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2장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게 하는 성령
https://www.youtube.com/watch?v=GoArctsqTYc 정리
* '정리'라는 말은, 주제는 같으나, 서술이 원래 내용과 약간 다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복음, 십자가의 도)를 깨닫게 하는 성령 고전2:10~16 2025-04-13
▲도입
고전2:1~5절까지는, 사도 바울께서 과거 고린도에서 말씀을 전했을 때,
그때 어떻게 자기가 사역했는가 하는 것을, 거기에 언급을 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2차 전도여행 때, 세운 교회이고,
지금 바울은 3차전도여행 중에 에베소에서 고린도전서를 쓰고 있습니다. 약1~2년 지났죠)
먼저는 바울이 결심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그것만 알기로' 결심했습니다. 2:2
그때 바울의 마음은 약하고 또 심히 떨고 두려웠습니다. 2:3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 말씀을 전했나요?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 안에서
그는 말씀 증거를 했다'고 고백을 합니다. 2:4
그러면 아마 이 말씀을 듣고 있는 분들은, 질문이 생길 것 같아요.
'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고,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말씀을 전했나?'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이, 2:6~16절까지 말씀입니다. 대부분 오늘 본문이죠.
지난 주는 2:6~9절까지 말씀을 다루었고,
오늘은 2:10~16절까지 살펴볼 텐데요.
바울은 왜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증거할 때,
성령의 나타나심 만을 의지했는가요?
2:6~9절까지 바울이 답하는 것은,
인간의 지혜로는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거죠.
십자가의 말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 계획을
인간의 지혜를 통해서는, 도저히 하나님의 지혜를 깨달을 수가 없기 때문에
바울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 라고 설명을 합니다.
오늘 다루는 2:10절부터의 말씀은, 적극적으로 바울은 설명을 하는데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집니다.
2:10~12절 :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비밀, 지혜를 어떻게 깨달을 수 있는가?
그 답은 성령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다는 거고요.
2:13~16절 : 그러면 이 십자가 말씀을 말씀을 가르치는 설교자들,
또 말씀을 듣는 성도님들이 계십니다.
이 십자가의 도,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라면,
말씀을 가르치는 자는, 또한 듣는 사람은 <성령님을 간절히 의지해야 된다>는 거죠.
◑고전2:10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보이셨다' 라는 말은 '계시하셨다' 라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은 '감추어진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방법으로? '성령으로'
이것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이셨다'라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그런 다음 설명하는 내용은 뭔가 하면 '성령은 도대체 누구신가?'를 설명합니다.
'성령은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는 분이시다'
이 말은 '사람의 지혜가 미쳐질 수 없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뜻과 계획, 그 깊은 것 까지도 통달하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통달'이라는 말은 '샅샅이 살피다 search' 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성령님은 하나님의 깊은 생각, 깊은 계획, 그 모든 것을 샅샅이 살피셔서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같은 말씀을 11절에는 하나의 비교를 통해서 같은 교훈을 줍니다.
◑2:11 '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무엇을 비교하냐면, '사람의 영' 과 '하나님의 영'
이거는 뭔가 하면 '사람의 생각'입니다.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깊은 생각과 뜻은, 아무리 친한 아내와 남편 또 자녀를 할지라도
짐작만 할 수 있지, 사람이 가지고 있는 깊은 생각들을, 남들은 알 수 없습니다.
누구만 아나? 바로 자기 속에 있는 영만 알 수 있죠.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깊은 생각과 뜻과 계획은 누구만 알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자신의 영, 곧 성령만이 이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설교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2:4~5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이어지는 12절에, 바울은 이 사실을 한 번 더 또 강조합니다.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님은 누구시냐?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입니다.
성도는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다'
이게 그리스도 인의 정체성이죠.
12절은 우리 교회 '제자반' 필수 암송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누구냐?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에 대해서 대적하게 하고,
무지하게 만드는 세상의 영을 받지 않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영을 에게 주신 목적이 뭐라고 했습니까?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2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바로 '십자가'로 대표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내 모든 죄가 용서함 받고,
또 성령님을 부어주셔서 나의 인생을 하나님의 걸작품으로 새롭게 빚어가시고,
하나님이 준비하신 새하늘과 새 땅을 우리에게 허락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들을 바로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는가?
세상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을 주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 고전2:10~12절까지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비밀 지혜, 하나님의 깊은 것,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것들,
이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성령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이렇게 우리에게 분명하게 증거를 했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적용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이 말씀이 팩트, 사실이라면,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누구를 의지해야 되겠습니까? 바로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을 의지해야 됩니다.
그런데 이거 정리를 잘 하셔야 되는데,
오늘 설교를 듣다가 성령님들 중에 만약에 소위 '은혜를 받는 분들'이 계셨다면,
앞으로는 용어와 표현을 좀 더 정확하게 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간혹 어떤 분은 '목사님, 제가 설교에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하세요.
그런데 그 내용을 자세히 여쭈어 보면, 전혀 다른 내용으로 은혜를 받으셨어요.
예화로 '고부 갈등'을 들면, '며느리에게 망신 당해 고생하는 시어머니'
그 내용... 그러니까 자기가 처한 입장을 옹오해주는 그런 내용에,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은, 자기 직업이 '건설, 건축' 이예요.
그러면 설교에 '건설, 건축' 예화가 나와서 은혜 받았다고 합니다.
과거에 어떤 할머니는, 목사님 얼굴이, 오래 전에 죽은 자기 아들 얼굴과 닮았다고
또 은혜를 받는 분도 있었어요. 목사님을 보면, 자기 아들 생각이 난다는 거죠...
그래서 '목사님, 은혜 받았습니다' 라는 말을, 요즘 곧이 곧대로 듣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저 '인사치레' 정도로 듣지요.
'은혜를 받았다'고 말할 때는, '성령님이 도와주셔서, 성령님이 깨닫게 해주셔서,
어떤 통찰력을 얻었다든지,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그때 '은혜 받았습니다' 하는 것입니다.
한 번씩 제가 설교한 후에 2, 3일 지나서 '고맙다'고 한 번씩 문자가 온다거나
연락이 올 때가 있어요. 그런데 제가 당황스러운 이유는 뭔가요?
그분이 '은혜 받았다'고 나누시는 내용이, 제 설교 내용하고 거의 상관이 없는
다른 내용으로 은혜를 받으셨어요.
30년 전에 일입니다.
어떤 분은, 자기가 선물한 넥타이를 메고 나오면, '은혜 받았다'하시는 분이 있었고,
반대로 그 넥타이를 메고 나오지 않으면 '시험 들었다' 하시는 분들이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부담주는 선물은, 주고 받지 않는 것이 훨씬 그 분을 위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제가 설교를 했는데,
깨달은 은혜의 내용은 사람들마다 각각 다 달라요. 그 이유가 무엇이죠?
깨닫게 하는 것은, 제게 달린 게 아니고,
깨닫게 하는 것은 성령님이 하시는 일이라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왜 이것을 강조하느냐?
마치 '깨닫게 하는 능력이 목사에게 있다'라고 생각하면,
사람들은 누구를 따르나요? 목사님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깨닫게 하는 능력이 성령님께 있다'ㅍ그러면 어떻게 되죠?
우리는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구하게 됩니다.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충분히 인정을 하고, 그분들의 수고를 우리가 높이 평가하지만,
과거에 한국교회의 아픔 중에 하나가 무엇이었느냐?
성도들이 '깨닫게 하는 능력이 마치 목사님에게 달린 것처럼'
그분들을 추종하거나, 우상화하며 따르는 일들이 많이 있었어요. 과거에.
그래서 교회가, 때로는 걷잡을 수 없는 혼란과 아픔 속에 빠졌던 적이 있었습니다.
저희들과 같은 목회자는 누구냐? 도구에 불과하죠.
깨닫게 하시는 일은 누가 하시는가? 성령님이 하십니다.
그래서 항상 말씀을 전하거나 말씀을 들을 때
우리는 '깨닫게 하시는 성령님'을 우리가 의지하고 그분을 높이는 성도들이 되셔야 됩니다.
절대 사람을 높이면 안 됩니다.
◑2: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조금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분별'이라는 단어가 14절, 15절에도 나옵니다.
여기서 '분별'은, 한글로는 똑같지만,
13절에 사용된 '분별'과
14절에 사용된 '분별'은 약간 다른 단어입니다.
13절의 '분별'은 sygkrino, 영어로 comparing 입니다.
특히 둘을 묶어서 서로 비교 분별하는 거죠. to joint together, combine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 분별하느니라'
KJV 는 'comparing spiritual things with spiritual'
NASB 는 'combining spiritual thoughts with spiritual words'
이렇게 comparing, combining 각자 다른 단어를 썼지만, 같은 의미로 보면 됩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는 말처럼,
둘을 결합 combine 해서 대보면, 금방 분별 compare 이 되는 거죠.
저와 같이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들, 또 순장님들, 교사분들도 여기에 포함이 되겠죠.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이 놀라운 구원계획,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야 되겠습니까?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로, 이 진리를 가르쳐야 된다는 겁니다.
▲저는 한 40대 후반까지는, 성경에 모르는 게 너무 많았기 때문에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습니다.
너무 오래 걸렸고, 그래서 성경을 공부를 하다 보면 깨달음이 올 때가 있어요.
'우와, 이런 진리가 이 구절에 들어있었구나, 본문 말씀 속에 이런 진리가 있었구나'
그래서 '이번 주일에 설교할 때, 내가 이 진리를 성도들한테 잘 설명해 주면,
아마 성도님들이 나를 보는 태도가 달라질 거야...' 제가 한 번씩 생각했던 적이 있었어요.
그런데 실제로 설교를 해보면, 항상 결과는 어떻겠습니까?
결과는 예상과 달리, 죽 쑤는 것으로 나타나죠.
분명히 그 포인트, 이건 엄청난 것을 제가 깨달았는데
그런데 막상 전해 보면, 이게 소통이 잘 안돼요. 반응이 밋밋했습니다.
그런데 또 반대의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 이 말씀을 제가 노력은 했지만, 제 한계가 너무 큽니다.
하나님, 저한테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들로, 성령님을 의지해서 이 말씀 가르칠 수 있도록
하나님, 저를 도와주십시오. 깨닫게도 해주시고, 가장 적절한 표현도 생각하게 해주시고,
정말 성령님께서 가르쳐 주신 말들로 이 설교가 진행되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간절하고 겸손히 의지를 하면,
정말 제가 설교하면서도 '야 하나님이 나를 도와주고 계시는구나' 하는 것을
제가 느낄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설교를 준비할 때 결국 두 부분입니다.
-한 부분은 주초에는 정말 나름 열심히 공부를 해서, 강의안을 만들고, 설교의 틀을 짜고,
이게 주중에 한 3일 정도는 이렇게 보냅니다.
이제 목요일부터 3일은 뭐 하는 시간이냐?
애들 말로 하면 제가 멍 때리는 시간입니다.
설교 준비를 해놓고, 그 다음에는 그냥 하나님 앞에 그냥 가만히 앉아가지고
'하나님, 제가 최선을 다해서 나름 준비를 했는데,
하나님, 이 진리의 말씀을 성령님이 가르쳐 주신 말로, 성도들에게 나타낼 수 있도록
성령님이 가르쳐 주신 단어, 성령이 가르쳐 주신 표현으로 이것을 잘 전달할 수 있도록
저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사실은 주중 후반부의 시간입니다. *목~토
만약 이 시간이 빠져버리면, 아무리 제가 준비를 했다고 한들 저의 설교는 뭐가 되느냐?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이에요. 그러면 뭐가 되느냐?
설교에 능력이 나타나지 않고, 성도님들과 영적인 소통이 이루어지자 않아요.
왜요? 이 설교가 깨달아지는 것은 이유가 뭔가 하면
말씀을 가르치는 저에게도 성령님이 계시고,
말씀을 받는 성도들 속에도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에,
이 성령님이 우리를 소통하게 만드는데,
제가 성령이 가르치심을 의지하지 않으면,
진정한 영적 소통이 일어나지 않죠.
지금 바울은 우리에게 교훈을 했습니다.
'말씀을 는 전할 때 깨닫게 하시는 분이 성령님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말씀을 전해야 되나?
하나님의 영적인 진리를 성령이 가르쳐 주신 말들로 표현해야 된다.'
이것은 앞으로 교회를 섬기는 모든 사역자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 제목이 되어야 돼요.
또 순장님들 교사분들까지도 말씀을 가르치는 분들이
항상 빠뜨리지 않고 기도해야 될 제목이 바로 이겁니다.
'하나님, 내가 하나님의 말씀,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는데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바로 성령님이 가르쳐 주신 말로 가르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자 14절부터는 '전하는 자에서' → '말씀을 듣는 사람들'로 초점이 옮겨갑니다.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말씀을 듣는 사람들을, 사도 바울은 두 종류의 사람으로 구분을 합니다.
그래서 14절은 육에 속한 사람이 등장하고 *프쉬키코스
15절에는 영에 속한 사람, *프뉴마티코스
우리말 번역에는 '신령한 자들'로 나타납니다.
이렇게 육에 속한 사람과 신령한 자로 구분을 하게 됩니다.
*육에 속한 사람(프쉬키코스)과, 신령한 자(프뉴마티코스)의 구분은 아래를 참고하세요!
https://rfcdrfcd.tistory.com/15977845
'육에 속한 사람'은 ... 자기 지, 정, 의의 능력으로 살아가는 사람을 뜻합니다.
그러니 우리나라 유교학자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반듯하게 살아가는 사람.
예수 안 믿어도, 반듯하게 살아가는 사람 많잖아요. 자기 지, 정, 의로 살아갑니다.
영어로 Natural man인데, 헬라어로 프쉬키코스, 자기 프쉬케 soul 로 살아가는 자죠.
프쉬케는 우리 말로 '혼 soul' 인데, 혼을 풀어 설명하면.. 지, 정, 의 같은 자기 능력입니다.
15절의 '신령한 자'는 헬라어로 '프뉴마티코스', 프뉴마가 spirit 이죠. 여기선 성령입니다.
자기 혼적인 능력으로 살지 않고, 성령의 능력으로 사는 사람을 뜻하죠. Spiritual man.
중요한 것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14
교회를 다니는 사람 중에도, 간혹 '육에 속한 사람'이 있을 수 있죠.
그런 사람은, 복음을 깨닫지 못한다는 거죠.
그러면 교회에서 파당을 나누고, 분쟁을 일삼고, 싸울 수 밖에 없는 거죠.
왜냐면 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자기 육신, 자기 soul, 자기 지, 정, 의로 판단하니까요.
그 속에 성령님이 없는 사람들은, 지금 바울이 성령이 가르치신 말로
주님의 지혜를 나타내지만...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못 합니다.
그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고 그것을 알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이유를 설명합니다.
그러한 일 하나님의 지혜를 깨닫는 것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죠.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4b
앞서 13절의 '분별'은 sygkrino, 영어로 comparing 입니다.
특히 둘을 묶어서 서로 비교 분별하는 거죠. to joint together, combine
본절 14절의 '판단'은, 15절의 '분별'과 똑같은데, anakrino 입니다. examine, judge
ana는 '반복' 입니다.
그러니 anakrino '심사숙고해서 옳은 것으로 알아차리는 것'이죠.
정리하면, 헬라어로 13절은 sygkrino(syn+crino) : 분별 (한글 번역)
14절은 anacrino : 분별
15절은 anacrino : 판단
정리하면, sygkrino 나 anacrino가 비슷한 말인데, 뉘앙스 차이가 조금 있다는 거죠.
13절의 sygkrino(분별) 은, 둘을 비교해서 분별하는 것이고,
14절의 anacrino(분별)과 15절의 anacrino(판단)은.. 재차 심사숙고 하며 분별하는 거죠.
90% 비슷한 말이지만, 10% 미세한 차이가 있는 거죠.
14절의 중요한 메시지는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한다'는 거죠.
즉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메시지는,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서 할 수 있는 거다' 라고 바울이 설명합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선, 성도들이 '신령한 자 spiritual man'가 되어야 하는 거죠. *프뉴마티코스
즉, 진정으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씀을 가르치지만, 이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죠?
바로 '육에 속한 사람들'은 그 속에 성령님이 없는 자연인 natural man 들입니다. *프쉬키코스
그래서 그들이 복음을 들을 때는, 이거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고,
어리석게 보이기만 합니다. (반듯하게 사는 유교 학자를 생각하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이런 영적인 진리는, 성령의 감화감동을 통해서만
심사숙고해서 올바른 것으로 알아차려질 수 있기 때문인 거죠. .. 이게 14절이고요.
◑2: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신령한 자'는, 위에 14절에서 설명했습니다. *프뉴마티코스 spiritaul man
'육에 속한 사람'과 비교해서 설명했죠. *프쉬키코스 natural man
15절의 '판단 judge'도 14절의 '분별'과 같은 '아나크리노'라고 앞서 14절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15절은 정말 위험한 표현입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이 15절이 정말 난제입니다.
영적인 사람 자기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고, 올바른 것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죠?
성령님이 가르쳐 주시고, 성령님이 인도해 주시니까,
자기는 올바른 것을 판단하고, 알아차릴 수 있어요.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 표현입니다. '자기는 아무에게도 자기는 판단을 받지 아니한다'
무슨 뜻인가 하면 '다른 사람의 판단에 흔들리지 않는다. 종속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른 사람의 판단에 영향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말은 '세상 불신자들에게, 또는 14절의 육에 속한 사람들에게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당연하죠. 성령의 사람들은, 성령의 판단 또는 분별을 하는데,
성령받지 못한 자연인들에게, 판단이나 분별을 받을 이유가 없죠.
(예를 들면, 대학생이 초등학생에게 뭘 가르침 받을 필요가 없는 거죠)
하나님의 영이 없는 육에 속한 사람들이 볼 때는,
영적인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이죠.
그래서 그들을 향해 비난과 정죄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전혀 영향받을 필요가 없다는 거죠. 왜요?
그 사람들은 육에 속한 사람이니까, 신령한 일은 깨닫지도 못하니까,
그들의 판단과, 그들의 어떤 분별이나 비판에 영향받거나, 흔들릴 이유가 없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이 구절이 너무 많이 악용되어 왔어요.
특별히 저와 같은 목회자들을 통해서, 어떻게 악용이 됐느냐?
교회가 큰 프로젝트를 세우고 추진하게 되었어요.
뭐 성전을 짓는 거든, 성전을 옮기는 거든, 어마어마한 물질이 투자되는 큰 프로젝트를 할 때,
목사님들이 발표를 하시죠.
그런데 성도님들 가운데도, (다 그렇지는 않지만)
정말 주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 중에,
그 계획에 쉽게 동의가 안 되는 분들이 계셔요.
그러면 그분들이 목사님께 문제 제기를 할 수 있는 거죠.
그러면 목사님들이 가장 즐겨 사용했던 구절이 이 구절입니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해서 올바른 것을 알아차릴 수 있지만,
자기는 누구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한다...'
이런 폐단을 피하려면, 일단 14~15절을 정확하게 주해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이 15절을 말씀한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합니다.
그러면 함부로 15절을 인용하지는 못 하겠죠.
▲또 다른 예도 있습니다.
여기서 '신령한 자'를 오랫동안 누구라고 생각했느냐?
또 성도들 가운데서 특별히 기도많이 하는 소수의 사람들이 있죠.
우리가 평소에 '신령한 자다' 하는 말을 가끔씩 쓰잖아요. 기도 많이 하는 사람들을 두고서.
이런 사람들은, 자기와 의견이 안 맞으면,
교회를 뛰쳐나가서, 소위 말해서 기도원 같은 것을 만들고,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나는 신령한 자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나는 누구한테도 판단받지 않아요' 이렇게 이 15절이 악용이 됐던 적도 있었습니다.
근데 제가 말씀드렸죠. 여기 '아무에게도'는 불신자들입니다.
'신령한 자는, 세상 불신자들에게 판단을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15절 말씀의 진의를, 우리가 제대로 파악하면, 함부로 이 구절을 인용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신령한 자'들도 판단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바로 '신령한 자'들에게 판단을 받는 거죠.
왜냐면, 사람은 완전하지 않으니까,
교회 지도자들도, 서로 서로 판단해주고, 조언해주고, 지도해주고, 가이드해 주는 거죠.
서로의 안전을 위해서요!
저와 같은 목회자라 할지라도,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뜻과 비전이 있더라도,
항상 누구한테 한 번씩은 점검을 받아야... 건강한 목회자가 되는 거죠.
그래야 주님의 몸된 교회는 하나가 되고, 더 건강해질 수가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목회자 또는 성령 충만한 소수의 사람들이
독선적으로 행동해도 된다.. 라는 것을 정당화시켜주는 구절이 아니라는 겁니다.
자 바울은 말씀을 듣는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 과 '신령한 자'
프쉬키코스 와 프뉴마티코스
헬라어를 쓰면, 보통 성도님들이 아예 귀를 닫기 때문에, 가급적 안 쓰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꼭 써야 될 때가 있습니다. 안 쓰면 이해가 되지 않을 때입니다.
바로 본문 고전2:14~16절입니다.
*그 외에 '사르키코스'도 있습니다. 육적 죄에 빠진 사람이죠. 사르크스
◑2: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이 16절은 마무리가 되는 부분인데 이거는 3장의 내용에 대한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
먼저 교훈을 우리에게 주는 겁니다.
16절은 이사야 40:13절 말씀을 인용한 겁니다.
사40:13절 '누가 여호와의 영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아무도 주님의 마음을 가져서, 주를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바울은 이거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바울은 선언합니다.
그런데 아마 우리들이 성경을 볼 때 한 번씩 어려움이 뭔가 하면,
똑같은 단어로 번역이 됐는데, 헬라어 원문을 보면, 뜻이 조금씩 차이가 날 때가 있습니다.
이게 강조점의 차이인데, 미세한 차이가 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지금 이 구절도 하나의 예인데,
여기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 할때, '마음'은 헬라어로 '누스'를 쓰고 있어요.
보통 '마음'할 때, 나오는 헬라어는 '카르디아' 입니다.
이게 보통 영어로는 heart 로 번역이 돼요. 이거는 '감정, 의지를 강조할 때의 마음'이죠.
그래서 16절의 영어 번역을 보면, 하트가 아니고 마인드 mind 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인드를 가졌다'는 거죠.
이게 무슨 뜻이죠? 마인드는 뭡니까? 바로 뜻과 생각, 사고방식이죠.
뜻과 생각, 사고방식이 뭔가 하면.. 마인드입니다.
우리는 누구냐?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인드를 가진 사람들이다' 라고 바울은 소개를 합니다.
설교를 정리하면, '신령한 사람 spiritual man' 은 누군가?
그 속에 성령님이 계신 인데,
'신령한 사람' (:15)은 어떤 사람인가? 바울은 두 가지를 이야기합니다.
1) 하나는,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하나님의 비밀이요, 지혜인 십자가의 말씀(도)을 깨닫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의 용서함을 받고,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들이
바로 신령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만 강조하는데, 바울은 여기에 한 가지를 더하게 돼요.
2) 신령한 사람은, 성령님을 통해 그리스도의 마음 mind 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16
그러면 '그리스도의 마인드'가 가장 잘 나타난 본문이 무엇이냐? 빌2:5절부터이죠.
빌2:5~8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게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마인드'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16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는 사람일까요?
우리들한테 조금 투박한 표현이 될 수 있는데 이렇게 정리할 수 있어요.
'십자가 모양의 정신을 가지고, 십자가 모양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누구냐?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십자가 모양의 정신, 십자가 모양의 삶은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자기를 비우고, 상대방을 낮게 여기고, 상대방의 입장을 먼저 배려해 주어서,
예수님처럼 남을 섬기면서 살고,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면서 살아가는 삶,
그게 뭔가 하면 '그리스도의 마음, 그리스도의 마인드' 이라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