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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그리로 가려 하나이까

LNCK 2023. 7. 3. 15:23

https://blog.naver.com/karamos/220215825553

 

◈또 그리로 가려 하나이까          요11:1~10            2013.03.03.

                                                            ☞인명진 목사 설교모음 

◑도입

 

얼마 전에 제 후배목사 몇 명이 찾아와서 제게

“목사님도 이제 호(號)를 하나 가지셔야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희가 호를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하였습니다.

 

사실 내로라하는 지도자들이 이름 앞에 붙이는 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 박사는 우남(雩南)

임시정부의 주석이셨던 김구 선생은 백범(白凡)

조병옥 박사는 유석(維石)이라는 호를 쓰셨습니다.

 

또 교계에서도 내로라하는 목사님들은 다 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추양(秋陽),

조용기 목사님은 영산(靈山),

김재준 목사님은 장공(長空),

강원룡 목사님은 여해(如海),

옥한흠 목사님은 은보(恩步)

곽선희 목사님은 남원,

문익환 목사님은 유일하게 한글로 늦봄이란 호를 쓰셨습니다.

 

요즘은 호보다는 영문 이니셜로 많이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김종필씨는 JP, 김대중 전 대통령은 DJ, 김영삼 전 대통령은 YS로 부릅니다.

 

호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많이 알려진 지도자들의 이름에 붙여지는

또 하나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살아왔던 삶, 해왔던 일, 인간성 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이름이 호입니다.

 

호를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인생을 살아왔는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같은 사람이 호를 가진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요,

자칫 웃음거리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주제넘게 무슨 호냐고 두 손을 내저으며 사양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도대체 이 사람들이 무슨 호를 지어왔는가 궁금하기도 하여

호기심이 생겨 ‘내 호를 무엇이라고 지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자신들의 생각으로는 제 호로 ‘삼우’가 좋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다시 ‘삼우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석 삼(三)자에 어리석을 우(愚)자로

세 번 어리석은 짓을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에 제가 평생을 어리석게 산 사람인데,

적어도 제 인생에 세 번은 바보짓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호를 삼우(三愚)라고 지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들으니 ‘그럴 듯하다, 나에게 어울리는 호다’ 라는 생각이 들어

제가 삼우를 제 호로 사용하기로 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내가 삼우라는 호를 사용하려고 한다고 했더니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다 깔깔거리고 웃는 것입니다.

 

‘삼우’라는 말이 세 번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뜻인데

인명진 목사에게 뭔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호를 들을 때, 그 호가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과 어울린다고 생각해야

그 호를 마음 놓고 사용할 텐데, 그 호를 듣고 사람들이 웃는다면

‘이것은 아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보야야 한다’는 생각을 제가 했습니다.

 

▲이런 와중에 제 마음속에 새삼스럽게 생각나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만약 우리가 예수님에게 호를 지어 드린다면

어떤 호가 적당할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에게 호를 붙여드린다면 어떤 호가 적당할 것 같습니까?

저는 아주 쉽게 생각이 났습니다.

예수님에게 호를 붙여드린다면,

더 말할 것도 없이 바보라고 붙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보 예수’ 얼마나 예수님에게 잘 어울리는 호입니까?

인명진 목사의 호가 바보라고 하면, 이의가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만

예수님의 호가 바보라고 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 모두가 다 그럴듯하다,

 

어울린다고 100% 동의할 것입니다.

바보 인명진 목사라고 하면 웃던 사람들도

‘바보 예수’라고 하면 웃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본론

 

우리가 예수님의 일생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예수님은 정말 바보처럼 사셨습니다.

바보라도 그런 바보가 없습니다.

 

우선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신 것이 바보 같은 짓이었습니다.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이 사람이 되신 것도 바보 같은 짓입니다.

 

지혜롭고 똑똑한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위로 올라가려고 하는데

예수님은 내려오신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데

하나님이셨던 예수님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바보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 시골 나사렛의 낮고 천한 요셉의 아들로 태어난 것도 바보짓입니다.

기왕에 세상에 오시려면 명문가문, 좋은 집안을 택해서 나셔야지

저 시골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것도 바보짓입니다.

 

제자들을 뽑을 때도 배우지 못하고 천박한 사람들을 뽑아서

데리고 다닌 것도 바보짓입니다. 저라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보 같은 제자들 때문에 예수님이 얼마나 고생을 하시고 속이 상하셨습니까?

그게 다 바보 같은 예수님이 스스로 자초한 바보스러운 일의 결과입니다.

 

▲예수님의 이 바보 같은 행동은 오늘 본문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본문 요11장에서 보면, 예루살렘으로 가시려는 예수님에게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하며 제자들이 간곡하게 말렸습니다.

 

요11:8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16 도마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요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수전절에 예루살렘 솔로몬 행각에서

백성들을 가르치셨습니다. 이때 백성들이 예수님에게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인가?’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 단호하게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0:30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이 화가 났습니다.

‘저 자가 감히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신성모독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돌로 치려고 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려고 덤벼들었습니다.

 

간신히 유대인의 손에서 벗어난 예수님은, 먼 곳으로 도망을 가셨습니다.

10:40절에 보면 ‘요단 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베풀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다급했으면 요단강 저편, 옛날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던

산골짜기로 도망을 가신 것입니다.

 

마침 그때 베다니에 사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집에서 한 사람이 심부름을 왔는데

이들의 오라버니 나사로가 병이 들었으니 예수님께 빨리 좀 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10리, 4킬로쯤 떨어진 곳입니다.

그러니까 베다니로 간다는 것은

다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고 잔뜩 벼르고 있는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마리아와 마르다의 요청대로 베다니로 가시는 것은

기름을 지고 불 속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스스로 무덤으로 들어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예수님이 사랑하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청이라고 할지라도,

예수님의 친구인 나사로가 병들었다고 할지라도

예수님께서 쉽게 그곳으로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닙니다.

 

가기만 하면 영락없이 곤경에 처하게 되는 상황입니다.

아니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이 대목에서 예수님께서 아주 곤혹스러워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간신히 빠져나온 것이 바로 엊그저께인데

마리아와 마르다의 청대로 베다니로 가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요단강가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예수님께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왜 안 그렇겠습니까?

가기는 가야 하는데 가면 분명히 고생하고 죽을 것입니다.

 

▲6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예수님이 도망가셔서 피해 계시는데,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말을 듣고도

이틀을 더 유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이 늦게 가셔서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소식을 듣자마자 베다니로 달려가셨으면,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마리아는 예수님이 늦게 오셔서

오라버니가 죽었다고 예수님을 원망하는 말을 합니다.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이틀을 더 고민하시다가 마음에 결심을 하셨는지

베다니로 가자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8절에 보면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라고 말합니다.

 

쉬운 말로 하면 “예수님 정말 죽으시려고 하십니까? 거기가 어디인줄 알고

가시려고 하십니까? 고집부리고 가시면 이번에는 정말 죽습니다.

가시면 안 됩니다. 며칠 전에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극구 말리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이 지체하시고, 늦게 베다니로 가신 이유는, 부활의 확실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즉 나사로가 완전히 죽은 후까지 기다리신 것입니다. 위험해서 주저하신 게 아니라요)

 

너무도 상식적이고 당연한 말입니다. 우리들이라도 그랬을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안일을 생각한다면

아무리 나사로가 병이 들었더라도 절대로 가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예수님은 이와 같은 제자들의 일리 있는,

합리적인 말을 무시하고 자기 생각대로 다시 베다니로 가셨습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베다니에 가셔서 죽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다만

결과적으로 그곳에서 붙잡혀 돌아가시게 됩니다.

결론은 예수님은 스스로 바보짓을 하신 것입니다.

안 가도 되는 유대 땅으로 스스로 가셔서

그것이 화가 되어 자신의 죽음을 자초하게 되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조금이라도 생각하셨다면 누구든지 예측할 수 있는

훤히 내다보이는 일을 하는 것은 바보짓입니다.

베다니에 안 갔다고 해서 예수님이 잘못했다고 탓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바보처럼 처신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놓을 수밖에 없는

곤경에 처하신 것입니다.

 

▲가정이지만, 이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말을 듣고 베다니에 가지 않으셨다면

예수님은 절대로 그렇게 빨리 죽지 않고 좀더 오래 사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고난을 당하고 돌아가신 것은

스스로 자초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말을 듣고 못 이기는 척하고 그냥 요단강가에 머무르셨다면

죽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바보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와 같은 바보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적용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나도 예수님처럼 바보처럼 살겠다고 작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잘 믿는다는 것은

얼마만큼 예수님처럼 바보처럼 이 세상을 사느냐 하는 것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바보처럼 사는 사람은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약삭빠르고 계산적이고 이해타산에 밝은 사람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말은 바보처럼 살겠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나는 얼마나 바보처럼 사는 사람인가,

세상 사람들이 나를 바보처럼 사는 사람이라고 하는가

아니면 약삭빠르고 계산적이고 이해타산에 밝은 사람이라고 하는가?'

스스로 질문을 해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바울도 그와 같은 바보였습니다.

그가 젊은 시절에는 지혜롭고 똑똑하게 살았지만

예수님을 믿은 뒤로 바보처럼 살았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을 믿은 후에 자신이 가진 권력과 명예와 지위 등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보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의 다윗도 바보였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끈질기게 따라다녔습니다.

어느 날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겨 굴속에 숨어 있는데, 마침 그때 사울왕이

굴속에 들어와서 볼 일을 보려고 무기를 내려놓고 옷을 벗었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바보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옷자락만 살짝 베었습니다.

원수를 갚을 절호의 기회를 놓친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인다 한들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사울이 먼저 다윗을 죽이려고 따라다니기 때문입니다.

 

바보였던 예수님처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보처럼 산다는 것입니다.

얼마만큼 열심히 바보처럼 사느냐 하는 것이

얼마나 열심히 예수님을 믿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산다는 것은 오늘도 내가 바보처럼 살겠다는 말입니다.

 

▲우리 후배 목사들은 제가 살아가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본 사람들인데

제게 “목사님은 바보처럼 사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최소한 세 번은 그러셨으니 호를 삼우라고 하십시오.”

라고 한 말을 듣고, 사실 저는 크게 감격했습니다.

 

예수님이 바보셨는데 저도 예수님처럼 바보였다고

감히 비교할 수도 없고 불경스러운 말입니다.

 

그래도 몇 사람이라도 제가 바보처럼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 인생 최고의 영광이요 자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사람들이 저를 바보라고 한 것은

지금까지는 예수님처럼 바보처럼 살지 못했지만

앞으로 남은 인생만은 바보처럼 살라는 후배들의 애정 어린 충고,

바람으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다시 말해 앞으로 남은 인생에 세 번만이라도 바보짓을 해보라는 부탁으로

그런 호를 제게 준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보처럼 산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 ‘저 사람 참 바보다. 보통 세상 사람이라면

절대로 저렇게 돈을 쓰지 않는데,

저렇게 처신하지 않는데 참 바보처럼 사는 사람이다.

저렇게 하고 세상을 어떻게 사는가?’ 그런 말을 듣는 것,

그렇게 사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제자들이 말렸을 때

“그렇다. 그곳에 고난이 기다리고 내 생명을 빼앗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리로 가겠다.” 라고 하시며

예루살렘을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가신 예수님,

우리는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고,

그 예수님을 따라서 바보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 귀한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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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탄이 이길 수 없었던 바보

톨스토이의 동화에 사탄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종으로 삼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가 유일하게 이길 수 없는 사람이 있었다. 다름 아닌 바보 이반이었다.

 

그는 바보이기 때문에 아주 단순하다. 그래서 사탄의 속임수가 통하지가 않는다.

더구나 그는 욕심이 없다.

그래서 사탄이 돈으로도 무엇으로 유혹해도 욕심이 없으니 통하지 않는다.

 

아마 톨스토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었으리라.

바보와 욕심이 없는 사람,

바보처럼 사는 사람은 사탄이 도저히 유혹해서 이길 수 없다는 사실!

 

☞바로들이 절실한 세상 

☞ 바보 예수 행전 

☞사복음서 대조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