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고후13장 확증하라

LNCK 2025. 5. 27. 11:58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고린도후서

고린도후서 특강(12) - 확증하라(고후 13장) - YouTube

 

◈확증하라               고후13:1~13         고린도후서13강          

고린도후서 오늘로 12강 마지막 시간인데, 고린도후서 말씀을 통해서 
많은 것을 공부하시고 또 깨닫고 느꼈을 겁니다. 

고린도후서 말씀을 보면, 성도의 정체성을 다양한 용어,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하셨죠. 기억나는 것만 우리가 한번 꼽아보면 
'너희는 그리스도의 편지'라고 그랬습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향기라' 
'우리는 새 언약의 일꾼'이라고도 말씀하셨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도 하셨습니다. 

지금 제가 명제만 쭉 얘기하는데, 그 중간중간 내용에 담긴 의미들을 기억하시고 
떠올려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를 '보배를 담은 질그릇'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고후12장도 그랬고, 11장 말씀도 보면 '우리가 연약한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낮추는 자, 연약한 자, 나의 부족함을 인정하는 자가 되어야, 
내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활동하실 수 있다... 그랬습니다. 

그러므로 이걸 이렇게 쭉 이어서 생각해 보면, 
고린도후서가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하는 게 나타날 겁니다. 

그래서 어떤 성경 한 권을 공부를 하고 나면, 전체적으로 이어지는 메시지를 
한번 되뇌어 보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성도의 정체성은 이런 것이다. 성도는 이렇다. 이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라고 
쭉 말씀하신 그 의미를 기억하시고, 그걸 마음에 꼭 새기고, 고린도후서를 마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확증하라"라는 주제로 함께 말씀을 나누려고 합니다. 
사실 본문 고후13장 말씀은, 고린도후서 전체를 정리하는 말씀이기도 하고, 
동시에 12장 말씀에 연결되는 내용이기도 합니다. 

◑고후13:1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리라'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가겠다는 얘기입니다. 이제 세 번째 방문이 되는데,

바울이 첫 번째 고린도교회를 방문했을 때는, 개척할 때입니다.  *2차전도여행, 행18장
고린도교회를 개척할 때, 그때 처음 방문했고, 

두 번째 방문했을 때는, 문제가 생겼는데, 문제 해결을 위하여 들어갔습니다. 
문제를 해결했습니까, 못했습니까? 못했습니다. 상처를 크게 입고 나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바울이 '눈물로 쓴 편지'를 써서, 디도에게 들려서 보냅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이 이 문제가 다 해결되었다는 얘기를 듣고 
세 번째 가겠다고 약속한 겁니다.    주1)

바울이 이렇게 편지도 많이 쓰고, 많이 방문한 교회는.. 고린도 교회밖에 없습니다. 
그토록 이 교회가 문제도 많았고, 
또 그토록 바울은 이 교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지대했다는 걸 의미합니다. 

바울은 고린도로 '가겠다' 그랬습니다. 그런데 2절을 보십시오. 

◑13:2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두 번째 대면했을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난리가 났잖아요. 문제 해결이 안 됐잖아요.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 이게 무슨 말이에요? 겁주는 겁니까? 

바울이 이런 말씀을 하는 이유는.. 회개하라는 겁니다. 
'아직까지 그 잔재 속에 머물러 있는 자들이여 회개하고 돌이켜라.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면 용서하지 않겠다.' 

'내가 세 번째 방문했을 때도 여전히 그 상태로 머물러 있으면 가만히 두지 않겠다.' 
어떻게 하려는지는 모르겠어요. 
어쨌든 바울이 대단히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사람들이 어떤 잘못을 했는가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 배웠습니다. 지지난 시간에도 공부했고, 
바울이 전하지 않은 다른 것들을 용납한 겁니다. 세 가지를 용납했다고 했습니다. 

1) 다른 예수.. 바울이 전하지 않은 다른 예수를 용납했고 

'다른 예수'란 그 당시 영지주의자들이 전하는 이야기를, 받아들였다는 얘기입니다.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정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이 육체로 이 땅에 오셨음을 부정하는 영지주의가, 고린도 교회도 그대로 들어왔는데,
이걸 내가 갈 때까지 해결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가만히 두지 않겠다...

 

2) 다른 영을 용납했습니다. 
'다른 영'은 뭡니까? 사탄의 영 아닙니까? 
성령 외에 다른 영은 사탄 마귀의 영이죠. 
성령은 일치의 영인데 사탄 마귀는 분열의 영입니다. 

이 사탄 마귀 분열의 영이, 이 교회 안에 들어와 있으니까, 교회가 나누어집니다. 
고린도전서에서 본 것처럼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 
이래 가지고 서로 파벌이 나누어져서 싸웠습니다.

또 은사를 가지고도 싸웠습니다. 방언파, 예언파, 병고침파, 가르치는파 등등..
성령은 일치의 영이고, 하나되게 하는 영인데 
성령이 아니라 '다른 영'이 들어와 있으니까, 교회가 사분오열 되어서 계속 싸웁니다. 

'내가 세 번째 갔을 때도 이런 식이면,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는 겁니다. 

3) 고린도교회는 '다른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구원 받는데,
그런데 '할례도 받으면 더 좋지 않겠느냐?' 
이렇게 할례가 구원의 다른 조건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건 갈라디아 교회도 그랬고, 고린도 교회도 '다른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갈1:8참조
'그거를 끊어내지 않으면, 내가 가서 가만히 두지 않겠다.'  13:2

여러분 지금 바울이 지적하는 교회의 잘못들을 보십시오. 여기에 토를 달 수 있습니까? 
토를 달 수 없습니다.    *토를 단다 : 이의를 제기하다
왜냐하면 근본적인 문제니까요. 

바울은 사소한 문제를 가지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의견이 나뉘어질 수 있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 
복음의 진리를 가지고 얘기하고, 성령을 얘기하기 때문에, 여기에는 토를 달 수가 없습니다. 
'이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라' 바울은 이런 얘기를 아주 직설적으로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2 

왜요? 사랑하니까. 이 교회를 고쳐서 쓰고 싶으니까. 
이 문제들을 깨끗하게 다시 고쳐놔야, 하나님께서 이 고린도교회를 들어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실 거니까... 그래서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합니다. 

사실 이런 소리를 자꾸 들으면, 고린도 교인들 입장에서는 힘들잖아요. 
'야 너희들 잘한다. 들리는 소문이 성도도 많이 늘었다며?'
이런 듣기 좋은 얘기만 하면 서로 참 좋을 텐데... 

그런 좋은 얘기는 일절하지 않고, 이런 얘기만 자꾸 하니까, 부담스럽잖아요. 
그런데 이게 복이라고 얘기합니다.  ↙

시94:12 '여호와여 주로부터 징벌을 받으며, 주의 법으로 교훈하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나니'
어떤 자가 복되다 그랬어요? 
징벌 받고 교훈하심을 받는 자, 즉 혼나는 자가 복되다는 얘기입니다. 

잘못했을 때... 잘못했다고 혼나고, 두들겨 맞고, 지적당하고.. 그런 자가 복되다 그랬습니다. 
여러분 시편기자는 이걸 복이라고 했습니다. 
이걸 진짜 복으로 우리가 여길 수 있어야, 우리가 복받는 자가 됩니다. 

세상이 얘기하는 복과,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복이 다르다 라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잖아요. 
구약에서 말하는 복은, 바라크 - '무릎 꿇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무릎 꿇음이 복입니다. 
잘못했으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하나님, 잘못했습니다' 라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야 되잖아요. 그게 복인 거예요. 

곧 징벌하심이 복이고, 교훈하심이 복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 관심 있는 자를 징벌하시고 혼내시지요. 
그렇지 않은 자, 즉 사랑하지 않는 자, 관심 없는 자는... 무관심하게 버려 버립니다. 

그래서 징벌 중에 가장 큰 징벌은 '유기'의 심판입니다.  reprobation, forsaken
이거 우리가 로마서 공부할 때 배웠습니다. 로마서 1:24, 28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롬1:24
'내버려 두사' ... 유기했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동성연애를 얘기하는 건데, 
그런 일이 있어도 양심의 가책이 없도록 '내버려두셨다'는 뜻입니다. 

롬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내버려 두는 것, 이게 얼마나 무서운 심판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내버려 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길을 가다가 보니까, 어느 집 아이가 심하게 떼를 씁니다. 
내 집 아이면, 내가 어떻게 하겠는데 
남의 집 아이니까 '내버려 두는' 거예요. 
그 아이가 왜 떼를 쓰는지.. 간섭하거나, 그 부모에게 충고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내 집 아이가 아니니까요. 

하나님이 '내버려 둔다(유기하셨다)'는 말은, 너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내버려 둬서.. 죄인들이 (또는 성도들이) 편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이 간섭 안 하시니까.. 내 몸이 편하고, 내 육신이 편하고... 그런 게 아니에요. 

그냥 하나님이 내버려 두십니다. 이건 대단한 심판입니다. 
죽어서 지옥 가는 심판이죠. 

그런데 이 땅을 살면서, 이미 우리는 유기의 심판을 당할 수 있는데, 그건 큰 심판입니다. 
무서운 심판이에요. 

차라리 하나님 앞에 혼나서 다리몽둥이 부러지는 게 낫지, 
그래가지고 눈물 콧물 흘리면서 '하나님 저한테 왜 이러세요?' 
이래야 그게 복받는 자이지... 그게 아니라 내버려 두고 '네 멋대로 해라' 그러면 
그게 얼마나 비참한지 몰라요.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사랑하니까, 이런 말씀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는 '내 안에 성령께서 계신다/ 계시지 않는다'를 뭐로 분별합니까? 
행2장을 보세요. 거기에 베드로가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설교를 쭉 하거든요.  행2:37~ 

그 설교를 듣고, 그 예루살렘 사람들이 '마음에 찔려' 그랬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찌할꼬?' 

마음에 찔렸다는 것은,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에 찔림을 주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령께서 그들(우리) 속에 함께 계시고, 그들(우리)를 포기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에 찔림이 있고, 깨달음이 오고, 
누군가가 나를 책망한다는 건... '아직까지 하나님이 나에게 희망을 두고 계시는구나' 라는
증거입니다.  설교 듣다가, 성경 읽다가, 기도하다가, 
내 마음에 가책이 오고, 눈물이 나고, 잘못한 게 깨달아지면... 그럼 안심해도 됩니다. 
그게 여전히 '나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전혀 찔림이 없어요. 아무리 내가 잘못해도 아무런 찔림이 없어요. 
그냥 걍팍하게 막 살아요. 그러면 심각합니다. 한번 자신을 돌아보세요. 

길게도 아닙니다. 지난 1년만 한번 돌아보세요. 
'내가 막 살았는데 아무 일이 없었다.' 
그러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서, 뺨을 좀 때려달라고 말씀하세요. 
나를 좀 혼내달라고 부탁하십시오. 
'내가 막 살았는데.. 나를 좀 때려달라고.. 정신 좀 차리게!'
그래서 '유기 심판'처럼 무서운 심판이 없다니까요. 잘 기억하십시오.

히12:5~6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왜요? 나는 하나님의 아들임이 분명하니까, 그때 낙심하면 안 돼요. 
그걸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13:3 '이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시는 증거를 너희가 구함이니 
그는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2절과 3절 내용의 행간을 잘 읽으셔야 해요.
바울이 지금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막 책망하잖아요. 징계하겠다고 하잖아요. 
'내가 가면 너희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너희가 다른 복음을 받아들였지? 
다른 예수를 받아들였지? 다른 영을 받아들였지? 내가 가만히 있지 않겠다'

그러니까 고린도교의 성도들이 되바라지게 뭐라고 말하느냐? 
'그거 정말 그리스도께서 주신 말씀 맞습니까? 증거 있습니까?'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3
바울 당신이 그럴 자격이 있는지 '증거 내놔라' 그랬다는 말이에요. 

유추해 보면, 두 번째 바울이 이 교회를 방문했을 때 이랬던 것 같습니다. 
'증거를 내 놔라' 했다는 거죠. '당신이 그럴 권위가 있는가요? 
정말 그게 당신의 말인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인지 증거를 보여달라' 

참 무섭습니다. 고린도교회의 일부 교인들이 얘기하는 게 뭡니까? 
고린도 교회에 거짓 교사들이 왔습니다. 그들이 들고 온 게 있잖아요. 추천장을 갖고 왔죠.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수 없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유력한 사람의 
도장과 직인이 찍힌 추천장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그 추천장을 들이밀면서 말합니다. 

'바울은 사도가 아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3년을 동행한 사람이 아니다.' 
그걸 가지고 얘기했다.고요. 

그러니 바울에게 '당신은 그럴 만한 증거를 보여달라. 
당신은 그들처럼 추천장이 있는가? 당신은 진짜 예수와 함께 3년을 동행했는가? 
그러니 우리에게 그런 말할 자격이 있는가? 
당신이 확실하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받아서 말한다는 증거를, 우리에게 보여 달라'  

이때 바울이 어떻게 얘기합니까? 
3b절, '그는 (예수 그리스도) 너희에게 대하여 약하지 않고 도리어 너희 안에서 강하시니라' 

예수님이 강한 이유를 4절에서 설명합니다. 

◑13:4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니' 
예수님이 사람들이 볼 때 얼마나 약합니까? 그렇죠.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대해서 실망한 이유가 이거거든요. 

예수님이 로마를 전복시키고, 유대인들을 로마의 손에서 해방시킬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약한 거예요. 그냥 도살상에 끌려가는 어린 양처럼, 한마디 하지 못하고, 
끌려가서 십자가에 달려 죽고 끝나버렸잖아요. 사람들이 볼 때 이게 너무 약한 거죠. 
  
예수가 가진 그 능력이라면, 얼마든지 저항하고, 얼마든지 그들을 물리칠 수 있는데, 
예수님은 한마디도 저항하지 않았으니까... 사람들이 볼 때 '약해 보이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계시니' :4 

그를 살리신 분이 누굽니까?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 약한 이유는 왜 약한 겁니까? 능력이 없어서 약한 게 아니에요. 
하나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셨기 때문에.. 자신은 약해졌고, 
그 빈자리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한 겁니다. 그래서 그는 강하게 된 겁니다. 

빌2:5~11절 말씀을 우리는 잘 압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사람들과 같이 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랬습니다. 

온전히 사람과 같이 되셨고 죽기까지 순종하셨는데, 십자가에 달려 죽기까지 순종하셨어요.
예수님이 능력이 없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지 못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자기를 비운 겁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비워낸 그 자리에 누가 임했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어요.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니까, 죽은 예수가 살아나지 않습니까!
예수가 살아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분을 살리신 거라고요. 

바울은 지금 그 말씀을 하는 겁니다.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여기 우리가 누굽니까? 
바울과 디모데와 실라, 누가 같은 바울의 동역자들입니다. 

'우리도 그 안에서 약하나, 너희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와 함께 살리라' :4b
'너희가 나에게 증거를 보이라고 하는데, 추천장을 보이라고 하는데, 
(사도라는 증거, 우리를 가르칠만한 권위를 받은) 증거가 뭐냐고 그렇게 따져 묻는데, 
나는 보여줄게 내 약함밖에 없다. 나는 보여줄게 예수 그리스도가 약해지셨으니, 
나도 나의 연약함 밖에 없다' 12장에 그 얘기 했는데, 본문 13장에서 다시 얘기하는 겁니다. 

'너희도 알다시피 나는 눈이 약해서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 만나느라, 그 빛을 보느라 
안질에 걸려서, 사람도 잘 못 알아보고, 눈에는 눈물이 자꾸 흐르고, 
눈에는 눈곱이 자꾸 끼고... 내 병도 잘 못 고치면서, 그래도 사람들 병치유한다고 돌아다닌다.

내 육신은 이 꼴인데, 내가 늘 전도한다고 돌아다니고 있다.
이게 나의 약함이다. 그런데 이 약함을 가지고 내가 일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에게 임해서 일하는 거 아니냐?이게 나의 증거라는 겁니다

'내가 약한데, 나를 통해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봐라.
이것이 너희에게, 내가 보여줄 증거가 된다.
 
'추천장 따위가 증거가 아니고, 
예수님과 3년을 동행한 사도의 외부적인 지표가 증거가 아니라, 
내가 약할 때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해 일하시는 그 능력이 증거가 된다.' 이 말씀이에요. 
이걸 (한글 성경에) 이렇게 어렵게 표현해 놓은 겁니다. 

이걸 우리가 잘 기억하셔야 돼요. 바울은 예수님처럼 사역한 겁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힘이 없어서 약한 게 아니잖아요. 
순종하니까 약해진 거고, 그 약한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일하신 거죠. 

고후12:9~10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네가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내가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력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내가 강함이라' 

여러분 이 강함이 어느 정도까지 뻗치는 것 같아요? 아무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내가 나를 비워서 연약한 모습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나면, 
내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시거든요. 

그러면 그 일하는 능력의 폭발력이, 어디까지 갈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능력 안에 머물고 싶었던 겁니다. 이걸 사모했던 거예요. 

근데 자신의 강함으로 일하면, 그건 한계가 있습니다. 
자신이 가진 학벌, 지식, 지혜... 이건 그 한계가 딱 있잖아요. 

'그 한계만큼 일할 거냐? 혹은 그 한계를 넘어서서 더 위대한 능력으로 일할 거냐? 
내 능력으로 일할 거냐?,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일할 거냐?'

뻔한 것 아닙니까? 당연히 정상적인 사람은, 큰일을 하고 싶은 사람은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일해야 큰 일을 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면 안 됩니다. 자신의 잘남을 드러내면 안 됩니다. 
철저하게 나는 낮아지고, 철저하게 나는 죽고, 예수의 능력을 덧입어야 됩니다. 

고후11:7절에도 바울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전할 때 '나를 낮추어 전했다' 그랬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이 선명하게 드러나려면, 내가 낮아져야 되거든요. 

그리스도께서 완벽하게 드러나려면, 내가 약해져야 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가 더 높아질 수 있어요. 
그래야 그리스도가 더 완전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내가 사라져야 돼요. 내가 나는 존재감이 싹 사라지고, 안개처럼 사라지고... 
그래야 예수의 능력이 나타나고,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사람들이 막 놀렸잖아요. 비아냥 그랬잖아요. 
예수님이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까 
'저가 엘리아를 부르는가 보다. 지켜보자, 엘리아가 와서 저를 구원해 주나 한 번 보자' 

그때 만약 예수님께서 그 말을 듣고서 막 화가 나가지고, 너무 화가 나셔가지고, 
하늘의 천군 천사들을 불러다가 '야, 쟤들 다 잡아가라. 그리고 나를 여기서 끌어내려라' 
라고 하셨다면,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나타납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어서 무덤 속에 들어가 버렸는데, 
그런데 그 무덤이 빈무덤이 되고, 무덤 문을 막았던 돌이 굴려지고 
지키던 군인들이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고, 돌아가셨던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내 손에 못자국을 만져보라'고 하고 '내 허리에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라'고 하시고 
그래야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 아닙니까! 그게 역설이거든요.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내가 자꾸 뒤로 가고 하나님을 앞세우고... 그래야 됩니다. 

바울이 끝까지 얘기하는 것, 이게 복음이거든요. 

▲그런데 출애굽 할 때 보니까, 자기를 자꾸 나타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기가 자꾸 높아지려고 하려는 사람들이었죠. 

1) 미리암과 아론이에요. 
민12:1 '모세가 구스 여자를 취하였더니 그 구스 여자를 취하였으므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니라'

'비방하니라' 
이 말은 '등 뒤에서 이야기하다' 라는 뜻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뒷담화죠. 
그런데 그냥 뒷담화한 게 아니에요. 의도가 있었습니다. 
등 뒤에서 아론과 미리암 두 사람만 말한 게 아니에요. 회중들에게 계속 이야기를 한 거예요. 
공동체를 어지럽힌 겁니다. 

민12:2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하매 
여호와께서 이 말을 들으셨더라'

무슨 말입니까? '왜 모세만 최고 리더십, 탑 리더십의 자리에 있어야 되느냐?'
미리암도 아론 자기들도, 모세와 동급으로 
'나도 백성들의 지도자가 될 자격이 있지 않느냐?' 
이런 이야기를 백성들에게 계속 하고 다닌 거예요. 스스로 자기가 높아지려고! 

결과는 미리암이 나병에 걸립니다. 나병이 뭡니까? 격리되는 겁니다. 
백성들에게서 완전히 격리되는 겁니다. 그리고 모세가 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자 
그가 다시 나병에서 고침받고 돌아왔습니다. 

2) 고라 일당
민16:3 '그들이 모여서 모세와 아론을 거슬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분수에 지나도다 
회중이 다 각각 거룩하고 여호와께서도 그들 중에 계시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총회 위에 스스로 높이느냐'

이 말만 딱 떼서 생각하면 그럴듯한데... 고라 일당도 리더십을 가지고 싶었습니다. 
고라자손들도 레위인으로서, 회막 안에서 봉사하는 자로만 그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도 좀 높아지고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백성들 핑계를 대는 거예요.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이 '향로 하나씩 들고 다 모이라' 그랬습니다. 
그 향로에서 불이 나와서 다 타 죽습니다. 땅이 갈라집니다. 땅이 그들을 다 삼켜버립니다. 

높아지려고 했는데 땅 속으로 꺼져버렸어요.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하니까, 하나님이 가장 낮고 낮은... 
저 땅바닥이 아니라 지하 수 십 미터 밑으로 그냥 삼켜버렸습니다. 
여러분 이게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높은 데로 올라가려고 하면, 하나님이 땅의 입을 열어서 그들을 삼키게 하십니다. 
고라 일당이 어디까지 떨어졌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높아지려고 해서 안됩니다. 
특별히 가장 낮은 자리에서 자신을 비우고, 그 빈자리에 성령께서 임하시도록 해야 됩니다.

3) 광야에서 하나님을 원망하는 자들
민20:3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도다'

'백성이 모세와 다투어 말하여 이르되' 
백성들이 모세와 왜 다투었을까요? 물이 없어서 그랬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하였다'
이는 10정탐꾼의 불신앙적 보고 이후,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서, 그 당시 20세 이상이던 구세대가 지난 37년간 광야에서 
죽어가던 상황을 가리킵니다. 지금은 광야행진 거의 말기죠.

진심은 아니에요. 죽고 싶다는 거 진심인 거 봤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모세의 리더십과, 물이 없음을 허락하신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거든요. 
이때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셨습니까? 

높아지려고 하는 이들에게, 계속해서 끊임없이 원망하는 이들에게 불뱀을 보냅니다. 21:6
독사죠. 독사가 물어서 독이 온몸에 퍼지게 하십니다. 이게 하나님의 심판의 방법입니다. 
높아지려고 하는 자들에게 주신 무서운 심판입니다. 

그래서 요12:24절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이게 십자가의 법칙이고요, 예수님이 하신 일 아닙니까? 

가정에서도 누군가가 한 알의 밀알처럼 죽어서 희생하면, 거기에 열매가 맺히고 
교회도 마찬가지고, 일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의 법칙도 그래요. 일터 직장에서 
저마다 자기 시간, 자기 건강, 자기 권리를 계속해서 주장하면 
그 공동체의 꼴이 제대로 돌아갑니까? 안 됩니다. 누군가가 희생하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희생하고 헌신하는 사람, 썩어지고 죽어지는 사람이 있어야 됩니다. 

요즘은 하도 법이 이상해져서 사람들이 '법대로 하라'고 하면, 이게 참 웃긴 게
집합으로 따지면 A집합, B집합, C집합이 있으면, 
A와 B의 교집합, B와 C의 교집합, C와 A의 교집합, ABC 3개의 교집합이 각각 있잖아요. 

그러면 ABC가 다같이 열심히만 하면, 가장 먼저 ABC 교집합이 제일 먼저 차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공통부분은 '이건 B가 하겠지, 이건 C가 하겠지, 이건 A가 하겠지' 
이러니까 자기 건 다 채워지는데, 그 교집합이 안 채워진다고요. 
모두의 일은 누구의 일도 아닙니다. 이런 세상이 되고 말았어요. 

그러니까 ABC 중에 아무도 안 죽고, 아무도 안 썩은 거죠. 
교회도 마찬가지죠. 그러면 교회가 되겠습니까? 가정이 됩니까? 회사가 됩니까? 
산업이 되겠습니까? 안 되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셔서 '나는 하나님의 아들인데' 내 위치가 있잖아요. 
당신의 위치가 하나님의 아들, 지존자 아닙니까? 
지존자로서의 위치와 그 자리를 지키려고 했으면, 우리는 구원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한 알의 밀알이 되어서, 그냥 사람처럼 낮아지시고 완전히 죽어버렸기 때문에 
그 희생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 받았잖아요. 

세상의 법칙은 어떤 식으로 돌아가든지.. 그건 우리가 상관할 바 아니에요. 
세상은 다 이기적이니까.. 세상 사람들은 전부 다 자기 좋은 대로 사니까요. 

그런데 이 세상의 이기심이 교회에까지 들어와서, 교회를 세속화시킨다고요. 
교회에서도 자기 권리를 자꾸 주장하고, 교회에서도 자꾸 자기 위치를 주장하고, 
그러면 아무도 희생하려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몸으로 살아내야 합니다.
만약 십자가를 머리로만 알고, 삶은 세상 논리, 이기심을 따라 살면.. 그러면 교회가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살면 안돼요.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시고 수고하라고 하신 일에, 기꺼이 희생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 희생(십자가)의 자리에서 씨앗이 떨어져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겁니다. 
죽지 않고 어떻게 열매가 됩니까? 

바울은 그걸 지속적으로 계속해서 강조합니다. 그러나 사탄은 계속 반대로 얘기하죠. 
우리에게 손해 의식을 자꾸 줍니다. '네가 미쳤냐? 너 왜 그러냐? 넌 돈이 안 아깝냐? 
넌 시간이 아깝지 않냐? 넌 집에 가서도 손에 물 묻히지 않고 사는데, 
교회에서 이게 웬일이냐? 하지 마라! 너 주위를 둘러봐라 누가 하느냐?' 이러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그 사탄의 속삭임에 내가 은혜 받는 거예요. '그렇지...' 
그래서 그게 원망이 되고, 불평이 되고... 
그게 출애굽할 때 불평했던 이스라엘 공동체와 다를 게 뭐가 있습니까? 똑같지요. 

우린 그 반대로 행해야죠. '우리가 조금 더 희생하자.. 우리가 조금 더 손해보자.. 
우리가 조금만 더 봉사해보자.. 내가 조금 더 수고하자.. 
예수님처럼 내가 조금 더 헌신하고 그리고 그리고 남을 좀 더 섬겨주자' 
그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그게 자꾸 번져가야 그게 '되는 집안'입니다. 
집이나, 가정이나, 직장이나, 교회나, 이 나라나 다 마찬가지 아닙니까!

◑13:5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이게 오늘 설교의 핵심인데요. 

'시험하다'는 페이라조 라는 헬라어를 썼는데요. 
이 말은 '본질을 알기 위해 테스트'하는 겁니다. 이런 거죠. 

어떤 우주비행사가 화성에 가서 광물을 하나를 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이 광물이 도대체 뭔지를 몰라요. 그래서 이걸 가지고 이렇게도 시험해보고, 
저렇게도 시험해보고, 이렇게도 테스트해보고... 저렇게도 해보는 거예요. 
그게 페이라조, 테스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믿음이 진짜 믿음인지 가짜 믿음인지, 
내가 갖고 있는 믿음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이렇게도 저렇게도 계속해서 테스트해보라는 뜻입니다.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확증하다'는 도키마조 인데, 
시험을 거쳐서 '아 이게 진짜입니다, 아닙니다. 이거는 가짜입니다' 승인 확증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 믿음이 어떻게 해야 됩니까? 

페일라조(테스트, 시험)하고, 도키마조(확증) 해서, 
즉 진짜 믿음으로 확증받아서 '하나님 직인' 도장이 딱 찍혀야 되잖아요. 

그걸 항상 내가 달아보고 시험해야 됩니다. *페이라조
시험한 다음에는 확증해야 됩니다. *도키마조
 
페이라조(시험)했는데, 가짜라면 정신 바짝 차려야 되는 거예요. 
근데 페이라조(시험) 해 보고 난 다음에 도키마조(확증) 도장을 딱 찍어줍니다. 진짜라고! 
그러면 뿌듯한 거예요. 

이제 여러분은 '내가 믿음 안에 있는지' 뭐로 확정합니까? 
우리가 믿음이 있다/ 믿음이 없다. 
나는 믿음이 크다, 믿음이 괜찮다를 뭐로 확인(확증)합니까? 

우리가 이런 말을 자주 하잖아요. 
'저 분은 믿음이 참 좋아.. 저분은 믿음이 참 순수해.. 
저분은 믿음이 별로야.. 저분은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믿음이 없어...' 

그 렇게 말하는 근거가 뭐예요? 기준이 뭐예요?  몇 가지를 얘기해 볼게요. 
-일단 공예배에 빠지지 않는다. 
-새벽기도회에 열심히 나온다. 왜냐하면 새벽기도는 하기 어려운 거거든요. 
-교회 봉사를 열심히 한다. 
-또 헌금생활을 열심히 한다.
-남들에게 험한 말을 하지 않는다. 고운 말을 쓴다... 등등입니다. 그렇죠? 

근데 사실 그게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가를 시험하고 확증하는 근거로 삼기에는
너무 가볍지 않으세요? 만약 그거라면, 

'저 사람은 3대째 신앙인이고, 아버지가 목사님이야, 
저 분은 3대째 장로야, 저 분의 형제들이 다 장로님이야' 
그건 다 드러난 외형일 뿐입니다. 

▲여러분, 진짜 믿음이 있고, 없고를 
성경을 통해서 여러 가지 말할 수 있지만, 딱 세 가지만 말해봅시다. 

첫째, 아브라함을 우리가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뭡니까? 
아브라함이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게, 창11장 끝부터 12장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를 거쳐서, 하란 땅을 거쳐서, 가나안으로 불렀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합니까?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으로 갑니다.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갔다' 그랬어요. 답사하고 간 게 아니에요. 

창12:4절을 보면 '이에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갔고' 그랬어요. 
그래서 믿음이라는 건, 내가 믿음 안에 있는가/ 없는가 하는 건, 
'말씀을 따라가는가/ 그렇지 않는가를 보면 됩니다.

'말씀을 따라간다'의 반대말이 뭘까요? 
환경과 상황을 따라가는 겁니다.

자, 아브라함의 상황을 한번 보세요. 그때가 75세입니다. 그때 아브라함의 상황을 보세요. 
아브라함이 175세까지 살았거든요. 그런데 75세면, 얼마를 산 겁니까? 
그러면 아브라함은, 175세 중에 절반도 덜 되는 인생을 산 겁니다. 

오늘날 우리가 100세 시대라고 하면, 요즘으로 치면 한 45~46세 정도를 산 거예요. 
요즘 기준으로 보면 40대 중반입니다. 
그런데 그때, 자기 고향, 친척, 아버지 집, 자기 산업을 다 내려놓았습니다. 
인솔해야 될 가정도 있습니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조카 롯도 있습니다. 

그런데 고대 시대에 자기 집,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서 낯선 곳으로 간다는 건 
목숨을 건 여정입니다. 아브라함은 그걸 선택했어요. 상황보다 말씀을 따라갔습니다. 

따라갔으면 뭔가 보상이 있어야 되는데... 아직 자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자녀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하세요. 
하늘의 뭇 별을 보여주시면서 '네 자손이 저 하늘의 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다'

아브라함이 뭐라고 그럽니까? 
'아브라함이 이를 믿으니 하나님이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고 했습니다. 창15:5~6

하나님의 말씀 따라 왔는데 자식이 없다니까요. 
자식처럼 여겼던 롯은 이미 소돔땅으로 가버렸어요. 

상황은 엉망진창이에요. 그런데 하나님이 뭇별을 보여주시면서 
어쩌면 황당한 말씀을 하신 거잖아요. '하나도 없는데 무슨 하늘의 별이에요? 
무슨 바다의 모래예요? 하나나 제대로 주시고나서 얘기하지지... '
그런데 아브라함이 '이를 믿었다' 그랬어요. 

상황을 보지 않고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그게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 거예요. 
그걸 우리가 매 순간 나를 달아 봐야(재 봐야)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항상 상황과 믿음이 부딪힐 때, 뭘 선택합니까? 
상황 때문에 말씀을 버립니다. 상황이 너무 무게가 크니까요. 무서우니까요. 

그런데 '너희가 믿음 안에 있는지 너희 자신을 시험하라' 
이 말은 항상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테스트 하시거든요. 

'말씀과 상황이 부딪힐 때, 그 상황이 아니라, 
전적인 하나님의 말씀만 붙잡고 갈 수 있는가?' 하나님은 그것을 확인하십니다. 

2) 두 번째는 '정죄감 속에 살고 있는가? 자유함 속에 살고 있는가?'를 보셔야 돼요. 

롬8:1~2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다 그랬어요. 
과거에 지은 죄가 예수 안에서 사라지는 거거든요.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자, 우리가 믿음 안에 있다는 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겁니다. 
요셉의 형제들이 다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책감 가운데 삽니다.
아버지 야곱이 죽은 후에. 

다윗도 다 회개하고 용서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책감 때문에 살면서 
자녀들 교육을 제대로 못하는 거예요. 
그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않아서 그런 겁니다. 내가 믿음 안에 있지 않아서... 

여전히 내 속에 죄책감과 정죄감이 있으면, 그건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 게 아니에요. 
자유해야지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 그랬는데 
왜 자꾸 죄책감 가운데 살면서 인생을 허비합니까? 
그걸 우리가 달아보는 거예요. 확인하는 겁니다. 사탄은 계속 그런 식으로 우리를 괴롭힙니다. 

3) 세 번째, 한계를 극복하는 믿음이 중요해요. 
나는 내 한계를 극복하고 있는가요? 

눅8:49~50 '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하거늘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위 눅8장 이야기는 이야기 속에 또 다른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가 자기 딸이 병들어서 죽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딸을 고치시러, 그의 집으로 가시는 길입니다.

그때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대죠. 
예수님이 이 여인과 함께 대화를 나눕니다. 거기서 지체되고,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여인의 사연을 듣습니다. 이 여인이 자기 간증을 합니다. 
그러면 그 상황에서 가장 괴롭고, 가장 견디기 힘든 사람, 
그래서 발을 동동 구르는 사람은 회당장 야이로입니다. 

어차피 이 여인은 병에서 낳았는데, 예수님이 빨리 우리 집에 가서 내 딸을 고쳐줘야 되는데,
예수님이 시간을 계속 지체하고 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하인이 찾아 온 거예요. 
'선생님을 괴롭게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끝난 거죠. 그렇죠? 끝났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이 회당장 야이로의 마음을 아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눅8:50

우리의 두려움은 언제 생깁니까? 우리의 믿음이 언제 박살납니까? 
그래도 내가 믿음 좀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내 믿음이 언제 깨지고 박살나고 처참하게 무너지느냐? 
내가 정한 시간이 넘어버렸을 때 깨집니다. 

'나는 이 시간 안에 이거 반드시 되어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이 시간이 넘어가면... 햇수가 지나가면... 그러면 그때는 완전히 무너져 내립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 안에 있는가요? 이렇게 나를 시험하는 건, 
'이 한계를 넘어갈 수 있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주님을 신뢰할 수 있는가?'
의 시험입니다.

이걸 극복하는 것은 큰 믿음이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여러분 이 기준으로 우리가 항상 나를 바라보는 겁니다. 

-새벽기도 나오는가 
-헌금생활 열심히 하는가 
-봉사생활 열심히 하는가? 뭐 이런 것도 중요한데요. 본질은 아니에요. 

그보다 더 귀한 본질은, 위 3가지가 되면,
그 다음은 신앙생활이 다 됩니다. 믿음이 있다고 확증되는 것입니다.

시17:3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시고 밤에 내게 오시어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주께서 내 마음을 시험하신다' 그랬습니다. 어떻게 하세요? 

'밤에 내게 오셔서 나를 감찰하셨으나' 
여기서 '밤'이라는 게 진짜 물리적인 밤을 얘기할까요? 아닙니다. 
불시에 불쑥 찾아오시는 거예요. 불시에 주께서 내 마음을 찾아오셔서 나를 시험하십니다. 

'이 사람이 진실로 믿음 안에 있는가'를,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불시에 시험하십니다. 
상황을 던져주고요. 그 상황을 말씀과 합치시키고 있는지? 
상황보다 말씀을 붙잡고 있는지? 우리를 테스트 하십니다. 아브라함처럼!

또 한계 상황을 주시고, 그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가를... 우리를 테스트 하십니다. 
사탄이 계속 우리에게 정죄감을 주는데, 그것도 테스트의 수단이죠. 그런데 어떻습니까? 

'흠을 찾지 못하셨사오니 내가 결심하고 입으로 범죄하지 아니하리이다'
이렇게 되면 얼마나 좋아요. 

불시에 찾아와서 나를 막 시험하는데, 
내가 도키마저(확증) 도장을 딱 받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이상 무!' 이 사람의 믿음은 검증되었음, 확증되었음!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내 믿음을 이렇게 확증해야 됩니다. 
1년에 52주 출석하는 것으로 확증하는 건, 교회학교 어린 학생들이 하는 일이고, 
우리는 이런 식으로 내 믿음을 도키마조- 확증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바울은 그 수준 높은 믿음의 확증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13:8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

'우리'가 누굽니까? 바울과 함께 일하는 복음전도자들이죠.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성경에서 '진리'라는 단어가 나오면, 뭐로 바꿔도 된다고요? 
네 '예수 그리스도!'  또는 '말씀'으로 바꿔도 됩니다.

진리는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똑같은 거잖아요. 
과거에 이랬다가, 오늘은 저랬다가, 내일은 또 달라지는 게 ... 그건 진리가 아니잖아요. 

진리는 언제나 똑같은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 있도다' 그게 진리잖아요. 
변함없는 말씀, 변함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진리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말씀을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말씀을 위할 뿐이니' 이 말씀은
즉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할 뿐이니' 
이런 말입니다. 이게 바울의 사역의 방향입니다. 

우리가 목회를 하는 것,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 
이건 나를 위한 게 아닙니다. 
내 이름을 유명하게 만들고, 내 이름을 온 천하만국에 떨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는 사역이다... 그 말씀이에요. 

◑13:9 '우리가 약할 때에 너희가 강한 것을 기뻐하고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 곧 너희가 온전하게 되는 것이라'

그렇습니다. 바울이 진짜 바랬던 건 성도의 온전함입니다. 성도의 온전함

◑13:10 '그러므로 내가 떠나 있을 때에 이렇게 쓰는 것은 대면할 때에 주께서 너희를 
넘어뜨리려 하지 않고, 세우려 하여, 내게 주신 그 권한을 따라 엄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먼저 준비하도록 함이라' 
바울이 이렇게 글(편지)로 먼저 얘기하는 건, '너희가 먼저 회개하고 준비해라. 
내가 가면, 지난번 두 번째 방문 때처럼 얼굴 붉히는 일이 없도록 해라' 그런 뜻이죠. 

(공동번역) '내가 여러분에게 가게 될 때에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권위를 너무 가혹하게 
쓰지 않아도 되기 위해서 내가 떨어져 있는 동안에 이렇게 미리 편지를 써 보냅니다. 
그 권위는 여러분을 망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키워주라고 주신 것입니다.'

◑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2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게 바울의 마지막 인사죠. 그런데 좀 특별한 기도가 있습니다. 
13절을 보면, 지금 우리의 축도하고 형식이 똑같아요. 

 

: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여기서 꼭 들어가는 게 뭡니까? 예수님, 하나님, 성령님 삼위일체가 들어가고, 
예수 그리스도는.. 은혜를 
하나님은.. 사랑을 
성령은.. 교통을 

저는 옛날에 어릴 때 목사님께서 축도하실 때 '교통' 얘기해가지고, 
저는 교통 traffic 이라고 알아들었어요. 도로에 나가면 교통이 있잖아요. 

'왜 자꾸 성령은 교통 트레픽을 얘기할까?' 
근데 그걸 묻지를 못했어요. 혼날까봐. 
아무도 제게 안 가르쳐주는데, 제가 묻지도 못했어요. 

 

그래서 성경이 어려운 거예요. 이게 말이 너무 어렵잖아요. 
집에 가셔서 혹시 모르니까 애들한테 좀 가르쳐주세요.
'교통'은 '교제'를 의미하는 코이노니아 라고요.

이게 중요한 게, 은혜는 내가 주는 겁니까? 내가 받는 겁니까? 내가 받는 거잖아요. 
예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게 은혜입니다. 
사랑은 내가 주는 겁니까? 하나님께로부터 내가 받는 겁니까? 받는 거예요. 

그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로부터 은혜를 받았어요.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어요. 그러면 우리는 해야 될 일이 뭡니까? 
그걸 가지고 교제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성도들끼리는 은혜를 받았으니까 
받은 은혜를 나누는 거고요. 사랑을 받았으니까 받은 사랑을 나누는 거예요. 
그게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고요.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서로 간의 소통과 교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 여전도회나 남선교회를 한번 보세요. 교회 공동체를 보세요. 
여전도회의 또래 자매님들을 보면, 나이만 비슷하지 각자의 개성이 너무 달라요. 
너무 다르잖아요. 성격 다르지, 살아온 환경 다르지, 생각하는 거 다르지, 
가정 환경 다르지... 다 달라요. 십인십색 이예요.

그런데 어떻게 거기에서 교제가 일어나느냐? 
성령께서 일하시니까! 교제하게 하시니까!
교회가 참 특별한 곳인 것이, 교회만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교제가 있다는 건 그건 기적입니다. 
왜 기적이냐? 성령께서 일하시니까요. 

그래서 우리는 이 바울의 마지막 기도, 이 축복 기도를 들을 때는, 항상 우린 결단해야 됩니다. 
은혜와 사랑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주시는 거니까, 그럼 우리가 받을 그릇을 준비하면 돼요. 
그런데 우리는 그 축복기도만 받고 끝내면 안 돼요. 
은혜도 이웃과 나누고, 사랑도 나누고, 베풀어야 됩니다. 
바울이 그걸 얘기하고 싶은 겁니다. 그래서 코이노니아를 얘기했어요. 

'성령의 교통하심'을 받는 건, 절대로 그냥 네 혼자 가져가지 마라. 나누어라. 베풀어라! 
'성령의 교제'가 그런 뜻입니다.

구약에 아론의 축복기도가 있습니다. 민6:22~27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우리가 귀가 아프도록 들었습니다. 마르고 닳도록 들었습니다. 
구약의 복(바라크)은 무릎 꿇음입니다. 
구약의 복은, 지금 여기 아론의 축복에 보면, '여호와의 얼굴'이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오죠. 
이건 구약의 전통입니다. 

아론의 축복, 대제사장 아론의 축복기도에 여호와의 얼굴이 나오고 
이걸 다윗이 받아서, 다윗의 시편에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여호와의 얼굴은 여호와의 손과 상호 보완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손은 권능의 손입니다. '능력의 편 팔과 오른손' 이런 말 들어보셨잖아요. 
그 손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고 부귀, 영화, 권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아론의 축복에는 하나님의 손이라는 말은 일절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복이 없어도 됩니까? 우리는 사실 그거를 기대하잖아요. 

그런데 여기는 아론의 축복기도에는 '여호와의 얼굴'만 있습니다. 
그럼 이게 뭘까요? 
'하나님의 임재가 너희에게 임할 것이니, 너희는 그 앞에서 무릎 꿇어라'는 뜻입니다. 
그게 복이 되려면 하나님 앞에 무릎 꿇는 것,

그래서 구약은 항상 이 복을 얘기해요
복은 무릎 꿇음이고, 여호와의 얼굴은 하나님의 존재입니다. 

그 다음 이어지는 건 다 부차적인 거예요. 다 부차적인 거예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겁니다. 이거 잘 기억하십시오. 

이제 우리 고린도후서 말씀을 다 마무리했습니다. 
사실 고린도전서보다 후서가 조금 더 접근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하나하나 잘 살펴보면, 훨씬 더 깊이가 있고, 훨씬 더 은혜가 됩니다. 
한번 시간 나실 때마다 고린도후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보시면 좋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

 

주1)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보내기 전에, 고린도를 몇 번 방문했습니까? 
1) 첫번째 방문
먼저는, 바울이 2차 선교 여행 때 처음으로 갔죠. 가서 고린도 교회를 개척했죠.
그게 사도행전 18장에 나오거든요. 거기서 1년 6개월 머물렀어요. 행18:11

2) 두번째 방문
고후2:1 '내가 다시는 너희에게 근심 중에 나아가지 아니하기로 스스로 결심하였노니'

이 말을 미루어보면,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갔다는 말입니다.
왜 갔을까요? 문제 해결을 위해서 간 거예요. 

자신의 사도권을 비방하는 사람들이 교회를 어지럽히니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갔는데... 결국 해결을 못하고 돌아온 거예요.

그래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3rd 편지를 써서, 디도에게 준 거거든요. 
그래서 바울이 고린도후서를 쓰기 전에, 이미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문제가 해결됐잖아요. *디도의 옴으로

3) 세 번째 방문
그 다음 바울이 결정한게 이겁니다. 
고후13:1절 '내가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리니...' 

이 세번째 방문 대한 더 자세한 사항은, 성경에 밝혀진 게 없습니다.

그렇지만 갔다고 보는 거죠.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세 번 방문했는데, 그 외에 세 번 방문한 곳은, 고린도교회 밖에 없죠.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뜨겁게 사랑했다는 거죠. 
4번이나 편지를 쓰고, 세 번 방문한 교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