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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5장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

LNCK 2025. 6. 29.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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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         호5:1-15                     2013년

 

호세아 5장은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 죄를 범한 이스라엘을

다시 한번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1절을 보면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기울이라. 너희에게 심판이 있나니.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

 

‘제사장들아! 이를 들으라. 이스라엘 족속들아 깨달으라. 왕족들아! 귀를 귀울이라’고 하며

호세아 선지자는 3중 강조법을 사용해서 아주 강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들으라 → 깨달으라 → 귀울이라 .. 이것이 점층적으로 더 강한 어조로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족속 전체를 포함시켜서 말하고 있지만

5장 전체적으로 볼 때 그 방점이 제사장들과 왕족들을 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의 죄악에 빠진 것은

제사장들과 왕족들 곧 백성의 지도자들의 책임이 큽니다.

앞서 4장에도 4:6~9절에, 제사장들에 대한 경고가 나왔었죠.

 

그러면 그들이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1절을 다시 보면, 그들이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제사장들과 왕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하나님의 심판에서 예외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대 앞으로 소환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너희가 미스바에서 올무가 되며, 다볼 위에서 친 그물이 됨이라’고 했습니다.

 

미스바와 다볼은 둘 다 높은 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산에서는 사냥이 자주 행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 사냥꾼들과 짐승 사냥꾼들이 그물과 덫을 쳐 놓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와 짐승이 그물과 올무에 걸렸습니다.

 

이와 같이 제사장들과 왕족들이 그물과 함정이 되어, 백성들이 그것에 걸려

우상숭배자들로 전락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제사장들과 왕족들이, 그 높은 산에서 ‘우상숭배를 조장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미스바와 다볼은 어떤 곳입니까?

미스바와 다볼 역시 길갈과 벧엘과 같이 우상숭배의 중심이 되어 있는 곳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미스바’가 어디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이스라엘에는 미스바 라는 지명이 여러 곳 있기 때문입니다만

문맥에 비추어 보면, 삼상7장에 나오는 미스바가 맞고, 변두리 변방의 미스바는 아닙니다)

 

미스바가 삼상7:5-14에 나오는 곳이라면

사무엘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압박을 받다가 회개하고 돌아온 곳입니다.

이처럼 베냐민 지파의 미스바는 이스라엘 회개운동의 본거지입니다.

 

다볼은 사사기 4장에 보면 여선지 드보라가 가나안 왕 야빈의 군대장관 시스라의 철병거를

쳐부순 장소입니다. 삿4:1-16

 

이처럼 미스바와 다볼 이 두 곳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그 모습을 회복한 곳이고,

참회개와 참된 신앙을 찾은 영적 부흥의 상징적인 장소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곳이 길갈과 벧엘과 같이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는

우상숭배의 장소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제사장들과 왕족들이 이곳에서 백성들에게 제사를 드리고 제물을 바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오히려 백성들에게 올무가 되고, 즉 그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지도자들이 온 백성으로 우상숭배의 죄에 빠지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로인해 제사장들과 왕족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적용 / 과거에 은혜가 임했던 곳을, 너무 추종하다가, 우상화의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히스기야가 출애굽 시절의 놋뱀을 깨트린 적이 있었습니다.

“히스기야가... 모세가 만들었던 놋뱀을 이스라엘 자손이 이때까지 향하여 분향하므로

그것을 부수고 느후스단(놋조각)이라 일컬었더라" 왕하18:3~4

과거에 미스바, 다볼은 모두 승리의 장소, 하나님이 역사하신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에 임한 성령,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임재... 그걸 우상화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늘 새롭게, 의외의 사람을 통해, 의외의 장소에서, 의외의 방식으로 역사하십니다.

우리가 과거와 전통을 존중해야 하지만, 과거와 전통에 얽매여 있으면 안 됩니다.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교회의 본부가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그 다음은 에베소로,

이렇게 자꾸 옮겨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이 강하게 임하신 장소가, 이제 우상 숭배의 근거지가 되었다는 점은

참으로 기억하고 조심해야 할만한 일입니다. 일례로 새벽기도를 수 년 동안 한 번도 결석하지

않은 권사님은, 그게 자기 의가 되어서 교만에 빠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2절을 보면 “패역자가 살육죄에 깊이 빠졌으매 내가 저희를 다 벌하노라”

 

이 말씀은 그들이 우상숭배에 깊이 빠졌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들을 하나님께서 징계 하여 바로잡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우리말 번역 그대로 봐서

제사장들과 왕족들이 미스바와 다볼에서 부흥운동을 벌인다고 속인 후

참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 위해 모인, 경건한 사람들을 다 죽인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부흥을 열망하는 자들이야말로

왕족의 권력유지와 돈에 눈 먼 제사장들의 부의 축적에 적지 않은 방해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북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언약하신 다윗 왕가가 아닙니다.

그런 비정통국가가 존속하려면 언제나 타락한 종교지도자들의 지지를 얻어야 합니다.

 

권력과 돈을 위해 더럽게 결탁한 왕족과 타락한 제사장들에게 가장 걸림돌은

바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신앙을 가지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경건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들을 잡아 죽이기 위하여 신앙부흥이라는 함정과 올무를 파놓고

남아있는 경건한 사람들을 다 잡아 죽였다는 것입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난 배교의 길에 서 있는 것이

우발적인 것이 아니고 제사장과 왕족과 지도자들의 동의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아주 구조적이고 조직적인 배교행위입니다.

 

▲3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에브라임은 내가 알고 이스라엘은 내게 숨기지 못하나니.

에브라임아 이제 네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느니라”

 

여기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죄가 다 드러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행음하였고 이미 이스라엘이 더러워졌다’는 것은, 우상숭배를 뜻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자기들의 죄를 인정해야 하는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회개하고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은 것입니다.

 

▲4절을 보면 “그들의 행위가 그들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음란한 마음이란 가나안 사상을 말합니다.

풍년을 위해서는 어쩔 수없이 음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바알에게 제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비가 오고 풍년이 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 마음 속에 음란이 있어서 여호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은 앞서 4:1, 4:6절에 나왔는데,

지금 5:4절에도 나왔습니다.

앞으로 6:3절에 또 나옵니다. 나중에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는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용납이 됩니다.

그 이론이 완전히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생활을 해도 갈등이 없고 죄의식도 느끼지 못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신자들도 별로 예외가 아닌 것이 현실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는 방식과 차이가 없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합니다.

 

이스라엘 공동체를 끌고 가고 있는 사상은 ‘가나안 사상’이었고, *바알우상숭배, 풍요추구

여기에 아무도 예외가 없었고, 부끄러워 하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사고를 지배하는 것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이 시대의 사조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위해서 이 세상을 좇아 살면서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부끄러움을 느낄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된 것입니까?

 

▲5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교만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나니.

그 죄악을 인하여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저희와 한가지로 넘어지리라”

 

그들이 교만하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교만하여져서 말씀에 대해 전혀 고개를 숙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다 그러는데 왜 나만 가지고 그러느냐’는 식입니다.

결국 이런 교만한 태도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의 대표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과 에브라임이 넘어지고 유다도 저희와 한가지로 넘어진다”라는 말은

북 이스라엘과 남유다가 다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함께 망한다는 것입니다.

 

▲6절을 보면 “저희가 양 떼와 소 떼를 끌고 여호와를 찾으러 갈지라도 만나지 못할 것은

이미 그들에게서 떠나셨음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찾으러 열심히 제물을 들고 나아가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미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떠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7절을 보면 “저희가 여호와께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고 사생자를 낳았으니.

그러므로 새 달이 저희와 그 기업을 삼키리라”

 

그들이 정조를 지키지 아니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바람을 피우고 사생자를 낳았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게서 하나님은 떠나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제물을 가지고 나갈지라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이런 그들에게 심판을 선포합니다. “새 달이 저희와 그 기업을 삼키리로다.”

여기서 ‘새 달’이란 매월 오는 월삭의 기간을 말하는데 칼빈은 짧은 기간이라고 했습니다.

곧 짧은 기간에 이스라엘이 그 모든 기업을 상실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제물을 잘 바치고 절기를 잘 지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제물과 절기가 무엇을 위해 있는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왜 제물을 바쳐야 하는지를 모르고, 자신들이 제물 바치는 그 행위에 의의를 두고 있기에

그들은 정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정조를 지킨다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마음이 빼앗기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여 놓으신 그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그 하나님께만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바로 그들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교회를 가리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기도 하고,

성도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고도 합니다.

 

그러면 이러한 신부된 교회가 가장 중요하게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정조입니다. 주님을 사모하는 우리의 마음은 일편단심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마음이 어떠합니까?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늘 다른 것을 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이미 정조를 잃어버린 자들이 아닙니까?

우리가 늘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지만, 우리는 이미 정조를 잃어버린 자들입니다.

 

우리는 이미 죄와 허물로 인하여 정조가 상실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신부로서의 자격이 없는 자들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미 아담 아래 있습니다.

해 아래 새 것이라고는 없는 세상에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는 아무리 정결한 신부로 단장을 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자신의 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거룩하게 하심을 붙들어야 하는데,

우리는 주님께서 주신 의의 옷은 버려두고, 자기 스스로 멋진 옷을 입고 나아가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조를 잃어버리는 것이요, 우리 주님을 욕되게 하는 것입니다.

 

▲8-9절을 보면 “너희가 기브아에서 뿔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나팔을 불며

벧아웬에서 외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벌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반드시 있을 일을 보였노라”

 

이 말씀에 보면 에브라임, 즉 북이스라엘은 황무하여 질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지파 중에 필연적으로 있을 일을 내가 보였다는 것입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견책 곧 징계를 받아 망할 것이 확실하기에

남유다는 정신을 차리라는 것입니다.

 

형이 잘못해서 매를 맞으면 동생은 분위기 파악해서 알아서 기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고집을 부리고 반항하면 동생이 더 맞을 수 있습니다.

형이 잘못해서 맞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너도 꼭 같이 잘못을 하는가 하면서

더 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북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망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니

남쪽 유다 너는 정신을 차리고 똑바로 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고하는 말씀이 8절 말씀입니다.

 

8절을 다시 보면 “너희가 기브아에서 뿔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나팔을 불며

벧아웬에서 외치기를 베냐민아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기브아라든지 라마와 벧아웬이라는 곳은

이스라엘 지역 중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스라엘 중에서 가장 안전지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브아와 라마와 벤아웬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경계 지역에 위치해 있습니다.

주로 이스라엘에서 전쟁이 터지려면 북쪽이나 남쪽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중부 지역에 위치해 있는 이곳들은 피해가 가장 적은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뿔나팔을 불고, 나팔을 불며, 깨우치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깨우치라는 것입니까?

‘북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세력이 베냐민 네 뒤를 좇는다’는 경고의 소리를 외치라는 것입니다.

 

곧 남 유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북이스라엘이 망한 것같이 너희도 망한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경고의 나팔을 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이 경고의 말씀대로 남 유다가 회개하지 않고

북이스라엘의 길을 감으로 북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B.C. 722년에 망한지

한 세기가 조금 지난 후인 B.C. 587년 바벨론에 의해 결국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필요로 합니다. 돈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불러도 나에게 힘을 보태어 주는 하나님을 요구하는 것이지

나의 삶이 근본적으로 죄된 삶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키기 위하여 주를 부르는 자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이런 말을 하면 그러면 인간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관적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절망적인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 온 문명이라는 것이,

결국 하나님을 배척하는 자리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벨탑 사건입니다.

 

하나님처럼 살고자하는 것이 인간이 공동으로 추구하고 있는 목표인 것입니다.

인간의 이러한 죄악된 모습을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이스라엘을 보면서

인간의 실상을 봐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지금도 입고 살고 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살고 있는 겁니다.

 

곧 자기가 하나님이 되어 있는 겁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오늘 본문 10-11절에서 보게 됩니다.

 

△적용 / 이웃이 징계를 당할 때는, 나도 옷깃을 여며야 합니다.

 

9절 ‘벌하는 날에 에브라임이 황폐할 것이라

내가 이스라엘 지파 중에서 반드시 있을 일을 보였노라’

 

이미 에브라임, 즉 북 이스라엘은 황무하여 질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필연 있을 것이라는 겁니다.

 

북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견책을 받아 망할 것이 확실하기에 남 유다는 정신 차리라는 것입니다.

형이 잘못하여 매를 맞으면, 동생은 분위기 파악해서 알아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똑같이 고집부리고 반항하면 동생이 더 맞을 수가 있습니다.

형이 잘못해서 맞고 있는 것을 보면서도

‘너도 꼭 같이 잘못을 하는가’ 하면서, 부모가 더 때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고하는 것이 8절입니다.

5:8 ‘너희가 기브아에서 뿔나팔을 불며 라마에서 나팔을 불며

벧아웬에서 외치기를 베냐민아 (북방 세력이) 네 뒤를 쫓는다 할지어다’

 

8절에서 기브아와 라마와 벧아웬이 남쪽 베냐민 지역입니다. 역시 유다도 포함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뿔나팔을 불고 다른 나팔을 불며 깨우치라는 것입니다. 뭐라고 깨우쳐야하는 것입니까?

 

‘북이스라엘을 망하게 한 세력이 베냐민(남유다) 네 뒤를 좇는다’고

경고의 소리를 외치라는 것입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망한다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3:1-5절을 보십시오.

 

실제로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는 남유다까지 집어삼키려고 했죠.

히스기야 때였습니다. 그때 남유다가 이 호세아의 경고를 들었는지,

어쨌든 앗수르의 18만5천 대군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간절히 의지한 결과 승리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돌이켜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가자, 주님을 알자’

하는 것이 참으로 크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필요로 하는 세상입니다.

돈을 필요로 하는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불러도, 나에게 힘을 보태어 주는 하나님을 요구하는 것이지

나의 삶이 근본적으로 죄 된 삶임을 인정하고 회개하고 주께로 돌이키기 위하여

주를 부르는 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인간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가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관적인 정도가 아니라 절망적입니다.

 

지금까지 인류가 이루어 온 문명이란 것이

결국 하나님을 배척하는 자리로 나가는 것입니다.

인간이 하나님 없이 하나님처럼 살고자하는 것이

인간이 공동으로 추구하고 있는 목표인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유다 지도자들은 경계표를 옮기는 자 같으니 내가 나의 진노를 그들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

 

여기서 보면 유다의 죄가 무엇입니까? 경계표를 옮기는 것입니다.

여기서 경계표란 자기 땅의 영역표시(지계표)를 말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와서 땅을 하나님으로부터 무상으로 분배를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싸우셔서 이스라엘에게 영토를 무상으로 분배하여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제비를 뽑아 그 경계를 정하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경계표를 옮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다의 방백들은 자기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경계표를 옮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자기 땅을 확보하기 위해 경계를 옮기는 것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우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역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모두 다 몰아내고, 파괴하여야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은 적극적으로 가나안의 우상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땅을 빼앗아, 그들의 영역을 허락해 주었던 모양입니다.

이것이 호세아 선지자 당시 유다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유다에게 자신의 진노를 물 같이 부으리라고 하십니다.

“내가 나의 진노를 저희에게 물 같이 부으리라”(10b).

진노를 물 같이 붓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유다를 향한 그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홍수 피해로 수십, 수백 명이 죽었다는 뉴스를 봅니다.

우리나라도 여름에 몇 차례씩 홍수 피해를 입습니다.

 

장마 때 쏟아지는 물의 위력을 보면 대단합니다. 모든 것을 휩쓸어 가 버립니다.

차도, 집도, 사람도 다 쓸어 가 버립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경계표를 옮긴 유다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북 이스라엘의 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명령보다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한 것입니다.

 

△적용 / 지계표(경계표)를 옮기면서까지 힘썼던 우상숭배

인간의 이러한 죄된 모습을, 하나님의 계시를 받은 이스라엘을 보면서

인간의 실상을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지금도 입고 살고 있지만, 그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겨

자기들의 욕심을 따라 살고 있는 것을 10-11절에서 보게 됩니다.

 

10절에서 유다의 죄가 무엇입니까? 지계표를 옮기는 것입니다.

지계표란 자기 땅의 영역표시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 들어와서 땅을 무상으로 분배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앞장서서 싸우셔서 이스라엘에게 영토를 무상으로 분배하여 주신 것입니다.

인구의 수를 비례하여 제비뽑아 경계를 정하여 준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영토를 확장하기 위하여, 영토의 표시인 지계표를 옮겨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자기 땅을 확보하기 위하여 경계를 옮기는 것만이 아니라,

이방인의 우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역에는 가나안 원주민들이 섬기던 우상들을 모두 다 몰아내고 파괴해야 하는데

그런데 오히려 적극적으로 우상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우상숭배자들, 그들의 산당 지역에, 일정한 땅을 돌려 준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럼으로써 이스라엘 해당 지파와 가문은, 그만큼 땅을 잃어버리게 된 것이죠)

그러므로 권세자들이 지파와 가문이 가진 고유한 유산인 땅의 지계표를 옮겨버린 것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기가 쉽죠. 내가 정말 원하는 일이 있으면,

'법과 규정을 내게 적당하게 고쳐가면서까지' 무리하게 그 일을 추진하는 것입니다.

뭐든지 무리수를 두면.. 결과가 안 좋습니다.

그건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며, 자신의 욕심을 이루려하는 것인데.. 결과는 파멸입니다.


▲11절 “에브라임은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하므로 학대를 받고 
재판의 압제를 당하는도다”

 

이 구절은 번역하기 어려운 구절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명령’이라는 단어 때문입니다.

 

여기서 이 ‘명령’은 히브리어로 ‘짜브’라는 말인데,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은 영어 성경들은 철자는 다르지만 발음이 비슷한 ‘우상’으로 번역했습니다.

즉 에브라임이 우상을 섬겼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말 성경은 그런 영어 번역을 따르지 아니하고 원래대로 ‘명령’이라고 번역했는데,

그냥 ‘명령’이라고 하면 ‘하나님의 명령’과 혼동이 되니까

‘사람’이라는 말을 넣어서 ‘사람의 명령’이라고 의역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의역은 본문의 의미를 가장 정확하게 드러낸 번역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여튼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 사람의 명령을 따랐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자기 자신을 지키는데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 세상적인 방법을 택했다는 뜻입니다.

 

에브라임 곧 북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을 좋아 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했습니다.

 

그들이 왜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들의 가르침이 더 매력이 있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가르침이 더 합리적이고 자기들을 좋게 하여 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에 비해서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독선적이고 비현실적인 것 같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루도 못살 것 같았습니다.

 

비전도 없어 보이고, 하루살이처럼 살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삶 같았습니다.

사람은 꿈을 먹고 사는데 그러한 꿈을 하나님의 말씀은 허무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여호와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삶이 마치 갑갑한 감옥살이를 하는 삶 같이 여겨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듣기가 싫은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가르침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보다 바알과 아세라와 같은 우상을 숭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우리가 역사서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왕들에 대하여

악한 여로보암의 길을 따랐더라’는 말이 계속해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상16:2절 한 곳만 보겠습니다. “내가 너를 진토에서 들어 나의 백성 이스라엘 위에

주권자가 되게 하였거늘 네가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여 내 백성 이스라엘로 범죄케 하여

저희 죄로 나의 노를 격동하였은즉”

 

이와 같은 말씀이 역사서에 보면 곳곳에 나타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이 ‘여로보암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세상 방식으로 잘 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난 백성들이 안전할 수 있는 곳은 이 세상 어느 곳에도 없습니다.

그들이 만든 수 만가지 방법들이 그들을 돕지 못합니다.

가장 안전한 곳으로 피했다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그곳이 바로 사자의 입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 어디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에브라임과 유다를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적용/ 11절에서 북 이스라엘은 사람의 명령 좇기를 좋아한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여야 하는데

어떻게 사람의 명령을 좋아한 것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들의 가르침이 더 매력이 있었던 것입니다.

합리적이고 자기들을 좋게 하여 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나 낯설고 황당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 하루도 못살 것 같습니다.

비전도 없어 보이고 하루살이처럼 살아야 하는 것 같고,

도대체 희망이 없어 보이는 삶 같습니다.

 

사람은 꿈을 먹고 사는데 그러한 꿈을 허무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오직 여호와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갑갑한 감옥같이 여기는 것입니다.

잔소리 많은 시어머니 같습니다. 그러니 듣기 싫어서 귀를 막고 도망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는 것입니까?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것이 사랑입니까? 아니지요 간섭하셔야 합니다.

 

▲12절을 보면 “그러므로 내가 에브라임에는 좀 같으며, 유다 족속에게는 썩이는 것 같도다”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에게는 좀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썩히는 것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좀처럼, 썩히는 것처럼 에브라임과 유다를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좀이나 썩는 것은 요란스럽지 않습니다.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망하게 하는 길입니다.

 

옷에 좀이 썰어버리면 어떻게 됩니까? 겉모양은 멀쩡한데 입으려고 하면

불에 탄 재처럼 부수어지는 것입니다.

 

썩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에서 썩어진 것은 겉으로 볼 때는 멀쩡하지만

그것을 갈라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북 이스라엘과 남 유다를 좀이 쓸고 썩어서 완전히 폐허가 되게 하듯이

완전히 멸망시켜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경고의 말씀대로 그들은 앗수르와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북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나 이들이 이렇게 되었을 때에

‘우리가 병이 들었구나!’ 하고 깨달았다면, 그들은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와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도리어 어디로 향하고 있는 것입니까?

 

▲13절을 보면 앗수르 왕 야렙에게 가는 것입니다.     *왕 야렙 : ‘위대한 왕’이란 뜻

“에브라임이 자기 병을 깨달으며, 유다가 자기 상처를 깨달았고

에브라임은 앗수르로 가서 야렙 왕에게 사람을 보내었으나

저가 능히 저희를 고치지 못하겠고, 너희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리라

 

여기서 ‘에브라임이 자기 병을 깨닫고 유다가 자기 상처를 깨달았다’라는 말은

그들이 근본적으로 자기 자신들의 병과 상처의 원인을 알았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그들은 현실적인 여러 어려움에 대하여 깨닫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조공을 내야 하는데 낼만한 돈이 없거나, 흉년이 들었는데 곡식을 구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별문제가 없는 줄 알았는데, 비로소 여러 가지 현실적인 어려움들이 불거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느끼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들이 한 것이 무엇입니까? 앗수르라는 눈에 보이는 강대국을 의지했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자신들의 죄를 깨달았다면 앗수르가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으로 자신들의 죄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로 인해 그들은 눈에 보이는 강대국 앗수르를 의지한 것입니다.

 

여기서 ‘야렙 왕’이란 ‘싸움에 능한 위대한 왕’이란 말로서 앗수르 왕의 별명으로 봅니다.

자신들이 병이 들고 상처가 났다면 치료자인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들은 오히려 이방의 왕에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지금 무엇이 문제인지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이 병이 들었다는 것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로 돌아가야 사는 길인데, 힘만 있으면 살겠다고

앗수르 왕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북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도 같은 모습입니다.

이것이 그들이 정조를 잃어버린 모습이요, 멸망을 당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앗수르와 애굽 사이에 있는 이스라엘 나라는

국제정세를 따라 이리 저리 도움을 구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랐던 구원은커녕, 그들은 앗수르에게 점령당하고 만 것입니다.

 

남 유다는 나중에 바벨론에 의해 망하지만, 앗수르에 의하여 괴롭힘을 많이 받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도움을 받고자 은과 금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였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오히려 괴로움만 더하여진 것입니다.

남유다 아하스 때 앗수르에게 도움을 청한 적이 실제로 있었습니다. 왕하16장

호1:1에 의하면, 호세아는 아하스 왕 때도 예언했습니다. 

 

그러므로 야렙 왕이 그들을 고치지 못하고 상처를 낫게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도움을 요청하자

그들은 와서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백성들을 괴롭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후로도 세계의 열강들이 이 땅을 집어 삼키려고 얼마나 각축전을 벌렸습니까?

그 결과 지금의 남북으로 나라가 두동강이 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열방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그들의 힘을 빌려서라도 살아남아야 했다면

이스라엘 나라는 그렇게 하면 안 되는 나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왕으로 계시는데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의 왕 됨을 싫어하여

이방 왕의 도움을 구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의 마음이 빼앗긴 것이요, 정조를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러한 에브라임과 유다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하신다고 합니까?

 

▲14절을 보면 “내가 에브라임에게는 사자 같고 유다 족속에게는 젊은 사자 같으니.

나 곧 내가 움켜갈찌라. 내가 탈취하여 갈찌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

 

이 말씀에 보면 에브라임에게는 하나님이 사자 같이,

유다에게는 젊은 사자 같이 움켜 갈 것이라고

합니다. 내가 탈취하여 갈찌라도 건져낼 자가 없으리라고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무서움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동물의 왕국을 보면 사자의 움켜감의 위력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유다에게는 젊은 사자 같이 움켜 갈 것이라고 합니다.

에브라임보다 더 심판이 강함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물론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방 나라들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그렇게 하시지만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내가, 즉 여호와 자신이 그렇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건져낼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역사적으로 보면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하고(왕하 17:1-6),

남 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왕하 25:1-21).

그때 아무도 그들을 구원해 줄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15절을 보면 “내가 내 곳으로 돌아가서 저희가 그 죄를 뉘우치고

내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리라. 저희가 고난을 받을 때에 나를 간절히 구하여 이르기를”

 

이렇게 사자가 삼키듯이 사로잡혀 가고난 후에

여호와께서 여호와가 계시던 곳으로 돌아가신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이스라엘 됨은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범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는 것입니다. 얼굴을 돌이켜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끝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신의 얼굴을 구하기까지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의지하였던 세상의 힘들이 오히려 그들을 삼켰을 때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다시 여호와의 얼굴을 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마치 음란한 고멜이 자기 남편을 버리고 떠났다가

나중에 죽을 고생을 하고서는 그래도 옛 남편이 나았다고 하면서 돌이키는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의지하던 앗수르로 인해 고난을 당할 때 그들은 그때서야 비로소

여호와를 간절히 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내용이 이미 신명기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신명기 4:25-31절을 보면 “네가 그 땅에서 아들을 낳고 손자를 얻으며 오래 살 때에

만일 스스로 부패하여 무슨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악을 행함으로 그의 노를 격발하면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열국 중에 흩으실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쫓아 보내실 그 열국 중에 너희의 남은 수가 많지 못할 것이며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결국 북 이스라엘이나 남 유다나 간에 모두 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좋아하던 것들을 좇아갔다가

오히려 그러한 것들이 그들의 올무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좋아하고 의지하던 것들에 의하여 수많은 고난을 당한 후에

그제야 주께로 돌아가자고 하는 자들이 나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의 교훈을 삼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보다 사람의 명령을 따라 살 때 그 길이 망하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아니면 사람의 명령을 따라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지혜를 따라 살고 있다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 길이 살 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세상 지혜를 따라 사는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하나님께로 돌아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적용 / 본문 호5장에 '하나님이 떠나신다'는 표현이 두 번 나옵니다.

한 번은 6절이고, 또 한 번은 15절입니다.

 

18세기에 영적 대각성 운동을 일으킨 조나단 에드워즈 목사님은

본문 15절을 주제로 ' 긍휼과 사랑을 보여 주시기 전에 먼저 비참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은 스스로 숨기신다' 라고 설교했습니다.  rfcdrfcd.tistory.com/15974534

 

'주 떠나 가시면 내 생명 헛되네' 라는 찬송가 가사도 있듯이,

하나님이 떠나시는 것은, 성도가 받는 최고로 무거운 징계입니다.

 

'하나님이 떠나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내가 떠나기 전에 나를 붙잡아라' 라는 뜻입니다.

진짜 떠나실 마음이 있으시면, 말 없이 조용히 떠나시면 그만인데 말입니다.

 

북이스라엘처럼 계속 우상숭배에 빠지면,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떠나시고, 얼굴을 숨기십니다.

그러면 정말 비참하고, 가련한 인생이 되고, ... 결국은 포로가 되고,

온갖 수모와 수치를 당하는 거죠. 그 전에, 떠나시는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