘을 이길 수가 없었어요. 
그리고 그 죄를 환영했고 즐겼고, 누렸고, 그 죄 속에 살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이 죄를, 한마디로 얘기하면 뭔지 아세요?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에요. 
하나님에 대한 반역! 
사람에 대한 반역이 아니고, 하나님에 대한 반역! 

이 상태는 뭐죠? 구원의 가능성이 제로,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태! 
그래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얘기하잖아요.  엡2:3

그래서 하나님 편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어떻게 하셨어요? 
로마서 5:8절에 보면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러니까 우리가 죄를 먹고 마시고, 죄의 포로가 되어, 그 속박 속에 살아가는 
그 상태에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정해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롬5:8절은 외우셔야 돼요. 부담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건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거예요.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죄를 먹고 마시고, 죄 속에 살아가는 상태에 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 

이어서 롬5:10절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여러분 우리가 죄인에서 의인이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거죠. 
우리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기회가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 없고, 우리는 하나님께 반역자들이라는 거예요. 
죄밖에 몰랐고, 죄 짓는 걸 즐겨했고, 그 죄를 통하여 하나님을 끊임없이 거슬렀던 사람들,
그 상태에서 우리를 건져내 주셔서, 이제 우리가 죄인에서 의인이 된 거죠. 

자 여러분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인이 의인이 됐다는 거잖아요. 
근데 의인이 되었다면 어떻게 해요? 죄를 짓지 말아야 돼요. 

근데 현실은 어떠세요? 여전히 죄를 지어요. 
그럼 이전과 달라진 게 뭐죠? 죄인에서 의인이 됐다는 신분적 변화? 
그 외에는 다른 게 없나요

그냥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우리를 용서해 주셨기 때문에 
이제 죄인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계속 죄를 짓는 게 우리의 삶일까요?  

자, 우리가 분명히 해야 될 게 있어요. 
우리가 죄를 지어요. 그러나 달라진 게 있어요. 차이점을 알아야 돼요. 
이 차이점을 알아야 돼요. 

죄를 짓긴 해요. 여전히 짓지만 이전과 동일하지는 않아요. 뭐가 달라졌어요? 
죄에 대한 태도가 달라졌어요. 

이전에는 죄에 대해서 계획적이고, 의도적이고, 적극적이었어요. 
죄를 짓는 일에 내가 저항력이 없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아니에요. 
이전처럼 죄를 지을 수 없어요.       

구원을 얻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은 
이제 그 죄에 대한 태도가 바뀐 거예요. 죄는 지어요. 그런데 태도가 달라졌어요. 

이제는 죄를 좋아하지 않아요. 죄 짓는 걸 좋아하지 않아요. 
나는 예수 믿고 구원 받았는데, 죄 짓는 게 아직도 신나요. (그는 구원받지 못한 거예요)

구원받은 사람은, 어쩌다가 죄를 짓는 거예요. 
죄를 짓고도 내가 죄를 지은 내 모습이 스스로 싫어요. 

전에는 죄를 자랑을 했어요. 죄 짓는 것에 대해서 부담이 없었어요. 
그냥 마구 끌려 다녔어요. 완전히 죄에 사로잡혀 살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그 죄를 내가 짓고 싶지 않았는데, 짓게 된 거죠. 

▲자, 우리가 구분을 해야 될 게 있어요. 반역불순종이에요. 

반역은...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 거예요. 작심하고... 
이건 악한 거예요. 그게 우리의 옛 삶이에요. 이건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에요.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이런 하나님에 대한 반역의 죄를 짓죠. 
'하나님이 어디 있어?' 하고 죄를 지어요. 

그런데 우리는 달라요. 그런 반역을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불순종'이에요. 

자, 반역과 불순종의 차이를 아시겠죠? 
반역은... 의도적으로 죄를 짓는다는 거예요. 
죄에 대해서 적극적이고, 하나님을 무시하는 거예요. 노골적인 반항! 

그러니까 죄를 지을 때, 옛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오지 않았을 때 생각을 해보세요. 
옛날에는 하나님이란 존재가 나에게 없었어요. 
죄를 지을 때 내가 하나님이 되는 거에요. 내 마음대로 하잖아요. 
죄를 지을 때 내가 마음대로 하잖아요. 그건 내가 하나님인 거예요.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나에겐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게 반역이에요. 이 반역은 절망적인 상태예요. 

그러나 우리가 예수를 믿고 난 다음에는, 반역할 수 없어요. 
근데 불순종해요. 말씀대로 살지 못할 때가 많아요. 

우리가 죄를 이제 더 이상 갈망하지 않아요. 
내가 예수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주야로 늘 죄를 묵상합니까?  
죄에 대한 음모와 계획을 꿈꿉니까? 그러지 않아요. 

하나님께 순종할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잘 안 되는 거예요. 
아직 말씀을 따라 살만한 신앙을 갖추지 못한 거죠. 마음은 원해요. 

▲그게 오늘 본문이에요.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입니다.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고, 주님을 따라다니며 말씀을 배우고, 기적도 체험하고,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아직도 여전히 미숙한 상태에 있었어요. 

오늘 본문의 내용이 뭡니까?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올라가셨어요. 
주님은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간절하게 기도를 하시잖아요. 

그리고 주님이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주님은 제자들과 거리가 떨어진 곳에 가서 기도하시다가, 
한참 기도하시다가 와보면, 제자들이 졸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자들을 깨우시는 거예요. 

깨우고 가면 또 자고... 또 자고... 그때 주님이 하신 말씀은 뭐예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막14:38
이 말이 오늘 설교의 핵심이에요.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음은 순종하고 싶은데, 몸이 안 따라준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예요? 
마음과 몸이 따로 논다는 얘기예요. 
마음은 졸지 않으려고 했어요. 기도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몸이 안 따라오는 거예요. 

여러분 여기서 '육신이 약하다'는 이 말은, 단순히 바디를 말하는 게 아니에요.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하면, 말씀을 따르기에는 아직 훈련이 되지 않은 몸,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몸이에요. 

내 마음을 따라오지 않는 이 몸은, 이게 내 삶에 부담이 되는 거예요. 
내 생각들은 안 되니까! 나의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는 몸이 
결국은 제자의 삶을 살아가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무너지게 하는 거잖아요. 

여러분, 제자 베드로에게 자주 발견되는 모습입니다. 바로 앞부분에서도 뭐죠? 
예수님이 '너희가 다 나를 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장담하죠. 

베드로는 참 재밌는 사람이잖아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를 버리지 않겠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 말이, 베드로가 거짓말을 했을까요? 거짓말이 아닐 거예요. 진심이었어요. 
근데 여러분 어때요? 
문제는 진심만으로 안 된다는 거예요. 나중에 어떻게 해요? 
베드로는 비참하게 무너집니다. 맹세하고 부인하고 도망을 칩니다. 

뭘 보여주죠?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부인하고 도망친 자신이, 스스로 얼마나 미웠겠어요? 
문제는 현실입니다. 마음은 하늘에 닿아 있는데, 이 현실은 그냥 바닥을 기는 거죠. 

여러분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한' 상태를 그대로 두면 어떻게 돼요? 
우리도 베드로처럼 사는 겁니다. 
그래서 늘 이 말을 하는 거예요.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주님이 중요하게 보시는 것은 태도라고 했어요. 마음의 태도, 마음의 중심! 
우리 행위 이면에 숨은 동기를 보시죠. 

그래서 가룟유다는 사실 반역한 거거든요. 아웃이에요. 반역은 기회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베드로는 불순종한 거죠. 겉으로 보면 비슷해 보여요. 

주님은 베드로를 용서해 주세요.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은 다시 그를 찾아가서 재기하게 하세요. 

만약에 베드로가 반역자였다면, 더 이상의 이어질 스토리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음은 원인데 육신이 약하여 순종하지 못한 거에 대해서 
주님은 그의 불순종을 이해하시는 거예요. 

여러분, 죄에 대한 우리의 태도죠. 
순종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으나, 어쩔 수 없이 죄를 짓게 된 것, 

이렇게 표면적으로 보면, 가룟유다나 베드로가 동일한 죄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전혀 다른 성격인데, 하나님이 이걸 구별하신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죄 자체보다, 죄에 대한 태도를 먼저 보세요. 
-짓고 싶어서 아예 작정하고 죄를 지은 것인가? 
-아니면 짓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가 지은 것이냐? 

죄 지은 것은 동일해요. 그런데 하나님은 그 동기를 보시는 거죠. 
마음의 태도를 보시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하여 넘어진 것을 이해하시는 분이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삶 가운데 얼마나 많이 넘어집니까?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주님의 뜻대로 살고 싶어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간절하지만... 몸이 그렇게 안 되잖아요. 

만약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 받고, 그 말씀대로, 결단한 대로 다 살았다면, 
여러분 우리는 지금 다 하늘에 떠 있겠죠. 굉장한 신앙 수준이 되었을 거예요.

우리가 죄를 짓고도 실패를 해요. 불순종해요. 그리고 괴로워해요. 그걸 주님은 아세요. 
아가서 1:5절에 참 재미있는 말씀이 있어요. 
'예루살렘의 딸들아, 네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이게 참 의미 있는 말씀이에요. 
어떻게 보면 '검다'는 말은, 사랑받을 만한 요인이 아니에요. 
'네가 검으나 아름답다'는 표현은 이중적인 거죠. 
사랑받을 만한 게 없는데 아름답게 보는 거죠. 솔로몬이 술람미 여인을.

그러니까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지만, 살지 못하고 실패했던 것을 
주님이 이해하신다는 거예요. 

우리는 죄를 지을 때 정죄감에 빠지고, 수치감에 빠지고, 자괴감에 빠지고, 
'나는 형편없는 인간이야, 나는 가능성이 없어, 
하나님이 어떻게 이런 인간을 받아주시겠어? 내가 이럴 죄를 짓다니...' 
그래서 죄책감이 시달려서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려고 하죠. 

하나님이 앞에 나아가는 자신감을 잃습니다. 기도를 해도 소극적이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신감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우리 하나님의 백성들이, 죄를 짓고 불순종함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썼던...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연약하여 실패한 우리를 이해하시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여전히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다고 우리를 버리시는 분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반역을 한 게 아니에요. 
불순종을 했어요. 왜? 내가 약하기 때문에.
 
그래서 약해서 죄를 짓고 실수를 했는데, 
내가 스스로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멀어져 가려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죄인의 모습으로 그대로 여전히 주님 앞에 나와야 한다는 거예요. 

이게 복음이에요. 하나님은 아세요. 우리가 온전히 순종할 수 없다는 걸 아세요. 
그렇기 때문에 죄를 지은 것만으로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세요. 
우리의 연약함을 이해하시는 분이세요. 

히4:15~16 '우리에게 있는 대지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지어다'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세요. 
우리가 연약해서 넘어진 걸 아신다는 거예요. 동정하시는 분이라는 거예요. 
이해하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어떤 때는 '네가 마음은 원하는데 육신이 약하다'라고 하는 
이 주님의 말씀은, 정말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되는 거예요. 주님이 이해하신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가 죄를 짓는다고, 그냥 죄를 짓는 대로 처벌하셨다면, 
여기에 남아있을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용서하시고, 기다려 주시고, 참아 주시고, 품어 주시고, 이해해 주시고, 
'네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애를 썼는데 넘어졌구나'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자녀들하고 똑같아요. 
우리 부모들이 가지는 태도가 그렇지 않아요. 

자녀들이 정말 착하고 말을 잘 들으면 사랑스러워요. 
그런데 말을 안 들으면... 그래도 사랑스러워요. 

자녀가 성적표를 내밀 때, 성적이 좋으면 좋은 대로 자녀를 사랑하고 
성적이 안 좋으면 안 좋은 대로 사랑하는 거예요. 그때는 뭐예요? 
(성적이 안 좋으면) 여전히 자녀를 사랑하지만, 가슴이 쓰리면서 사랑하겠지요. 
그런 차이는 있어요. 근데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언제는 동일해요. 

시103:10절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나' 이게 하나님의 은혜예요. 

자 그러면 여러분,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죠? 
이제 '마음은 어디로든 육신이 약합니다. 할렐루야!' 그러고 살아요? 

우리가 죄를 짓고 불순종했다면, 당연히 회개해야죠. 잘못했다고... 진심으로 회개해야죠.  

근데 여러분, 회개에 대한 오해가 하나 있어요. 
회개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거...는 잘못이에요. 

여러분 회개는, 과거의 죄에 대한 용서를 구하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회개의 핵심은 미래를 향하는 거예요. 

잘못했다는 걸 깨닫는 것만으로는 회개가 아니에요. 
그걸 고치고 새롭게 되는 거예요.      

우리에게 뭐가 문제죠.? 죄의 반복이라는 거죠. 계속된 실수가 문제예요. 
늘 똑같은 회개를 한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죄를 반복해서 짓는 거죠. 

그런데 죄를 반복해서 지을 수 있는가요? 회개 다음에는 뭐가 와요? 
변화된 삶이 따라오는 거죠. 
그게 참된 회개인가/ 아닌가를 알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기준이에요. 

똑같은 죄를 회개하고도 계속 지을 수는 없어요. 
그 죄를 지을 때, 내 마음의 태도 자체가 달라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입술의 회개만으로 부족하다는 거예요. 
성숙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거죠. 회개는 성장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미성숙하면 계속 죄를 지울 수밖에 없거든요. 
몸이 안 따라주니까, 그게 미성숙이거든요. 

우리의 성장은, 우리의 신앙의 가장 중요한 영역입니다. 
엡4:15절에 보니까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의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랄지라.. 라는 거죠. 

여러분, 계속 '마음은 원이라도 육신이 약하도다'를 외치면 안 되죠. 
그러면 어떻게 돼요? 언제나 결심만 하는 사람이 되겠죠. 

그런 말을 들어보셨죠? '바보는 결심만 한다!' 
여러분, 2025년초에 결단을 몇 번씩 하죠. 벽에도 막 크게 써 붙여놓고... 

소원과 꿈은 하늘까지 닿습니다. 근데 나중에 하나도 실천을 안 해요. 
'내가 세상을 바꾸는 삶을 살겠다'고 공언을 했는데, 
세월이 지나면 세상은 못 바꾸고, 리모콘으로 채널만 바꾸는 거예요. ㅎㅎㅎ

여러분, 우리가 변화와 성장을 위해 노력해야 돼요. 
왜요? 성장하지 않으니까. 

미숙한 상태에서, 계속 신앙생활을 하면, 
마음은 원하는데, 몸이 내 마음이 원하는 대로 따라주지 않는 거죠. 

그래서 여러분, 성장을 해야 되는 거죠. 
그런데 이 성장이 마음대로 안돼요. 왜요? 
내 죄성을 극복하는 게 어렵기 때문에! 

근데 여러분, 우리가 노력하다 보면 절망하게 돼 있어요. 안 해본 사람은 절망을 몰라요. 
근데 내가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제대로 살아보겠다고 
나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노력하다 보면... 내가 노력한 만큼 안 된다는 걸 경험하게 돼죠.
그래서 절망하는 겁니다

여러분 그때, 절망하고 포기하면 안 돼요. 한계를 발견하는 게 중요해요. 
'아 내 힘으로는, 내 의지로는 안 되는구나'
그런데 '그럼 내가 그냥 이대로 살다가 가야지...' 

아니에요. 그 시점이 중요해요. 
나의 절망을 느끼는 그 시점에서 어디로 가느냐? ... 이게 중요해요. 
그때 포기하면 안 돼요. 어디로 가야 되죠? 하나님에게로 가야 돼요. 


누가 하나님을 의지합니까? 자신의 절대 한계를 깨닫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언제가 가장 위험한지 아세요? 
자기 힘으로 변화가 가능하다고 자신감을 가지는 사람이에요. 
그러면 베드로가 되는 거예요. 

베드로를 보십시오. 착각을 하잖아요. 자기가 할 수 있다고 믿는 거죠.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무슨 힘으로, 무슨 능력으로? 
그래서 '선 줄로 생각하면 넘어질까 조심하라!' 교만은 금물이에요. 

바리새인들의 문제가 뭡니까? 자기 의 self-righteousness 로 가득했어요. 
자기 의의 치명적인 약점은, 변화가 불가능해지는 거예요.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어요. 가장 경계해야 될 사람들이에요. 
늘 겸손한 마음으로 주를 의지해야 되는 거죠. 

요21장이 유명하잖아요. 실패한 제자들을 찾아 디베라 바닷가에 찾아오신 주님이 
베드로에게 질문을 던져요. 어떤 질문이죠?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질문에 옛날 같으면 베드로는
'주님,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내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사랑합니까? 
제가 기분 나쁩니다.' 하며 별별 수다를 다 떨었겠죠. 

근데요. 이때 베드로 대답이 '주님이 아십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이 아십니다'
여러분 베드로가 바뀌었어요. 세 번의 질문에, 세번 다 그렇게 대답해요. 

베드로는 막 허언을 하지 않아요. 장담이 없어졌어요. 큰소리 치는 게 없어졌어요. 
'주님이 아십니다' 그것도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했을 거예요. 

여러분, 이런 베드로의 태도에서 뭘 느낍니까? 
베드로는 이제 자신을 스스로 믿을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는 거예요. 
자기가 자기를 믿을 수 없다는 걸 아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이 아십니다...' 

여러분, 사람들이 왜 큰 소리를 치죠? 내가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여러분 이게 가장 문제예요. 내가 나를 모르는 거예요. 모든 문제의 출발점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 자신을 모르니까, 
주제를 모르고, 자기 분수를 모르고, 
진리를 파악 못하고, 공약을 남발하고, 헛소리를 남발하고... 

여러분, 이게 베드로가 처절한 실패 이후에 얻은 황금 같은 레슨이에요. 
자기 성찰을 한 거죠. 정말 정신을 차린 겁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까, 나야말로 소망이 없는 존재라는 걸 아는 거예요. ///////////////자아
여러분 우리 자신에게 스스로 절망해야 돼요. 깨어져야 해요. 

여러분, 누가 주님을 붙듭니까? 
자기 자신에 대한 처절한 절망을 한 사람이에요. 
우리의 노력으로 안 돼요. 

자기에게 희망을 가지는 사람은, 주님을 붙들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주님이 아십니다. 이제 내가 나를 모르겠습니다. 
이제 내 인생의 길은 주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을 따라 살고 싶습니다. 반항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내 실력으로 안 된다는 걸 내가 압니다.' 하고 자신을 주님께 맡깁니다. 

'주님께 제 삶을 맡깁니다.
주님이 이끄시는 대로 내 삶을 드리고 싶습니다.' 
주님에 대한 절대적 의존이죠. 

그러자 주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세요. 
요21:18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젊어서는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다녔어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살았어요. 
그러나 나중에는 '남이 네게 띠 띄우고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이제 네가 아닌, 다른 힘(성령의 힘)이 너를 이끌고 갈 것이라는 거죠. 

그래서 오순절의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하여 
베드로는 한 번도 자신이 걸어보지 못한 길로, 성령님이 그를 인도하시고 
마침내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드리는 순교의 자리까지 가는 거예요. 

누가 하신 거죠? 하나님이 하신 거예요. 
여러분, 하나님께 완전히 나를 맡기는 것, 그때부터 우리의 성장이 시작이 돼요. 

내가 주님을 위해 살고 싶어요. 내가 사랑하는 분의 마음을 거슬르고 싶지 않아요.
그러나 그게 내 마음대로 안 돼요. 그래서 베드로처럼, 그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거죠.
자아의 깨어짐과 성령의 세례!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가 자라가는 걸 기뻐하세요. 
여러분 가정에서도 자녀들이 자라가는 걸 보는 것처럼 기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는 거예요. 
자라간다는 건 놀라운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으로 들어오면, 
그 말씀이 생명이기 때문에, 우리 안에 들어온 그 말씀이, 우리를 자라게 하세요. 
성장하게 하세요. 

어떤 분은 '난 별로 자란 것 같아 보이지 않아요.' 
아뇨, 자랐어요. 
여러분, 자라는 것은 하루아침에 자라는 것은 아닙니다. 시간이 많이 필요해요. 

어떤 분은 너무 낙심합니다. '내가 이렇게 오래 교회를 다녔는데, 별로 안 변했어요' 
그러나 교회를 다녀서, 그만큼이라도 변한 거예요. 
그리고 자기가 변하지 않았다고 깨닫는 것도... 그것도 성장했으니까 깨닫는 거예요.

여러분 나무를 보세요. 나무를 심으면, 그냥 쑥쑥 자라납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땅에 씨를 뿌렸는데, 혹은 모종을 심었는데, 이게 뭐 기별이 없어요. 
근데 어느 날 보면, 싹이 나요. 어느 날 보면 자라요. 
근데 그 나무가 자라는 게 눈에 보여요, 안 보여요? (안 보여요)
근데 오랜 세월이 지나서 가보면, 그게 쑤욱 자라나 있어요. 생명이기 때문에 그런 거죠. 

여러분 속에, 그런 역사가 지금도 일어나고 있을 줄로 믿습니다. 훌쩍 자라나 있는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세월이 흘러서 저도 자라나 있는 거예요. 

초신자들이 자라는 거 보면 신기하죠. 너무 너무 신기해요. 
저는 목회하면서 어떤 분은, 1년차인데 세례 간증하는 분들을 보세요. 
벌써 믿은지 1년밖에 안 됐는데, 어떻게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이 쏙쏙 들어가서 
체계적으로 자리가 잡혀서... 간증을 하는데 들어보면 놀라워요. 

그게 어떻게 가능해요. 여러분? 성령이 하시는 거예요. 
자라나는 걸 보는 것은 기뻐한 거예요. 여러분 그거보다 더 기쁜 게 없어요. 성장하는 거죠. 

여러분, 결혼한다는 게 뭐예요? 그리스도 안에서는 아내와 남편이 서로 영적으로 자라가는 
걸 보는 기뻄이에요. 그것보다 더 기쁨이 없죠. 
여러분, 자라지 않는다면 죽은 생명체죠. 심각한 거죠. 

여러분 누가 기뻐하실까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장성한 분량의 믿음으로 자라가는 것, 
그걸 하나님이 바라시는 거죠. 왜요? 
우리가 자랄 때,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더 많은 걸 맡기실 수가 있는 거죠. 

그래서 베드로에게 주님이 말씀하셨죠. '내 양을 먹이라'
하나님께서 성장한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맡기십니다. 

근데 문제는 뭐죠? 하나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맡기고 감당하게 하시려는데 
우리가 그게 감당이 안 되는 거예요. 
자라기 전에는 사명을 주실 수가 없는 거예요. 그걸 감당 못할 거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일들을 누구에겐가 맡기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사람을 찾고 계세요. 
우리가 자란 만큼 해야 할 일이 있어요. 

여러분, 이기적인 삶을 내가 살고 싶어서 사는 게 아니고, 
내가 나 하나도 추스리지 못하면... 이기적일 수밖에 없는 거예요. 

아이가 안 자라면, 계속 돌봐 줘야 되죠. 
자기가 이기적인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거에요. 

여러분, 자아중심적 삶을 사는 이유가 뭐에요? 굉장히 미숙한 그리스도인 이잖아요. 
자라지 않은 상태에 있으니까, 자기밖에 모르는 거에요. 
자기 세계에 갇혀 있는 거거든요. 그가 누구를 도와주겠어요?
나(자기) 하나도 간수하기 힘드는데, 어떻게 주님을 위해서 살 수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베드로나 예수님의 제자들을 보세요. 
예수님을 따라다니는데 계속 사고치잖아요. 
귀 잘라가지고, 또 예수님이 붙여주시고... 
물에 푹 빠져가지고, 주님이 다시 건져주시고... 

여러분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가면, 자란 만큼 주님이 우리를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시고 
우리를 쓰시는 것이죠. 

여러분 주님이 우리에게 뭔가를 맡기신다는 건 놀라운 거잖아요. 
어린 아이의 상태에 있으면 아무것도 맡길 수가 없어요. 
늘 자기 고민, 자기 문제에 빠져가지고 거우적거리는데 어떻게 맡기겠어요?

여러분 누군가 윗사람으로부터 놀라운 일을 위임받는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죠. 
사람들이 많지만, 주님이 그런 사람을 찾고 계시는 거죠. 

하나님은 우리가 자라가기를 원하시고, 
죄의 노예 상태로 계속 머물러 있기를 원치 않으시고, 높은 레벨로 살기를 원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결심만 하는 신자는 안 돼요. 마음만으로 안 됩니다. 
진심만으로는 안 됩니다. 
마음에 원하는 것을, 실력으로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된다는 거예요. *설교 제목

멋진 말만 하는 신자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여러분 우리의 마음의 그 소원을,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구체적으로 삶에 실현해내는 능력을 갖춘 신자! 그러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돼요? 

우리는 끊임없이 주님의 도우심이 필요한 겁니다. 
순간순간 성령의 이끌리심을 받아야 됩니다. 
작은 것에도 주님에게 의지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는 순간이 단 한 순간도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 계속 우리는, 
우리의 입으로, 우리의 생각으로, 우리의 마음으로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저를 인도해 주십시오. 하나님 가르쳐 주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하나님, 살려 주십시오. 
내 실력으로는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도움이 필요합니다'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분리되어서 우리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요15장이 뭐라고 말합니까?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요15:5

그래서 나는 날마다 주님의 능력이 필요합니다. 
매 순간 말씀 앞에 서고, 매 순간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고, 
매 순간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말을, 추상적으로 듣지 않기를 바랍니다. 
모든 삶의 영역에, 크고 작은 모든 일들에,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이란 뭘까요.? 독립적인 존재가 내가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주님을 더 의존하게 되는 거죠. 
내 삶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포션(영역)이 점점 커지는 거예요. 

전에는 내가 어떤 일을 할 때, 내 힘으로 한참 하다가, 일이 어려워지만
그제야 하나님이 생각나곤 했습니다. 

혹은 내가 다 결정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을 기도하는 것입니다. 
허락 받는다고 하면서요. 

더 나쁜 거는, 내가 다 실패하고 난 다음에, 비로소 하나님을 찾는 거예요. 
여러분, 선기도가 와야 돼요. 나중에 제일 끝에 '기도나 해볼까?' 아니에요. 

여러분, 항상 하나님이 첫자리에 와야 돼요. 
여러분 '나는 하나님 없이 호흡조차도 할 수가 없습니다' 라는 고백이 필요해요. 

그래서 신앙생활을 하면 할수록, 하나님이란 존재가 내 삶에 점점 더 커지고, 
그분을 부인하고는 내 삶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매 순간 주님을 의지하고... 그게 믿음이 장성한, 성숙한 사람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의지한다는 게 뭘까요? 
그분의 말씀 앞에 나아가는 것이고, 그리고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는 것이고,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고... 매 순간 그렇게 하는 겁니다.

여러분, 성장은 내가 노력해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고요. 오늘 메시지가 그거잖아요. 
만약 내가 스스로의 힘을 믿고, 내 노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면... 지금 다 됐겠죠. 
죄도 안 짓겠죠. 

근데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았기 때문에, 
절대 절망을 깨달았던 우리가, 이제는 순간순간 모든 일들 속에 
성령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고,

내가 호흡을 할 때마다 주님을 찾을 때 
주님 안에 내가 붙어있는 삶을 살게 되고, 
그 붙어있는 삶을 살 때, 세월이 흐를수록 나도 모르게 내가 성장해 있는 거죠. 

그러면 어느 순간에 어떤 일이 일어나요? 
죄가 더 이상 나를 다룰 수 없는 단계에 이르는 거예요. 

내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노력해서 죄를 짓지 않기는 어려워요. 
일대일로 정면으로 죄와 싸워서 이기는 것은 어려워요.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자라면, 
이전에 나의 유혹거리가, 더 이상 유혹거리가 안되는 거예요. 

옛날에는 다 걸려 넘어졌어요. 왜? 내가 아직 미숙하니까, 유혹에 넘어간 거예요. 
내 몸이 아직 훈련이 안 됐어요. 여전히 죄를 짓기에 적합한 최적화되어 있는 몸이에요. 
게으르고, 나태하고, 자기중심적이고, 끊임없이 자기의 욕심을 좇아 살아가는 이 몸이, 
그리스도 안에 들어왔어요. 

이제는 우리의 몸을, 그 말씀에 맞게 성화시키는 이 과정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의존하고, 그분에게 붙어있는 삶을 살아갈 때, 
그 주님의 은혜로 나를 덮으시고 인도해 주실 때, 
어느 순간 그 죄의 힘이 내 안에서 약화되는 걸 느끼는 거죠. 

그래서 유혹이 더 이상 유혹이 강하게 되지 않는 거죠. 
걸림돌이 더 이상 걸림돌이 안 되는 거예요

여러분, '옛날에 걸림돌이 지금도 똑같이 걸림돌이 된다'는 말은, 
아직 내가 성장하지 않고 있다는 얘기예요. 

신앙이 성장하면, 옛날에 늘 넘어졌던 게 이제 나에게 게임이 안 돼야 돼요. 
(쉽게 이길 수 있어야 해요)
여러분 옛날에 조그마한 돌에도 넘어졌던 아이가, 크면, 
장애물을 뛰어넘기도 해요. 왜요? 성장했으니 껑충 뛰어버려요. 

여러분, 우리가 성장이 자라가면, 하나님은 우리가 자라가기를 원하시고요. 
자라가면 자유가 와요. 제한이 사라져 버려요. 옛날에는 제한이 너무 많았어요. 

여러분, 바다를 항해할 때, 높은 파도가 문제가 아니에요. 배가 작은 게 문제예요. 
큰 항공모함은, 파도가 심하게 쳐도 그냥 가요. 파도가 지가 지쳐 떨어져요. 
그러나 배가 작으면, 바람만 약간 불어도 바다에 나가면 안 돼요. 

여러분, 장애물 경기를 보세요. 실력이 있으면, 높은 것일수록 실력을 증명해내는 거예요. 
시험이 시험이 될 수가 없어요. 그게 오히려 나를 더 업그레이드 시켜주는 거예요. 

여러분, 인생은 장애물과 같잖아요.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 예요.
내가 잘하지 않으면, 계속 시험의 연속이에요. 

지금 시험에 계속 든다는 말은, 내가 아직 안 자랐다는 얘기이고, 
육체의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고... 여러분 자라보세요. 시험이 시험거리가 안 돼요. 

  


원망과 불평이 왜 일어납니까? 아직도 유치한 삶을 하고 있다는 거죠. 
자라가지 않으면, 유치하게 살 수밖에 없는 거죠. 유치원에 계속 다녀야 되는 거죠. 

유치원에서 반장하고, 또 반장하면서, 초등학교를 안 가는 거예요. 
계속 유치원에서 뺑뺑이 도는 거예요. 

여러분, 이전에는, 내가 성장을 하지 못하니까,
사람들이 누가 무슨 말을 한마디 하는 것에, 위축을 받고, 시험에 들어서 괴로워했어요.

▲여러분 성장하면요. 모든 것이 넘어가는 게 자연스러워져요. 
분노와 염려와 관심이 사라지고, 다른 클래스가 되는 거예요. 풍성한 삶을 사는 거예요. 
안정된 삶을 사는 거예요. 성장하니까 안정된 거죠. 

여러분 영적으로 자라면, 바라보는 시각도 넓어집니다. 
왜 시험이 들죠? 보는 시각이 좁으니까 그래요.
근데 자라가면 자라갈수록 시각이 넓어지는 겁니다. 
날개를 펴고 하늘을 오르는 것 같은 것이죠. 자랄수록 멋진 삶이 펼쳐집니다. 

내가 살고 싶은 삶과, 실제로 살아내는 삶의 간격이 좁아져야 된다는 거죠. 
'마음은 원하더라도 육신이 약하라'는 말이 없어지는 거죠. 

마음이 원하는 대로 내가 살고, 마음이 원하면 몸도 따라가는 거죠. 성숙하면! 
결심만 하는 게 아니에요. 실행에 옮길 수 있는 능력까지 갖추는 거죠.

'내가 사랑하며 살아야 되겠다'라고 하는 말씀이 깨달아지면, 사랑을 행동으로 옮겨요. 
실천하는 거예요. 그 실천을 반복하면 어떻게 해요? 그게 내 삶에, 내 몸에 붙겠죠. 
그럼 나중에 내가 안 하고 싶어도, 사랑하게 돼요. 

'내가 기도의 자리에 앉겠다' 그렇게 결심하면, 몸도 나중에 따라오는 거예요. 
몸도 훈련시켜야 되는 거예요. 

게으르고 죄성에 따라가는 그 몸을, 계속 훈련시켜야 되는 거예요. 
'기도의 자리에 앉겠다'고 결심하면, 그걸 지켜내는 거죠. 성숙한 단계입니다.

그러면 나중에는 이 몸이 내 마음과 일치를 이루어요. 
안 따라가기 힘들어요. 몸이 앙탈을 부리지 못해요. 

영적으로 성숙하고, 훈련이 되면 어떻게 해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거예요. 
깨닫고 결심한 것을 적극적으로 행동에 옮길 수 있다면, 우리 인생이 어떻게 되겠어요?
놀랍게 하나님께 쓰임 받는 거죠.

여러분, 예수님의 제자들이 끊임없이 '나는 마음은 원하는데 몸이 약하도다'
사실 여러분 이 말은, 제자들이 한 말이 아니고, 예수님이 너무 안쓰러워서 하신 말씀이에요. 
근데 우리가 그 말을 써죠. 몸이 약한 자기를 합리화하기 위해서요. 
여러분, 오늘 그 말을 우리의 입에서 내지 않게 되길 바랍니다. 
신앙이 자라고, 영적으로 성숙하면... 우리는 더 이상 그 말을 하지 않게 되는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