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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장 아벨, 영원한 데스티니 P2

LNCK 2025. 5. 21. 10:22

설교본문 색인                 ☞주제별 분류               데스티니 시리즈

아벨, 영원한 destiny -  - YouTube   이 동영상 36:00초~끝까지 녹취  

◈아벨, 영원한 데스티니 P2              창4:1~15, 히11:4           

◑2. 아벨을 통해 배우는 것은,
우리의 데스티니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공동체적인 거라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면, 물론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여러분이 이루어나가야 될 데스티니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여러분이 속해 있는 공동체가 있어요. 
작게는 가정부터 시작해서, 교회, 또는 민족, 나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공동체들이 있죠. 

그리고 여러분의 데스티니는, 이 공동체의 데스티니와 굉장히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 한국이라는 나라의 데스티니가, 우리의 데스티니랑 별 개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한국이 전쟁이 나서 쫄딱 망해보세요. 
그럼 여러분의 데스티니는 그 위에서 시작하는 거지, 날고 기어도 거기를 벗어날 수 없어요.

반대로 한국이 잘 되고 잘 살게 되면, 우리가 국제사회 나갔을 때 우리의 위상은
그냥 따라서 올라가요. 내가 뭘 안 해도, 우리 위상이 아주 높은 거예요. 지금 그렇잖아요.

그 얘기는 뭐냐면, 공동체의 데스티니와 개인의 데스티니는 분리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하나님께서 이루시고자 하는 궁극적인 데스티니는, 
'공동체적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목적'을 보기 원하시는 것이지, 
각 사람,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것은 공동체, 다른 말로는 '하나님의 나라'인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이루어가는 데'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데스티니를 쓰셔서 
궁극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데스티니를 이루어나가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이지 
우리 개인적인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걸 이해하지 못하면, 아벨(과에 속한 사람들)의 데스티니를 이해할 수가 없어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원하시는 것이지, 
어떤 한 사람의 성자를 만들어내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아벨의 삶은 그 개인만을 볼 때는 실패였습니다. 사실 개인만을 볼 때는 실패였어요. 
아무리 그의 메시지가 어떻고, 뭐가 어떻고 얘기를 해도...
사실 뭐 이룬 것이 없잖아요. 세상적으로 봤을 때. 
아벨 개인만을 놓고 봤을 때는 설명이 안 돼요. 요절했어요. *요절 : 젊은 나이에 죽음
해놓은 것도 없어요. 

그러나 그의 데스티니를, 하나님의 나라 라는 공동체 속에서 바라보면, 큰 의미가 있어요. 
그는 그의 짧은 인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공의가 무엇이고, 또 하나님의 자비가 무엇이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공동체 가운데 드러냄으로써 
그 공동체가, 공동체적인 데스티니를 찾아가는 일에, 일조를 했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이 아벨은 그의 데스티니를 이룬 거라는 거예요. 
이 관점을 가지고 여러분, 장애인들이나 연약한 사람들을 보게 되면, 
그들의 소중한 데스티니가 무엇인지, 우리 눈에 보이게 돼요. 

헨리 나우엔이 썼던 <아담> 책에서, 이 관점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계속 아담의 데스티니가 안 보인다는 거예요. 그 사람의 삶의 의미가 도대체 뭔지... 

그런데 이 관점을 가지고 보기 시작하면, 아벨과에 속한 사람들, 
중증장애인 아담이라든지... 이런 사람들의 소중한 데스티니가 조금씩 보여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헨리 나우엔이 예를 들었던 중증장애인 정신지체 장애인 아담의
데스티니는 뭐였을까요? 그에에 아주 소중한 데스티니가 있어요. 공동체적인 데스티니! 

그건 뭐냐면, '이 사람은 사랑받아야 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해가 되세요? 
이 사람은 존경받아야 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존중받아야 되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뭘 했기 때문이 아니라, 대단한 일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돼요. 존경받아야 돼요. 
사랑을 받아야 돼요. 이것이 이 사람의 데스티니예요. 

그리고 이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에, 주변에 있는 이웃들이 아무 조건 없이 
'사랑하는 게 뭔지'를 배우게 돼요.

여러분, 사랑을 아무 조건 없이 한다고 하는 것은 참 힘듭니다. 
보통 사랑을 해서 뭔가를 줄 때는, 항상 돌려받을 거를 기대해요. 
'내가 이만큼 해줬으면 저기서 이런 반응이 있겠지...' 
항상 무언가를 돌려받기를 원하죠. 

그런데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사랑이 아니거든요. 
만약에 여러분 아담과 같은 장애인들이 없었다면, 
하나님의 (돌려받지 못하는 일방적인) 사랑이, 세상에 구현될 수 있는 기회는 거의 없을 거예요. 

자기 아이를 낳아서 키우는 것은 좀 다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그냥 아무 조건이 없이 사랑할 수 있어요. 왜요? 나의 분신이니까. 

그런데 그거 말고, 아무 이유 없이, 아무 조건 없이, 아무 돌려주는 것도 없는데 
그냥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 이게 과연 세상에서 드러날 수가 있을까요? 
이런 사랑이 세상에서 한 번이라도 실천될 수 있을까요? 
이분(장애우)들이 없다면, 실천될, 구현될 기회가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받아야 되는 사람'의 데스티니도 주셨어요. 
사랑받아야 되는 데스티니!

그런데 이 데스티니가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해요. 
혼자서 이걸 나타낼 수가 없어요.
 
그러나 주변에 있는 다른 이웃들이, 우리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 데스티니,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 데스티니를 이루어가면,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퍼즐들이 맞춰지는 거예요. 놀랍지 않아요? 
이게 하나님의 지혜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세상의 눈으로 바라볼 때는, 아무 의미 없고 실패한 사람처럼 보이는 그 인생이, 
사실은 이 하나님의 퍼즐 안에서는, 완벽한 하나님의 그림을 그려간다는 거예요. 

근데 거기에는 몇 가지 조건들이 필요해요. 
첫째는, 사랑받을 사람이 그 안에서 겸손해야 돼요. 
사랑받는 것에 대해서 자존심 상해 하면 안 돼요. 그것이 자기 데스티니예요. 도움 받는 것!

또 사랑하는 사람이 헌신할 수 있어야 돼요.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소중한 건지를 깨닫고 
같이 헌신할 수 있어야 돼요. 

이렇게 (사랑하고, 사랑받는) 공동체가 함께 갔을 때 
거기서 하나님의 계획들이 드러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우리의 데스티니는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우리의 destiny는,
여러분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얽혀서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지, 
우리 각자 개인의 destiny 만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함께 이루어 가는 공동의 destiny가 뭔지를 발견하게 됐을 때, 
그 안에서 우리가 고개를 갸우뚱하게 했던 것들이, 
얼마나 우리의 눈이 좁고, 얼마나 우리가 하나님의 지혜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인지를 
깨닫게 되는 거예요. 

'아 하나님께서 이런 목적을 두셨구나.. 사랑받아야 될 사람, 또 사랑해야 될 사람'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드러내는 이 역사가, 
저와 여러분에게 같이 일어나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3.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데스티니는, 절대로 중단되거나 폐기되지 않습니다. 

'아벨이 빨리 죽었으니까 끝난 거 아닌가요?' 그런데 오늘 본문 마지막에 보면, 
하나님은 셋을 주시잖아요. 
그래서 원래 아벨을 통해서 이루고자 했던 데스티니가 끊어진 게 아니라는 거예요. 

아벨은 짧은 인생을 통해서, 강한 임팩트를 주고 떠났지만 
원래 가인의 죄가 들어오지 않고 아벨이 오래 살았으면, 
그 가운데 이루어졌어야 될 일들, 그 일도 하나님이 중단하거나 포기하시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걸 누구를 통해서 이루세요? 셋이라고 하는 다른 사람을 통해서 
그 일을 끝까지 이루어 가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하나님이 한번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한번 마음 먹으신 것은 
어떤 경우에도 중단되거나, 어떤 경우에도 폐기되지 않는다는 것이 
아벨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세 번째 진리예요.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 destiny 이 있으면, 
그 계획은 여러분들이 누구의 죄로 인한 훼방이나 태클 때문에, 
누구의 타락 때문에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일이 생기더라도,  

또는 내 스스로 뭔가 문제를 일으켜서, 그 일을 못 이루는 것처럼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거예요. 반드시 이루신다는 거예요.  주1)

◑5. 마지막 다섯 번째, 영원한 삶과도 연결되어 있는데 
이 땅에서도 반드시 이루시는데,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의 임팩트를 통해서 영향받은 후손들을 일으키셔서 
그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그 일을 계속 이어가십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독교 교회사를 보면, 
얼마나 이 교회사가 이런 패턴으로 이루어지는지를 금방 보게 돼요. 예를 들면,

 

1) 16세기에 '재침례교도'라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나벱티스트! 재세례파
이 사람들은 굉장한 하나님의 사람이었어요. 정말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해서 
가장 말씀대로 살려고 했던 헌신된 사람들을 꼽으라면, 이들을 꼽아야 될 거예요. 

정말 하나님 앞에 헌신된, 충성된 사람들이었는데, 
당시 기독교인들은, 그거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순교를 당합니다. 
주로 카톨릭에게 죽임당하고, 개신교에게 죽임 당하고 그래서 다 죽임을 당해서 
2년 안에 이 재침례교도의 리더십들이 다 몰살을 당해요. 한 명도 안 빼고 다 몰살을 당해요. 

 

그러고 나서 보면 이 '재침례교도 운동'이 2년 만에 불씨가 꺼져요. 
교회사 2000년을 통해서 가장 파워풀하게, 가장 근본적으로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했던 
이 운동이, 2년 만에 불씨가 꺼져요. 그걸 보면 우리는 이해가 안 돼요. 

'아니 도대체 이런 하나님의 사람들이...  정말 바울 같은 사람들인데... 
왜 억울한 죽음을 당했을까?'

그 사람들의 이야기가 역사에 기록돼 있어요. 한번 찾아보세요. 
그 사람들의 얘기를 읽어보면 '정말 바울 이래에 이런 사람들이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정말 바울 같은 사람들이에요. 정말 베드로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고, 헌신되어 있었고, 
순교자들이었어요.  그런데 왜 그 사람들을 일찍 데리고 가시냐는 거예요. 

 

2) 이 사람들만 그런 게 아닙니다. 여러분 짐 엘리엇이라고 아시죠?
그와 그의 친구들 5명은, 오랜 시간 동안 남미 원주민 선교를 준비하고, 
진짜 헌신된 사람이었어요. 정말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었는데, 

그들도 에콰도르도 아우카 부족 마을에 딱 들어가려고, 강가 편평한 곳에서 경비행기를
착륙시키고 내리는 순간, 아우카족의 활과 창에 맞아서 목숨을 잃었어요. 
거기서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그냥 죽은 것밖에 없어요. 그럼 그게 헛된 죽음이었나요? No!
  ☞짐 엘리엇 

여러분 놀라운 것은, 이 재침례교도(재세례파)들이 다 죽은 것처럼 보였는데, 
이 재침례교도들이 남겨놓은 임팩트가 있었어요. 

그 임팩트 때문에, 재침례교도 이후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레디컬한 영성운동들은, 
다 이 사람들로부터 나온 거 아세요? 
거의 레디컬한 영성운동들과 교회운동은 다 이 사람들로부터 나왔어요. 

여러분이 잘 아시는 사람 중에 '모라비안'들이, 이 사람들의 영적인 후손이거든요. 
또 여러분들이, 우리나라에는 많지 않지만, 아미시 또는 후터파(후터라이트) 라든지, 
또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인터콥도 거기서 나왔어요. 뿌리를 가보면 다 연결돼 있어요. 
침례교회도 마찬가지예요. 침례교단도 뿌리가 거기서부터 나왔거든요. 
  *관련글 https://blog.naver.com/mysoul9/40209002749

여러분들이 바라보시는 오늘날에 보다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추구하고자 하는 
거의 대부분의 뿌리들이 다 재침례교도로 연결되어 있어요. 
그 이야기는 뭐냐면, 그들은 죽었지만 죽지 않았다는 거예요. 
폐기되거나 중단된 게 아니라는 거예요. 
계속 하나님이 사람들을 세우셔서 그 일들을 이루어 가신다는 거예요.

짐 엘리엇도 마찬가지예요. 짐 엘리엇 일행이 그렇게 요절하고 나서, (거의 20대 초반) 
그것이 이제 언론을 타고 미국에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이것이 '학생 선교운동'을 일으키게 되는 불씨가 되었어요. 
수많은 선교사들이, 거기서부터 나오기 시작해요. 수많은 선교사들이 일어나게 돼요.

그 중에 한 명이 랄프 네이버도 여기서 나왔어요. Ralph W. Neighbour
랄프 네이버 라는 목사님이 젊었을 때, 이분의 순교 소식을 듣고, 헌신해서 선교사로 가죠. 
그리고 선교지에서 계속 교회를 개척하고 목회하다가 깨달으면서 계발한 게 
'셀 교회'라고 하는 명칭이었어요. 

그래서 이제 우리 교회가 오늘 셀교회로 존재하고 있고,
우리나라에도 셀교회라고 하는 게 존재하는 이유도, 그 뿌리에 가보면 
또 여기(짐 엘리엇)에 기원해서 연결되고 있어요. 

3) 그 외에도 미국 인디언 선교사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David Brainerd 1718~1747

가 있습니다. 그는 미국 인디언들을 말을 타고 다니면서 전도하다가 29세에 요절했지만,

그의 <일기>를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고,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 근대 선교의 아버지 윌리엄 캐리

- 에드워드 페이슨(1838~1888. 미국 작가, 장로교 목사)의 가슴에도 옮겨 붙었습니다

-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고 기도에 힘쓴 로버트 머리 맥체인 (1913~1843.

   스코트랜드의 탁월한 설교자로서 눈물의 목회자로 유명) 이 있습니다

- 브레이너드가 죽어갈 때 존 웨슬리는, 그의 <일기>를 읽으라고, 성도들에게 적극 권면했죠.

    ☞ rfcdrfcd.tistory.com/14461645

 

그러니까 여러분, 우리가 다 누구 빚을 지고 있죠?
아벨 계열 사람들의 빚을 지고 있는 거예요. 

즉 '별로 한 걸 없이 일찍 죽은 사람들' 
얼핏 보면 실패한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의 빚을, 우리가 다 지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하나님의 지혜예요. 어떻게 보면 (아벨이) 별거 아닌 것 같아 보이는데... 

  

그래서 여러분, 우리 주변에 사소하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지나가는 것들을 
잘 눈여겨보셔야 됩니다. 
장애인들, 연약한 사람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아 보이는 분들...

'저 사람들은 도대체 왜 사는 걸까?' 이런 눈으로 바라보면 안 돼요. 
거기에 하나님의 지혜가 있어요. 함께 이루어가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도 그 역사의 그냥 한 피스(조각)일 뿐입니다. 
이 피스 조각을 다 맞춰서 보면, 마지막에 큰 하나님의 그림이 나오는 거예요. 할렐루야! 
이 영광을 바라보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바랍니다.

◑4. 아벨이 보여주는 마지막 네 번째 데스티니의 비밀은,
 이 땅에서 삶이 끝이 아니라는 거예요. 영원한 데스티니가 있다는 거예요. 

사실은 이 아벨의 데스티니를, 이러니 저러니 해도,
뭐 공동체적인 데스티니가 어떻고... 아무리 얘기해도 
이 '영원한 삶'이라는 안경을 끼고 보지 않으면, 설명이 안 돼요. 

So what? (그래서 어쨌다는 거예요?) 
'그가 일찍 죽어서 그 열매로 공동체가 이루어 진 것은 좋은데... 
그럼 죽은 사람는 뭔데? (억울하지 않나요?)' 

이해가 쉽지 않은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오케이, 내게 공동체적인 역할이 있고, 사명이 있고... 다 좋은데, 
'내가 죽고 나면 뭔데, 그 다음에?' 

'만약 영원한 생명이 없고 부활이 없다면, 내가 죽고 영원히 소멸돼 버리는 거라면 
그 다음은 도대체 뭔데? 내가 왜 그 일을 해야 되는데?' 이유를 찾을 수가 없어요.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거예요. 
우리는 소멸되는 존재가 아니라, 영원히 사는 존재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땅에서 우리가 짧은 인생 때문에, 아벨처럼 혹시 짧게 살다가 퇴장해도, 
그게 끝이 아니라 진짜 우리의 데스티니는, 다시 찾아올 하나님의 나라가 있고, 
부활할 몸이 있는데.... 
(마치 장례식 설교하는 것 같아요. 지금 여러분의 장례식 설교라고 생각하고 들으세요)

나의 부활한 몸이 있다는 거죠. 거기서 우리의 진짜 데스티니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이 땅에서의 데스티니는, 그 영원한 데스티니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그냥 준비하는 것일 뿐이지, 즉 그림자일 뿐이지, 

이 땅에서 내가 이루어내는 데스티니가, 진짜 데스티니가 아니라는 거예요. 
이것은 여러분 '하늘의 것의 그림자'일 뿐이에요. 
이걸 이해할 수 있어야, 진짜 데스티니를 볼 수 있습니다. 땅에서는 '그림자'라는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 바울이 뭐라고 했냐면, 부활이 없고 영원한 소망이 없다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어요. 제일 불쌍한 사람... 

맨날 얻어맞고 다니고, 실패자처럼 보이고... 이뤄낸 게 뭐에요? 
이 사람이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는 이 땅에서는 완전히 실패자처럼 보인다는 거예요. 
완전히 고생만 하는 사람처럼 보인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진짜 성공한 사람인 이유는 뭐예요? 
영원의 생명, 부활의 몸이 있기 때문이라는 거예요. 

이것이 여러분, 아벨이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는 데스티니입니다. 
우리의 데스티니는 땅의 것만을 이루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거예요. 

땅의 것을 우리가 물론 이루어야 됩니다. 
내가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내게 계획하신 것들을 이루겠지요. 

그런데 그 이루는 것이, 꼭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모습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거예요. 
아벨은... 누가 보든지 우리가 생각하는 성공적인 모습이 아니었어요. 

여러분 중에 '나의 데스티니는 아벨입니다' 아마 그렇게 살고 싶은 사람은 별로 없을 거예요.
그렇지만 천국에 가면, 달라진다는 거예요... 아벨은 결코 억울한 인생이 아니고, 
오히려 '믿음의 조상 중에 조상'이 되어서, 히브리서에 등재되어 있죠.  히11:4

이 땅에서 그렇게 아벨처럼 살고 싶은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별로 그렇게 가고 싶지 않고, 
성공적으로 보이지 않은 아벨 같은 인생이라 할지라도, 

이런 데스티니를, 하나님이 주시는 우리 중에 특정 사람들에게 주시는 이유는, 
영원한 데스티니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이 땅은 그림자일 뿐이라는 거예요. 
실체는 영원한 천국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이루어낸 그 데스티니를 통해서, 그 공동체적인 데스티니, 
비록 짧지만 임팩트를 주고 떠나는 사람들, 
그런 삶들을 통해서 결국 하늘에서 우리의 영원한 운명이 무엇인지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골3:1~3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졌음이니라
4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여러분, 이게 꼭 아벨의 인생을 얘기하는 것 같지 않아요? 특별히 4절.
아벨이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생명이 하나님 안에 지금 감춰져 있는데,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오실 때, 
그의 생명도 영광 중에 나타날 거라는 거예요. 그것이 그의 데스티니라는 거예요. 

▲여러분, 저와 여러분의 데스티니는, 이 땅에서 어떤 인생을 살든지 간에 
그것이 하나님이 계획하신 일이었으면, 설령 요절하는 한이 있더라도 
우리는 천국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영광에 참여한 자가 될 거라는 거예요. 할렐루야! 
이게 우리의 진짜 데스티니 라는 거예요. 

그래서 데스티니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기도하고, 
데스티니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그 삶을 추구해 갈 때, 땅의 것만 바라보아서는 안 돼요. 
성경이 우리에게 권면하는 거잖아요. '위의 것을 찾으라'는 거예요. 
'무엇이 영원한 것인지를 보라는 거예요. 무엇이 영원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를 보라'는 거예요. 

'무엇이 영원한 영광인지를 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것에 욕심을 내셔야 된다는 거예요. 

그것에 욕심을 내게 되면, 이 땅에서의 일들이 질서를 찾아가기 시작합니다. 
무엇이 진짜 중요한 일인지.. 무엇이 덜 중요한 일인지... 비로소 질서를 찾아가기 시작해요. 

그렇지 않고, 위의 것을 다 버리고 나면, 질서가 뒤죽박죽이 돼요.
'땅에서는 건강하게 장수하며 잘 먹고 잘 사는 게 좋은 거야'
근데 이 질서가 꼭 맞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영원을 고려할 때, 비로소 현세의 삶도 질서를 찾아가기 시작하는 거예요. 

여러분, 오늘 현실보다 더 중요한 건 뭐냐면, 
'우리가 어떻게 영원한 데스티니를 준비하느냐'는 거예요. 

그리고 그 영원한 데스티니 가운데, 우리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향해 주시는 영광이 있는 줄 믿습니다. 

마치는 말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우리의 진짜 데스티니는 땅에 속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속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것들을 이루어가시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이 하늘의 것들을 이루어가기 위해서,
이 하늘의 것을 이루어간다고 하는 것은, 여러분 그렇게 추상적이고 복잡한 것이 아니에요. 

하늘의 것을 이루어간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라'는 얘기입니다. 
이것이 첫 번째 대지에서 얘기했던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라는 거예요. 

그리고 그 가장 핵심에 들어가 보면, 사랑이 있어요.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여러분, 연약함 가운데 계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도움을 받고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해서 자존심 상해하지 마세요. 
그건 교만한 거예요. 

내가 사랑을 받음으로,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날 수 있다면, 영광스러운 거예요. 
수치스러운 게 아니라는 거예요. 영광스러운 거라는 거예요. 

중증장애인이었던 아담은, 한 번도 누구에게도 도와준 적이 없었어요. 
왜? 자기가 도와줄 수가 없으니까. 

그렇지만 그는 '사랑받는 자'라는 그의 데스티니를, 충성되게 살았을 때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구현되고 나타나는 그 역할을 감당했듯이,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다른 지체들의 도움을 받고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지체들의 아무 조건 없는 사랑을 받는 것에 대해서 
자존심 상해하지 마세요. 아멘! 

여러분 조금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줄 수 있는 여력이 있다면... 사랑하세요. 
사랑을 하시는데, 돌려받을 수 없는 곳에 가서 사랑을 하세요. 

돌려받는 곳 말고, 이건 주면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아무리 퍼 주어도 돌려받을 게 없어요. 거기서 사랑을 전하세요. 
그러면 거기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날 거예요.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요. 

그것이 사실은, 저와 여러분이 이루어내야 될 궁극적인 데스티니 라는 거예요. 
물론 우리의 삶 가운데, 구체적인 하나님의 계획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이 모든 구체적인 계획 이면에, 그저 본질에 가면 사랑받는 자, 사랑하는 자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이 데스티니, 
그리고 사랑받는 자와 사랑하는 자가 함께 했을 때 
이 공동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거예요.

이것이 사실은 교회거든요. 이게 사실 교회의 본질이거든요. 
그래서 이 교회를 통해서, 우리 하나님이 사랑하시고, 사랑받으시는 
참 근원적인 데스티니가, 저와 여러분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축복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살아간 사람은, 그 사람의 장례식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백할 거예요. 
'당신 때문에 내가 살았습니다.' 그게 진짜 복이 잖아요. 
'당신이 있어서 참 행복했습니다.' 그런 고백 받고 싶지 않으세요? 

이번에 하용조 목사님 장례식에 보니까 많은 사람들이 그 고백을 했더라구요. 
'하목사님이 계셔서 참 행복했습니다.' 

그래요. 여러분의 장례식장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여러분 때문에 복을 받았다고 하는 
여러분 때문에 행복했다고 하는.. 생명을 얻었습니다... 라고 하는 
그런 인생, 그런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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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영국에 찰스 웨슬리의 묘비에 이렇게 쓰여 있다고 합니다.

God buries his workmen  하나님은 자기 사역자들을 장례하시나

But He carries on his work. 자기 사역은 계속해 나가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