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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개론6강 요한복음 1

LNCK 2025. 6. 27. 21:2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신약개론>

161005 「신약개론 6강 – 요한복음1」 - YouTube 정리


◈신약개론 6강 – 요한복음1            요4:46~54          2016.10.05.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
요한복음의 저자는 사도 요한이죠. 
예수님의 제자, 야고보의 형제입니다. 

'요한'이라는 이름은 예수님 시절에 굉장히 흔했던 이름입니다. 
우리가 아는 또 다른 요한이 있죠. 세례 요한이죠. *헬라어로 이오아네스 Ἰωάννης

예수님의 제자 요한과,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던 요한을 구별하기 위해서 
그 앞에 '세례'라는 이름을 붙여서 부릅니다. '세례요한, 또는 세례자 요한'

요한복음의 저자 사도 요한은, 그 형제가 야고보입니다. 세베데의 아들들이죠. 

요한의 형 야고보도,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와 구분해야 됩니다.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사도들 중에 가장 먼저 순교한 사람입니다. 행12장

참고로, 야고보 '이야코보스' 란  Ἰάκωβος
이름은, 구약의 야곱 (히브리어로 이야코브)' 에서 따온 헬라식 발음이죠.  יַעֲקֹב

야고보는 30세 가량 일찍 순교했지만, 
그 형의 수명을 동생 요한이 그대로 받아서 가장 오래 생존한 사람입니다.
계시록을 쓸 때가 90세 경이었고, 100세 가까이 에베소에서 살았던 것으로 알려집니다.
 
요한이 가장 오래 살면서 요한복음도 기록했고 
요한 1서, 2서, 3서도 기록했고 요한게시록도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굉장히 깊이 있는 사람이고 
이분이 쓴 복음서, 서신서, 특별히 게시록을 보면 
이분이 하나님의 게시를.. 직접적으로 참 깊이 있게 받았구나 하는 걸 우리가 알게 됩니다. 

▲요한의 변화를 한번 살펴볼 텐데 
마20장에 보면,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나와서 
'내 아들 야고보와 요한을, 주의 영광의 때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주십시오' 하고 그의 어머니 (살로메)가 청탁하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신학자들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는

예수님 어머니 마리아와는 형제이거나, 이복형제 간으로 봅니다.

어쨌든, '친척 찬스'를 쓴 것인지, 
사도 요한은, 이렇게 출세욕이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어머니 살로메가 아들들과 상의 없이, 자기 혼자 그렇게 청탁했다고 보기는 어렵죠.

또 눅9:49~56절에 보면, 요한을 소개하고 있는 두 가지 사건이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요한이 좀 편협되고, 불 같은 성질을 가진 사람 임을 알 수 있는데요.

'요한이 여짜오되 주여 어떤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와 함께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그가 우리 편이 아니라고, 귀신 쫓아내는 걸 금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50절에, '금하지 말라 너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너희를 위하는 자니라' 
이렇게 요한이 굉장히 편협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52절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시는 길에, 
사마리아의 어느 마을이 예수님 일행을 받아들이지 아니했습니다.
 
그러자 야고보와 요한이 '이를 보고 이르되 주여 우리가 불을 명하여 하늘로부터 내려 
저들을 멸하라 하기를 원하시나이까?' 
성격이 급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이 형제들의 별명이 '우레의 아들'이죠. sons of thunder
이런 얘기를 한 사람이에요. 

요한이 속 좁고, 성격 급하고, 그리고 출세욕이 있었던...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고 함께 다니다 보니까 
점점 어떻게 변화되었느냐?

요19장에 보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 유일하게 
예수님 제자 중에 한 명이,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지켰다 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이 요한이에요.  

요19:26~27절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제자들이 다 도망갔다' 라고들 말하는데, 정확한 말은 아닙니다.
요한은 끝까지 예수님 곁을 지켰어요.

이 예수님의 유언을 따라, 모친 마리아와 사도 요한은, 나중에 에베소에 가서 사셨죠.
사도바울이 에베소를 전도하고, 교회를 세우고 순교한 이후에,
그 즈음에는 예루살렘, 안디옥에 이어서, 에베소가 기독교의 중심지였어요.

어쨌든 지금 에베소(현 지명, 터기 셀주크)에 가면, 
사도 요한이 목회하던 에베소 교회의 터,
특별히 모친 마리아가 살다가 소천한 '산 위의 집 터'를 볼 수 있어요. *성모 마리아 기념교회 
에베소 교회는, 에베소의 아데미 신전 터와 거의 1.5킬로 정도 떨어져 있죠.

그렇게 요한은 예수님의 십자가 곁을 끝까지 지킨 사람이 되었고, 
예수님의 유언에 따라, 노년에 에베소에서 목회하며 교회를 지키다가, 
밧모 섬에 유배도 다녀왔고, 특히 에베소에서 모친 마리아를 끝까지 섬기며 돌보았죠.
그리고 에베소에서 노환으로 소천하신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살아서 순교'하신 거죠.

그는 원래, 출세욕에 사로잡혔던 사람이고, 속이 조금 편협한 사람이었고 
성격 급하고 사람들에게 위해를 가하기를 좋아했던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서 변화되니까,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변화되어서 
십자가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이 되었고, 
그는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에베소에서 끝까지 모셨고, 그도 에베소에서 소천했습니다.

그 전에, 그는 요한복음을 썼죠. 그 전에 짧게 짧게 기록된 것이
AD 90년 경에, 한 권으로 모아졌다고 전해집니다.

이 변화된 자가 복음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요한의 복음서를 우리가 오늘 한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의 특징

요한복음이 기록될 당시에 이미 회람, 
'회람'이라는 말은 '돌려보는 편지'라는 뜻입니다. 당시는 책이 귀했으니까요. 

요한복음 말고도, 돌려보는 편지 형태의 다른 세 복음서가 이미 읽혀지고 있었죠. 
마가복음도 있었고, 누가복음, 마태복음도 사람들 사이에는 
이미 광범위하게 읽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대교회 당시를 한번 생각해보세요.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이후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사랑의 정신을 추구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그분들이 누구를 따라갔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3년 동안 동행했던 제자들에게 가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이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이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까?'
이렇게 묻고 따르는 제자들이 생겨났어요.
 
그래서 마태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서 마태 공동체를 이루었고 
또 베드로는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모아서 베드로 공동체를 이루었고 
베드로 공동체에서 설교된 이야기를, 마가가 받아서 기록한 것이 마가복음이고 

그리고 누가는 한 사람 데오빌로를 위해서 쓴 편지가 
하나의 회람 형태의 서신이어서 사람들에게 읽혀졌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성향의 목회자를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가면 성격 급하고 또 뭔가 사족이 긴 얘기가 듣기 싫다. 나는 핵심만 듣고 싶다.' 
그럼 사람들 누구한테 가겠어요? 베드로한테 가겠죠. 

베드로에게 가서, '앞뒤로 다 긴 설명은 필요 없고, 본질만, 핵심만 이야기해 주세요'
그런 성격 급한 사람들은 베드로한테 찾아가서 듣는 거죠. 

주로 정통적인 유대인들은 마태를 좋아하고, 
또 그리스적인 사고방식에 깊이 뿌리박은 사람들은 요한을 따라갔습니다. 

그래서 요한이 함께 만든 공동체가 요한공동체인데 
요한공동체에서 사도 요한이 매일, 또는 매주일 모일 때마다 설교를 했을 거 아니에요. 

그 설교한 이야기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이런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가르친 것을, 글로 모으고 모아서, 엮은 책이 <요한복음>이에요. 

그래서 그 당시 이 책은 혼자서 골방에 들어가서 쓴 게 아니라 
사람들과 나누고 대화하고, 
그리고 이미 읽혀지고 있었던 회람 형태의 다른 복음서를 참고해서 
거기에 없던 것들을 더 첨가해서 쓴 책이 <요한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요한복음의 특징은 '가장 헬라적인 복음서다'라고 볼 수 있어요.
헬라 라고 하면 그리스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이 복음서를 읽고, 설교를 듣고,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요즘으로 얘기하면 '당시 그 시대에 가장 젊은 사람들의 사고방식에 가장 합당한 복음서다'
이렇게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헬라적이다' 하는 말은요. 사람들이 논리적입니다. 또 철학적이죠.
또 '헬라적이다' 하는 건, 시간의 흐름에 굉장히 민감하고, 공간의 이동에 민감합니다. 
그래서 그리스 사람들은 이성적인 사람들이라서 
시간과 공간의 순서를 좋아하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은 그래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쭉 기록되어 있고 
그리고 공간이 갈릴리 사마리아 유대 이렇게 오가면서 공간의 이동을 
그때그때 잘 묘사하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걸 눈여겨 보시면 되겠습니다.

본 강의에서 그렇게 살펴볼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의 세 덩어리 공간으로 나누면, 
1) 하나는 갈릴리... 예수님이 자라신 곳이에요. 
예수님이 자라시고 공생의 대부분을 여기서 보냈습니다. 이게 한 덩어리에요. 

2) 유대라고 되어 있는데 사실은 유대 중에서도 

3) 예수님이 가장 많이 활동하신 곳은 유대 땅의 예루살렘이에요.  
그래서 예수님은 이 갈릴리와 유대, 즉 북쪽 갈릴리와 남쪽 유대, 
특히 예루살렘을 오가면서 사역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생각에는, 갈릴리에서 유대로 올 때 가운데에 뭐가 있습니까? 
사마리아를 통과하면 되죠. 
또 유대에서 갈릴리로 갈 때 사마리아를 거쳐 지나가면 되잖아요. 

그런데 그 당시에 모든 유대인들은 사마리아를 통과해서 가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땅과 사람을, 부정하다고 여겼으니까요. 
북이스라엘이 망하면서, 이스라엘 순수 혈통이 사라지고 혼혈된 지역이라서요.

그래서 그 이후로 경건한 유대인들은 혈통이 더러워졌다고 해서 
사마리아 지방의 땅을 밟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오지도 못하게 했고
또 자기들도 그쪽으로 가지도 않아요. 

그러면 예수님 시대 북쪽 갈릴리 사람들은 남쪽 예루살렘으로 어떻게 다녔을까요?
육로로 올 때는 사마리아를 밟지 않고, 갈릴리에서 일단 요단강을 건너가요. 
그래서 요단강 오른쪽, 즉 요단강 동쪽을 따라서 내려오다가 
여리고 근처에 다달았을 때, 강을 건너 여리고를 거쳐서 예루살렘으로 오는 방법이 있었죠. 
사람들이 이렇게 다녔습니다. 

남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갈 때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여리고는 항상 예루살렘을 가든지 오든지 늘 거치는 도시예요. 

▲요한복음 1장부터 보겠습니다.
1장의 '장 제목'을 제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이라고 정했습니다. 

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말씀 (로고스)'을 우리는 누구로 바꾸어 읽어도 될까요? '예수님'으로. 
그러면 한번 다시 읽어볼게요.  
'태초에 예수님이 계시니라. 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전혀 무리가 없죠. 

그리고 1:2~3절도 '예수님이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예수님이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렇게 읽을 수 있단 말이죠. 

그래서 말씀은 곧 누구시다?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말씀인 예수님을, 여기 요한복음 1장에서 '그'라고 인격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은 곧 예수님이고 예수님은 곧 살아있는 인격이기 때문에 
말씀은 어떻다? 살아있는 생명이라는 얘기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력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 있고, 힘이 있습니다. 
말씀이 내 속에 들어가면 꿈틀대는 게 막 느껴져요. 

내가 말씀을 만나면, 죽어있던 내 영혼도 살아나고 
말씀을 내가 만나면, 죽어있던 내 영혼이 소성케 되고 기쁨이 넘치고 
뭔가 일을 하고 싶어지고 행복해지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말씀이 곧 생명이고 인격이기 때문에!  

그래서 세상 지식하고, 하나님의 말씀하고는 이렇게 하늘과 땅 차이가 나고, 
가장 큰 차이는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차이예요. 

1: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무슨 뜻일까요? 
1) 말씀이 말로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이루어졌다. 진짜 이루어졌다는 거죠. 

이사야 7:14절에 임마누엘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하면서, 그리스도의 탄생을 예언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700년 전에 예언했던 말씀이에요. 
또 이사야 53장에 보면 메시아의 수난, 고난에 대해서 이미 예언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700년 전에 하신 말씀이... 공수표로 끝나지 않고, 진짜 메시아가 오셨다니까요. 
육신을 입고...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는 말은, 
그 말이 정말 이루어졌다... 이런 뜻이 되고요.  * '말씀이 실체가 되셨다' 라는 뜻
 
그래서 예수님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은...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 없습니다.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그렇다면 지금 이루어진 말씀도 있고, 앞으로 이루어질 말씀도 있잖아요. 
앞으로 이루어질 말씀들 중에, 우리를 가장 두렵게 하지만, 
반면에 기대감을 가지게 만드는 말씀이.. 종말에 대한 말씀이에요. 

오실 메시아에 대한 말씀... 예수님 오실까요? 안 오실까요?  
천국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습니다. 반드시 
말씀이 육신이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신뢰하지 못하고 그걸 믿지 못하면 기독교 신앙이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 말씀이 현실이 되고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제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에요. 

말이 말로 끝나지 않고, 말이 육신이 되는 자들이에요. 
근데 우리 말이 항상 긍정적인 말만 해야 되는데 
부정적인 말을 자꾸 쏟아내고, 자꾸 사람을 향하여도 저주하는 말을 쏟아내면, 
그 저주의 말이 능력이 있다니까요. 

여러분들은 내가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 잘 몰라요. 자기가 자신을 잘 모른다니까요. 
우리가 저주하는 말을 자꾸 쏟아내면 
그 말이 육신이 되어서 이루어지면 어떡할 겁니까? 

우리는 주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말의 권능을 가진 자들이에요. 
그래서 말이 힘이 있고 말의 권능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축복하는 말, 긍정하는 말, 잘된다. 
그리고 또 항상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는 말씀들을 자꾸 하셔야 됩니다. 
그래야 그 말이 현실이 됩니다. 

2) 또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하는 말은, 말씀이 예수님이잖아요. 
예수님이 인간이 되셨다는 말이에요. 우리와 같은 육체가 되셨어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가 있죠. 
인간이 가지고 있는 한계는 시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고 공간의 한계를 가지고 있어요. 

시간의 한계를 갖고 있다.는 말은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60, 70, 80 길게는 100년 살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육체를 입고 오셨다는 말은, 인간의 시간의 한계 가운데 스스로 매이셨다. 
우리 인간의 3차원의 공간의 한계 가운데 오셨다는 말이죠. 

스스로 그러나 한번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이 시간과 공간의 육체 한계 가운데 들어오셨지만, 거기에 매여 계십니까? 
매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 하는 말은 두 가지의 의미 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2장으로 가겠습니다. 
2:13절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더니' 

요한복음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기술하고 있는데, 
요한이 절기로 가지고 힌트를 줍니다. 특별히 유월절을 가지고 힌트를 줍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만 3년 사셨거든요. 3년반 설도 있지만, 3년설이 지배적입니다.
만3년 사시는 동안 예수님이 유월절을 몇 번 경험하셨을까요? 4번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유월절을 4번을 얘기하고 
유월절은 1년에 딱 한 번이 있는 거잖아요. 

유월절을 포인트로 잡고 우리에게 시간을 알려줍니다.  
그리고 나중에 초막절도 알려줘요. 
요한복음은 절기를 통해서 시간의 흐름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첫 번째 유월절 어떤 사건이 있었을까요? 
첫 번째 유월절 사건은  성전정화 사건입니다. 

그래서 성전 정화 사건은, 2번 있었죠.
공생애 시작 초기에, 또 공생에 마지막에.    마21:12~13

지금 요2장은, 예수님이 1st 성전청결을 하실 때입니다.
그걸 보고 유대종교 지도자들이 그랬겠죠. 
어디서 갑자기 듣보잡이 나타나서, 상을 둘러엎고 난리를 치니까 
오늘날 우리 입장에서는 성전정화, 성전청결인데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 입장에서는 난동이에요. 난동!

예수님의 첫 번째 유월절은 이랬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면 한번 생각해 보세요. 그 다음 절기 또는 유월절에 
가난하고 눌린 자들이나 평민들은 
그 젊은, 작년에 그렇게 성전을 청소한 사람의 재등장을 기대하겠죠. 

그런데 그 당시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또 그가 뒤집어 엎을까봐' 많이 경계하겠죠. 
'또 나타나기만 해 봐라. 당장 체포해서 잡아가지고 가둬버려야지.. 
어떤 죄목을 뒤집어 씌워서라도...'
 
그래서 예수님을 향한 상반된 시선이 이때 존재하게 되는 거죠. 
그런 느낌을 가지시고 성경을 보시면 됩니다. 

▲요3장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온 사건이죠.
그는 공회원입니다. 공회원이란 말은
예수님이 성전을 뒤집어 없는 걸 보고 '저 친구를 잡아 죽여야 되겠다'고 생각한 사람들 중에 
한 부류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사람들 중에도 '이탈표'가 있었던 거죠. 

3: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가 왜 밤에 찾아왔을까요?  
그가 말한 표적이 뭘까요? 
-성전을 뒤집어 엎는 거예요. 
-또 살펴봤더니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이적도 예수님이 이미 행하셨거든요. 

그러니까 니고데모가 이 예수에 대한 궁금함이 생긴 거예요. 
낮에 찾아오지 못하고 밤에 찾아온 이유는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우니까 
내가 그래도 공회원인데 조용히 가서 한번 만나봐야 되겠다... 그래서 밤에 찾아온 거예요. 

찾아와서 예수님과 대화하는 중에 거듭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죠. 
그런데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된다' 이런 말씀을 하시는데 전혀 이해하지 못해요. 
그런 대화 중에 요3:16절이 나오죠.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도 니고데모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마음으로 영접하지 못해요. 
그런데 니고데모가 마지막에 어떻게 됐을까요? 

요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그 사실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

대단한 용기죠.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면 
당시 분위기상 정치적 반역자로 몰려서 함께 구속이 될 텐데 
아리마대  요셉이 담대하게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가요. 

39절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이걸 보면 니고데모도, 이제 예수님에 대해서 진정어린 신앙고백을 한 거예요. 
그 신앙고백을 삶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첫 번째 유월절을 지금 살펴봤습니다. 여러분, 기억하셔야 됩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유월절은 어떤 사건이요? 성전 청결!

그 성전 청결 이후에 예수님을 바라보는 두 가지 시선이 생겼겠죠. 
-예수님을 보고 통쾌하다 하는 부류와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부류
그리고 나서 예수님에 대한 위협이 계속해서 많아집니다.

▲이제 4장으로 갑니다. 

4:3절 '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4: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예수님이 그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 고의로 사마리아로 찾아가신 거예요.

4: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야곱의 우물'이라는 곳은, 이스라엘에 성지순례를 가면, 동네마다 다 야곱의 우물이 있어요. 
왜 '야곱의 우물'이라고 이름 붙여진 우물이, 동네마다 있을까요? 

여인들이 주로 우물에 물 기르러 오잖아요. 
여인들이 우물에서 물을 긷고 그냥 집에 갑니까? 아니죠. 
그 당시의 우물은 요즘으로 말하자면 커피숍, 미장원 같은 곳입니다.
아무튼 동네 여성들이 가장 많이 모여서, 서로 뒷담화하며 스트레스 푸는 그런 곳이에요. 

그런데 우물을 '야곱의 우물'로 부르는 이유는, 어디까지나 추정이지만, 
야곱이 모든 이스라엘 여성들에게 최고의 로맨티스트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럴까요? 
야곱이 라헬 한 여인을 위해서 14년을 종처럼 일했잖아요. 

'나도 야곱처럼 그런 14년의 사랑을 한번 받아보고 싶다.' 하는 마음이 다들 있는 거죠.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남편 얼굴도 모르고 시집왔는데, 내가 미쳤지... 
내가 왜 그렇게 살까? 나도 그런 사랑을 한번 받아봤으면 좋겠다...' 

그래서 여인들의 로망이 야곱이라서, 여인들은 '야곱의 우물'이라고 부르기를 좋아했던 거죠.
그래서 동네마다 '야곱의 우물'이 있고, 지금 여기 본문에도 '야곱의 우물'이 있습니다. 4:6 
여인은 항상 우물로 물길으러 나오면서 '나도 한번 야곱 같은 사람을 만나보고 싶다...' 

그런데 어느 날 정오의 한 멋진 유대 남자를 만났는데 
대화하다 보니 '당신이 야곱보다 더 큽니까?' 라고 질문하는 거죠. 

그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리고 나서 이 여인이 예수님을 제대로 만났어요.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고 난 뒤에 이 여인의 변화된 모습을 한번 보시면, 
그가 어떤 질문을 합니까? 

4:19절 '여자가 이르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이건 아직 '그리스도' 까지는 못 깨달았지만, 그래도 예수님을 제대로 봤다는 증거거든요. 
그 여자는 이제부터 정상적으로 예수님에게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합니다.

4:20절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님을 제대로 만나면 예배에 대한 관심이 생깁니다. 
내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나면 예배드리고 싶어져요. 
예배에 대한 갈망들이 자꾸 생겨요. 

그런데 주님을 떠나면 떠날수록 마음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예배에 대한 마음이 자꾸 사라집니다. 
이 여인도 주님을 만나고 나니까 예배에 대한 말이 불쑥 나오잖아요. 뜬금없이, 

맥락과 상관없이 남자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예배 이야기'로 전환되잖아요. 
그래서 주님을 만나면 예배에 대한 관심이 깊어집니다.    

24절 보십시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예배에 대한 말씀을 주님께서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예수님이 다시 갈릴리 가나로 가셨습니다.

4:46 '예수께서 다시 갈릴리 가나에 이르시니 전에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곳이라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잠시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이제까지 행적을 정리해 보면,
제일 먼저 갈릴리 가나에서 물로 포도주 만드는 표적을 보이시고,
예수님이 첫 번째 유월절을 지키시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죠.
 
예루살렘에서 1st 성전 청결을 하시고 
그리고 밤에 니고데모를 만나시고 
갈릴리로 내려가시다가 (방향으로는 북쪽으로 가시다가)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서 그녀를 회심시키시고 
그 다음에 다시 북쪽으로 갈릴리 가나에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이 갈릴리 가나에 이르고 나니, 누가 예수님을 만나려고 기다리고 있습니까? 
46절 보니까 '왕의 신하가 있어 그의 아들이 가버나움에서 병들었더니' 
*가나에서 가버나움까지 거리는 약 34Km

여기서 왕이라고 하는 건 헤롯 안티파스 겠죠. 
헤롯 왕의 신하가 있는데 그의 아들이 병들었습니다. 

4:47절 '그가 예수께서 유대로부터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내려오셔서 내 아들의 병을 고쳐 주소서 하니 그가 거의 죽게 되었음이라' 

지금 요한이 얘기하고 있는 게 중요한데요. '내려오셔서' 라는 말이 중요해요. 
왜 중요하냐? 

예수님이 거기 가버나움에 가지 않으면 병을 못 고칩니까? 
지금 가나에서 말씀만 하시면 못 고칩니까? 
고칠 수 있잖아요. 

예수님이, 백부장의 하인이 병에 걸렸을 때 
백부장은 '내 집에 들어오시는 걸 감당하지 못하게 싸우니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십시오' ... 그래서 그의 하인이 나았잖아요.

예수님은 백부장에게 
'이스라엘 중에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다. 큰 믿음이다' 칭찬하셨어요. 

그런데 이 왕의 신하는 '예수님이 우리 집에 꼭 가셔야 됩니다.' 
왕의 신하가, 얼핏 보기에는 믿음이 좋은 것처럼 보이죠. 
맞습니다. 대단히 믿음이 좋으니까, 예수님을 만나러, 예수님께 나아온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 이 사람의 믿음은 공간에 매여있는 믿음입니다. 
자기가 공간에 매여있거든요. 인간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우리 집에 꼭 가셔야 우리 아들이 낫는다'는 거죠. 

49절을 보셔요. '신하가 이르되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 
두 가지를 다 보여주는데요.
 
-내 아이가 죽기 전에 죽어버리면 말짱 헛거니까 죽기 전에 오셔야 됩니다. 
 이렇게 그는 시간에 묶여있고 
-가버나움으로 내려오셔야 됩니다. 이렇게 공간에 묶여있어요

그런데 이런 믿음이... 바로 우리 같은 믿음이에요.
우리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지금 올해도 석 달밖에 안 남았습니다. 
올해 12월 31일 땡 하기 전까지, 올해 연초에 제가 1월 1일에 기도한 것, 
이거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반드시 이루어주셔야 됩니다.' 

근데 안 이루어져요. 그렇게 간절히 연말까지 기도하다가,
신년이 딱 되면 '하나님, 아직 음력도 있으니까.. 제가 한 번 더 기회를 드릴게요. 
설날까지는 (음력으로 연말까지는) 제 기도를 꼭 이루어주셔야 됩니다...' 

우리는 그렇게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를 하죠. 

근데 우리 하나님은 굉장히 유머러스 하시고 짓궂으세요. 
우리가 자꾸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면 
우리의 믿음을 더 크게 하시려고 모른 척하고 눈 딱 감고 지나가세요. 

그러므로 시간에 매이지 마세요. 하나님의 가장 적절한 때, 하나님의 가장 좋은 공간에, 
하나님은 그때 이루시고 그때 응답하십니다. 
그래서 주님 뜻대로 주님의 시간에, 주님의 공간에 
모든 것이 합력해서 선을 이루시니까... 그렇게 모든 것을 주님께 다 맡기고
시공간을 초월하여 기도하시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죠. 
5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니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예수님은, 그의 아들을 고치시러, 가버나움으로 가시지 않았어요.
그냥 가나에서, 말씀만으로, 고쳐주셨어요.

이거 정말 힘든 거예요. '가라 네 아들이 살아있다' 하는시데, 이게 믿어집니까? 
그러면 왕의 신하는 선택을 해야 되잖아요. 
진짜 믿고 내려가든지, 아니면 예수님을 보쌈이라도 해서 가든지...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거절할 수 없는 위엄을 느꼈겠죠. 
그래서 왕의 신하는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 :50

저는 이 왕의 신하의 믿음이 참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왜 훌륭하냐? 

여러분들은 이 믿음이 100% 순도 100%라고 볼 때요. 
한 몇 프로의 믿음을 갖고 믿고 갔다고 생각하세요? 

지금 왕의 신하가 믿고 갔다.고 얘기하잖아요. 이게 순도 100%의 믿음일까요. 
'지금 내려가면 내 아들이 살아있을 거다'. 100% 믿고 갔을까요?  No
입장을 바꿔놓고 한번 생각해 보세요. 

만약 내가 그 왕의 신하의 자리에 있었다면, 
예수님이 저렇게 위엄어린 얼굴로 저렇게 나를 뚫어보시면서 
'가라' 하시니까 
내가 더 이상 붙잡을 여력이 없어서 가긴 가는데 
발걸음이 떨어지지는 않는데... 한 몇 프로 정도 믿어질까요? 

그런데 이 믿음이 겨사씨 같은 믿음이라도요. 이 작은 믿음이라도 소중해요.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순도 100% 믿음의 신화'에 빠져 있습니다. (100%믿음의 가지자)
우리는 자꾸 믿음이 없다, 믿음이 없다... 이렇게 얘기하는데 
그런데 사실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이 100%의 믿음은 없습니다. 

믿으면서 의심하고, 의심하면서 믿고 싶고...
'믿습니다' 해 놓고는 ... 그래도 안 믿어지는 걸? 
그런데 입으로는 믿고 싶다고 고백하고 
그렇게 오락가락 하며 사는 게 우리 인생이에요. 
그게 우리 믿음의 약한 부분이고요. 

그런데 중요한 건 '행동으로 가느냐/ 안 가느냐' 이게 믿음의 관건이거든요. 
안 믿어지는 건 매 한 가지예요. 
1%밖에 없는 믿음은 이건 매 한 가지인데 

그런데 안 믿어져서 '여기 가나에서 계솎 예수님께 매달려가지고, 
'주님. 가버나움으로 가십시다' 하는 불신앙을 보여줄 거냐?
 
아니면, 100% 안 믿어지는데,
그래도 주님이 '가라'고 하시니까 
'그냥 가보자, 그냥 한번 눈 딱 감고 가보자' 하느냐 
그 차이에요. 그게 큰 차이를 만들어내거든요. 

그게 삶과 죽음의 차이를 만들어내고 
응답받음과, 응답받지 못함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믿음입니다. 

우리는 자꾸 '나는 믿음이 없다. 나는 순도 100%의 믿음이 없다. 
그래서 응답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행함이 없는 거예요. 순종이 없는 겁니다. 

왜 믿는데 순종하지 않습니까? 왜 믿는데.. 믿고 가지 않습니까? 믿고 행하지 않습니까? 
'네 발을 떼서 한번 가 보라' 하는데, 왜 우리는 가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역사가 안 일어나는 거죠. 

△베드로가 갈릴리 바다위에서 예수님 바라보고 가다가 물속에 빠졌잖아요. 
그때 배 속에 타고 있던 모든 제자 가운데 
용기 내어서 물에 뛰어든 자는 베드로 하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물에 빠지게 된 거죠.

그렇지만 우리는 베드로는 흉보지 말고, 오히려 칭찬해 줘야 됩니다. 
다른 제자들처럼, 배 속에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아무도 물 위를 걸을 수 없습니다. 

일단 예수님이 '오라' 하시니까, 그 다음에는 '우리가 가야' 물 위를 걸을 수 있어요. 
안전한 배 속에서, 위험한 물 위로 내려와야 걸을 수 있습니다. 

'풍랑 이는 물 위로 과연 걸을 수 있을까?' 
베드로인들 그거 100% 믿었겠어요? No
예수님이 '오라' 하시니까, 좌고우면 하지 않고 그냥 간 거죠. 그냥 무식하게! 

그러니까 물 위를 걷게 되는 놀라운 역사의 주인공이 되잖아요. 
중요한 건 ... 순도 100%의 믿음을 타령하고 있다가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 갈 때까지 절대 순도 100%의 믿음에 이르지 못합니다. 

그런데 안 믿어지더라도 한번 해보세요. 
좀 덜 믿어지더라도 해보면 증거가 생겨요. 해보면 역사가 일어나니까!

▲5장으로 갑니다. 
5:1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되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수님이 또 예루살렘에 가셨죠? 이제 1년이 지나갔습니다.  *앞서는 2장 성전청결 때
근데 여기 '유대인의 명절'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이 유대인의 명절은 유월절이에요. 

자 이제 1년이 지나간 거예요. 1년 동안 수많은 일이 있었을 텐데 
성경은 예수님의 일지를 조목조목 상세히 기록하는 게 아니고, 
중요한 사건들만 기록하니까 

첫 번째 예수님의 유월절 성전 청결, 그 밤에 니고데모를 만나셨고, 
갈릴리로 내려오시는 길에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여인을 만나시고,
갈릴리 가나에 도착하셔서 왕의 신하의 아들의 병을 고쳐주시고 

그리고 다시 두 번째 유월절... 1년이 지났습니다. 예루살렘에 또 오셨습니다. 
지금 5장이에요.
이때는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베데스다 연못가에 가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세요. 

문제는 9절입니다.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안식일에는 무화과 두 개 이상의 무게를 들고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38년 동안 병자였으니까, 가진 짐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예수님이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으니,
이 사람이 들고 걸어간 짐이 얼마나 많았겠어요? 

그러니까 당장, 10절의 반응을 보세요.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이 유대인들은요. 예수님이 첫 번째 유월절에 성전청결 하셨을 때 
비호감을 가지고 바라봤던 부류의 유대인들이예요.
'자, 그 자가 다시 오는지 잘 봐라' 왔어요. 예루살렘에 나타났어요. 

이 사람들이 두 번째 유월절이 되니까, 예수님에게 미행을 붙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들을 계속 모니터링, 또는 스토킹을 한 거죠.

근데 보니까, 예수님이 38년된 병자를 고치셨는데, 그날이 안식일이에요. 
'옳다. 걸렸다'
그래서 안식일 규정을 가지고 문제를 삼는 겁니다. 

그래서 그 유대인들이, 주로 사두개인이거나 그들의 하수인들이, 즉 성전 관계자들이
예수님을 나중에 십자가상에서 못 박기 전까지, 죄목을 하나씩 수집하는 거죠.
 
첫 번째 죄목이 뭡니까? 성전소란죄예요. 
두 번째 죄목은 안식일 규정을 범한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시비를 걸어요. :16
세 번째 죄목은 '신성모독죄'입니다.

이때 예수님이 뭐라고 하시느냐면
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5:18 유대인들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하니 이는 안식일을 범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자기의 친 아버지라 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심이러라'
 
그래서 예수님의 두 번째 유월절은 
안식일 규정을 범한 게 되고요. 
그리고 또 신성모독죄까지 뒤집어쓰셨어요. 

그런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입장에서 예수님의 두 번째 유월절은 뭡니까? 
38년 동안이나 병자로서 고생하던 사람을 해방시켜준 날이에요. 

첫 번째 유월절은 성전의 기독권 세력들을 파괴한 날이고 
두 번째 유월절은 병에 매여있던 자들을 해방시켜준 날이에요. 

한 사람의 사역, 한 분 예수님의 사역이 이렇게 사람에 따라서 다르게 비춰진다니까요. 
그래서 이 두 번째 유월절을 우리는 그렇게 이해하시면 됩니다. 

이제 요6장부터는 우리가 다음 주에 <요한복음 2>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