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사울의 인간됨

LNCK 2023. 12. 12. 20:07

https://blog.naver.com/kaikk/60017653390

◈사울의 인간됨               삼상9:1~14

 

곽선희 목사 새벽강해

올린이 : 조달용 목사

 

오늘 본문 가운데는 어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왕정제도의 문제점 https://rfcdrfcd.tistory.com/15978331

 

특별히 이방 사람들이 왕의 제도를 통해서 그들의 권세를 드러내는 것,

그런 것을 좋게 보아서 ‘우리도 왕을 세워 다스리게 하여 주십시오’ 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전적으로 하나님만 믿는 신앙으로부터 후퇴하는 것을 의미한다.

 

또 사무엘을 믿고 오늘까지 살아왔지만

사무엘이 나이가 많아서 늙어 가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사무엘 다음에 있어지는 문제에 있어서는 인간적으로 미래를 예측하게 된다.

 

그래 사무엘은 늙었고 아들들은 시원치 않고, ‘자, 그러면 어떻게 될 것인가?’

문제는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세우셨으니까 또 다음에 누구를 세우시든지 세우실 것이다.

 

그걸 걱정할 필요가 없는데, 인간적인 입장에서 생각한다.

‘사람은 늙는다. 그리고 (사무엘은) 사라진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을 영영 못 만나게 되지 않느냐?’ 하는 것,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건 인간적인 생각이다.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시고 하나님이 사람을 세우고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그 방편 중에 이런 사람을 택하기도 하고

저런 사람을 택하기도 하는 것이지... 그 일의 주인 되시는 분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시다.

사무엘이 늙었다고 괴로워할 것 전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은 불신앙적이다.

이렇게 신앙이 사라지면서 저들은 왕을 세워 달라고 요구하게 된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이것을 허락하신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게 되는 장면을 보게 된다.

 

결국은 이 많은 사람 중에 이제 사무엘이 (하나님이 택하신 왕을) 만나야 되겠는데,

하나님이 참 귀한 경륜 가운데서 만나게 하신다.

 

물론 하나님이 사울을 선택하신다. 그러나 사무엘과 사울이 만나야 된다.

그렇게 만나도록 경륜하셨다는 사실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경륜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한다. (*룻과 보아스의 만남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가기도 하고 오기도 하지만, 우리가 이 한평생을 살면서 많은 사람과 만난다.

그 만나는 가운데서 그 만남의 관계 속에, 하나님의 경륜과 뜻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모든 만남이 섭리적, 경륜적 만남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 중에는 섭리적, 경륜적 만남도 있는 것이다. 잘 분별해야 한다.

 

▲저는 가끔 결혼 주례를 할 때 그런 이야기를 하지만,

‘하나님께서 짝 지워 주셨다’ 하는 이야기를 강조하게 되고, 막10:9

그리고 그 많은 사람 중에 당신들 두 사람이 서로 만났고, 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고

또 일생을 같이 하자 하는 그런 약속까지 하게 되는데

이것이 우연한 일인 줄 생각하지 말라고,

 

뭐, 한번 해 봤다가 그만 두고 싶으면 그만 두고... 그런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건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에 태어나게도 했고

하나님이 우리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신 것이다.

 

이 만남의 관계 속에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그런 믿음으로 신혼을 시작하라. 그것이 바로 바른 결혼 자세라고 그렇게 강조를 한다.

 

그런데 여기 오늘 본문에도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이) 아주 우연한 것처럼 되어지지만, 그게 아니다.

이건 다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되어지는 것이다.

 

뭐, 나귀를 찾아가서 어쩌고 저쩌게 되는데,

어쨌든 그 많은 사람 중에 사무엘이 사울을 만나게 되고,

또 만날 때에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신다.

 

그래서 이제 사무엘이 사울에게 기름을 붓고 ;네가 이스라엘 왕이 될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하나님이 그를 왕으로 지명하게 된다.

그리고 그 백성들이 사울을 지지하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 순서가 그렇게 된다.

 

◑그렇다면 <사울 선택의 기준이 뭐냐?>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지명하시지만, 하나님이 정하실 때에 어떤 사람을 지명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15:17절에 가서 보면 한 마디로 요약해서 잘 나타나고 있다.

"사무엘이 가로되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스라엘 지파의 머리가 되지 아니하셨나이까

여호와께서 왕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을 삼으시고" 그랬다.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이게 중요하지요.

스스로 작게 여기는 사람, 바로 겸손한 사람, 겸손할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또 백성의 말도 들을 수 있다. 조용히 자기의 양심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스스로 작게 여기는 사람, 하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통하여 역사 하시는 것이다.

언제나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교만한 자를 물리치신다.

 

우리가 이 ’겸손‘이라는 말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된다.

이것은 신앙적 겸손이다.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이다.

그런고로 언제나 하나님께서는 겸손한 자를 쓰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선택의 기준원리다.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는 원리다. 언제든지 겸손한 사람,

심지어는 선택을 했다가도, 그가 교만해질 때 버렸다.

사울이 겸손할 때 그를 왕으로 삼으셨고, 또 왕이 되어 가지고 교만할 때 그를 폐하셨다.

이 진리를 우리가 꼭 생각해야 된다.

 

근본적으로 겸손할 뿐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겸손해야 된다.

그럴 때만이 하나님이 그를 쓰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된다.

 

우리가 겉으로 볼 때는 잘 알 수가 없다. 사람의 속을 어떻게 알겠는가?

그러나 그 진실을 하나님은 다 아신다. 하나님이 그의 겸손을 인정하셔야 된다.

 

▲그러면 하나님 앞에 겸손이란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이 쓰신다고 하더라도

'나는 하나님 앞에 쓰여질 만한 존재가 못됩니다.

언제나 이 일을 감당하기에 나는 부족합니다.

또 하나님이 내게 이런 은혜를 주신 것은 진정 분에 넘치는 것입니다.

이건 감히 내가 맡을 수 없는 것을 내가 맡았습니다.' 하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맡기시는 사명 앞에 겸손한 것이다.

 

찬송가 405장 가사처럼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나 같은 죄인에게 이런 은혜를 주셨다.

나 같이 작은 자를 하나님이 불러 써 주시고 계신다.

그런고로 그에게는 언제든지 감사와 감격과 찬송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게 겸손이다.

언제나 주어진 현실에서 감사하고, 주어진 일에 대해서 더욱더 감격해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겸손이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낮출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쓰셨다는 사실이다.

 

▲이제 오늘 본문에 사울이 어떻게 겸손한 사람인가?

그의 겸손에 대한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신앙적 겸손에 대해서 살펴보자.

 

먼저는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어버렸다. 나귀를 잃어버리는 일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인지 모르지만 암나귀를 잃어버렸다. 이제 이것을 찾으려고 한다.

 

이 나귀를 잃어버린 경위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가 풀을 뜯으러 가다가 잃어버리기도 하고,

혹은 새끼를 찾아 헤매다가 잃어버리기도 한다. 어쨌든 암나귀가 멀리 도망간 모양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말하기를 ‘너는 사환 하나를 데리고 가서 암나귀를 찾아오라’고 그런다.

그럴 때 사울이 찾으러 다닌다.

찾으러 다닐 때 오늘 본문을 보니까 ‘사흘 길을 찾아 헤맨다’.

 

암 나귀를 찾아가라 할 때 '가겠습니다' 하고 나서는.. 거기에 <겸손>이 있다.

또 겸손만이 아니다. 그는 아주 순종의 사람이다. 아버지의 말에 <순종>한다.

 

또 나아가서는 <충성>되다. 꼭 찾고야 말겠다는 것이다.

뭐, 찾으라 그랬으니 하루 찾아보고 ‘그냥 없습디다’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게 아니다. 그저 말씀을 순종하되,

나귀를 찾으라 했으니 찾도록 찾는 것이다. 사흘 길을 헤맸다는 것이다.

이 산 저 산, 이 마을 저 마을, 이 골짜기 저 골짜기를 계속 찾아다니는데 사흘 길을 헤맸다.

 

그만큼 그는 충성되고 믿음직하고

또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해서 성실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그게 충성이었다.

또 그것이 겸손이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된다.

작은 일에 충성될 때, 큰 일을 맡겨도 된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어요.

작은 일, 변변치 않는 일을 맡겼지만, 그 일에 충성을 다할 때

하나님은 그에게 그보다 더 큰 일을 맡기신다. 또 충성을 다하면 또 더 큰 일을 맡기신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어떤 분들은 작은 일은 하지 않고, 큰 일만 하려고 한다.

큰 일만 맡겨 달라고 한다. 작은 일을 맡기면 하지 않겠다고 한다.

이런 일은 구질구질해서 안 하고

굉장한 일, 위대한 일만 하겠다고 하는 그런 사람들을 볼 수가 있다.

 

그건 참으로 잘못되고 어리석은 생각이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나라를 맡기신다. 나라를 맡기고 왕을 삼는데 어떤 사람이냐 하면,

아버지의 심부름을 잘하는 사람, 소년일 때 아버지의 심부름을 잘하는 사람,

작은 일에 충성된 것이다. 그 작은 일에 충성하는 사람을 높여서 왕위에까지 높이신 것이다.

이걸 잊지 말아야 한다.

 

저는 신학대학에 가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그런 이야기를 종종 한다.

열심히 공부하라고.

그뿐만 아니라 이 신학생 때에, 이 수업시간에도 최선을 다해 충성해야 된다고,

 

내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에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 충성에 따라서 하나님께서 당신들에게 큰 일을 맡기실 것이라고.

그리고 또 기왕이면 성적도 좋은 성적을 받아 놓으라고 말한다.

 

‘뭐, 이거 졸업만 하면 되지.. 까짓거 학교성적, 이게 뭐 중요하다고.. 적당히 해도 되지’

이런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 마음가짐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치 않다.


그래서 특별히 요즘 교회에서 목사님을 청빙할 때

학교에 가서 그 사람이 공부한 성적표를 떼 오게 한다. 그걸 보고 평가를 한다.

 

왜? 중요한 것은 학교 다닐 때 공부 안 하고 빈둥빈둥 논 사람은,

목회도 빈둥거릴 가능성이 있다. 왜 그런 말이 있잖아요.

"안에서 새는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공부할 때 공부 성실히 하지 않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하겠는가?

뭐, 꼭 공부뿐만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다 그렇지요.

 

오늘 여기 보니까 사울이 아버지의 말을 잘 들어요. 책임 있게 순종해요. 충성해요.

사흘 길을 헤매면서 찾아요. 이거 참 좋은 마음이지요.

 

▲그 다음 또 보니까 사흘 길이 지나고 난 다음이다.

사환에게 말하기를 돌아가자 '이제는 나귀는 고사하고 아들 잃어버렸다고 걱정하시겠다.'

이 생각이 아주 건전해요. 아버지를 생각한다.

 

자기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찾으라니까 자꾸 찾아야지, 그게 아니다.

나귀는 이미 잃어버렸고, 중요한 것은 아들을 잃어버렸다,

 

3일 동안이나 안 돌아오니까 아들에 대해서 걱정할 테니까

아버지의 마음을 생각하면서 돌아가자 그랬다.

참 귀한 이야기가 아닌가? 얼마나 중요한 마음인가?

 

어느 조그만 책에 보니까 그런 말이 적혀 있더라.

‘인도의 간디가 있지요. 그 간디가 어떤 날 기차를 타는데

기차가 막 떠나려고 하는데 급하게 탔다. 타면서 신발 짝 하나가 벗겨져 떨어졌다.

인도는 더우니까, 평소에 샌들을 신고 다니니까, 잘 벗겨진다.

 

기차는 떠났다. 신발 하나는 신었고, 다른 하나는 잃어버렸다.

그 순간에 빨리 남은 신발을 벗어서 밖으로 던지더란다. 그거 왜 던지느냐고 물으니까

어차피 신발을 하나밖에 없으니 내다 버릴 것인데,

누군가 가난한 사람이 저 신발을 주으면, 한쪽만 가지고 신을 수 있겠느냐?

그러니까 두 짝 다 가져야 신을 테니까, 그래서 남은 한쪽마저 내던졌다고 했단다.

 

이 얼마나 좋은 마음인가?

내 편에서 생각하지 않고, 언제나 상대방 편에서 생각한다.

적어도 이만할 때, 큰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언제나 내 마음부터 생각하는 게 아니다.

남의 마음, 이 말을 할 때에 저 사람의 마음이 어떨까?

내가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은 어떨까? 이것을 생각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까 사울이 참 키도 크고 한데, 이 때는 생각도 아주 훌륭했다.

‘아버지가 아들 잃어버렸다고 걱정하겠다. 자, 이제는 돌아가자.’

 

그럴 때에 사환이 말한다. 한 마디 딱 한다.

"여기에는 선지자가 있는 마을입니다. 선지자에게 가면 뭐든지 물으면 대답해 준다고 그럽니다."

 

그럴 때에 오늘 본문에서 사울은 사환의 말을 듣는다.

그래서 ‘참 그러면 좋겠다’고 했다. 이것 또한 중요한 것이다.

 

사환은 그의 종이다. 사환이 그런 말을 할 때 '이놈아 네가 무엇을 안다고!' 하면서

그냥 가도 상관없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사환의 충고, 종의 말을 들었다. 사환이 하는 말을 귀담아 듣고 그 말을 그대로 따른다.

이게 아주 중요한 것이다.

 

아버지 말만 듣고, 또 지금은 삼일 동안 할 일을 다했으니 이제 돌아가자, 그게 아니다.

하나의 길이 더 남아 있었다.

‘선지자에게 물어 보면 되겠습니다.’ 사환의 말이다.

그 종의 말을 귀담아 듣고 ‘그리하자’ 한다.

 

자, 그 다음에 이렇게 처음 만나러 가는데, 삼일 동안 돌아 다녔기에
먹을 것도 다 떨어졌고 어른을 만나러 가는데 어떻게 그냥 갈 수 있느냐?

이것도 또한 중요하지요.

 

그때 사환이 말하기를 ‘여기 한 세겔의 ¼이 있습니다’ 했다.

이거 사환의 돈이다.

‘됐다 그거라도 가지고 가자.’ 그리고 사무엘을 만나러 찾아간다.

 

이제 다음 장에 보면 사무엘과 사울이 만나게 된다.

여기 보니 사울이라는 사람은 준수하다고 했다. 아주 잘생긴 사람이다.

아주 외모가 잘생겼고 온 이스라엘 중에 잘생겼다고 그랬다.

키도 커서 어깨 너머로 하나 크다.

 

몸은 크고 잘 생겼지만 마음은 겸손하고

아버지의 말에 아름답게 순종하는 사람이고

사환의 말을 귀담아 듣기도 하고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마음이 깨끗하고 충성된 사람을 들어서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삼으신 것을 볼 수 있다.

 

....................................

 

 

◑연약한 산파를 들어 사용하셔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신 하나님 -설교 녹취-

 

출1:16 '이르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해산을 도울 때에 그 자리를 살펴서

아들이거든 그를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여러분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을 해보세요.

딸들은 왜 살려두라 그랬을 것 같습니까? 큰 위협이 안 되니까요.

 

창12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사라를 데리고 애굽으로 기근을 피해 내려가죠.

아브라함이 '당신의 남편인 남자인 나는 죽이고 여인은 살려 둘 줄 알고

내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때 그 대상국이 애굽이에요.

강한 놈은 밟아서 없애버리고, 여인처럼 연약한 존재들은 자기 소유로 삼고..

이것이 세상의 구조입니다.

근데 지금 바로가 애굽의 왕인데, 똑같은 짓을 하고 있어요.

 

자 그런데 여기에 하나님의 위대한 반전이 있다는 말이에요.

이 구원의 실마리를

일반 역사는 볼 것도 없고, 성경의 역사만 뒤져봐도

이 인류의 구원의 실마리를 누가 풀어가나요?

 

1~2장에 보면, 여러분 여인들이 풀어가요.

하찮게 여겼던 여인들이 풀어가요. *산파들, 요게벳, 미리암, 바로의 딸

 

이게 누구의 방식일까요?

하나님의 방법이에요.

 

세상이 하찮게 여기는 것들, 지푸라기들, 쓸모없어 여겨지는 존재들...

근데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과, 그분의 위대하심과, 구원의 섭리는

언제나 그렇게 비천한 여인들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이 누구의 몸에서 태어나셨나요?

한 비천한 여인의 몸을 통해서 이 땅에 오십니다.

 

룻과 다말, 이방 여인의 몸에서 구세주의 조상이 나시고,

전부 이것이 하나님의 오묘한 구원의 섭리예요.

 

이런 일관성 있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식을 통해서

우리는 '크기의 논리, 세력의 논리'에서

이 우상 놀음(놀이)에서 빨리 벗어나야 돼요.

 

하나님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시고, 인류 구원의 실타래를 풀어 가시는가?

바로가 여자아이는 살려 두라고.. 그 의식 밑바닥에는 어떤 가치관 때문입니까?

 

이건 전혀 영향력도 없는 존재들,

그저 내 소유물에 불과한 지푸라기 인생들,

실제 여인의 위상은, 그 시대에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게 얼마나 하나님의 아이러니입니까!

이런 여인들을 통해서 출2장서부터는

요게벳(모세의 모친), 바로의 공주... 이런 여인들의 스토리를 통해서

구원의 새벽이 열리는 거예요. 하나님의 역사의 먼 동이 터오는 거예요.

 

세상은 늘 1등만 주목하고, 강한 자만 살아남는 구조 속에 움직입니다.

우리가 거기에 너무 익숙해 있어요.

 

근데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은 반대라니까요.

바로가 쓸모 없어서 남겨두고 살려 두라는 그 여인들을 통해서

하나님은 구원의 새벽을 열어가시거든요.

 

자 이제이 여인들의 행동을 본격적으로 살펴보도록 하십시다.

 

1:17 '그러나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누가 이렇게 '용기'를 정의했습니다.

'참된 용기란, 내가 두려워할 수밖에 없는 대상보다, 더 두려운 분이 계시다는 것을

인식하는 행동이다'

 

우리는 두려움에 이렇게 둘러싸여 있잖아요.

미래에 대해서 두려움이 있고, 나를 물리적으로 겁박하는 어떤 두려움이 있고...

 

그런데 진짜 용기란, 그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그것보다

더 두려운 분이 존재한다는 사실 앞에 서는 거예요.

 

이 히브리인들을 위한 산파의 행동이 기초가 어디 있었습니까?

여러분, 바로가 얼마나 절대적인 존재였어요?

 

바로와 산파의 존재 차이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간극이 큰 대상이었어요.

그런데도 이 히브리인들을 위한 산파는,

그보다 더 두려운 분을 인지하고 있었어요.

천지의 주재자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 서는 두려움!

 

17절을 잘 보시면, 이것이 산파들의 행동, 동기입니다.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기들을 살린지라'

 

큰 일났어요. 산파들은 왕의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을까요?

없었다고 보십니까?

 

그러면 이 행동은, 자기 목숨을 건 행동이었어요.

이들의 신앙은 대단한 신앙이었어요.

 

누구의 지혜보다 높은 지혜입니까? :10

바로의 지혜보다 높은 지혜였어요.

 

그러면 더 궁금해요.

'이 산파들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20절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

결국이 산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었습니다.

 

1:18 '애굽 왕이 산파를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같이 남자 아기들을 살렸느냐'

 

신적인 존재인 바로가 이 정도 화가 났다면, 이 둘은 죽어야 돼요.

 

근데 그때 여러분 산파가 딱 두 명이었을까요?

둘이 200만 명 가량 히브리인들을 다 감당하지는 못했을 것 같아요.

두 사람은 산파들의 책임자였을 거예요.

 

1:19 '산파가 바로에게 대답하되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 하매'

 

이게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된니다.

근데 이 산파들의 대답 속에는 거짓을 담은 지혜가 있었어요.

 

사실은 히브리 여인들이 애굽 여인들보다 건강한 것도 사실이고,

워낙 생식력이 좋기 때문에 그 말은 사실이고

한편으로는 바로에게 거짓말을 했겠죠.

 

여기서도 히브리 인들을 위한이 산파가, 물론 거짓말을 했어요.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생명을 살리기 위한 거짓말이었어요.

 

그렇다면 '하나님의 옳다' 라는이 정의는

우리가 생각하는 '맞다/ 틀리다' 하는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돼요.

 

1:21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안을 흥왕하게 하신지라'

 

여기 '흥왕'이라는 말에 동그라미 쳐보세요. 히브리어로 '아싸'예요.

하나님을 경외했던 여인들의 집안을, 하나님이 흥왕케 하셨다는 거예요.

 

근데 이 여인들은, 바로의 기준에서는 살려둬도 아무 영향력 없는 존재들이었어요.

이것이 하나님의 언제나 일하시는 방식입니다.

 

항상 우리 중심에 이런 주님 앞에 세워진 기준을 가지고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의 전능하신 손에 붙들리는

약한 자들이 될 수 있기를, 약함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리 "약한 나로 강하게" 찬양하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