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1장 당신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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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눈물이 필요합니다 애1:1~10, 눅19:41~44 2010.06.06.
◑도입 /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눈물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는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고,
그때 그때마다 애국애족의 눈물을 흘린 사람들로 인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없으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지 아세요.
우리는 전쟁세대가 아니라서 잘 모릅니다. 다만 전쟁후 직후 세대라서 가난이 무엇인가는
조금은 압니다. 지금은 정말 감사해야 하지요.
물론 뼈아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내용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새겨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를 보면 고난의 역사요, 눈물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우리는 외세의 침략을 많이 받았고,
그때 그때마다 애국애족의 눈물을 흘린 사람들로 인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나라가 없으면 얼마나 비참한 삶을 살게 되는지 아세요.
우리는 전쟁세대가 아니라서 잘 모릅니다. 다만 전쟁후 직후 세대라서
가난이 무엇인가는 조금은 압니다. 지금은 정말 감사해야 하지요.
물론 뼈아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내용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새겨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살을 에이듯이 추운 날이다.
옷 없는 병졸들이 움추리고 앉아 떨고 있다.
군량은 바닥났다. 군량은 오지 않았다.』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때 쓴 <난중일기> 1594년 1월20일자에 기록된 일기내용입니다.
유성룡 선생이 쓴 <징비록>에 보면,
『부자(父子)가 서로 잡아먹고, 부부(夫婦)가 서로 잡아먹었다. 뼈다귀를 길에 내버렸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굶어죽은 송장이 길에 널렸다. 한 사람이 쓰러지면 백성들이 덤벼들어 그 살을 뜯어 먹었다.
뜯어먹은 자들도 머지않아 죽었다.』
이 내용은 임진왜란 때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가 쓴 <난중잡록>에 기록된 내용입니다.
이런 일은 없어야 하지 않습니까? 임진왜란 무렵 조선 백성들의 참상은
땅 위의 지옥을 이루었음을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우리의 역사와 일맥상통하는 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도 전쟁의 역사였습니다. 항상 작은 민족국가로서
늘 주위에는 강대국들로 에워싸여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보면 지금도 강대국들의 주위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동쪽으로는 일본이, 서쪽으로는 중국 대륙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남쪽으로는 넓은 태평양 바다가 우리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과 우리나라의 여러 가지 공통점 가운데 하나가,
아직도 이스라엘이나 우리나라가 건재하여
세계속에 영향력을 끼치며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믿는 자들로서 성경 속에 나타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다스림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읽은 예레미야애가는 예레미야를 통해서 쓴 말씀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가리켜 눈물의 선지자로 일컫습니다.
예레미야는 자기를 위하여 눈물을 흘린 것이 아니라
조국을 위해서 눈물을 흘린 선지자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왜, 무엇 때문에 울었습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주전586년, 남유다가 망할 때
예루살렘이 무너진 장면의 모습을 보고, 비통한 마음으로 기록한 것이 예레미야애가서입니다.
예레미야는 나라가 망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린 것입니다.
그래서 1절 시작이 “슬프다 이 성이여!”입니다.
여기서 ‘이 성이여!’는 예루살렘을 말합니다.
◑그러면 예루살렘이 망한 모습이 어떠했기에 그렇게도 슬퍼했는지 살펴봅시다.
▲첫째, 전쟁을 통하여 인구가 줄었습니다.
1절에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사람이 왜 줄었을까요? 전쟁을 통해서 전사하고 포로로 잡혀갔기 때문입니다.
전쟁을 통한 모습을 5-7절에 보다 자세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5b절에 “어린 자녀들이 대적에게 사로잡혔도다”고 했습니다. 포로로 많이 잡혀갔습니다.
6b절에 “그의 지도자들은 꼴을 찾지 못한 사슴들처럼 뒤쫓는 자 앞에서 힘없이 달아났도다”
아무 대항도 하지 못하고 도망하기에 급급했다는 것입니다.
7절 “예루살렘이 환난과 유리하는 고통을 당하는 날에 옛날의 모든 즐거움을 기억하였음이여
그의 백성이 대적의 손에 넘어졌으나 그를 돕는 자가 없었고 대적들은 그의 멸망을 비웃는다”
단순히 인구가 준 것은 그렇다 할지라도 문제는 4절입니다.
4절 “시온의 도로들이 슬퍼함이여 절기를 지키려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
모든 성문들이 적막하며 제사장들이 탄식하며 처녀들이 근심하며”
시온의 도로는 예루살렘의 성전으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절기를 지키러 나아가는 자가 없다’고 하신 것은 :4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남자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사장들이 탄식하고 처녀들이 근심한다고 했습니다. 왜 처녀들이 그렇습니까?
남자들이 죽고 젊은 총각들이 다 죽고 붙잡혀 가다 보니
결혼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게 된 처녀들에게는 근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즘 같으면 ‘결혼 안하면 되지, 꼭 결혼을 해야 하나’라고 할지 모르지만
당시 이스라엘 처녀들은 그것이 걱정이었습니다.
오늘날도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문제가 되고 있지 않습니까?
▲둘째, 주권을 상실한 채 비참하게 종노릇 한 보습을 보았습니다.
1b절에 보면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전에는 열방 중에 공주였던 자가 이제는 강제 노동을 하는 자가 되었도다”
남편을 잃은 아내는 힘이 없어집니다. 마찬가지로 나라를 잃었으니
백성들은 자연적으로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공주같이 일하던 자들이 강제 노동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가슴아픈 일입니까?
우리가 나라를 잃으면 주권을 상실하고 우리는 종속되어 그들의 법에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나라를 잘 지켜야 합니다. 국가가 우선이어야 합니다.
나라없는 국민은 힘이 없습니다. 우리가 가난하게 살던 시절만 해도
우리가 해외에 나가면 알아주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국력이 신장해서 어디를 가서 외국 사람을 만나도 떳떳하게
"south korea"라고 하면 알아줍니다. 나라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나라를 사랑해야 합니다. 나라를 든든히 세워가야 합니다. 국력을 신장시켜야 합니다.
여러분 개인적으로도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가문이나 가정이 남달리 부요하거나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는 부모를 둔 사람은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이 들어갑니다.
기죽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라가 선진국이면 세계 어느 나라를 가더라도 당당합니다.
그런데 나라를 잃으면 권리가 상실됩니다. 이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마라톤 손기정 선수가 올림픽 경기에서 일장기를 달고 1등으로 들어올 때
그 가슴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나라 없는 서러움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그래서 시상대에서 국기가 올라갈 때 일장기가 올라가기 때문에 손기정 선수는
고개를 숙인채 비통에 잠겨있었습니다. 이것이 국권을 상실한 한 국민이 주권을 잃어버린 모습을
그대로 반영하는 모습니다.
예레미야가 바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모습을 보고 통곡을 했던 것입니다.
▲셋째, 위로자가 없고 배신자만 남았습니다.
우선 2절을 보세요. “밤에는 슬피 우니 눈물이 뺨에 흐름이여 사랑하던 자들 중에
그에게 위로하는 자가 없고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들이 되었도다”
*2절을, 주석서는 애굽등 주변국들이 배반해서 도와주지 않았다고 나오나,
이 설교는 남유다 자국민 중에서 배반자가 있었다고 해석하는데,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포위되었을 때는 그게 어려워도, 패망하고 난 직후에, 적편에 서서 부역한 자도 있었겠죠.
9절에도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위로하는 자가 없었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친구들도 다 배반하여 원수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입니까?
그래도 같이 걱정하고, 같이 울고, 같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래도 위로가 되고 힘이 됩니다.
그런데 같이 울어주어야 할 친구들, 가까운 사람들조차도 다 등을 돌리고 가버렸습니다.
(유다의 지도자 중에 일부가) 야합한 것입니다.
자신들이 우선 살고보자는 식으로 국가를 배신하고 강대국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을 때도 지도자들 중에나 백성들 중에서도
일본의 앞잡이 역학을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야 죽든 말든 자기들만 살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선지자가 볼 때 울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넷째, 재물, 아니 보물을 잃었습니다.
10절에 “대적이 손을 펴서 그의 모든 보물들을 빼앗았나이다”
사실 나라를 잃으면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은금 패물들 모두, 그리고 지하에 묻혀있는
모든 보물까지도 자신의 것이 되지 않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 지하자원과 삼림자원까지 무수히 가져갔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은금패물이야 빼앗겨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잃지 말아야 할 가장 큰 보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우리나라가 일본의 지배를 받았을 때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가슴 아픈 일은
신앙의 자유를 빼앗긴 것입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제대지 못하도록 신사참배를 강요했고
그것을 거절했던 목사님이나 성도들을 순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슬퍼한 이유 중의 하나가 보물을 빼앗긴 것이라고 했는데
그 보물 중에 가장 큰 보물이 무엇인가 하면 성전입니다.
그래서 10b절에 보면 “주께서 이미 이방인들을 막아 주의 성회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하신 그 성소에 그들이 들어간 것을 예루살렘이 보았나이다” 고 했습니다.
이방인들조차도 들어갈 수 없는 성소에 이스라엘을 공격한 사람들이 짓밟았다는 것입니다.
왜 들어갔겠습니까? 성소 안에 혹시라도 있을 보물을 탈취하기 위한 것입니다.
예레미야52:17-20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갈대아 사람은 또 여호와의 성전의 두 놋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 성전의 놋대야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갔고
가마들과 부삽들과 부집게들과 주발들과 숟가락들과 섬길 때에 쓰는 모든 놋그릇을 다 가져갔고
사령관은 잔들과 화로들과 주발들과 솥들과 촛대들과 숟가락들과 바리들
곧 금으로 만든 물건의 금과 은으로 만든 물건의 은을 가져갔더라
솔로몬 왕이 여호와의 성전을 위하여 만든 두 기둥과 한 바다와 그 받침 아래에 있는
열두 놋 소 곧 이 모든 기구의 놋 무게는 헤아릴 수 없었더라” 렘52:17-20
물론 이렇게 보물을 탈취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갔지만
성도들도 성소에 함부로 들어갈 수 없고 제사장만 들어갈 수 있던 성소에
이방인들의 발에 짓밟혔다는 것은 수치중의 수치가 아닐 수 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이 짓밟힌 것은 가장 큰 보물을 잃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예배가 드려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배를 드릴 수 없는 성전은 성전의 가치를 잃은 것입니다.
그래서 '절기를 지키려 (성전에) 나아가는 사람이 없음이로다'라고 했죠. :4
△백성들의 삶이 이정도 되면 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선지자인 예레미야는 참아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이스라엘을 두고서
밤새도록 통곡하며 기도하며 슬퍼했던 것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 이렇게 망하게 되었습니까?
그 원인을 예레미야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5절 “그의 대적들이 머리가 되고 그의 원수들이 형통함은 그의 죄가 많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를 곤고하게 하셨음이라”
죄가 많음으로 여호와께서 그렇게 망하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8절에서는 ‘예루살렘이 크게 범죄 함으로 조소거리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 문제가 무엇인가 하면, 죄를 범하고 있으면서도
나중에 그것으로 인해 심판받을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우둔함이었습니다.
9절 “그의 더러운 것이 그의 옷깃에 묻어 있으나 그의 나중을 생각하지 아니함이여
그러므로 놀랍도록 낮아져도 그를 위로할 자가 없도다”
‘더러운 것’은 죄악을 말합니다. ‘옷에 묻었다’는 것은 죄를 짓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은
결국 나중에 죄로 말미암아 닥쳐올 심판을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런 미련한 예루살렘은 결국 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런 이스라엘의 총체적인 패망을 두고 예레미야 선지자가 결론적으로 표현한 것이 6절입니다.
“딸 시온의 모든 영광이 떠나감이여” 영광이 떠났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망하는 것입니다.
△사무엘상4장에 보면 '이가봇'
이가봇의 의미는 ‘영광이 떠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의 시아버지와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대제사장과 제사장이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망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항상 머물러 있는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항상 머물러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항상 머물러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읽은 눅19장에서는 대제사장이며 선지자시며 왕으로 오셨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다고 했습니다. 우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눅19: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숨겨진 비밀이 무엇인가 하면, 앞으로 예루살렘성은 원수들이 에워싸고 자녀들을 메어치며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질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다 아셨기 때문에 우셨던 것입니다.
이 시기가 언제 도래되었습니까? 주후70년에 로마 디투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이 완전히 정복당하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A.D 70년경 로마 장군 티투스에 의해 그 성전이 훼파되며
그 후로 유대인들은 영영 건물 성전을 잃어버린 민족이 되었습니다.
성전이 무너져 내림과 함께 그들은 유리하는 민족이 되었고
온 세상을 떠돌며 그리스도를 처형하라고 목소리 높였던 그 피값을
그 자손들이 받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전 된 우리를 허실 때, 그것이 더러움의 결과였다면,
우리는 영광을 잃고 비참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여생을 정리해야할 것입니다.
지금의 성전은 어디에 있습니까? 물론 예배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성전이 있습니다.
그것도 곧 여러분 자신의 마음, 성령이 여러분의 영을 지배하는 상태입니다.
고린도전서3:16절 말씀에 보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영을 보신 곳이 곧 성전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이 모인 교회가 성전입니다.
지금 애1장에서 '예루살렘 성전의 훼파'를 살피는 중입니다.
우리 각자의 성전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2:20-22절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적용 / 오늘 날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합니까? 무엇을 보고 울어야 합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환경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기업을 하는 사람들은 기업환경이 좋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물론 맞습니다.
기업환경이 좋아야 기업을 잘 하게 되고 기업을 많이 할 때에 경제적 부흥을 가져오고
소득이 높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소득이 높아진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오히려 우리의 삶의 질을 좋게 하기 보다는, 더 나쁘게 할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의 주거환경이 중요합니다.
보다 쾌적한 환경이 되려면 인공적으로 만든 것보다 하나님이 자연 그대로가 좋습니다.
그렇지만 이미 인간은 지구를 다 망가뜨렸습니다.
요즘 기업들도 이런 물리적 환경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클린 경제정책으로 오염을 줄이거나, 오염물질을 배출하지 않는 기업을 세우려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모두는 이미 자연을 훼손하는데 가담하고 하고 있습니다.
많으냐 적으냐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자연환경도 중요하지만 우리 자녀들의 교육환경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특히 학교 환경을 강조하면서 공부하기 좋은 환경을 만들겠다고 공약을 하고
교육감에 당선된 사람들도 많습니다. 학교 주위에 학생들의 정신건강을 해치는
유해환경들을 들어서지 못하게 합니다.
이런 물리적 환경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인간환경입니다.
여러분,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느냐 하는 것은
쾌적한 자연환경도 중요하지만, 근본적으로 인간환경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서로 돕고 돕는 관계로 살아가야 합니다.
협력하며 살아야 합니다. 혼자는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입니다.
오늘날 우리 인간사회가 어떻습니까? 인간관계가 좋습니까? 깊이 생각해 봅시다.
때로는 동물보다도 못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간환경이 좋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성경에 보면 종말의 때에는 사랑이 식어지고 무정해진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인간관계가 메말라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님은 늘 사랑을 강조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사랑해야 합니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의 관계만이 행복을 줄 수 있고,
삶의 가치를 높여줄 수 있습니다.
주거환경이나 자연환경이 아무리 좋아도, 인간관계(인간환경)가 좋지 않으면
그것은 지옥과 같습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지금까지의 환경도 다 중요하지만
이 모든 환경보다도 더 중요한 환경이 있습니다. 그것은 곧 “영적 환경”입니다.
영적환경에서 주의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집, 성전이 오염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전이 오염되면 하나님은 우리를 넘어뜨린다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3:16절 말씀에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내 안에는 하나님의 성령이 계신다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이 거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해서
하나님의 성전인 나를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거룩해야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영적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영적환경에는 무딘 감각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본문 애1장처럼, 영적 성전이 다 대적 마귀에게 훼파된 상태에 있으면서도,
심지어 성도들마저도, 기업환경, 주거환경, 자연환경, 인간환경만 부르짖습니다.
본문의 예레미야처럼 애통해 할 줄 모릅니다.
왜냐하면 시대의 탓으로 돌리기 때문입니다. ‘시대가 그러니까 할 수 없다’는 생각만 하지,
영적환경을 어떻게 하면 좋게 만들 것인가? 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예레미야가 운 것도, 예수님이 우신 것도 바로 영적인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곧 국가의 존폐와 관계되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기며,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말은 하지만
마음에 없는 위선된 신앙을 갖고 있었음을 안타까워하셨습니다.
결국 영적환경이 무너짐으로 인해 성전이 무너지게 되고,
성전을 무너지게 하려고 하니까 국가가 외세의 침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누구를 위하여 울어야 합니까? 무엇을 위하여 울어야 합니까?
대학에 떨어진 것, 취직하지 못한 것, 결혼하지 못한 것, 질병에 걸린 것 때문에 울어야 합니까?
물론 그것도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요소는 될 수 있지만
우리가 값진 눈물을 흘릴만한 것이 못됩니다.
진정 우리가 눈물을 흘려야 할 것은,
하나님께 범죄하고도 회개하지 못한 것에 대해 울어야 합니다.
성도들의 삶이 오염되고 영적환경이 열악해져서
백성들이 점점 영적으로 무디어지고,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하고
마귀의 도구 역할을 하면서도,
자신들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있다고 착각하는 자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그것이 곧 애국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영적 환경을 좋게 조성하지 못하면
결국 영적으로 병들어 영이 죽게 됩니다. 그럴 때에 우리에게서 무엇이 떠납니까?
예레미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떠난다고 했습니다. 1:6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면 인생 끝장이요, 교회의 쇠락이요, 나라가 망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애국자는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머리에 붉은 띠 두르고, 두 주먹 불끈 쥐고 ‘물러가라’ ‘바로하라’고 외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눈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특히 백성들이, 성도들이 말씀을 뒤로 하고 죄를 범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 지경에 이른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회개하는 마음으로 눈물 흘리며 기도할 수 있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교회는, 아니 한국교회는 지금 눈물로 기도해야 합니다.
정부나 여당이나 야당 할 것 없이 나라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이 이 나라의 주인이요, 주님이 이 교회의 머리이십니다.
교회도 하나요, 나라도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신 것을 감사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데 쓰임 받는 여러분과 우리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