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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장, 행위보다도 태도가 더 우선된다

LNCK 2025. 2. 18. 14:36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마음, 중심>    ▣ 예배          

믿음불패2. '태도, 행위보다 태도가 더 우선된다' - 이규현 목사 - YouTube

 

행위보다도 태도가 더 우선된다                         히11:4

   *여기서 '태도'는 마음의 태도, 마음 자세를 뜻함. 거기서 우러나오는 태도.

 

히11: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기독교 신앙생활의 핵심은.. 마음의 문제, 마음 관리, 신실한 마음, 진실한 마음,

하나님을 찾는 간절한 내면, 갈급하고 가난한 마음, 좋은 것과 최선을 드리고자 하는 마음!

이렇게 '마음의 문제, 거기서 우러나오는 진심어린 태도'가

기독교 신앙생활의 핵심이며, 이것이 아벨의 제사 라는 주제!

 

 

◑도입

 

이번 집회에는 여러분들이 믿음에 대한 주제인데요.

새벽에 나와서 말씀을 듣는 것도 중요한데, 개인적으로 기도를 좀 하셔야 돼요.

 

믿음이라는 게 우리가 다 알고 있지만,

그 믿음이 작동이 되려고 하면 기도가 필요하죠.

 

기도가 그만큼 같이 따라 붙지 않으면, 이게 전부 다 어디로 가느냐 하면

머리로 가는 거예요. information이 되는데 그치는 거예요.

그러면 실제적으로는 작동이 안 돼요. 아는데 작동이 안 돼요.

 

이게 (들은 말씀이) 우리의 삶의 워킹이 되려고 하면, 그만큼 개인기도가 보태져야 되죠.

그래서 말씀을 듣고 난 다음에 즉시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고,

그 다음에 일상 속에서 여러분들이 기도를 평소보다 좀 많은 시간을 가지면 좋겠는데

몸이 피곤하기 때문에 기도가 잘 안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싸우셔야 돼요. 한 4주 동안에

그냥 기를 쓰고 노력하면, 하나님이 은혜를 주실 줄로 믿습니다.

 

▲어제 집회 말씀을 잠시 복습하겠습니다.   *1강 rfcdrfcd.tistory.com/15980432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이 증거를 선진들이 얻었다는 거거든요.

그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를

우리의 믿음의 선진들이 이것을 다 얻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 11장에 나오는 모든 사람(선진)들은 보면

칼에 베임을 받고, 핍박을 받고, 갖가지 형태로 죽기도 하고, 순교를 당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여기서 이 '실상'이라고 하는 것은, 100%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 100% 이루어질 실상은 무엇이냐면,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에요.

 

그래서 어떤 면에서는, 믿음을 통해서 시력이 확보되어야 되는데, 천국을 봐야 돼요,천국을!

믿음을 통해서 쫙 보고 보고, 뚫고 뚫고

 

현실의 난감함과, 시련과, 고난과, 죽음의 위기와 위협과 모든 것을 뚫고, 뚫고,

저 넘어 보이는 천국을 봐야... 거기는 100% 이루어질 거거든요.

100% 이루어질 미래에 주어질 그 천국! 그게 실상이에요.

 

현재 눈에 보이는 것은 좀 이루어져도, 안 이루어져도... 그건 다 허상이에요.

뭐 병이 나은들.. 또 죽어요. 또 아프고... 또 병들고...

 

그러니까 우리가 눈에 보여지는 모든 것에 흔들리지 말라는 거예요. 아멘!

이게 믿음이 확보가 돼요. 믿음의 시력이 열려서 천국이 보여져야 돼요.

우리는 천국이 목표이지, 이 세상이 목표가 아니라는 거죠. 아멘!

 

이게 강력하게 나를 사로잡아야, 순교도 해요. 죽는 게 안 무서워져야 됩니다.

여러분, 신자는 죽는 게 안 무서워야 돼요. 오늘이라도 죽으면 죽는 거예요.

 

오늘이라도 주님이 데려가시면, 최고 좋은 데 가는데요, 뭐.

우리가 그곳을 향해 가고 있어요.

 

여기에서 천년 만년 말뚝받고 살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래되든, 저래되든... 현실이 우리를 흔들어 놓지 못합니다.

 

이게 확보되면 당당하죠. 당당해져요.

그래서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실상, 보지 못하는 것들의 그 증거,

선진들이 이걸 얻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말씀대로 생명을 걸고 살 수 있었지,

이 땅이 목표로 잘 되고, 잘 먹고 잘 사는 게 목표라면, 그렇게 (믿음으로) 살 수 없죠.

 

 

◑본론 / 오늘은 믿음의 첫 인물인 아벨에 대한 얘기입니다.

 

아벨의 믿음은 뭐냐?

더 나은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여러분, 믿음의 첫 인물 아벨을 얘기하면서,

(히11장이 말하는) 믿음의 첫 주제가 사실은 예배예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중심에 예배가 놓여져 있습니다.

믿음 생활은 예배 생활입니다.

믿음은 예배에서 드러납니다.

 

예배를 통해서... 그가 어떤 믿음인지, 과연 믿음이 있는지 점검을 받습니다.

매주일 우리가 예배를 드리지만, 오늘도 예배를 우리가 드리지만,

예배 속에 계속 우리는 믿음이 검증되는 시간입니다.

 

참된 예배를 우리가 드리고 있는가요?

여러분 믿음의 삶에 있어서,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우리의 존재 목적이 예배입니다.

교회의 존재 목적도 예배입니다.

다른 거 아무리 많이 해도, 예배가 죽어 있으면, 그건 죽어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참된 예배를 원하십니다. 참된 예배를 기뻐하시죠.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예배자입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라' 4:23

모든 것은 예배에서 시작해서 예배로 끝나야 합니다.

예배에서 신앙이 판가름 납니다.

 

아무리 다른 것을 잘 한다 할지라도 예배에 문제가 있다면,

다른 것은 다 의미를 잃어버립니다.

 

여러분 교회의 예배가, 예배답지 않으면

사회사업, 복지단체와 같은 그런 단체지... 그게 무슨 교회겠어요?

 

여러분 예배가 항상 첫 자리에 놓여져야 됩니다.

무엇을 하든지, 어디에 있든지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높여드리는 것이죠.

만약 예배를 온전히 드리지 못한다면, 모든 것이 뒤틀리고 맙니다.

여기서부터 모든 게 뒤틀리는 거죠.

 

하나님을 첫 자리에 높여드리지 않으면

그 자리에는 반드시 다른 것이 자리하게 됩니다.

예배를 예배답게 온전히 드리지 않으면

그 빈 공간에는 반드시 우상이 자리를 잡게 됩니다.

 

하나님 대신에 우상이 자리를 잡은 곳에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예배가 우리의 삶과 신앙의 사활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를 보면, 역사의 모든 운명은 예배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예배해야 할 제단에, 우상이 끼어드는 순간,

이스라엘의 역사는 쇠퇴해져 갔습니다. 정확하게!

 

이스라엘의 믿음의 상태는, 언제나 제단(예배)에서 드러났습니다.

흥망성쇠가 예배에서 결정된 거죠.

 

여러분의 예배의 자리를 보면 압니다.

부흥도 예배에서 시작되고,

몰락도 예배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오늘 11장에, '믿음 장'의 출발이 예배의 문제로 시작된다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신자는 예배자입니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사역 이전에 예배자여야 합니다.

 

예배자가 아닌 사역자는, 무서운 일을 벌일 가능성이 있는, 아주 위험한 사람입니다.

열심히 한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먼저 예배자여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냥 예배가 아니라,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거죠.

 

'내가 예배를 드렸다'가 아니고, 하나님이 받으셔야 됩니다.

예배를 드렸다고 다 같은 예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참된 예배를 구별하실 수 있으십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아니하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다.. 라는 이 말을,

우리는 긴장감을 가지고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제사를 구별하십니다.

하나님은 단순한 예전, 의식, 분위기, 순서... 이런 걸 받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는 것에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두 사람 다 예배를 드렸어요.

 

어디에나 예배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요.

무엇인가 예배를 해요. 누군가를 섬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배를 드리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리고 만족하는 것은, 내가 만족하는 예배가 아니고

하나님이 만족하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주체는 우리가 아닙니다.

우리의 많은 예배들이 오늘날 사람에게 집중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요.

 

내 마음에 드는 예배, 예배자가 소비자로 전락하는 것이죠.

내 구미에 맞는, 내 기호에 맞는, 내 마음에 드는 예배!

 

예배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관심보다,

예배자 자신에 대해서 신경을 쓰는 예배가 될 때,

소비 중심적 예배가 되는 거죠.

 

그러면 '소비자'들만 늘어나는 것이고,

진정한 '예배자'가 늘어나는 것은 아니죠.

그렇게 되면 예배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가인의 제물을 거부하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셨을까요?

가인은 농사를 짓는 자라서 곡식을 하나님께 드렸고,

아벨은 짐승을 잡아 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혹자는 '피의 제사를 드리지 않아서 받지 않으셨다'

그렇게 옛날에는 많이 해석을 했죠.

 

그런데 이때는 아직 모세의 율법이 내려지기 이전입니다.

제물의 종류가 문제의 핵심은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본문은 히브리서가 신약에서 정확하게 해석합니다. 11:51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 히11:4

무엇으로요? 믿음으로!

아벨은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는, 믿음으로 드리는 제사입니다.

가인은 '믿음으로 드리지 않은 제사'라고 볼 수가 있는 거죠.

 

하나님은 예물 자체보다, 가인의 믿음 없는 태도를 보신 것입니다.

가인의 태도는 금방 드러났어요.

 

창세기 4장을 보면, 하나님이 그의 제물을 거부하시자, 분노를 나타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너가 어떻게 그렇게 분노하며 안색이 변하느냐?'

 

가인이 좀 다혈질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얼굴이 확 붉어졌는 것 같아요.

하나님 물으시니까, 이 가인이 굉장히 과격한 것 같아요.

 

그 분노를 삭이지 못하고, 들에 나가 있는 동생을 엽기적으로 친족살해를 한 것입니다.

그 이후에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물으시죠.

 

그때 가인이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자기가 죽여놓고, 아주 하나님께 대항하는 모습입니다.

 

가인의 모습에서, '그는 결코 예배자가 아니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줍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자였습니다.

 

여기서 가인은 불신자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유다서를 보면, 가인의 길은 심판받을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악인이죠.

 

겉으로는 근사한 예배자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악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에게는 믿음을 찾아볼 길이 없어요.

 

그는 하나님의 이야기를 들으려고 조차 하지 않습니다.

가인은 자기 자신의 길을 걸어갔던 사람이죠.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 것뿐입니다.

그것은 예배 라는 형태를 가졌지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한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가인의 모습을 보면, 하나님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요. 철저한 '자기 숭배자'입니다.

예배자의 모습을 갖추며, 가장 경건한 사람으로 행동했지만

곧 살인자로 전락했습니다. 무서운 일이죠.

 

그래서 인류의 최초의 살인은, 예배의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는 처음부터 예배자가 아니었습니다.

 

마치 가룟유다가 처음부터 주님의 제자가 아니었던 것과 같습니다.

제자로 발탁은 됐지만, 그는 타락한 사람이요,

처음부터 그는 거듭나지 못한 자였어요.

 

15:07초~

 

하나님은, 마음이 담겨있지 않는 제물이나 의식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마음의 중심에 있는 것이 행동으로 드러나죠. 마음의 태도입니다. 마음의 태도!

 

언제나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기울여야 할 관심은, 내적인 태도입니다.

우리의 신앙의 영역에 매우 중요한 게, 우리의 내적인 태도, Inner heart

내면의 마음이 중요하다는 거죠.

 

겉으로 포장된 종교적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내용(내면)을 계속해서 확인하는 작업을 해야 된다.

 

교회를 일평생 다니고, 일평생 교회 안에 살아도, 월시퍼가 아닐 수가 있습니다.

이건 굉장히 도전적이죠.

 

여러분 우리는 일평생 신앙생활을 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의식을 반복하다 보면,

우리의 마음이 빠져버리고, 형식만 남을 위험성이 굉장히 있습니다.

 

마음이 없는 고백, 마음이 없는 감사, 마음이 없는 찬송을 아주 맛갈나게

행하고 있을 때가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내 마음을 들여다 봐야 됩니다.

우리의 마음의 태도를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합니다.

 

믿음은 태도입니다. 그 믿음은 태도요, 그 태도는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벨의 믿음이 예배를 통해서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1. 아벨은 첫째로는 자신의 최고를 드렸습니다.

창4:4절을 보면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으나...'

 

그는 양의 첫 새끼를 드렸다고 했어요.

그리고 그 기름(양의 최고 부위)을 드렸다고 하는 것은

첫 새끼와 그 기름을 드렸다 라고 하는 이 말은 최상을 드렸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에 대한 그의 태도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벨의 마음이 제물에서 묻어납니다. 하나님이 그것을 금방 알아보시죠.

그의 믿음의 표현이 무엇인가를 아신 것입니다.

 

‘첫 새끼’를 드렸다는 말은, 나중에 출애굽기에 유월절에도 언급이 되죠.

그리고 이것은 결국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에서도 발견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것을 내어놓으신 십자가 사건,

그 하나님의 외아들, 첫 아들을 드리신 사건,

이 말은, 하나님이 최상을 내어줬다는 얘기예요.

 

그러므로 첫 새끼는 아벨이 전부를 드렸다는 그런 의미가 있는 거예요.

최상이면서 사실은 전부를 드린 것과 같은,

그게 첫 새끼를 드리는 그 표현을 통하여 전부를 드리는 겁니다.

여기에서 아벨의 마음이 충분히 드러납니다.

 

잠3:9절에 보면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아벨의 제물에서 그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인정했는가를 우리가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의 첫 번째 소득을 어디에 드릴 것인가요?

가장 귀중한 것을 어디에 바칠 것인가요?

 

요즘은 그런 일이 좀 없습니다만

옛날에는 우리 부모님들이 신앙의 부모님들이 첫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경우가 많았어요.

아들의 의지와 관계없이 드리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입이 이만큼 나와가지고 신학교에 온 친구들이 가끔 있어요.

'우리 어머니가 서원해가지고 내가 할 수 없이 신학교에 왔다고'

 

△여러분 첫 번째를 드리는 것과, 두 번째를 드리는 것은 거대한 차이입니다.

순서가 중요한가? 드리는 게 중요하지!

아뇨, 순서도 중요합니다!

 

나의 삶에 하나님은 서열 몇 위인가요?

우리의 돈과 시간을 어디에 드리고 있는가요? 거기에 내 마음이 있는 거죠.

 

하나님을 첫자리에 모셔 드리는 일이, 바로 믿음의 태도에서 결정되는 것이죠.

여러분 이번 이 집회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의 태도를

다시 한번 교정하는 작업이 일어나야 될 줄로 믿습니다. 태도입니다. *설교제목

 

▲2. 또 우리가 살펴볼 것은, 아벨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에 집중한 것이죠.

'믿음으로 아벨이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렸다'는 이 말은

 

믿음으로 드렸다는 이 말은

아벨은 자신의 생각으로 고안해낸 제사를 드린 게 아니에요.

자기가 생각하기에 좋은 제사를 드린 게 아니에요.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은, 하나님께 집중한 것을 의미합니다.

아벨의 관심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뭘 원하시는가?

 

그런데 가인은 달랐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바쳤고, 그것에 만족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은 안중이 없습니다.

내가 '했다 (행위)'는 것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가인에게 하나님은 안중에 없어요. 자기 자신이 이미 왕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버릇 없는 태도를 보였습니까?

 

그는 하나님이 자신의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에 대하여 분노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 당신이 뭔데 내가 드리는 걸 안 받냐?' 이런 의미가 있는 거예요.

'내가 드렸으면 좀 기뻐하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뭐 이런 투예요.

 

가인은 자신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자기가 하는 대로 하면, 하나님이 기뻐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 자기 생각입니다. 자기의 방식을 하나님에게 요구하는 것이죠.

자신의 방식에 몰두하고, 자기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모습...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자기 방식을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서 자기의 주장을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자기의 길을 고집하면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고 봉사를 하면서도, 자신의 방식을 그대로,

옛날의 방식을 가지고 고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자기 마음에 들어야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정해놓은 틀이 있어요. 왜 불평이 일어납니까?

내 마음에 안 든다는 거거든요. 근데 그 마음이 뭐냐는 거예요.

 

'하나님, 요즘 내 마음에 좀 안 들어요. 계속 그러실 거예요?'

 

복음서에서 마르다가 그랬죠.

주님의 발치에 앉아있는 마리아가 마음에 안 들 뿐만 아니라,

주님도 자기 마음에 안 든 거예요.

 

'주님, 마리아에게, 좀 앉아있지 말고, 나를 좀 도와주라 하소서'

화가 나 있는 거예요. 지금 화가 뻗쳐있어요.

 

불평은 자기 생각이 강한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이예요.

자기 생각에 모두가 따라오도록 요구하는 것이예요.

 

가인은 '하나님은 왜 나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는가? 이유가 뭐냐고?

이 정도면 좋아하셔야지!

아벨의 제사와 나의 제사가 무슨 차이가 있냐?'고 따지는 거죠.

참된 믿음은 순종의 태도로 나타납니다.

 

▲3. 아벨의 믿음으로 드린 제사는,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한 태도이었습니다.

아벨은 하나님의 마음에 집중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다'...는 이 구절을 보면, 히11:4

 

아벨은 하나님 앞에 그냥 제사를 드린 게 아니라

자신의 죄의 문제를 들고 나아갔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가인은 이미 의인의 모습을 가지고 있지만,

아벨은 죄인의 모습으로 자신의 죄의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 것이죠.

 

믿음의 제사는, 자신을 살필 줄 아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인됨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모습!

이게 아벨의 믿음의 제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태도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숨겨진 마음의 그 태도에 집중을 하세요.

 

믿음은 우리의 마음의 태도예요. *주제

그거는 반드시 드러나게 되고, 하나님은 그것을 날마다 확인하신다는 거예요.

 

외적인 행위가 아무리 화려해도, 하나님은 그걸 받지 않으세요.

교회를... 뭐 수백 번 다니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마음이에요, 마음!

 

아벨의 마음이,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에서 충분히 드러납니다.

첫 새끼를 드리려고 하면, 여러분 보세요. 신경을 써야 돼요.

 

많은 양떼들 안에서 계속 들여다봐야 되잖아요. 임신한 양이 또 좀 많았겠어요?

가장 먼저 나오는 그 새끼를 하나님 앞에 드리려고 할 때 그 마음가짐!

그 기다리는 태도! 그냥 무심코 한 행동이 아니에요.

 

첫 새끼 나왔으니까 빼가지고 준 게 아니라니까요.

그 안에 섬세한 하나님을 향한 그 배려와, 그 기다림과,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들이 있었던 거예요.

 

하나님은 이런 것을 보신다는 거예요.

우리는 사람의 외적인 행위, 올려진 그 상태만 보지만

하나님은 올려지기 이전에, 이미 그가 구별하여 하나님 앞에 올려드리고자 하는

그 섬세한 마음을 받으셨습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은, 영적으로 민감해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이나 기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 민감해합니다.

 

그래서 예배자들은 센스티브 합니다. 영적인 민감함.

오늘 예배를 드렸을 때 '하나님이 오늘 나의 예배를 받으셨구나!' 이게 와야 돼요.

 

‘내가 예배를 드렸다..’ 라고 하는 자기 만족에 빠져 돌아가지 않고

'하나님이 오늘 정말 나의 예배를 받으셨구나' 이 필링이 온다는 거예요.

 

어느 날은 '하나님, 내가 오늘 너무 내 감정에만 몰두한 것 같습니다.

너무 내 감정에만 빠져 있었습니다.

너무 내 감정만 생각하고 예배를 드린 것 같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또는 '하나님 오늘 제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온전히 왕으로 올려드리지 못한 것 같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우리의 마음을 계속 들여다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살피는 거죠. 우리는 자칫하면 우리의 마음, 우리의 감정,

우리의 기분, 우리의 분위기에 빠질 때가 많아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가 흩어지지만

하나님이 받으시는 참된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는 소수일 수도 있어요.

 

하나님은 사람이 많이 모이고 굉장히 열광적인 예배를

하나님이 즐기시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 진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려하고, 하나님에게 집중하고,

하나님에게 신경을 쓰는 예배자, 하나님에게만 물두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집중한 그런 예배자를 하나님이 찾으시는 것입니다.

 

◑죽어서도 설교하는 사람, 아벨

 

본문 이 마지막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어요.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히11:4

 

아벨은 죽었지만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고 있다는 거예요.

~ 여러분, 믿음의 삶의 영향력이 압도를 합니다.

 

그는 수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인데, 지금도 말하고 있어요.

오늘 우리도 지금 듣고 있죠? 아벨의 얘기를!

 

그는 예배로 인하여 형에게 맞아 죽었지만

오늘 이 세대 가운데 우리가 어떤 예배를 드려야 될 것인가를,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거예요.

 

아벨은 지금도 우리에게 설교를 하고 있는 거죠. '지금도 말하느니라' 그랬어요.

참 아벨이 부러워요.

 

요즘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마치고 나가면서, 설교를 잊어버릴 때가 많잖아요.

금방 잊죠. 나가면서 자동적으로 잊어버립니다.

한 주간 지나면, 지난 주일날 설교 제목이 기억이 안나요.

 

왜 그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그 믿음으로서 지금도 말하고 있는가요?

이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고 싶으시기 때문에!

 

아벨을 통하여 그의 믿음을 통해서 말하게 하고 싶어 하시는 분이 누구예요?

하나님이세요.

하나님 계속 이 일에 대해서 자랑하고 싶으신 거예요.

 

계속 전하고 싶은 메시지, 시대를 넘어서 놓치면 안 되는 교훈이 여기 있다는 거죠.

믿음(진실한 신앙)으로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는 것!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동일하게 강조되는 주제는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행위가 가장 정확하게 드러나야 할 자리가 어디냐?

예배의 자리 라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놓치지 말아야 할 주제 중에 하나가

믿음으로 드려지는 참된 예배입니다.

그 예배가 오늘도 열방 가운데 하나님은 일어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앞으로 천 년이 지나가도, 세상이 변해도

하나님을 향한 예배는 변함없는 가장 중대한 주제가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관심이고, 우리를 향한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받으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참으로 예배하는 그 백성들이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아시기 때문에

오늘 이 아벨의 이야기는, 그가 벌써 오래전에 죽었지만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우리에게 계속해서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벨은 첫 믿음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최초의 순교자예요.

그리고 가장 오래된 증인입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 최초로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은 인물로

믿음의 영웅의 반열에 첫 번째로 등재가 된 것입니다.

 

그가 하나님을 붙들었기 때문이죠. 그가 붙들은 하나, 그것은 바로 예배였습니다.

믿음으로 드린 예배자는,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예배보다. 더 귀중한 것은 없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최고의 관심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히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은 무슨 일을 얼마나 잘하느냐에 관심을 갖고 있지 않으세요.

하나님은 참된 예배를 원하십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안에서 되어지는 거죠.

내일 (특새에) 우리가 살펴볼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에녹)의 이야기,

그것도 예배의 이야기죠.

 

여러분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은 진정한 예배자입니까?

예배의 진심어린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예배가 예배되도록 한다'는 것은,

우리의 신앙의 중심부에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붙들어야 할 핵심을, 우리가 붙들어야 될 것입니다.

그냥 예배가 아닙니다. 온전한 예배, 믿음으로 드려지는 예배,

형식이 아니라 마음을 다하여 드리는 예배,

마음과 정성을 놓치지 않는 예배를 붙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예배에 문제가 생기면, 믿음의 길은 탈선이 됩니다.

참된 예배자의 태도를 잃어버리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의 태도를 놓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마음을 놓치지 않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의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는 이 예배,

언제나 내 삶의 최고의 자리에 하나님을 올려놓고

우리의 마음과 진심을 다하여 주님을 예배하는 그 일에

내 삶의 모든 것을 바치고자 할 때

하나님은 예배를 받으시고 우리의 삶을 복주실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