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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1장 반전의 은혜 P1

LNCK 2025. 4. 28. 11:49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영적성장

https://www.youtube.com/watch?v=ecPAawJrIGQ
위 동영상 4:14초~30:40초까지 녹취

◈반전의 은혜 P1          빌1:12       2025.04.21.   

◑도입

필립 얀시 라는 기독교 작가가 이런 멋진 말을 했습니다.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 유일하게 상(변질)하지 않고 남아있는 단어가 있다면 은혜다'

사랑, 정의, 공의 등 기독교를 대표하는 많은 단어들이 있지만 
왜 그가 상하지 않는 단어를 '은혜;라고 말했는가? 생각해보니까 

여러분, 아무 설명 필요 없이 여러분에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만 
말해도, 여러분의 가슴이 뭉클하고 눈가가 촉촉해지면서 아멘이 저절로 나오는 것은, 
은혜라는 말을 하면, 여러분 안에 있는 은혜가 죽어 있는 게 아니라, 
상해 있는 게 아니라, 살아 있기 때문에, 반응을 하게 되어 있는 것이죠. 

이만큼 우리가 '은혜 안에 뛰놀고 주의 영광을 본다'는 찬송가도 있는 것처럼 
은혜는, 우리 신앙생활에, 우리가 꼭 지켜야 하는 소중한 요소입니다.

 

그런데 제가 봐서는 아무리 학력, 재력 그리고 경력, 신앙의 연수가 길어도, 
아무리 30년, 50년 신앙 생활을 해도, 
마귀가 와서 그 사람에게... 하나만 마귀가 빼앗아가면,

즉 '은혜'만 마귀가 도적질해 가면 됩니다... 그가, 또한 우리가 무너지는 거예요.

요10장에 보면 '마귀가 온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거라고 했으니까, 요10:10
마귀의 특징이 도둑질 아닙니까? 그렇죠.

30년, 50년 신앙생활한 사람에게도 '은혜' 하나만 도둑질해가면, 
손발, 아무 물질, 시간 안 씁니다. 

은혜가 떨어지면, 돈이 있어도 돈을 못 쓰고, 건강이 있어도 건강을 쓰고 싶은 마음이 없고, 
'집사님, 권사님, 장로님 이 일을 같이 하시죠' 권해도,

은혜를 도둑맞은 사람은 '아휴, 목사님 제가 할 여력이 없습니다.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주일에 교회 나오는 것만 해도 겨우겨우 나옵니다.' 

마귀가 성도에게서 '은혜' 하나만 훔쳐가면,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이 아무 쓸모가 없어지는데,
 
어떤 분은 보면, 마귀가 훔쳐가려고 해도, 은혜를 도둑맞지 않은 사람은, 
'저 분은 어떻게 일주일 살아내나? 저렇게 치열하게 사는데... 
저렇게 투잡, 쓰리잡 하면서 근근히 일주일을 버티는데, 
저렇게 힘드신데 어떻게 교회 섬기나?' 해도, 

마귀에게 은혜를 도둑질 안 당한 성도는
'집사님, 권사님 저랑 같이 일 좀 하시죠.' 그러면, 
'아멘, 목사님! 저 빼놓고 하실까봐, 저보고 요청 안 하실까봐 조마조마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이렇게 반응합니다. 

그러면 목사님은 '직장 생활 바쁘실 텐데 괜찮아요?' 
'괜찮아요. 제가 주의 일을 하려고 사는 거지, 직장 생활이 제 삶의 전부가 아니잖아요'

이렇게 은혜가 있는 사람은, 시간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능력이 없어도 
다 주의 일을 하게 되더라는 거죠. 

그래서 우리가 '은혜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여러분, 세상 사시다가, 다른 모든 것을 혹시나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잠시 주님이 꽉 붙잡고 안 열어주시더라도 

무슨 일이 있어도, 은혜는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기를 추구합니다. 
왜냐하면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할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는 안 나오지만 이런 굉장히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걷는 사람 위에 뛰는 사람 있고, 뛰는 사람 위에 나는 사람 있고, 
나는 사람 위에 붙어 다니는 사람 있다'고 그래요. 

붙어 다니는 게 뭐냐면, 하나님의 능력에 붙어만 있어도, 
하나님 가시는 곳에 내가 가고, 하나님 머무시는 곳에 내가 머물고, 
하나님 하시는 일을 내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붙어있는 것... 이것을 '은혜'라고 하는 거예요. 

은혜를 잃어버리면, 은혜를 빼앗기면... 교회에서도 멀어지고, 마음도 멀어지고, 
설교도 안 들리고, 모든 것에서부터 분리가 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있으면, 교회에도 붙어있게 되고, 말씀에도 붙어있게 되고, 
봉사에도 붙어있게 되고... 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의 날개 아래 붙어서, 
하나님의 그 광대한 하시는 일을 내가 보고, 주의 영광 가운데 평생 살아갈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일이 있어도 여러분은 은혜를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의 능하신 팔에 붙어있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이번 부흥회 주제가 "은혜가 우리를 살린다" 입니다.
오늘 첫째 날 저녁 설교 제목은 "반전의 은혜" 입니다. 

이 시간에 '반전의 은혜'를 여러분하고 같이 살펴볼텐데, 
일이 막히고, 일이 꼬이고, 일이 안 열리고, 문제가 있고, 몸에 병이 오고, 
큰일이 닥치고, 낭패를 당해도... 희한하죠. 그런 일이 있으면은 망해야 되는데, 
딱 그 순간에 은혜가 임하면, 반전이 일어나요. 

은혜는 반전의 역사가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에게도 은혜가 임하면, 길이 안 열리는 사람이 없고, 
쓰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없고... 

여러분 이번 집회기간 동안에, 밀렸던 주의 은혜가 
강물처럼 여러분에게 밀려오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밤에 여러분 한 분 한 분에게, 반전의 역사가 일어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병이 있는 분에게 반전이 일어나면, 치유가 일어나는 것이고,
코로나를 지나면서 경제적인 어려움이 있는 분에게, 은혜가 임하면, 살길이 열리는 것이고, 
가정이 천국같이 시작했다가 지옥처럼 지금 다툼이 있는 가정에, 은혜가 임하면, 
가정이 다시 천국이 되는 것이고, 

자녀 때문에 피 눈물을 흘리다가, 자녀에게 은혜가 임하면, 
자녀가 주 앞으로 돌아오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 각자 각자에게, 우리가 산 위에 올라왔다 생각을 하시고   *산상기도회
내일은 '산 위의 기도'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게 될 텐데 
여러분, 그러한 '반전의 은혜', 오늘 이 시간에 여러분이 그 주인공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제가 첫 번째 '반전의 은혜'를 여러분과 나눌 본문은 빌1:12절이에요. 
빌1장, 2장, 3장, 4장이 전부 반전의 은혜가 있어요. 
반전은 패러독스라고도 하는데, 그 반전의 역사가, 또는 역설이 
이 빌립보소서 들어있는데, 그걸 좀 설명 드리려고 합니다. 

바울이 감금 중에도 '기뻐한' 이유
여러분 빌립보서는 여러분 잘 아시는 것처럼 옥중서신이죠. 
행28장의 로마 감옥에서 쓴 겁니다. 

그 로마 감옥에서 쓴 옥중서신이 네 권이 있죠.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그런데 분명히 로마 감옥에서 편지를 쓴 바울이, 
빌1장, 2장, 3장, 4장에서 제일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가 뭔 줄 아세요? 
"기쁨"이라는 단어예요.

'카라' 라는 헬라어인데, 모두 19번을 쓰고 있습니다. 
'기쁨'과 그와 유사 단어로요. 

그런데 약간 의아스러운 것은 '감옥'하고 '기쁨'이 너무 결이 다른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감옥'의 연관 단어는 슬픔이죠. 분노죠. 초조함이죠. 두려움이죠. 한탄이죠. 한숨이죠. 

그런데 어떻게 감옥 안에서 바울이 편지를 썼는데, 
계속해서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이렇게 기뻐하라는 말을 19번이나 쓰고 있는 겁니다. 이게 역설이라는 거죠. 

주의 일을 하다가 감옥에 들어와 있었지만, 
바울은 감옥 안에서, 감옥이란 환경 때문에 자기 기쁨을 빼앗기지 않았고, 
그는 기쁨을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기뻐하면, 기뻐할 일을 하나님은 더 주십니다. 

우리가 좌절하면, 좌절할 일만 생기고 
우리가 슬퍼하면, 슬퍼할 일이 첩첩산중으로 다가오지만 

내 마음을 정하여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주를 노래하고 주를 찬양하고 기뻐하리로다' 라고 노래하며 
내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여러분은 어떤 상황에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그런데 이렇게 감옥 안에 들어왔던 바울이, 도대체 어떤 마음으로 감옥 안에 있었길래 
감옥 밖에 있는 빌립보 교회에게 안부 편지를 보내면서, 
오히려 감옥 안에 있는 사람이, 감옥 밖에 있는 사람에게 '기뻐하라'고 말하고 있으니, 

바울을 사랑했던 빌립보 성도들은 
'우리 바울 선생이 감옥에 갇혔으니 슬프다'고 그들은 울고 있었고, 
정작 울어야 되는, 감옥 안에 있었던 바울은, 웃고 있었습니다. 이 말이죠. 

이유가 이겁니다. 어떻게 바울은 감옥 안에서 기쁨을 빼앗기지 않았는가 살펴보니까, 
바울이 이런 얘기를 해요. 
'형제들이여 나는 감옥 안에 있었던 적이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요. 

무슨 말이냐면, 빌립보서에 '기뻐하라'는 단어보다 더 많이 나오는 단어가 뭐냐면 
'주 안에서' 라는 단어입니다. 

'주 안에서,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In the Lord, In Jesus, in Christ' 
라는 표현이 20번 이상 나와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바울이 감옥 안에 있다'고 했지만, 
바울은 고개를 흔들면서 뭐라 그래요? '나 감옥 안에 안 있습니다. 
누가 나보고 감옥 안에 있다고 말합니까? 나는 언제나 주 안에 있습니다.' 

    

사람 눈에는 감옥밖에 안 보이니까 그렇지만, 
감옥 안에 들어간 바울은, 감옥 밖에 있어도 주 안에 있었고, 
감옥 안에 있어도 주 안에 있었고, 

지중해 바다에 밤낮 하루동안 떠 있을 때에도 주 안에 있었고,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도 주 안에 있었고, 
태장으로 맞을 때도 주 안에 있었고, 
언제든지 바울은 주님 밖에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고, 

사람 눈에는 그가 감옥 안에도 있고, 바다에 떠서 표류하기도 하고, 
돌에 맞아 돌무더기에 들어가 있었는지는 몰라도, 바울은 늘 얘기합니다. 
'아니요. 나는 단 한 번도 감옥 안에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주님 안에 있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지금 여러분이 처한 환경 안에 있지 마시고요. 
어떤 파도가 밀려와서 여러분을 덮치는 것 같아도, 
여러분은 주님 안에 있으시길 축복합니다. 

여러분은 주님 안에 있는 존재들입니다. 
'아이고 저 사람 망하게 됐네, 저 사람 근심 속에 있네, 눈물 속에 있네, 
한숨 속에 있네, 다 끝났네' 할 때, 여러분은 고개를 좌우로 흔드십시오. 

'내가 그렇게 보입니까? 아닙니다. 
나는 한 번도 염려 속에, 근심 속에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나는 언제나 In Christ 주님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은, 빌립보서를 옥중서신이라고 불러야 하지만 
예수님을 만난 우리는 옥중서신이라고 부르면 안 되고, 
'주중서신'이라고 불러야 돼요. 주님 안에서 쓴 편지!

감옥 안에서 쓴 편지가 아니라 주님 안에서 쓴 편지! 

저는 여러분이 지금 어떠한 문제에 처해 있어도 
주중 노래를 부르고, 주중 서신을 쓰고, 주중 은혜를 나누시길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일주일 동안 세상으로 나간다고 해서, 세상에 동화되지 마십시오. 
여러분 바다에 사는 물고기가, 그 염분이 많은 바다에서 살아도, 
살아있는 고기 잡아서 회 떠보세요. 짠맛이 없습니다. 

살아있는 고기는 절대로 염분이 몸속으로 침투하고 들어오지 못하는 것처럼, 
주 안에 있는 자는 세상이 침투하지 못하는 줄 믿습니다. 

여러분이 예배 마치고 세상으로 나가고, 월, 화, 수, 목, 금, 토를 지나실 때에 
세상에 염려가 들어오고, 근심이 들어오고, 한숨이 들어오고, 낭패가 들어오고, 
좌절이 들어온다고... 다 야금야금 받아 먹어서 
세상이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세상에 절여지지 말고, 

우리는 세상 안에 살지만,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합니다. 
'나는 세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이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죄짐을 풀었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전혀 없는 줄 믿습니다. 
이게 믿음인 거예요. 
바울이 그냥 장군 같은 믿음이 있어서 바울이 아니라, 

그가 감옥 안에 있어서, 그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울면서 
'바울 선생님, 어떡하나, 어떡하나...' 할 때도 

바울은 '여러분 감옥 안에 들어왔지만 나는 여전히 주님 안에 있습니다. 
주님의 날 안아주는 그 품이 얼마나 따뜻한지 모릅니다. 
나는 오늘도 주님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그 세미한 음성을 듣고, 
주님이 주시는 그 은혜의 날개 아래서 기뻐하고 또한 기뻐합니다' 

♬주 날개밑 내가 편안히 쉬네♬ 
'남들은 감옥 안에 있어도, 나는 주님의 날개 아래에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한 분도, 주님의 날개 아래, 주님 안에 있는 분들이, 
주님 밖으로 나가는 일 없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니까 주님 안에 있으니까, '기쁨의 서신'을 쓸 수 있었던 거예요. 
감옥 안에 있었으면, 기쁨의 서신을 쓸 수 없지만, 
주님 안에 있으니까 근심할 일이 없고, 
주님 안에 있으면 주님이 책임지시는 것 아닙니까? 

걱정을 해도 주님이 하셔야지, 왜 내가 합니까? 
주님이 하실 일을, 여러분이 가져와서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해봐야 안 되고요. 

주님 안에 있으면, 주님이 여러분의 힘이 되시고, 산성이 되시고, 피할 바위가 되시고, 
구원의 뿌리가 되시고, 환난 날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시는 줄 믿습니다. 

시46편에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산이 흔들리고 바다 가운데 빠지고, 바닷물이 요동하여 그 산의 뿌리까지 흔들릴지라도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주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라고 말씀한 것처럼, 

주님 안에 있으면 주님이 여러분을 위해 대신 싸우시고, 일하시고, 
갈 길을 몰라 헤맬 때 길이 되어 주시고, 길을 인도해 주시고, 
원수 마귀에게서 보호해 주시고, 기력이 쇠할 때 여러분에게 힘주시는 분이심을 믿습니다. 
주님 안에 있으면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되는 거죠. 

◑1. 빌1장, 열악한 환경에서 '도리어'의 반전

그렇게 주님 안에 있다 보니까, 빌립보서에 반전의 역사가 몇 가지 일어나는데, 
그 중에 하나가 빌1장에 나오는 반전은 뭐냐면 '도리어'의 반전입니다. 도리어의 반전!

빌1:1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도리어의 반전인데요.
여러분, 은혜가 임하면 '도리어'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열심히 전하다가, 황제에게 상소해서, 황제의 재판을 받기 위해서
로마 감옥에 자진해서 들어간 셈입니다. 행28장

바울이 사도로 부름받은 후에, 3차 선교여행을 하다가,
로마로 가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이 생겼습니다. 행19:21

당시에 로마는 세계의 중심이었고, 모든 길이 로마로 통했기 때문에
'하나님, 저를 로마시 한 가운데 떨어뜨려 주시면, 제 몸이 가루가 될 때까지
열심히 복음을 전할 게요.'

'저를 로마로 보내주시면, 조지 휘필드의 말처럼,
제 몸이 녹슬어 없어지지 않고, 닳아서 없어질 정도로 
이리 뛰고 저리 뛰어서 복음을 전할게요' 했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자유인의 몸으로 보내신 게 아니라, 
차꼬에 매인 죄수로 보내시게 되는 거죠. 그러고 난 뒤에 감옥에 들어가게 됐다는 거죠. 

거기서 가택연금으로 있었습니다. 

(재판 준비 과정에서, 심문이 있는 날에는, 감옥으로 출퇴근 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 날은 아마 사슬에 매였을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내가 쇠사슬에 매인 사신이 된 것은' 엡6:20)

처음에 바울은, 자기가 당한 일에 대해, 그렇게 썩 수긍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자유의 몸으로 로마에 와도, 복음을 널리 전하는 일이 쉽지 않을 터인데,
제 손말을 묶어 놓고서, 제가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또 집에 갇혀서, 어떻게 복음을 전하겠습니까?
하나님, 왜 이런 길로 인도하십니까? 저보고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겁니까?'

그렇게 한숨을 쉬면서 낙망하려고 할 때,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바울은 연금 중에 있는데, 
1:12절에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 원하노라' 하고는,

이어지는 1:13절에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그러니 바울이 로마에서 가장 먼저 전도하게 된 사람들이
시위대, 즉 로마황제의 친위대, 자기를 지키고 있는 일종의 간수들이었습니다.

바울이 황제의 재판을 기다리는 미결수로 있으니, 
그를 지키는 목적으로, 황제의 시위대, 경호부대가 바울과 24/7 접촉하게 된 것입니다.

 

(*혹자는 이 시기가, 가이사랴에서 2년간 구금되어 있었던 시기이며,

이때 옥중서신을 썼다고 주장합니다. 어쨌든)

바울은 자기 셋집에 가만히 있어도, 시위대가 교대로 자기 집을 방문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가끔 재판준비 과정으로 법정에 출두해도, 
자기의 변론을(복음 선포를) 그 시위대 모든 사람들이 듣게 된 것입니다.
지금 빌립보서1장에서, 바울은 그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시위대'는 프라이토리온 인데, 로마군대 헤드쿼터 head-quarter를 뜻하는 라틴어죠.
약 9천명의 출신성분이 좋은 정예병사들입니다.

일반 로마부대는, 귀화한 이방인들, 용병이 섞여 있었지만, 시위대는 순수 로마인들로만
구성되었습니다. 황제에게 반란을 일으키면 절대 안 되니까요.  막15:16참조

로마 시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굉장히 중요한 일이거든요.
그 일을 위해서, 바울은 로마로 가기 원했던 거잖아요.
그런데 막상 그렇게 감금되어 있으니, 바울은 처음에 난감했을 겁니다.

그런데 보니까, 아침에 로마군 시위대 병사 2명이 보초 서기 위해, 찾아오는 거예요.
그래서 자연스럽게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 두 명이 보초를 서면서, 성경공부를 자연히 받게 된 거죠. 
물론, 그 중에는 믿는 사람도 있었을 테고, 안 믿는 사람도 있었을 겁니다.

그건 사람이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거고, 
믿고/ 안 믿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 때문에, 
그 중에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도 있고, 안 믿은 사람도 있었겠죠. 

놀라운 사실은, 오전반 임무가 끝나니까, 점심때에 두 명의 군인들이 또 새로 와요. 
그래서 오후반 성경공부가 시작되었습니다.

밤이 되니까, 저녁 반이 교대하러 왔어요. 
그 후에 또 야간반이 와요. 

행12:4절에 군사 넷씩 네 패에게 베드로를 지키도록 한 것을 보면,
아마 6시간씩 4교대를 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루 24시간을 6시간씩 4교대.

그러니 하루에 최소한 여덟 명씩 복음을 전한 거 아닙니까? 그렇죠.
그러다 보니까 자기는 가만히 앉아 있었는데, 자기가 찾아다니면 발 아프고 힘들 텐데,
자기는 집에 가만히 앉아만 있는데, 알아서 두 명씩 성경공부 받으러 오는 겁니다. 

 

그러다 보니까 13절에 뭐라고 그러냐면
'형제들아 이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것은 
이 복음이 온 시위대 안에 다 나타났다'고 그러거든요.  빌1:13

또 바울에게 감명받은 군인들이, 시위대(프라이토리온)로 돌아가서,
'바울에게 가 보라'로 전도했을 거 아닙니까.
그걸 2년 동안 했으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은 겁니다.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13b  
시위대 9천명을 먹여살리기 위해, 허드렛일 하는 사람, 밥 짓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등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밖의 모든 사람'입니다.

그 사람들도 군인들 틈에 섞여서, 겸사겸사 일하면서 복음을 곁다리로 들었을 거예요.
청소하닥, 바닥 쓸다가, 주방봉사 하다가,
군인들이 나누는, 바울의 전한 복음을 전해 든는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밖의 모든 사람들, 기타 등등의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졌으니 
바울이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일은 신묘막측하도다...'  

그러면서 편지하는 겁니다. 
'로마의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일, 감옥 밖에서도 못하는 일을 하게 하시는 하나님, 
형제들아 내가 묶인 게 아니더라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나를 묶어놓고 
100% 로마 시민들만 내 앞에 오게 해서, 복음을 다 듣게 하여, 
온 시위대 안에 복음이 전해졌도다!' 하고 편지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반전의 은혜가 얼마나 놀랍느냐!' 이 말이지요. 

그런데 이어지는 14절에 보면 그것뿐이 아니에요. 
감옥 안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로마 교회 안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당시에 이미 로마 교회가 있었습니다.

빌1:14~17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바울이 가택 연금 되었다는 소문이 로마 교회 안에서 퍼지자,
희한한 일이 일어났다고 했어요. ↑

자기가 여기에 묶인 것 때문에, 믿음의 동력자들이 두 부류로 나뉘어지는 거예요. 
어떤 이들은 '바울이 복음을 못 전하게 되었으니까, 대신에 내가 열심히 전해야 되겠다'
평소에 별로 열심히 안 하던 사람이, '아휴 바울도 없는데 내가 놀 수 있나?' 하고는, 
이렇게 좋은 뜻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로마에 생긴 겁니다. 

반대로 또 한 부류는, 평상시에 같이 주의 일을 하면서도 
바울이 인기가 많으니까, 늘 시기 질투해가지고 마음이 편치 않았던 사람이 있었는데,
'아이고 바울이 감옥에 있는 동안, 내가 열심히 복음을 전해서, 
나도 바울 같은 명성을 좀 얻어봐야 되겠다' 하는, 별로 선하지 않은 마음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100M 달리기도, 혼자 달리는 것보다, 
여럿이 경쟁해서 달리면, 기록이 더 잘 나오는 거 들어보셨죠? 

로마 교인들 가운데, 선의의 경쟁이 붙어서 
바울은 가만히 앉아 있는 것 뿐인데, 자기들이 로마 시에서 복음을 전해요. 

그래서 바울은 뭐라고 이야기하냐면 
빌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여러분, 이런 반전이 어디 있습니까? 
그는 가택 연금으로 집 안에 앉아있으니까, 
로마 교회에서는 두 팀이 자극을 받았어요.
그래서 바울은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마찬가지로 여러분이 지금 계획한 대로 되고 있는 일도 있을 테고, 
계획한 거하고는 정반대로 일어나는 일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한숨 섞인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 왜 좀 길을 시원하게 안 열어주십니까? 
하나님, 왜 내가 이것만은 하지 말아달라고 했는데, 
이걸 꼭 하나님 나에게 당면하게 하셔서, 이렇게 근심 가운데 나를 놓아두는 겁니까?' 

'하나님, 나에게도 물질도 주시고, 시간도 주시고, 마음껏 좀 길을 열어주세요. 
제가 주의 일을 열심히 하겠습니다.
제가 주의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불덩이처럼 올라오는데, 
왜 나는 옴짝달싹 못 하게, 이런 환경 가운데 나를 묶어두셨나요?' 

하나님 앞에 원망하시는 분에게, 오늘 이 '도리어'의 은혜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rather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12  

여러분이 환경에 묶여 있어도, 하나님께서 '도리어로, 반전의 역사로' 
여러분이 움직이는 것보다, 더 많은 일을 하실 줄 믿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능력이고, 이게 반전의 역사라는 거죠. 

◑2. 빌2장에 보면, 어떤 반전의 역사가 일어나냐면, 
'낮아지면 도리어 높아지는 반전'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말씀합니다. 
빌2:5~6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이시라는 거죠. 

'그러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인간의 몸으로 오셨죠.'  2:6~7

캐노시스의 영성, '자기를 비우셨다'는 겁니다.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살펴 보겠습니다. 

빌2장의 반전은, 우리가 낮아질 때, 하나님이 높여주시는 반전이거든요. 
예수님이 하나님인데 인간으로 오셨습니다. 
인간으로 오셨는데, 인간 중에도 계급이 있는데, 가장 낮은 인간으로 오셨다는 거예요.

그 당시에는 계급사회였기 때문에, 그러면 종도 구원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인간의 몸에서 → 종의 형체로 또 더 낮아진 거예요. 
그래야 종들도 구원할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예수님이 보니까, 종이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인간인 줄 알았는데, 
종보다 더 못한 사람이 있더라는 거죠. 어디 있습니까? 감옥 안에 죄수들! 
그래서 죄인의 몸을 입기까지 또 낮아지신 거예요. 

그런데 그 죄인들끼리도 레벨이 있어요. 
죄인 중에 제일 극악무도한 죄인이 뭐냐면, 사형수예요. 
그래서 예수님은, 사형수가 되는 데까지 낮아지셨어요. 

존귀하시고 높고 높으신 하나님이면서 
인간도 구원하시고, 인간 중에 종도 구원하시고, 
종들 중에 죄인도 구원하시고, 죄인 중에 가장 극악무도한 사형수까지 
다 구원해야 되기 때문에... 예수님은 낮아지고, 낮아지고, 더 낮아졌더니 
성경이 뭐라 그럽니까? 

빌2:9~11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이게 역설이라는 거예요. 낮아지고 낮아지면, 더 낮아지면 
하나님은 그를 높여주시고, 높여주시고, 더 높여주십니다. 
이 역설, 이 반전의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누가 여러분을 낮출 때, 무시할 때, 멸시할 때, 
내게 기분 안 좋게 말할 때, 은근히 나를 무시하고, 자기보다 못한 사람 취급을 할 때, 
여러분 너무 화내지 마세요. 그냥 낮아지십시오. 
바울도 '내가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다'고 그랬습니다. 고전4:13

복음 전하다가 나를 무시하면.. 내가 기꺼이 무시를 받고, 
나를 우습게 여기면.. 우습게 여김 받고 낮아지고 더 낮아져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 지금 누구 때문에 기분 상하고, 누구 때문에 자존심 상하고... 
그래서 기분이 좋지 않은 분이 있다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때가 이르면 반전의 역사가 일어나면, 사람은 나를 낮추지만, 
때가 이르면 하나님은 높여주십니다. 높여주시고 높여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더 낮아지실 수 없는 데까지 낮아졌더니,
하나님이 '이제 내가 일할 시간이구나' 하시면서 
그를 지극히 높여, 하늘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있는 모든 것까지... 모두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게 하는 반전의 역사를 이루어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나를 무시하고 괄시한다고, 기분 나빠할 일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세상 사람 누구가 점수를 매긴다고, 그 점수가 사실이겠습니까? 
다 헛된 점수이기 때문에, 매겨주는 점수에, 사실 여러분 그렇게 기분 상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 주 종려주일 때 저희 교회에서 성찬식을 했습니다. 
성찬식을 할 때에 예수님께서 떡을 떼시고 그리고 잔을 가지시고 
'받아 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찢기는 나의 살이요. 
이것을 먹을 때마다 나를 기념하고, 잔을 받아 마시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죠. 

그걸 주시면서 주님이 또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게 뭡니까? 
이것을 먹고 마신 후에, 땅끝까지 이르러 나의 복음의 증인이 될 때 
'너희도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밥이 되고,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서 피가 되어라'
라고 하는 그 메시지가, 성찬 속에 들어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 세상으로 나아갔을 때, 여러분은 누군가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밥이 되어야 되고, 피가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우리 성도님들한테도 얘기했던 게 뭐냐면, 
여러분 절대로 크리스찬이 세상에 나가서 이런 말 하면 안 된다고! 
사람들 앞에 '내가 네 밥이가?' 이 말을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우린 밥이 맞습니다. 우린 밥이에요. 밥으로 먹히기 위해서 세상으로 나아가는 겁니다. 

또 이런 말을 하지 말라고 그랬습니다. 
'너 나를 물로 보냐?' 우리는 물이요. 세상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흘리는 피입니다. 
그래야 그들이 살고, 나도 삽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높은 자세를 하고는 복음을 못 전하는 겁니다. 
기꺼이 그들의 밥이 되어주고, 기꺼이 그들을 위한 희생의 피가 되어주고, 
물이 되어줄 때... 밥으로 보이고, 물로 보여서 낮아질 때 
그들은 감동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낮아진 그 모습을 보시고,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높여주시는 겁니다. 
절대로 여러분 자존심 상해하지 마세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자존심 상할 일 하나도 없는 줄 믿습니다. 
이게 빌립보서에 나오는 두 번째 역설이거든요. 낮아질 때 높여주시는 역설!  *빌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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