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8장, 영적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에8장, 영적 전쟁은 피할 수 없다 여러설교정리 ☞ 에스더 설교모음
◑도입 주1)
▲본문의 배경
에7장 끝에서 원수 하만도 이제 죽을 길로 끌려나갔습니다. 보자기로 얼굴을 가려서 데려갔고
하만은 자기가 세웠던 높은 나무 위에 달려서 죽었습니다. 그로써 왕의 노도 풀렸습니다. 7:10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7장을 읽고, 이제 스토리가 다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아닙니다. 아직 중대한 문제가 해결 안 됐습니다.
이미 공포된 조서의 효력이 그대로 발생하고 있다는 겁니다.
왕의 조서는 한 번 공포되면 바꾸지 못합니다.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니라' 8:8
우리는 쉽게, '왕이 그 날에 유다인을 죽이지 말라고 새로 조서를 내리면 돼지!' 하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되면 왕의 권위가 실추됩니다. 왕의 조서에 권위가 추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한 번 내린 조서는, 악법도 법이라고.. 반드시 시행되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악의 화신 하만은 이미 나무에 달려 죽었지만, 약 9개월 후에 12월 13일에,
유다인들은 여전히 몰살되고, 재산을 뺴앗길 형편에 놓여있는 것입니다. 조서 때문에요!
그래서 본문 8장을 보면, 에스더가 방방 뛰기 시작합니다.
그가 모르드개와 함께, 이 변경할 수 없는 조서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 나가는지
8장을 읽어보십시다.
▲하만은 자기가 세운 장대에 자기가 매달리고 말았습니다.
하만은 국가 권력 서열 2위입니다. 실세 중의 실세이고,
정말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왕의 인장반지를 받아서, 자기 재량대로 찍을 수 있는 위치였습니다. 3:10
그런 권력자 하만이, 말단직 모르드개를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 빽이 대단합니다.
오히려, 하만은, 자기가 세운 장대에, 자기가 매달리고 말았습니다. 7:10
대접한 대로 대접받은 셈이지요.
성경에 그런 표현들이 종종 나옵니다.
시9:15 '이방 나라들은 자기가 판 웅덩이에 빠짐이여, 자기가 숨긴 그물에 자기 발이 걸렸도다'
시35:7~8 '그들의 그물을 웅덩이에 숨기며 까닭 없이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함정을 팠사오니
멸망이 순식간에 그에게 닥치게 하시며, 그가 숨긴 그물에 자기가 잡히게 하시며'
시57:6 '그들이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자기들이 그 중에 빠졌도다'
하만은, 자기가 판 그물과 웅덩이 때문에,
자기 뿐만 아니라, 자기의 열 아들까지 화를 입게 만들었습니다.
(에스더가 요청함)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게 하소서 하니' 9:13
여러분, 남에게 눈물 흘리게 하면, 내 심령에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 어렵죠.
남의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면,
반드시 내 눈에 피눈물이 난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됩니다.
‘대접한 대로, 대접 받는다’는 말씀을.. 우습게 여기거나 가볍게 여기면 안 됩니다. 마7:12
어떤 아이가 고양이 꼬리를 잡고서 막 잡아 당겼습니다.
고양이는 야옹 소리를 내며 울면서, 뿌리치고 도망가려고 했습니다.
엄마가 “얘야, 고양이가 얼마나 귀찮고 아프니, 그러지 마”
아이는 “엄마, 그게 아니야, 나는 잘 잡고 있는데,
고양이가 지금 도망가려고 애쓰다 보니까, 꼬리가 당겨서 아픈 거야”
여러분 이렇게 생각하시면 곤란합니다.
자기 잘못을, 변명하거나 회피하거나 핑계대지 말고,
막힌 것을 풀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성도는 '하나님이 눈동자 같이 보호하신다' 라고 했죠. 시17:8등
성도를 해코지 하는 일은, 하나님의 눈동자를 찌르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하만이, 괜히 모르드개와 유다인들을 공격하려 했다가
자기의 열 아들과 함께 '하나님의 보복'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나 자신이 '하나님의 보복'을 당할 일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계속 활약하는 에스더
7장에서 '왕후 에스더'라는 말이 7번이나 나올 정도로,
에스더는 왕후 queen 로서의 자기 사명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활약했습니다.
본문 8장에서도 그의 활동과 활약이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자기 민족의 구원을 위해서, 에스더가 막 치고 나가기 시작합니다.
이 때 에스더의 나이가 몇 세나 되었을까요?
참고로,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이때 에스더의 나이를 87세나 그 이상으로 보는 글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것은 에2:5~6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주2)
당시 에스더의 나이가 얼마냐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안 나오고,
페르시아 역사책에도 아직까지는 안 나옵니다. 그래서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왕후로, 여성이 가장 아름다운 나이 때를 선택하는 문화와,
또한 당시 조혼의 풍습을 고려해서 볼 때, 에스더는 10대 후반이었을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오늘날 세계 기독교계 가운데, 십대 청소년들을 훈련시키는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대학교육, 대학원까지 마치고, 성숙한 자들을 훈련해서 파송시키는 움직임도 있고요)
성경에서도 활약하는 나이가 십대 후반인 경우가 많았다는 거죠.
요셉, 다윗, 다니엘, 에스더 등입니다.
우리나라에 선교사로 왔던 언더우드, 아펜젤러 이런 분들 거의 20대 중반입니다.
후반도 아닙니다. 요즘 문화로 보면 애같은 분들이 와서, 한국교회를 개척했던 것이죠,
그래서 특별히 예수전도단 YWAM, 또 해외선교를 전문으로 하는 선교단체들은
그 주축들이 아주 젊습니다. 아주 젊은 사람들을 해외로 파송합니다.
젊은 사람들은 패기가 있어서, 또 그 부르심에 잘 순종하고요.
다니엘, 요셉, 다윗, 에스더.. 이런 분들이, 너무 젊은 나이인데도
당시 세상을 확 복음으로 뒤집어 엎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데서 힌트를 얻어야 됩니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말씀으로 준비된 다음에,
십대 후반이 되면, 그들을 세상 가운데 확 던져 버려야 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독립적으로 알아서 하나님의 음성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들을 감당하기 시작한다는 거죠.
독자적으로 생존법을 터득하고요.
그들은 우리 아버지 세대들과는 완전히 다른 길로,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뒤집어 엎어 버릴 것입니다.
어느 청년이 목회자의 소명을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나는 새로운 세대를 일으키기 원한다.
새로운 세대는 광야에서 죽어 없어진 모세의 세대와는 다르게
요단강을 건너 땅을 정복할 세대다.
너를 향한 나의 계획은 네가 선교지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 남아 새로운 세대인 다음 세대의 청년들을 준비시켜
선교지로 들여보내는 것이다.'
애굽의 시대에는 청년 요셉이 활약했고,
바벨론 시대에는 청년 다니엘이 빛을 발했고,
페르시아 시대에는 청년 에스더가 엄청난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노련한 노장 하만이 끽소리도 못 하고 있어요.
그런 기대감으로 여러분의 자녀들을 보셔야 됩니다.
'우리 아이가 이런 아이가 될 수 있구나!'
◑절별 해석
▲1~2절.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왕에게 상을 받습니다.
왜냐면 중대한 범죄자, 나라를 위경에 빠뜨리고 손해를 입힐 뻔 했던 하만의 정체를,
두 사람이 밝혀 주었기 때문이죠.
에스더는 하만의 집을 상으로 받았고,
이것은 꼭 '집'만 받았다기 보다는, 거기에 딸린 모든 것을 함께 받았음을 뜻합니다.
모르드개는 왕의 인장을 받게 되는데, 관직을 얻은 것입니다. :2
그래서 혹자는 모르드개가 총리가 되었다고 보기도 합니다.
8:1 '그 날 아하수에로 왕이 유다인의 대적 하만의 집을 왕후 에스더에게 주니라
에스더가 모르드개는 자기에게 어떻게 관계됨을 왕께 아뢰었으므로
모르드개가 왕 앞에 나오니
2 왕이 하만에게서 거둔 반지를 빼어 모르드개에게 준지라
에스더가 모르드개에게 하만의 집을 관리하게 하니라‘
에스더가 직접 모르드개를 초청해 가지고 '제 삼촌입니다' 하고 소개를 한 거죠.
그리고 자신의 속에 품고 있던 말들을 막 서슴없이 내놓습니다.
'모르드개가 왕의 앞에 나아오니'
모르드개가 왕과 수시로 대면할 수 있는(1:10, 14, 7:9).
고위직의 관리로 승진하게 된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모르드개의 이 같은 승진을 반드시 에스더의 후광 때문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모르드개는 이미 왕을 모살할 계획을 꾸몄던 두 내시를 적발하였고(2:21, 22),
또한 금번에는 왕과 왕후에게 손해를 끼치려한 하만의 음모를 폭로하는 데
그 공로가 컸었기 때문에, 왕의 중신으로 등용될 수 있는 충분한 자격의 소유자였죠.
▲3절 ‘에스더가 다시 왕 앞에서 말씀하며 왕의 발 아래 엎드려
아각 사람 하만이 유다인을 해하려 한 악한 꾀를 제거하기를 울며 구하니’
'울며 구하니'
이러한 에스더의 탄원은, 비록 그때 하만은 이미 처형되고 없었지만(7:10).
유대인 학살에 관한 왕의 조서(3:13)는 여전히 유효했기 때문이었죠.
조서는 한 번 공포되면, 절대 철회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니라’ 하니라 8:8
▲4절 ‘왕이 에스더를 향하여 금 규를 내미는지라 에스더가 일어나 왕 앞에 서서’
'왕이 금 규를 내어미는지라'
이것은 에스더가 왕의 호출없이 왕에게 나아갔다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3절에, 벌써 에스더는 왕 앞에 엎드려 울고 있습니다.
그런고로 왕이 금 규를 내어민 것은, 네 청원을 들어줄테니 말하라는 뜻입니다.
▲5~6절, 에스더의 청원은 앞서 하만이 반포한 ‘조서를 철회해 달라’는 것이었죠.
5~6절 ‘이르되 왕이 만일 즐거워하시며 내가 왕의 목전에 은혜를 입었고
또 왕이 이 일을 좋게 여기시며 나를 좋게 보실진대 조서를 내리사
아각 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이 왕의 각 지방에 있는 유다인을 진멸하려고 꾀하고 쓴 조서를 철회하소서
내가 어찌 내 민족이 화 당함을 차마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차마 보리이까 하니’
왕의 인장이 찍힌 조서는 변개되거나 취소될 수 없었습니다.
만일 왕의 조서가 쉽게 변개되거나 취소된다면, 그만큼 왕의 권위가 실추될 것이기 때문이죠.
아마 에스더는 이러한 사실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7절 ‘아하수에로 왕이 왕후 에스더와 유다인 모르드개에게 이르되
하만이 유다인을 살해하려 하므로 나무에 매달렸고 내가 그 집을 에스더에게 주었으니’
왕은 자기가 할 만큼 했다는 것입니다. 그걸 7절에서 얘기하는 겁니다.
사실 왕은 유다 민족에 대해서 그리 큰 관심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에스더가 울면서, 자기 앞에 엎드려 있습니다.
그러면서 왕은 한 가지 대책을 강구해 냅니다. :8
▲8절 ‘너희는 왕의 명의로 유다인에게 조서를 뜻대로 쓰고 왕의 반지로 인을 칠지어다
왕의 이름을 쓰고 왕의 반지로 인친 조서는 누구든지 철회할 수 없음이니라 하니라’
왕이 강구해 낸 해결방안은 쉽게 말하면 ‘맞불 작전’입니다.
산불이 날 때, 불을 피워서 불을 끄는 방법이 있지요. 그걸 맞불이라 그럽니다.
한 번 공포된 조서는 파기할 수 없으니,
새로운 조서를 다시 공포해서, 조서와 조서끼리 맞부딪혀 싸우게 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조서의 내용은 한 마디로, 유다인들이 스스로 적절한 방어 및
자기들을 공격하는 자들을 공격해서 죽일 수 있다는 것이었죠, 9:1~2
▲9절 ‘그 때 시완월 곧 삼월 이십삼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고 모르드개가 시키는 대로
조서를 써서 인도로부터 구스까지의 백이십칠 지방 유다인과 대신과 지방관과 관원에게 전할새
각 지방의 문자와 각 민족의 언어와 유다인의 문자와 언어로 쓰되’
'그 때 시완월 곧 삼월 이십 삼 일'
하만이 유대인 학살을 위한 조서를 반포한 것은 '1월 13일'이었죠(3:12).
에스더가 왕에게 하만의 음모를 폭로한 것은 1월 16일이었을 것입니다(5:1, 7:1).
그렇다고 한다면 본절의 조서가 유대인들에게 반포된 것은,
하만의 음모가 폭로된 지 약 2개월 10일 후의 일인 셈이다.
'모르드개의 시키는 대로 조서를 써서'
왕은 자신의 이전 조서(3:12-14)를 취소치 않고, (취소가 안 되니)
유대인들을 학살로부터 보호할 수 있게끔 하는 조서를 작성하라고 '모르드개'에게 명했죠. :8
'모르드개'는 그 같은 대원칙 아래서 유대인을 학살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조서 작성을 주도합니다.
▲11절 ‘조서에는 왕이 여러 고을에 있는 유다인에게 허락하여 그들이 함께 모여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과
그들의 처자를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
모르드개에 의해서 작성된 왕의 조서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요약해서 알려줍니다.
'그들이 함께 모여' 이는 여러 곳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보다 조직적으로 대적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중요한 비결이었죠(4:16, 전4:12).
거대한 제국에서 미미한 존재였던 소수 민족, 그것도 전국에 흩어져 살았던(3:8) 그들은
모이지 아니할 경우, 수많은 대적들의 공격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비록 유대인에게 자위권(自衛權)을 보장해준 새로운 조서가 왕의 명의로 반포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만이 내린 왕의 조서는 취소될 수 없었기 때문에 여전히 유효하였으므로(8절),
유대인을 미워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합법적인 살인을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유다인을) 치려 하는 자와 그 처자를 죽이고'
페르시아 제국 내에, 하만 말고도, 유다인을 미워하는 자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유다인들에 대해 항상 혐오감을 갖고 있다가
하만의 조서가 내려지자 그것을 빌미로 하여 유대인을 학살할 계획을 하고,
조서에 정해진 유대인 학살 날짜(3:13, 14)만을 기다리던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이같은 무리들은 대개 유대인들의 유일신 신앙을 혐오하는 우상 숭배자들,
또는 유대인의 독특한 율법을 혐오하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그 법률이 만민의 것과 달라서 왕의 법률을 지키지 아니하오니’ 3:8
그래서 성도의 핍박받음은 세상에서 필연적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지키고 사는 한!
‘그 처자를 죽이고'
새로운 조서에 이 내용이 들어간 것은, 지금 이 법은 방어적 성격을 띄고 있습니다.
대적이 공격해 올 때 ’동해보복법‘ 형식으로 방어한다는 것이죠.
’그 재산을 탈취하게 하되’
새 조서에는 이 내용이 적시되어 있으나, 유다인들은 그들의 재산은 손대지 않습니다. 9:10
왜냐면 그들의 전투는 지금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이어서,
자기 사욕을 취하지 않았습니다. 이 내용은 9장에서 더 자세히 다룹니다.
▲12절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에서 아달월 곧 십이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하게 하였고’
'아달월...십 삼 일'은 원래 유대인 대학살을 자행하도록 결정된 날이었죠(3:7, 13).
그러나 이제 이 날은 바로 유대인들이 그 대적들을 진멸할 날로 결정되었습니다.
유다인이 대적들에게 맞불을 놓는 것입니다.
모르드개가 바로 이 날을 대적들을 진멸할 날로 결정한 것은
대적들의 공격에 즉각적으로 대응하게끔 하기 위해서였으며
또한 이날이 되어야 유대인들도 누가 자신들의 대적인지를
보다 분명히 분별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죠.
아마 12월 13일에 대적들이 유다인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유다인들도 대적들을 공격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적용/ 대적들은 유다인을 공격하지 않아도 되는데도, 공격했습니다.
본질이 영적 전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조서가 2개가 반포되었습니다. 두 달 간격으로 두 번째 조서가 발표되었죠.
첫 번 조서는, 12월 13일에 누구든지 유다인을 죽이고 재산을 빼앗을 수 있다는 것이며,
두 번째 조서는, 같은 날에 유다인은 공격해오는 대적들을 죽이고 재산을 취할 수 있다는 거죠.
첫 번째 불은 한번 발화하면 끄지 못하니, 맞불로 끄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11절에, 모르드개의 주도로 작성된 두 번째 조서의 내용을 보십시오.
방어적 성격이 매우 강합니다.
‘스스로 생명을 보호하여 각 지방의 백성 중 세력을 가지고 그들을 치려하는 자들과’
유다인이 가만이 있는 대적들을 색출해서 죽인게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고, 자기들을 치려하는 자들에 대항해서 전투를 했다는 것입니다.
내용인즉, 대적들이 유다인을 12월 13일에 공격하지 않았더라면,
대적들이 피해를 입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적들이 피해를 입게 되는 일이 발생하고 말았습니다.
9:2절에도 ‘유다인들이 아하수에로 왕의 각 지방, 각 읍에 모여 자기들을 해하고자 한 자를
죽이려 하니 모든 민족이 그들을 두려워하여 능히 막을 자가 없고’
‘자기들을 해하고자 한 자를’
이라고 명백히 밝히고 있습니다. 방어전이라는 거죠.
현대의 법에도 정당방위는 무죄입니다.
▲그런데 12월 13일에 수산성에서 대적 5백인, 14일에 대적 3백인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9:6, 15
그 말은, 하만이 작성한 첫 번째 조서에 의거해서,
유다인들을 공격한 대적들이 수산 성에서만 적어도 5백명 이상 있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유다인들을 두려워해서 공격하지 않고, 오히려 도운 자들도 있었습니다.
9:3 ‘각 지방 모든 지방관과 대신들과 총독들과 왕의 사무를 보는 자들이
모르드개를 두려워하므로 다 유다인을 도우니’
그리고 유다인을 두려워해서, 스스로 유다인이 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8:17 ‘본토 백성이 유다인을 두려워하여 유다인 되는 자가 많더라’
그런데 반대로, 유다인을 미워하고 혐오해서, 그들을 죽이려고 공격한 자들도 있었다는 거죠.
수산 성에서만 대적 8백인이 죽었으니, 페르시아 제국 전체에서는 죽은 숫자가 더 많았겠죠.
▲<에스더>를 해석하는 큰 전제 중에
‘하만’을 적그리스도의 예표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당시 유다인을 전원 멸절 하려고 시도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럼 오직 하만 한 사람만 그렇고, 하만만 독특한 별종이었을까요?
아닙니다. 하만이 대표적 인물이었고, 그런 사람들이 수천~ 수만명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12월 13일에 유다인들을 공격했고,
유다인들은 그들을 격퇴하며.. 그 와중에 대적 5백인 + 3백인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지금 말씀드리려는 주제는.. 매 시대마다 <영적 전쟁>이 있다는 것입니다.
매 시대마다 언제나 하나님의 백성들, 주의 자녀들은 세상에 미움이 된다는 것입니다.
뭘 잘못하기 이전에.. 그냥 존재 자체로, 가만히 있어도, 세상은 성도를 미워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세상은, 마귀의 조종을 받아서,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멸절시키려고 난동을 꾸미고, 실행하고, 공격해 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당연한 일이며
정말 목숨을 빼앗길 뻔한 위험이 생기고, 멸절될 위험이 생기긴 하지만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들이 승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스더서의 스토리이고, 주제이고, 저자가 하고 싶은 말입니다.
우리에게 들려주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핍박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한 개 피하면, 다음에는 더 큰 게 옵니다. 항상 원리가 그렇습니다.
그리고 성도로서의 아이덴티티를 결국 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영생도 빼앗깁니다.
일제의 핍박을 두려워해서 신사참배를 가결했고, 실제로 신사참배를 했다가,
지금까지 북한의 형편이 이렇게 어렵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주1)
△16세기에는 마르틴 루터가, 그런 대적의 공격을 정면으로 상대해야 했습니다.
그는 이런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1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 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3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 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 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 나라 영원하리라」
‘요즘은 현대요 평화의 시대라서 마귀의 핍박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혹시 지금 핍박이 없을지는 몰라도, 곧 핍박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평생 예수를 믿어도, 핍박이 없었다는 사람도 간혹 있죠.
그가 아무 존재감이 없기에, 마귀가 화력을 전혀 쏟아부을 이유가 없는 거죠.
아무 역할을 못 하므로, 그냥 제껴놓은 것입니다. 건드릴 필요가 없는 거죠.
▲보십시오. 대적들은 12월 13일에 유다인을 굳이 공격 안 해도 됩니다.
유다인들도 반격하고, 그들과 똑같이 죽이고, 재산을 빼앗을 수 있다는 두 번째 조서도
반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내용도 다 압니다.
그런데도 대적들은 유다인들을 공격하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유다인들이 밉보여서 그런 것일까요?
유다인들이 얏보여서 그런 것일까요?
그게 아닙니다.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요15:18~20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것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택하였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은즉 너희도 박해할 것이요 내 말을 지켰은즉 너희 말도 지킬 것이라’
▲핍박을 허락하시는 이유 한 가지 : 옥석을 가리기 위해서!
이것처럼 불안한 관계는 없습니다.
언제든지 헤어질 준비가 되어 있는 연인,
언제든지 이혼할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부부,
언제든지 사표를 던질 생각으로 다니는 회사,
언제든지 뛰쳐나가고 싶은 집,
언제든지 그만 나가고 싶은 교회생활... 이것은 다 불안한 것이죠.
박수를 받을 때는 주님 곁에 딱 붙어서 제자인 척 했는데
모욕이나 핍박을 당할 때는 멀찍이 떨어져서
'나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예수님은 가려내기 원하십니다.
‘자신이 누구인지를’ 우리보고 깨달으라는 것이죠.
축복과 영광의 자리에서는 제자가 되고
핍박과 고난의 자리에서는 철저히 관객이 되는
이런 포장된 헌신, 헌신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믿음이 없는 헌신... 매우 불안한 거죠.
언제 밑바닥이나 본색이 드러날지 모릅니다.
아마 12월 13일을 앞두고, 자신이 유다인 임을 숨기는 자들도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있었을 것입니다.
말세가 될수록, 적그리스도의 활동이 강화될 것인데,
주님이 제일 원하시는 것은, ‘네 아이덴티티를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는 것입니다.
마10:32~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그를 부인하리라’
우리가 세상에서, 예수님을 시인하지 않고 숨기며 살면.. 결국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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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도입
<에스더>에는 여호와의 이름이 절대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루터와 칼빈은 <에스더>를 성경으로 취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주석도 하지 않았어요.
왜냐면 '하나님의 이름'이 그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에스더>를 세속적인 책이라 본 거죠.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이름'이 표면적으로는 나타나지 않지만
이면적으로, 물밑에서, 우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부터 끝까지
<에스더>에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숨어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숨어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발견해 낼 줄 알아야 하겠습니다.
지난 일제 강점기에도 아마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마치 안 계신 것처럼 느껴지고, 성도는 계속적으로 환난을 받고..
그런데 앞으로 미래에도 이런 순간이 올 수도 있다고요.
그때 우리는 <에스더>를 기억해야 됩니다.
일과 사건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 같지만, 이 모든 일은 우연이 아니며,
성도는, 에스더와 모르드개와 유다 백성들처럼
기도화 회개와 금식과 연합으로.. 대적을 승리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또한 <에스더>는, 1차포로귀환 과 2차포로귀환 사이에 있는 일이다.
원래는 수십 만 명이 돌아가야 했지만,
1차 스룹바벨 귀환 때는 49,897 명, 즉 약 5만 명만 돌아간 것입니다. BC537
고레스 칙령에 의해서, 하나님은 페르시아 제국 내 유다 백성들에게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돌아간 이들은 약 5만명에 불과했다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은, 하만의 몰살 음모를 허락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흔드시는 장면입니다.
부림절 사건이 BC 473년에 발생했는데,
하나님은 무려 64년을 참고 인내하시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한 번 호되게 흔들어 버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BC457년에 2차에스라귀환이 일어나는데,
1차귀환 후 80년 만에 2차 귀환이 일어난 셈입니다.
2차귀환이 발생한 후 12년 후 BC445년에 3차느헤미야 귀환이 일어나고요.
이것만 봐도, 부림절 사건으로 유다인들이 얼마나 혼비백산 놀랐는지 알 수 있죠.
2차귀환이, 부림절 사건 16년 후에 일어났는데요,
앞서 귀환을 준비한 기간을 고려한다면,
뭐 모여서 회의하고, 물자를 비축하고, 예루살렘과 연락을 주고 받은 기간을 고려하면,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그들이 부림절 사건으로 혼비백산 하는 경험을 했고,
좋은 말로 영적으로 갱신되며, 신앙이 부흥하는 체험을 했고,
그래서 2차 에스라 귀환이 부림절 사건 후에 곧 있었던 것입니다.
에스라의 메시지, 느헤미야의 메시지도 아주 날카롭고 예리합니다.
부림절 사건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한 번 대대적으로 부흥을 경험한 것입니다.
지금은 '서론'으로 다루지만, 어쩌면 이것이 <에스더>의 가장 큰 교훈일 수 있죠.
"하나님의 지시나 명령을 불순종하고, 게을리 반응하면,
하나님은 크게 한 번 흔들어 버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 기독교 교계 일각에서는, 북한 땅에 공산정권 수립이 1948.9.9.
꼭 10년 전 조선 기독교 장로회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한 것과 1938.9.9.
무관하지 않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징계, 흔드심이라는 거죠.
모르드개처럼, 하나님 외에 다른 우상 앞에 절하지 말하야 하고,
또한 핍박이 오면 피흘리며 싸웠어야 했는데, 거기에 굴복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교회와 전 성도들이 1938~45년까지 약 만7년간 우상숭배를 하고 말았으니,
그 후에 하나님이 '흔드셨다'는 것입니다.
(물론 통일이 이렇게 더딘 것은, 다른 이유와 섭리도 있겠지요.
그러나 북한의 공산화는, 그 이유가 가장 크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에 있는 백성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전 세계를 흔드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냐면 '제사장 나라'의 사명입니다.
세계 민족들 중에 유독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로 삼으신 거예요.
제사장 나라는, 열방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중간 역할을 해주는 나라가 이스라엘이란 나라란 말이죠.
근데 이스라엘은 이 부르심을 망각한채, 이방인들을 다 개로 여기고
'너네는 하나님도 모르는 개 같은 민족들이야' 하고, 선민주의에 빠져버렸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극우파 유대교 신자들은,
이방 사람들을 별로 교제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분리시키죠.
그건 자기 사명(제사장 나라)을 망각한 것입니다.
물론 그 사명은, 이제 우리 신약교회로 넘어왔지만요.
이렇게 자기 본분을 망각하면,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을 뒤흔드신다는 겁니다.
우리 한국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겠죠.
그 부르심 대로 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이 나라를 흔드신다는 갑니다.
아니 저기 무슨 네팔, 부탄.. 이런 나라는 가만 두시면서
왜 우리 한반도는 이렇게 반으로 갈라지게 하시고..
여러분 전세계에서 반으로 갈라진 나라를 주목하셔야 됩니다.
왜냐면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역사적으로 반으로 가르셨기 때문입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베트남도 남북으로 갈라졌던 적이 있었죠.
남과 북으로 갈라진 민족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성경과 비슷하게 돌아가는 특성이 있어요.
주로 북쪽이 고통 당하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북쪽 백성들이 남쪽보다 훨씬 더 심한 고통을 받습니다.
성경에도 북이스라엘이 남유다보다 더 큰 고통을 받았죠...
우리 한 민족도 부르심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지금 그 부르심 대로 달려 가지 않으면
우리를 하나님이 흔드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만 같은 사람을 들어 쓰실 수도 있는 거죠.
그래서 갑자기 한반도에 있는 교회들을, 언약 백성들을, 힘들게 하실 수도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느 역사학자는 말하기를 '악한 지도자를 세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징계다' 라고 했죠.
백성들이 너무 악하게 살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징계를 보내시는 데,
그 방편 중 하나가 폭군을 세우셔서, 그 아래서 압제를 당하게 하신다는 겁니다.
지금 <에스더>가 그럴 뻔 했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것입니다.
그때 에스더와 언약 백성들이 재를 덮어쓰고, 베옷을 입고, 울며 회개했습니다.
베옷이란.. 짙은 색의 염소 털이나 낙타 털로 짠 옷인데, 그걸 모시와 섞어 짠 모양입니다.
그걸 몸에 두른 다음 줄로 잡아맸습니다. 그래서 '굵은 베옷 linen'이라고 하죠.
아주 꺼칠꺼칠했습니다.
이런 베옷은 주로 상복으로 입었는데,
어떤 극한 슬픔을 표시할 때도 베옷을 입었습니다.
또한 굵은 베로 허리 부분만 가리기도 했다고 합니다. 암8:10
여러분, 우리 한민족에게 부르심이 있습니다.
조선이 없어지고 대한제국이 세워질 때,
이 나라가 하나님 앞에 서원했던 약속들이 있어요.
우리 믿음은 조상들은, 특히 이승만 대통령은
'아시아 최초로 예수교 나라가 되길 원합니다' 하고 선언했습니다.
이승만 박사는 프린스턴 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할 때,
당시는 커리큘럼이 신학을 1년 하게 되어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분이 국회를 기도로 시작하고, 군목제도를 도입하기도 했는데,
아마 대한민국을 기독교적 신앙으로 통치하려고 했던 노력의 흔적들이 있어요.
우리 나라의 소명은 한 마디로 <성서한국, 통일한국 선교한국> 이 세가지 입니다.
이 소명에 우리 성도들 대부분이 동의합니다.
그래서 남한에 있는 교회들이, 이 부르심을 위해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냥 통일해서 우리가 잘 먹고 잘 살자가 아니라
통일 되면, 통일의 힘을 바탕으로,
온 열방 가운데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선교한국이 되겠습니다.. 하는 비전이 있죠.
그런 선교한국으로 나아가는 길에,
먼저 중국과 일본 등의 주변국부터, 우리가 복음으로 선한 영향력을 미치도록
기도하며 애써야 하겠습니다.
이런 한반도의 부르심이 있습니다.
이 부르심에 쓰임받은 우리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평화통일을 위해서도, 성도들은 쉬지 말고 기도해야 됩니다.
미리 준비된 자들은, 통일이 되면 북한 땅을 향해서 달려갈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통일한국, 선교한국, 성서한국에 교회가 관심이 없으면,
하나님이 교회를 흔드실 것입니다.
우리는 지난 3년 동안, '코비드-19' 사태를 통해, 한국 기독교 역사상 초유의
집합금지명령을 받았습니다. 여러 분석들이 있지만
'하나님의 흔드심'이라는 해석도 큰 힘을 얻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교회의 본질에, 더 한발짝 다가가려고 했던 애씀과 기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흔드심'들이 언제든지 올 수 있다는 거죠. <에스더>의 교훈입니다.
주2) 모르드개의 나이, 난제 풀이
2:6절에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모르드개도 함께 사로잡혔더라’
모르드개가 여고냐(여호야긴, 2차포로, BC 597) 때 바벨론에 붙잡혀 온 것처럼 보인다.
이 경우 ‘부림절 사건’이 BC 480년으로 볼 때,
이때 모르드개 나이가, 1살 때 붙잡혀 왔어도 벌써 117세가 된다.
이런 난점에 대한 해결책으로,
1) 혹자는 모르드개가 아니라 모르드개의 선조가 포로로 잡혀간 것을 가리킨다라고도 이해한다.
2) 그러나 관계대명사 절이라고 할 수 있는 본절 전체의 선행사를 '모르드개'가 아닌
'기스'로 보면 한결 문제 해결이 간편해진다.★
즉 본절은 '그런데 그는(기스는) 전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서
유다 왕 여고냐와 백성을 사로잡아 갈 때에 함께 사로잡혔더라'로 번역될 수 있다.
모르드개는 베냐민 자손이니 기스의 증손이요 시므이의 손자요 야일의 아들이었다.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