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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 없음/2008

1501 느헤미야의 관심

LNCK 2008. 9. 25. 22:03

◈느헤미야의 관심             느1:1~11           인터넷설교 스크랩



느헤미야... 많이 들은 내용이지만

◑1.~4. 까지  제목이 신선해서 스크랩했습니다.

제 자신이 '눈물 없는 비판자'가 되는 오류에 빠지지 않기를, 주님께 기도로 부탁드립니다.



◑1. 느헤미야의 관심


▲예루살렘에 관심을 가졌던 느헤미야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에서 왕과 가까이 일하는 상당히 출세한 사람이었습니다.

명예도 있었고, 어느 정도 재물과 권력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대로 그 지위에서 평안하게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고국 유다의 소식을 듣습니다.


나의 한 형제 중 하나니가 두어 사람과 함께 유다에서 이르렀기로

내가 그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있는 유다 사람과 예루살렘 형편을 물은즉

저희가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은 자가 그 도에서 큰 환난을 만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성은 훼파되고 성문들은 소화되었다 하는지라. 1:2-3


이 소식을 듣고 난 느헤미야는 다음과 같이 반응합니다. 1:4절입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여 기도하여..


▲자기가 꼭 관심 가질 필요 없었습니다.

사실 느헤미야는 1,400km이상이나 떨어진 수산에 살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는 시간만 따져도 4개월이나 걸리는 엄청난 거리었습니다.

어찌 보면, 예루살렘 사정을 듣고서도

‘나는 어쩔 수 없다.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내가 어떻게 하나?’

라고 자기합리화를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느헤미야는 결코 그럴 수 없었습니다.

느헤미야의 최고의 관심사항은 바로 예루살렘과 그의 백성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하나님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백성에게 관심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지금 여러분에게 있어서 최고의 관심 사항이 무엇입니까?

부모들은, 자기 자녀가 좋은 곳에 취직되는 것입니까?

청년들은,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최고의 관심사항 입니까?

직장인은, 돈에 관심을 가져서, 돈을 많이 버는 것입니까?

성공한 사람은, 자기 명예에 관심을 가져서, 명예를 더 많이 얻는 것입니까?


공부에 관심을 많이 가지면 공부를 잘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운동에 관심이 많으면 훌륭한 운동선수가 될 수 있습니다.

돈을 벌려면, 일단 돈에 대한 관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은 자기 관심가지는 대로.. 자기 미래가 열리는데,

느헤미야는, 세상적 관점에서 보기에, 전혀 어리석은데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당장 자기가 올랐던 최고위직에서 미끄러질 수도 있고,

어쩌면 자기 목숨도 위태로울 수 있는 그런 일에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나중에 그는 예루살렘에서 모함을 받아, 정말 역적으로 몰릴 뻔도 했습니다.)


▲느헤미야를 통해 볼 때, 지금 나의 관심은?

느헤미야는 오늘날로 치면, 하나님나라와 그 백성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은 서로서로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교회 성도들 중에 어려운 사람은 없을까 항상 살펴야 합니다.

주일날 한번 만나 그냥 눈웃음이나 나누고 헤어지는 그러한 관계가 되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주된 관심으로 하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넓게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시는 성도들 되시기 축원합니다.


 

◑2. 가슴으로 연결된 관심


내가 이 말을 듣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에 하나님께 금식하며  1:4


▲슬퍼한 느헤미야

‘슬퍼한다’는 것은.. 거기에 애정이 있고 사랑이 있다는 증거입니다.

느헤미야 자신은 지금 안정되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운 좋은 사람이라 생각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처지를 즐길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파하고 있습니다. 울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람의 모습입니다. 


왜 느헤미야가 슬퍼합니까? 왜 느헤미야가 그의 백성들의 소식을 듣고 슬퍼합니까?

그것은 바로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의 소식을 듣고 하나의 관심을 표명하고 끝나는 게 아닙니다.

나라가 어지러움 빠져 있을 때 국민이라면 누구나 관심을 가질 것입니다.


사랑은 고통이라고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정말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픈 가슴을 가집니다.

그 아픔을 자기의 아픔으로 느낍니다.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진 것이 내가 무너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 백성들이 당하는 환란과 능욕을, 자기의 환난과 능욕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눈은, 눈물로 적시고 있었습니다.


▲적용

여러분! 만일 여러분의 가족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산다면,

여러분 가족의 영혼이 마치 무너진 성벽처럼 무너진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고

슬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 이웃을 사랑하고 이웃에게 진정한 관심이 있다면 손가락질하지 않습니다.

흉보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아픈 마음을 가지게 될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는 나라와 교회를 아끼고 사랑하기에 늘 쓴소리(비판) 한다면서

진정 위해서 애통하는 눈물이 없다면..,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입니다.

느헤미야와 같은 애통이 없다면, 그냥 자기가 입 닫고 조용히 있는 것이, 백 번 낫습니다.


여러분, 누구를 사랑하십니까?

성도를, 민족을, 교회를 사랑하십니까?

그러면 아픔을 갖게 됩니다. 마음에 상처를 가지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사랑하기 때문에 복음 전파에 아픔이 있고,

이 시대를 바라보면서 흘리는 눈물이 있고

내 이웃을 바라보면서 같이 애통할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리고 문제를 문제의식으로 느끼고만 있은 것이 아닙니다.

슬픔을 슬픔으로만 끝내 버린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반드시 잊어서는 안 될 한 가지 일을 기억해 냅니다.

 


◑3. 기도로 연결된 관심


내가 이 말을 듣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에 하나님께 금식하며  1:4


느헤미야의 슬픔은 기도로 연결됩니다.

느헤미야의 아픔은 슬픔으로만 끝나지 않았습니다.

단순히 감상적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만약 울고 슬퍼하는 것으로 끝났다면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보면서 가슴아파하고 슬퍼하고 운다고 해서

역사는 변화되지 않습니다.


교회의 역사를 움직여 온 사람들을 만나 보십시오.

그들은 한결 같이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역사를 움직였던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무엇이 그들의 삶을 역동적으로 만들었습니까?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역사를 뒤 바꾸는 이 위대한 일을 이룰 수 있게 했습니까?

그것은 기도였습니다. 기도가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느헤미야는 오래 동안 금식하면서 기도했습니다.

1:4절, “수일 동안 슬퍼하며 기도했다”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수일 하니까 3-4일 정도라고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1:1절의 기슬르월은 유대월력으로 11-12월에 해당됩니다.

그리고 2:1에 니산월이라고 나옵니다. 이것은 3-4월에 해당됩니다.

계산하면 얼마입니까? 4개월입니다. 약 4개월 동안 기도했습니다.


그 당시 바사왕국은 바벨론을 무너뜨린 세계적이고 대단한 강국이었습니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으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느헤미야가 모시고 있던 왕은

전 세계에서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왕이었습니다.


느헤미야는 자기를 신임하는 왕에게 먼저 도움을 요청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에게 먼저 호소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는 사람보다도 하나님이 우선이었습니다.



◑4. 행동으로 연결된 기도


주여 구하오니 귀를 기울이사

종의 기도와 주의 이름을 경외하기를 기뻐하는 종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날 종으로 형통하여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1:11


느헤미야는 기도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삶으로 옮기는 기도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기도한 후에, 내가 왕 앞에 나가겠다는 말입니다.

자기가 아닥사스다 왕 앞에 나갈 때, 왕에게 은혜를 입게 해달라는 것입니다.

(후략)

<08.08.31. 어느 농촌교회 인터넷설교 스크랩, *원제목 ; 느헤미야의 관심사



 ◑비판이 아니라 대안세력을 자청한 느헤미야


느헤미야도 얼마든지 예루살렘 비참한 상황을 비판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판 대신, 보완하는 사람으로 살아가는데요...


틀렸다고 느끼는 것,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것은.. 모두 다 똑같이 느낍니다.

문제를 보는 눈은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자기만 받은 특별한 은사 아닙니다.

그것이 인간의 독특한 특징(죄성)인 것 같습니다.


‘우리 교회는 기도가 없어요.’

‘우리 교회는 영성이 떨어져요.’

‘예배의 감격이 없어요.’

그래서 어쨌다는 것입니까? 이것은 비판에 불과합니다.


정말로 대안을 제시하는 사람이라면

‘우리 교회는 기도가 없어요. 그러므로 제가 기도의 불을 붙일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저를 위해 좀 중보기도해 주세요.’ 이렇게 나와야지요.


‘우리는 예배의 감격이 없어요. 어떻게 하면 예배의 감격이 있을 까요?

우리교회에 예배에 감격이 있을 수 있도록 내가 무엇을 할지, 주님 가르쳐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는 것이 바로 보완이지요.


바리새인들이 비판세력이라면, 느헤미야 같은 인물은 보완세력입니다.

또 다른 말로 하면 대안세력입니다.


비판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변화될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비판보다는 내가 먼저 대안세력이 되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를 향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전도 안 하느냐, 선교 안 하느냐···’ 외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직접 모델이 되든지, 아니면 모델 하나를 세우든지 하면..,

나머지는 다 쫓아오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실리적인 이야기입니다. 진짜 세상을 변화시키기 원하십니까, 잊지 마십시오,

진짜로 세상을 변화시키기를 원하느냐, 그렇다면 비판이라는 방법 쓰지 않습니다.

쇼맨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쓰는 것이 비판입니다.


여기 아내들 잘 들으십시오. 바가지가 남편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똑같은 원리입니다.

그렇지요? 바가지 긁는 것으로 변화될 것 같으면, 벌써 옛날에 다 변화되었습니다.

한국에는 그런 은사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많기 때문에······


잔소리로 아이들이 변화될 것 같습니까?

그것이 절대 변화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녀가 변화되기 원한다면, 내가 변화되면 됩니다.

내가 자녀에게 진심으로 존경 받는 부모가 되면... 자녀는 저절로 변화됩니다. 


정리합니다.

-문제가 있을 때에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세력의 관점으로 나아가야 된다는 것,

-또는 내가 대안을 제시하거나, 대안적 모델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영적 변혁자가 되는 축복이 임하기를 바랍니다. <01.12.24. 인터넷 설교 편집

 

[주제별 분류] 리더십, 목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