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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7장 반전의 은혜 P2

LNCK 2025. 4. 28. 18:23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고난/영광의 신학

https://www.youtube.com/watch?v=ecPAawJrIGQ
위 동영상 30:40초부터 녹취

◈반전의 은혜 P2           빌3:12, 신7:6~7       2025.04.21.    P1       

◑3. 빌3장 "멈춤의 반전"

3장에 보면 되게 멋진 말 나옵니다. 
어떤 역설이 나오냐면 "멈춤의 반전"이 나옵니다. 

여러분, 감옥은 멈추어 있는 곳이잖아요. 아무것도 할래야 할 수 없잖아요. 
탈옥하지 않는 이상, 감옥 안에서 할 수 있는 게 없죠. 

놀라운 사실은 빌3:12절과 14절에 보면, '달려가노라'라는 동사가 
연거푸 2번 나옵니다. 

3:12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 follow after'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press on'

말이 안 되는 말이죠. 감옥 안에서 묶여있는 바울이, 
'나는 오늘도 이곳에서 달려간다. 나는 감옥 안에서 달리고 있다. 
나는 지금도 내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달음박질하고 있다'고 편지했습니다. 
이 역설 무슨 뜻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는 묶여있지만, 내 사명은 묶여있지 않다는 거예요. 
나는 이곳에 묶여있어도, 하나님은 묶이지 않는다는 거예요. 

나는 비록 감옥 안에 있지만,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을 위한 일은 
지금도 내가 달음박질하고 있고, 나는 푯대를 향해서 멈춘 적이 한 번도 없고, 
나는 오늘도 부르심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여러분, 살다가 멈추어 있을 때가 있고, 
여러분이 무슨 일을 하다가, 앞으로 한 걸음도 못 나가는 것 같이, 
여러분이 묶여 있는 것 같아도... 여러분, 여전히 주님이 일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지금 여러분 안에 일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분명히 멈추어 있는 바울이 
'나는 오늘도 달려가노라' 이 얼마나 멋진 말입니까? 

여러분 코로나 때 우리 다 멈추었죠. 코로나 때 다 멈추어 있었을 때, 
그때 나온 찬양이, 모든 교회에서 불렸던 찬양이 뭡니까? 

♬날이 저물어 갈 때, 빈들에서 걸을 때, 그때가 하나님의 때 
내 힘으로 안 될 때, 빈손으로 걸을 때, 내가 고백해 여호와 이레 
내가 멈추어 있어도 주가 일하시네 주가 일하시네 아멘 아멘...♬ 

내 힘으로 안 될 때, 멈추어 있을 때, 아무것도 안 될 때, 
바울처럼 내가 묶여 있을 때에도 주님은 일하셔서 
바울은, 그 로마 감옥에 들어온 다른 죄수들 중에는 한 번도 써보지 않은 동사,
즉 '나는 지금 (있는 힘을 다해 모든 힘을 다 짜내서) 달려가노라!'  *3:14 press on 

바울만 유일하게 믿음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나는 멈추었지만 하나님은 쉬신 적이 없다고...' 

시46:10절에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너희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라는 말씀처럼, 
Be still and know that I am your God

여러분, 일이 내 뜻대로 안 되고, 조급한데 일은 안 되고, 
정한 기한에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일이 진척 안 될 때, 절대 조급해하지 마십시오. 

이 부흥회에 잘 오셨습니다. 그럴 때는 일을 좇아가는 게 아니라, 
주님을 만나러 와야 됩니다. 주님 앞에 나아가 기도하면,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주님은 일을 멈추신 적이 없어요. 

나는 피곤해서 졸아도, 나는 피곤해서 자도, 
주님은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면서, 나를 위해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아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보다 여러분의 문제를 더 잘 알고 계시고, 
주님은, 여러분보다 여러분의 문제를 더 잘 해결하시는 분이시고, 
주님은, 여러분보다. 여러분의 문제를 더 잘 해결하는 방법도 알고 계시고, 
우리를 쉬게 하셔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 반전의 역사가 여러분에게 일어날 줄 믿습니다. 

◑4. 빌4장 "자족의 반전"

빌4장에 가면 자족의 반전이 나오죠. 
바울은 '나는 빈곤하고, 나는 궁핍하고, 감옥 안에 있어서 아무 빌어먹을 게 없다'
이렇게 부정적이지 않았습니다. 
 
감옥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은 뭐 먹고 사나? 피골이 상접했겠네...' 그러는데, 
바울은 놀라운 얘기를 합니다. 아니다. '나에게는 넉넉하다. 나는 넉넉하다. 
누가 많이 도와줘서 내가 넉넉한 게 아니라, 
나는 빈부에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빌4:11~12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이 반전이 어떤 반전이냐면, 내 손에 아무것도 없어도, 
하나님 손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고 공급하시기 때문에, 
지금 아무것도 없는 빈털털이인 바울이 뭐라고 얘기합니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족하노라' 말하는 거예요. 4:18 

'나는 다 가졌는데, 문제는 지금 내 눈에 안 보일 뿐이지, 
때마다 시마다 하나님이 내 필요를 채워주실 걸 믿기 때문에 
나는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며 살 때,
지금 손에 별로 가진 게 없어도, 이미 다 가진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불필요하게 많이 주셔가지고,
여러분의 마음이 세상에 빼앗기기를 원치 않으셔요. 
날마다 날마다 주님을 신뢰하고 의뢰할 만큼, 필요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그 비결을 경험적으로 터득한 바울은
오히려 밖에 있는 사람에게 '내가 모든 것을 가지고 있고 또 풍족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4:18

여러분, 이미 하나님의 창고에 모든 것이 다 있는 줄 믿습니다. 이게 반전의 은혜인 거죠. 
그리고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지금 그만큼만 주셨다면, 
그만큼 가지고 살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에게 그 환경을 주셨을 수도 있다는 거죠. 

어느 수도원에 입구에 이런 표어가 쓰여져 있다고 그래요. 
"필요하신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십시오. 
저희가 그것 없이 사는 법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이 진짜 기도로 구하고, 그것이 반드시 있어야 되는 것이면,
주님은 응답해 주실 것이고, 
만약 하나님께 기도로 구했는데, 하나님이 당장에 주시지 않으면, 
지금 주신 것으로도 넉넉히 살아낼 수 있기 때문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마다, In His Time 그분의 시간에 주실 줄 믿습니다. 

그러니까 이 빌립보서의 이 반전이, 대단한 반전이죠. 
1장에 '위기 상황에 처했으나 도리어의 반전'
2장에 '낮아지는데 도리어 높아지는 반전'
3장에 '감옥에 갇혔는데, 자유롭게 달려가는 반전'
4장에 '빈궁하지만 오히려 빈궁과 궁핍에 일체의 비결을 배우는 반전'

이 반전들이 여러분에게 일어나서 
오히려 여러분의 열악한 상황이, 도약의 기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에 무시당하고 낮아지는 경우들이 가끔씩 있고, 
또는 높은 자리에 있다가 추락을 하게 되면서 너무나도 마음이 비참해져 있다면, *2장
걱정하지 마십시오. 겸손을 배운 후에, 하나님의 높여주시는 시간이 오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환경이 동서남북에 꽉 막힌 것처럼 묶여 있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달음박질할 수 있습니다. *3장

하나님, 여러분 손에 많은 것이 없어서 지금 빈곤한 마음으로 마음까지도 가난해졌다면,
그런 마음 갖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마다 여러분에게 넉넉히 공급해 주실 줄 믿습니다. *4장
이게 다 반전의 은혜들이거든요. 

◑구약에 보면 또 하나의 반전의 은혜가 나옵니다. 

신명기에 나오는 반전인데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선민으로 뽑으셨잖아요. 
이스라엘을 선민으로 뽑아서, 거기에서 메시야가 나오게 하실 구속사를 계획하셨는데,

온 열방을 구원하시려면, 하나님이, 좀 강한 민족을 뽑아도 될 텐데, 
그 당시 애굽이란 강대국이 없었던 것도 아닌데,
또 조금 더 기다리면 바벨론이란 강대국도 등장을 할 텐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왜 애굽도 아니고, 바벨론도 아니고, 
연약한 이스라엘 민족을 뽑아서, 그 말도 잘 듣지 않는 그 민족을 통해서 
주님은 역사하셨을까요? 그들을 택하신 이유가 신7:6~7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자기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나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기 
때문이 아니니라 너희는 오히려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신7:6~7

여기에 '반전의 역설'이 나오는 겁니다. 
가장 강한 민족을 택해 가지고, 하나님께서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시는 게 아니라, 
이스라엘을 택한 이유가,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라, 가장 수효가 적고 약해서랍니다. 

아니, 여러분이 어디 직장에서 직원을 뽑을 때, 가장 스펙이 안 좋은 사람을 뽑습니까? 
반대로 가장 스펙이 좋은 사람을 뽑지요.

만약 여러분이 학교의 총장님이라면, 가장 성적이 낮은 사람을 신입생으로 뽑겠습니까? 
세상에 그런 법은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반전은, 하나님의 나라에는, 그런 연약한 사람이 들어와서 사용되고, 
그 약한 자가 쓰임 받는데,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거죠. 

오히려 하나님은 강한 사람보다, 많은 것을 가진 사람보다, 
약한 사람을 통해서... 그를 통해 역사하시는 걸 굉장히 좋아하셔요. 

왜냐하면 하나님도 몇 번 일해보시니까 감이 오시는 거예요. 
강한 사람을 통해서 일하실 때, 하나님이 그에게 강한 능력을 주시니까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헷갈리는 거예요. 
'저거는 저 사람이 했는지, 저 사람이 믿는 하나님이 했는지...' 

왜냐하면 그 사람도 힘이 있으니까, 그 사람도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고, 재력이 있고, 
인맥이 있고... 가진 게 많이 있으니까, 
하나님이 아무리 그 사람 통해서 인맥도 주시고, 재력도 주시고, 지혜도 주시고, 
환경도 열어주셔서 일을 이루셔도, 
사람들은 '그 사람이 했다'고 얘기를 하니까... 하나님이 안 보이는 거예요. 

하나님이 보여야,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텐데, 
하나님이 안 보이면,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기회가 없잖아요. 
굳이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을 찾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러다가 우연히 하나님께서, 가장 약한 사람을 통해서 엄청난 일을 한번 해보니까 
그걸 쳐다보는 모든 사람들이 아무도 의심을 안 하고,

'저건 절대로 저 사람이 했을 수가 없다. 
저 사람에게는 저런 일을 해낼 능력도, 지혜도, 인맥도, 리더십도 없다. 
저건 저 사람이 밤낮 부르짖는 그 하나님이 해주신 거야' 하면서, 
대번에 '하나님은 대단하시다. 너 같은 사람도 쓰시고...' 

그러니까 그는 가만히 있는데, 하나님이 드러나시고 
사람들이 '나도 그의 하나님을 한번 믿어볼까? 
저런 사람도 쓰시면, 나 같은 사람도 쓰시겠는데?' 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님이 그 약한 자를 들어 쓰시고, 
그래서 고전1:27~29절에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래서 여러분 약해도 괜찮습니다. 여러분이 뭐 부족해도 괜찮습니다. 
세상에 나가서 나의 부족하고 약한 걸 이력서로 내밀면 '불합격!' 통보를 받지만,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나와서 '하나님, 저는 약한데 될까요?' 하면,
'너는 합격!' 그러셔요. '내가 원하는 게 바로 이거야! 
나는 약한 자들도, 아무 문제 없이 쓸 수 있어. 
왜냐면 어차피 강하나/ 약하나, 나는 그 사람의 힘을 안 쓸 거거든, 

그 사람이 어차피 지혜가 있거나/ 지혜가 없거나, 
나는 그 사람의 지혜 가지고 일을 안 할 거거든... 

어차피 그 사람 인맥이 있거나/ 없거나, 리더십이 있거나/ 없거나 
나는 그 사람의 인맥이나 리더십을 가지고 무슨 일을 안 할 거거든... 

나는 어차피 그를 통해서, 나의 지혜를 가지고, 나의 능력을 가지고 일 할 거니까, 
그 누구라도 내게 깨끗한 그릇으로 준비하여 자기 자신을 드리면, 
내가 그를 사용할 거야!'

이렇게 하나님 나라의 채용의 문은, 너무나도 관대하여, 세상 기준과 완전히 달라서, 
누구든지 쓰임 받게 되는 줄 믿습니다. 

◑부족함의 신비, 부족함의 역설, 부족함의 반전

그러면 이 부족함 속에서도 반전이 있는데, 
오늘 만약에 스스로, 우리 인간은 모두가 
'한 면으로는 내가 누구보다 낫지... 그러지만 
반대로 또 한 면은, 난 부족해, 다른 사람에 비해 모자라지...' 
하는 양면성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이 부족함에서 나오는 그 힘이, 또 얼마나 위대한지를, 
한번 남은 시간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족함의 신비, 부족함의 역설, 부족함의 반전이 뭐냐면 
부족함은, 새로운 능력을 발견하게 만드는 힘이 있어요. 
다 가진 사람은, 능력이 거기서 멈추는 경우가 많아요. 

그런데 부족한 사람은, 자기가 부족하기 때문에 
또 기도하고 또 섬기고, 또 기도하고 또 부르짖고, 또 성장을 하고...
그래서 부족했던 사람이, 나중에 월등히 뛰어난 경우를 많이 보게 됩니다. 

오히려 그의 열등함이, 나중에 우등함으로 바뀌게 되는 것은 
부족함이 연료가 되어서, 그 사람을 오히려 굉장한 많은 능력을 가지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인 거죠. 

여러분 바울은, 언어가 어눌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가서 말을 하면, 사람들이 실망했다고 그랬어요. 

그러나 하나님이 그에게 언어의 능력을 주시지 않아서, 
바울로하여금 말보다 글을 더 많이 하셨던 거죠. 

그러다 보니까 '말에는 졸하나 글에는 중한 사람이 되었고,' 
그가 쓴 글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주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쓰임받게 되었고, 
그의 편지는 오늘 신약 성경 27권 중에 13권 정도로 우리에게 읽혀지고 있으니, 

만약 그가 말만 잘하는 사람이었다면, 말로 했지, 성경을 안 썼겠지요. 
편지들을 안 썼겠지요. 

말이 어눌하다 보니까, 글을 쓰게 되었고, 
글의 능력이 나타나서, 아무도 감히 들어올 수 없는 성경에, 
그의 서신서가 이렇게나 많이 들어와 있다는 것은,
그가 말에 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다른 능력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지금 어떤 능력이 없어서, 늘 한숨이 나오고, 없어서 원망이 나온다면,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없기 때문에 더 기도하게 되는 거예요. 
없기 때문에 이 집회 자리에도 나와 있는 거예요. 
부족하기 때문에, 주님을 붙들고 있는 거예요. 그럼 되는 겁니다. 그럼 되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 앞에, 내게 없는 것 때문에 나아왔는데, 
그것 때문에 기도하다가... 하나님이 더하여 주시는 은혜를 받는다는 사실이죠.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제가 굉장히 존경하는 분 중에 고 강용우 박사님이 있습니다. 
강용우 박사님이 중학교 때에, 날아오는 공에 맞아서 
양쪽 시력을 다 잃어버리게 되면서, 
그리고 연세대학교를 들어가서 차석으로 졸업을 하고, 
장애인 최초로 미국에 가서 피츠버그 대학교에서 교육학 박사를 받고 

조지 H. W. 부시 행정부에서, 이분이 국가장애정책위원으로, 
우리 한국으로 말하면 차관보 자리까지 올라간... 
이민자로서 뭐 장애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최고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이거든요. 

이분은 워싱턴 중앙장로교회의 신실한 크리스찬으로 살다가 
지금은 주님 품에 가셨습니다.  1944~2012

근데 그분이 그 아내 석은옥 여사님의 간증에 보면, 남편 이야기가 나오는데 
제게 참 감동이 됐습니다. 그분 가정에 두 아들이 있는데, 
큰아들 강진O의 이야기입니다. 

강영우 박사가 미 정부에 일을 하면서, 워싱턴 DC에 살 때죠. 
하루는 퇴근하고 집에 와서,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의 일기장을 엄마가 본 거예요. 
아빠는 못 보죠. 엄마가 이렇게 아들의 일기장을 봤는데,
일기장의 시작부터 끝까지 내용이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 아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아빠는 앞을 보지 못해서 
나랑 놀아줄 수도 없고, 나랑 야구공 던지면서 공놀이도 할 수도 없고,
나랑 자전거도 같이 탈 수 없고, 우리 아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걸 매일 일기장에 써놓은 거예요. 

엄마가 그걸 보니까 가슴이 덜컥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일을 마치고 퇴근한 남편 앞에 앉아서 
'여보, 오늘 첫째의 일기를 봤는데, 이런 이런 내용이 들어있다고...' 
그러니까 아빠의 마음은 또 얼마나 아프고 무너지겠습니까? 

그래서 강박사님은 방에 누워서 잠자려고 하는 첫째 아들 방에,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그리고는 그 머리맡에 앉아서 '아들아, 아빠가 신기한 거 보여줄까?'
'그게 뭔데요?' 

그러니까 점자로 된 동화책을 가지고 와서, 
'아빠는 불을 끄고도 글을 읽을 수 있다!'
'정말이예요?'

그리고는 전깃불을 끈 다음에, 아들의 침대 머리맡에 앉아서 
아빠는 점자 동화책을 완벽하게 읽어줍니다. 

'와~ 아빠, 놀라워요. 또 읽어주세요.' 
아빠는 두 번째 책을 가져와서 점자로 읽어주고, 잠들 때까지 읽어줍니다. 

다음 날도 또 점자책을 읽어주었고, 그 다음 날에도 읽어주었고... 
아들의 눈이 점점 바뀝니다. 생각이 바뀝니다. 

학교에 가서 자기 아빠 얘기를 한 번도 안 했던 친구가,
이제 아빠 자랑을 하기 시작하는데, 
'너네 아빠는 불 끄고 캄캄한 데서 책을 읽을 수 있어? 
우리 아빠는 할 수 있어!' 이렇게 된 거예요. 

이 아들이 나중에 커서 12학년을 마치고, 대학교 시험을 보게 되는데, 
나중에 하버드 대학교 메디컬 스쿨에 가서, 안과 의사가 되어서, 
아버지처럼 맹인들의 눈을 뜨게 하겠다고 해서, 명의가 됩니다. 

10년 연속으로 명의, 최고의 의사가 되었는데, 
하버드 대학교를 들어가게 될 때, SAT 시험도 잘 봐야 되고, 내신도 좋아야 되지만, 
에세이가 굉장히 중요합니다. 

첫째가 대입 원서를 제출하면서 Essay 를 썼는데, 하버드의 입학 사정관들의 마음을 
다 울린 겁니다. 그가 초등학교 때 그 이야기를 쓴 거예요. 

「우리 아빠는 앞을 보지 못하는 분입니다. 
저는 어릴 적에, 아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했던 어느 날에,
아빠가 제 방에 들어와서 불을 끄고 책을 읽어 주면서, 
우리 아빠는 밤늦도록, 내가 잠들 때까지 책을 읽어 주셨습니다.」

그 에세이 제목을 뭐라고 썼냐면 Bedtime Story in the Darkness, 
'어둠 속에서 들려주는 동화 이야기' 

'못한다, 못한다' 생각하면... 나는 아무것도 우리 못하지만, 
'이거 부족해, 나는 저것도 부족해서 아무 일도 못하고, 주의 일도 못한다...'
그렇게 내가 전부 못하는 것 투성이 이지만, 

그 못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다른 은사도 있고, 다른 능력도 있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또 더 멋지게 사용하실 수도 있기 때문에, 
없어서 못하는 사람도 없고, 부족해서 못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능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여러분에게 반드시 그거는 안 주셔도, 다른 거는 주신 것이 반드시 있다... 
이 말이죠. 
내가 부족하다고, 내 인생이 이류, 삼류가 되는 거는 아닙니다...

기도제목들이 첩첩산중이라서, 기도 시간이 더 늘어나서 기도의 능력을 받을 수도 있고,
주님 앞에 울면서 기도하다보면, 주님과 깊은 관계 속으로 들어갈 수도 있고, 
부족하기 때문에 주는 유익은 또 얼마나 많느냐? 이 말이지요. 

♣제가 수년 전에 '유럽 선교사 연합 집회'가 있어서, 로마에 갔다가 
카타콤을 방문한 적이 있었습니다. 

보니까 카타콤이 한 군데 있는 게 아니라, 그게 로마의 장례문화였기 때문에 
가는 데마다 카타콤이 여러 곳에 있었는데, 
제가 가이드를 받아서 갔던 그 카타콤은, 지하 무덤이 굉장히 안으로 깊고, 
그래서인지 유명한 곳이었는데, 가보니까 그 앞에 소녀상 하나가 세워져 있어요. 

그때 있었던 한 소녀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 입구에 동상을 세웠다는 건데, 
여러분 이 카타콤 안에서 크리스찬 들이 핍박속에서 예배를 드리고 하다가, 

군인들이 들이닥치면, 막 거기서 도망을 가고, 숨어서 더 깊이 안으로 들어가고 하는데 
로마 군인들은 카타콤 속으로 들어갔다가, 자칫 길을 잃어서 못 나오는데 

크리스찬들은 등불을 다 끄고도, 그 캄캄한 동굴 속에서 길을 찾아서 도피할 수 있았던 이유가,
이 소녀가 앞을 못 보는 소경이었는데, 
깊은 동굴 안에 있어도, 자기 은사적인 감각으로 
그 안에서 빠져나가는 길을, 손을 더듬으면서 정확히 안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소녀가 수많은 크리스찬들을 살려냈다는 거죠. 
그를 기념하기 위해서, 그 앞을 못 보는 소녀의 동상이 거기에 세워져 있다는 거죠. 

앞을 못 본다는 건 굉장히 슬프고 어렵고 불편한 일일 수 있겠지만 
그것 때문에 하나님이 주신 다른 능력이 있어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도 한 영혼도 못 살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앞을 비록 보지 못하면서도, 수많은 사람을 살리는 일도 있기 때문에 

'우리가 부족하다'는 핑계를 주님 앞에 댈 수가 없는 것은 
우리가 부족하지, 하나님은 부족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은 일하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 하나님이 쓰시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는 줄 믿습니다.    주1) '비슷한 일화'

▲한 가지만 더 나누고 싶은 것은, 부족함은 우리의 사명을 만들어줍니다. 
사명을 발견하게 합니다. 

저는 저희 (강남중앙침례) 교회에서 목회를 하기 전에,
미국에서도 제가 21년을 공부 + 목회하다가 왔는데, 
미국에서 한인교회를 개척해서 17년을 목회하다가 
강남중앙침례교회 3대 목사로 청빙을 받아오게 되었는데요.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제가 목회를 이렇게 하면서 보니까, 
많은 분들이 몸이 아파요. 병원에 갔다왔는데, 암진단을 받고 오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죠. 저도 내려앉고, 그분도 내려앉고... 
그러면서 제가 기도를 해드립니다. 
기도를 간절하게 해드리면서 제가 당부하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이 반드시 고쳐주실 겁니다. 고쳐주실 때 
왜 하나님이 이 병을 주셨냐면 
나중에 이와 같은 병을 가진 분을 위해서 기도하시라고...

하나님이 이 병을 먼저 경험하게 하셨기 때문에, 
이 아픔과 이 병을 치유받은 경험을 통해서
나중에 신유의 기도로, 같은 병으로 투병하는 성도를 붙들고 기도해주는 
간절한 기도의 사명자가 되시라고...' 제가 꼭 부탁의 말씀을 드립니다. 

아무리 암 투병을 하는 분들이 힘들고 고통스럽고, 항암 약이 독하다 그래도, 
항암 주사 안 맞아본 분들은, 그게 어느 만큼 독한지 모릅니다. 

머리카락이 다 빠질 정도로, 온 몸이 바짝 마를 정도로 고통스러운 거 아세요? 
동참하지 않은 고통은, 잘 알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진짜 그 항암 치료를 받고, 그 죽음의 골짜기를 들어갔다가 나와가지고 
치료받았던 그 사람에게는, 
성도 중에 지금 암이 발병되어서 항암치료 시작한다 그러면,
먼저 닭똥같은 눈물을 흘립니다. 

'그거 어떻게 참고 견디나? 그거 얼마나 힘든데...' 느끼는 감정이 달라요. 
그 간절함 가지고 그분을 기도를 하면요, 거기서 능력이 나가는 거예요. 
간절한 기도가 응답되기 때문에...

목사가 아무리 기도를 해줘도, 그분만큼 능력이 기도가 나갈 수 없는 것은, 
그분은 사명자가 돼버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경제적으로 어렵고, 몸이 아프기도 하고, 자녀의 문제가 있고, 
부부관계의 문제가 있고, 무슨 문제가 있어도, 
그거 방치하지 말고 그걸 이겨내면... 

그와 같은 사람들은, 누구도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없지만, 
그 경험을 먼저 극복하고 이겨낸 사람은, 그 경험이 사명이 되기 때문에, 
우리의 부족함은... 자기 사명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주님 앞에서는 버릴 것이 단 하나도 없는 줄 믿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죽이고 난 뒤에, 인기가 올라가는 것은 잠시이고, 
나라 구한 죄밖에 없는데, 사울을 피해서 도망다니게 됐죠. 

대략 17살에 골리앗을 죽이고 난 뒤에, 잠시 그의 사위가 되어가지고, 
박수와 부러움을 받는 듯 하다가... 그때부터 사울에게 악신이 들려서 
추격을 당하다가, 그가 광야로 내쫓김을 당해서, 바란광야, 신광야, 엔게디광야를 
들짐승처럼 도망을 다닙니다. 

단 하루도 평안한 날이 없었고, 하늘을 이불 삼고 흙바닥을 침대 삼으면서 
그 이슬 내리는 곳에서 오늘 하루 연명하고, 
눈을 뜨기가 무섭게 어디에서 자기에게 화살을 겨누고 있는지 몰라서
또 거처를 옮기게 되죠. 

때로는 들짐승이 따라오고, 사냥감처럼 도망가야 되는 그 광야를 도망가는 
말도 안 되는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피눈물 났겠죠. 
'나는 나라를 구한 죄 밖에 없는데, 왜 내가 이렇게 광야를 들짐승처럼 도망다녀야 하고,
하루하루 내 생명이 벼랑 끝에 서 있어야 되는가?' 이해가 안 됐을 겁니다. 

여러분 그 다윗이 광야로 나가서, 한 2, 3년 있다가 돌아온 거 아닙니다. 
자그마치 10년이에요. 30살에 왕이 될 때까지 도망다닌 겁니다. 

그러면 17살에 발탁되었다가, 20살까지 미갈과 결혼해서 1~2년 왕궁에 살았다고 하면, 
10년가량을 광야에서 쫓겨다녔습니다. 아무것도 해석되지 않았을 겁니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하나님 내게 왜 이러십니까? 
왜 나에게 이 광야와 같은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내가 뭘 잘못한 게 있다고, 하나님 나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 

 

얼마나 많이 질문을 했고, 얼마나 많은 시편에 
'주여, 어느 때까지니까? How long? How long?' 

하나님 앞에 '내 살이 뼈에 붙게 되고, 자기의 심장이 녹는 것 같다'고 호소하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지만, 하나님의은 시원한 답을 주시지 않고 
그 고난의 험란한 세월을 10년을 지냈습니다. 
그런 억울하고 고달픈 시간이 없었죠. 그러다가 서른 살의 왕이 됩니다. 

왕이 되었는데 블레셋이 쳐들어옵니다. 
블레셋과 전쟁하기 위해서, 다윗 왕은 군사를 데리고 나갔는데 
블레셋과 전쟁을 한 모든 전장의 장소가 어디냐면, 바란광야, 신광야, 엔게디광야입니다. 
다윗 왕이 군대를 딱 이끌고 나아가서, 광야 높은 곳에 딱 서서 보니,
그 지형지물이 너무 익숙한 겁니다.
 
하나님이 10년 동안 광야에서 구르게 만들다 보니까, 
'왼쪽으로 가지마, 거기는 전갈밭이야! 
오른쪽으로 가지마, 거기는 독뱀이 있어 
조금만 더 가면, 저기에 가면 우물이 있어! 
아무 걱정하지마, 저기 가면 우리가 쉬었다 갈 수 있는 만한 그늘이 있어' 
눈 감고도 광야를 환하게 다 읽어내버리는 사람이 된 겁니다. 

그래서 성경에 뭐라 그러냐면 '다윗이 가는 곳마다 여호와께서 이기게 하셨더라' 
그 10년 이상, 광야에서 방랑하던, 험악한 순간이 없었다면, 
그가 왕으로서 전쟁에서 가는 곳마다 어떻게 이겼겠습니까? 

그때 무릎을 치면서 다윗이 얘기하는 거죠. 
'내가 10년 동안 광야에서 그냥 버려진 자처럼 살았던 게 아니라 
내가 왕의 수업을 받고 있었던 것이구나' 

바로 하나님의 방법이 그런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겪고 있는 모든 일들, 여러분이 지금 지나고 있는 모든 과정은 

어떤 분에게 있어서는 풀 한 포기 쉽게 나지 않는 광야에서 
지금 여러분이 길을 걷고 있다고 할지라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일하고 계시고, 여러분은 왕의 수업을 받고 계시고, 
그 광야의 시간이 끝나고 나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명자로 쓰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그의 성도를 양손으로 붙들고 있으시고, 
단련하고 훈련하시다가, 하나님 쓰실 날에 반드시 멋지게 쓰실 줄 믿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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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카타콤 동상 소녀와 비슷한 일화' 
어느 멋있는 여인이, 기차역에서, 기차표를 사고 나서,
시간이 남았다고 역 주위를 관광 삼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짙은 안개가 점점 몰려오더니,
어느 듯 거리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뿌연 안개로 뒤덮이고 말았다.
오직 보이는 것은, 자기가 내디딜 수 있는 한 걸음 뿐이었다. 

영국 런던의 안개가 그렇게 짙다고 하는데,
다른 것은 주위에 하나도 안 보이는 그런 짙은 안개가 있는데, 바로 그 날이었다.

이제 그 멋있는 여인은, 안개로 인해, 기차역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서둘러 걸음을 재촉해 보니,
안개 속에서.. 가로수에 얼굴이 찔리는가 하면,
전봇대나 길에 세워진 우체통에 자기 몸이 부딪히기도 하였다.
이렇게 헤매다가는.. 아무리 애써도, 정한 시간에 기차역까지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여인은, 주위에 걸어가는 남자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고맙게도 몇몇 남자들이 자기를 따라오라고 했다.
그런데, 그들도 모두 실패하고 말았다.
자기가 늘 다니던 길이 아니라서.. 안개 속에서 그들도 갈팡질팡 하는 것이었다.
시간만 더 허비될 뿐이었다.

그렇게 절망 가운데, 여인은, 길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한 구부정한 노인이 지나가다가.. 이 상황을 감지하고,
혹시 자기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면서.. 자기를 따라오라고 하였다.

그 초라한 노인은, 걸음이 보통 사람보다 느렸지만,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모퉁이를 돌고, 횡단보도를 건너서
그 짙은 안개 속에서도 능숙하게.. 여인을 기차역 앞까지 정확하게 인도해 주었다.

여인은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면서
그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는 순간 깜짝 놀랐다.
‘그 노인은 소경이었던 것이다.’

어떻게 성한 눈을 가진 사람들도 찾기 어려운 길을
눈 먼 노인이 찾을 수 있었을까?

다른 사람들은 연애와 데이트를 즐기기도 하고,
가족들이 소풍을 가면서 기차역을 이용하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다른 사람들이 행복과 즐거움을 누리고 있었던 시간에..

그 소경 노인은,
기차역 앞을 지나다니면서
돌부리에 걸려서 넘어지기도 하고, 가로수 가지에 얼굴이 찔리기도 하고,
전봇대에 부딪혀서 혹이 나기도 하고,
횡단보도를 잘 못 찾아서, 하마터면 교통사고를 당할 뻔도 했었다.

그러나 그 소경 노인은, 그 주변 일대를 날마다 ‘연단(훈련)했다.’
남들이 누리고 즐기는 그 시간에
그 소경 노인은 연단과 훈련을 쌓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 거리에 짙은 안개가 찾아왔다.
사람들은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이리 저리 방황하며 헤매고 있었다.
자기가 아는 길로만 겨우 걸어갈 뿐이었다.

그러나 ‘앞서 길을 먼저 간 사람’이
그 길에서 남들이 웃고 즐길 때, 그가 연단을 받은 것은
‘짙은 안개의 날’에, 길 잃은 사람들에게 눈이 되어주기 위해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