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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바보행전

LNCK 2016. 3. 20. 09:33

20151004 예수바보행전  - YouTube

예수바보행전         2:42~47          15.10.04.

     

◑저희 교회 미래 30년의 비전

   

창립30주년을 맞이하는 이 뜻깊은 주일에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며 달려왔던 지난 30년을 하나님앞에 감사드리고

또 미래 30년을 우리가 바라보며 결단하는 복된 주일입니다.

 

지금까지 저희 교회가 사도행전적 교회를 꿈꾸는 교회의 비전 슬로건으로서

"Acts29, 사도행전 29장"이라는 비전 슬로건을 붙잡았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의 역사가 지금도 계속 씌어지게 하겠다는 고백입니다

 

   혹자는 '사도행전 29장'이란 표현에 비호감을 갖기도 하는데,

   사도행전은 28장까지 밖에 없는데, 우리가 마음대로 성경을 바꾼다고 이의를 제기하는데,

   저희의 의도는, 사도행전이 예기치 않게 끝납니다. 사도행전28장에 보면

   그 마지막이 끝나지는 것 같지 않게 끝납니다.

 

   대개 마지막 인사말이 나오고, 맺음말이 나오고, 작별인사가 나오는데

   그냥 로마의 셋집에서 성경공부하다가 끝납니다. 그것은 계속 현재진행형이라는 메시지를 우리에게 줍니다.

   거기에 착안해서, 사도행전의 역사는 오늘 이시대의 교회를 통해서도 계속 씌어진다는

   그 비전의 고백으로 "사도행전29"이라는 이름의 고백을 우리가 해 왔습니다.

 

이제 창립 30주년을 맞이하면서, "사도행전적 교회"의 비전을 계속 이어가면서

동시에 우리 마음을 새롭게 결단하게 해 주는. 이 비전을 향해 계속 나가게 해 주는

새로운 슬로건을 찾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강해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 제 마음에 주신 비전 슬로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늘 설교 제목인 "예수바보행전"이라는 이름입니다.

'예수님을 위해, 바보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전'이라는 뜻입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우리가 정말 그대로 이어간다면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우리는 바보로 보일 것입니다.

 

사도행전11:26절에 보면, 안디옥에 있는 성도들이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불림을 받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인이다' 그렇게 불림을 받습니다.

 

그것은 보다 더 직접적인 의미를 부여한다면, 그것은 '그리스도께 미친 사람,

그리스도께 완전히 몰입된 사람,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처럼 사는 사람'

그런 의미를 다 함축하고 있는 단어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다'라고 부르는 그 단어 속에, 그런 의미가 다 포함되어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 그리스도를 위해 바보가 된다는 것이

혹시 마음에 부담스럽습니까? 이것이 만일 거슬린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의미를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저 적당하게 예수 믿는 것처럼, 그렇게 살지만

진짜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지 우리는 뒤돌아봐야 합니다.

 

보십시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바보가 되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을 '바보'라고 표현한 것이 불경스러워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삶을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이 때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감당하기 어려운 그런 바보스런 모습의 삶이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예수님은 그 당시 사람들이 추구하던 이기심, 탐욕,

위선, 자기를 위한 그런 삶을 결코 살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예수님은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예수님은 '바보'로 보이셨던 것입니다.

 

이 세상 기준으로보면, 예수님은 이루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재산을 모으지도 않았습니다. 교육을 많이 받지도 않으셨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물려줄 자녀도 남기시지 않으셨습니다.

 

거의 모든 시간을, 그 당시에 사람들이 만나기 꺼려하는, 달갑지 않은 사람들

외면당하는 사람들, 소외된 상한 사람들, 세리와 죄인같이 분류되어서,

저런 사람은 사회에서 추방되어야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과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33세의 나이에 사형수가 되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습니다.

세상 적인 관점으로 볼 때, 예수님은 실패자요, 바보같은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바보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자연적인 바보가 있고

-의도적인 바보가 있습니다.

 

'자연적인 바보'는 지혜와 분별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자기만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의도적인 바보'

자기에게는 분명 손해가 되는데,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서

더 큰 의로움을 위해서, 자신이 희생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조금도 자신의 손해를 아까워하지 않으면서, 그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가지 않는 그 길을 외롭게 걸어가는 그 사람.

바보같은 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을 가리켜 '의도적인 바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의도적 바보'가 되신 분입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이, 그 하늘의 영광을 왜 버리셨습니까?

바보 같은 선택 아닙니까. 의도적 바보가 되신 것이죠.

 

사람이 되신 것, 그것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입니까.

인간을 창조하신 그 흙으로, 그 흙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겁니다.

정말 바보 같은 선택입니다.

 

불의한 인간, 죽어 마땅한 인간을

그냥 죽도록 내버려 두셔야 마땅한데,

불의한 인간이 담당해야 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그 의로우신 그 분이 담당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

이기적인 사람들이 볼 때는, 결코 하지 않는 바보 같은 일입니다.

 

세상에 불의한 사람을 위해서, 의로운 사람이 대신하여 죽는 바보는 없습니다.

왜요? 그것은 바보 같은 선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바보가 되기 싫어합니다.

 

사람들이 조롱하고 외면하는 자들과 함께 식사하시고

그들의 친구가 되시는 것,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과 친구가 되시는 것

그것은 성공지향적인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 같은 선택이었습니다.

 

자신을 끊임없이 거부하고 배신하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자신을 배신한 사람들조차 포기하지 않으셨던 예수님은,

이 경쟁 중심적이고, 자신을 조금이라도 거부하는 자를

가차 없이 버리기를 원하는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 같은 선택입니다.

 

사도바울은, 이 복음의 위대함은, 바로 세상이 보기에 어리석어 보이는 예수님의 바보같은 선택.

십자가의 어리석음을 깨달을 때만, 이 복음의 위대함을 깨달을 수 있다 라고 여러 번 가르치셨습니다.

 

고전1: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이 어리석게 보인다는 겁니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5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란 표현이 나옵니다.

감히 하나님께 '어리석음' 이란 단어를 붙일 수 있을까요?

전지전능하시며 온 우주를 통치하시는, 지혜의 근원이시며 지혜가 충만하신 그 하나님을 가리켜

'어리석음'이란 단어를 감히 붙인다는 것이 타당합니까?

 

그러나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어리석음'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왜 이런 단어가 나왔을까요?

십자가는 세상이 볼 때 가장 어리석어보이는 선택이었기 때문입니다.

 

왜 어리석어 보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우리들을 사랑하시는 그 사랑이, 마치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길을 가시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이 세상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습니다.

 

계속해서 고전3장에서도 동일한 맥락의 말씀을 하십니다.

고전3: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19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어리석은 것이니 기록된 바 하나님은 지혜 있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 꾀에 빠지게 하시는 이라 하였고

20 또 주께서 지혜 있는 자들의 생각을 헛것으로 아신다 하셨느니라.

 

 

'여러분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말씀은

여러분이 지혜있다 라고 스스로 여기는 그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은 것이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의 지혜, 이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는 그런 자랑은

다 자기 꾀에 불과하고, 그 꾀에 다 넘어지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는 지혜있다 여기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절대로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되십시오

자연적 바보가 되라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지혜를 가지고 이 세상을 살 때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어리석어 보이는 길이, 하나님의 지혜라는 뜻입니다.

그 길은 십자가의 길이요, 낮아지는 길이요, 자신을 내려놓는 길입니다.

성육신의 길입니다.

 

애플 (컴퓨터) 회사를 만들어 전 세계를 놀라게 했고, 지금도 영향을 미치는 스티브 잡스는,

몇 해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2005년에 스탠포드 대학교 졸업식에서 이런 연설을 했습니다.

 

그는 대학 중퇴 학력입니다.

그 영상을 다시 보니까, 너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정말 훌륭한 가치를 붙잡은 사람이더라고요.

 

그 졸업식 연설에서 그는 3가지 자기 스토리를, 아주 간략한 5분밖에 안 되는 짧은 연설이지만,

자기 인생을 고백했습니다.

 

-자신은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나서, 그래서 다른 가정에 입양될 뻔 했다는 것입니다.

미혼모의 자녀로 태어난 것부터 시작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대학에 들어갔지만,

그 대학 학비를 부모님이 노동의 일을 하면서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자기가 자신의 모든 수입을 다 대학등록금에 내고도 부족하기 때문에, 대학을 그만두었다는 것입니다.

 

-대학을 중퇴하고 자신이 세운 회사를 잘 만들어갔지만, 그는 그 회사로부터 오히려 쫓겨납니다.

자기가 세운 회사로부터 쫓겨납니다.

 

-그리고 암에 걸려서 죽음 앞에서, 그 사투를 벌였던 그 모든 자기의 과거를 다 설명하면서,

그 모든 것을 극복한 그 위치에서 2005년도에, 그는 자신의 삶을 움직인 한 문장을 설명합니다.

 

그것은 어렸을 때, 무슨 백과사전 책의 카타로그에 있었던 한 문장인데,

그 문장이 자신을 움직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Stay hungry stay foolish!

'굶주림, 갈망 속에 머무르라. 어리석은 상태로 머무르라'

 

미국 최고의 지성인들의 대학의 졸업식에서,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라.' 그것이 자기의 삶을 움직였고, 오늘의 나를 만들었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 말을 이해한 졸업생이 몇이나 되었을까요?

 

저는 그 분이 우연히 발견한 백과사전의 한 문장, 그것은 사실은 성경적인 가치에서 나온 말이었습니다.

Stay hungry 역시 '가난한/갈망의 상태에 있는 자가 복이 있다'는 성경적인 내용과 일치합니다.

 

우리는 조금만 지식이 있고, 조금만 재산이 모여지고, 조금만 사회적 위치에 올라가면,

금방 헝그리 정신이 사라집니다. 계속해서 헝그리한 상태로 머무르는 것! 굉장한 정신자원입니다.

조금만 지혜롭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자기 잘난 지혜를 의지하며 살아갑니다.

어리석어보이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바보로 여길까봐 똑똑한 채 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진짜 지혜로운 사람은, 어리석어 보이는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Stay foolish! 이것이 스티브 잡스를 움직였던 인생철학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비추어 본 "예수 바보"란?

 

오늘 본문에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보같은 삶을 사는 모습을 오늘 본문이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익숙하지만, 이 본문을 그 당시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살지? 이렇게 살지 않아도 되는데, 그들은 왜 그렇게 살까?'

세상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같은 삶을 살았던 기록입니다.

이들의 삶은 '예수 바보들의 삶이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을 바로 보는 사람들입니다.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이들은 예수님을 바로 보기 위해서 가르침이 필요했습니다.

3년동안 예수님과 함께 동거동락했던 그 예수님. 그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예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고,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가르침을 받았던 사람들로부터,

그들은 가르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왜요? 예수님을 바로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배우는 것은, 바로 이 목적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보기 위해서 배우는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지식이 있어도, 예수님을 바라보는 바른 시각이 없으면, 성경공부 헛되게 한 것입니다.

 

많은 지식을 가져도, 말씀 전체가 예수님에 대해 증거한 것이기 때문에(5:39)

성경말씀을 깊이 안다는 것은, 예수님을 뚜렷이 바로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지는 것입니다.

 

이들이 기도에 전념했습니다. 기도가 무엇입니까?

기도란 내가 원하는 뭣을 얻기 위한 요술방망이가 아니라,

살아계신 예수님의 임재를 체험하고, 예수님을 바로 보는 것이 기도입니다.

 

예수님이 과거 역사 속의 인물이 아니라, 부활하셔서 지금도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

그 살아계신 예수님을 바로 보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들은 함께 떡을 뗐다고 했습니다. 2:42

이것은 그저 배고파서 한 식사가 아닙니다.

예수님 때처럼 성찬을 나누었다는 것입니다.

당시 교회는, 식사와 성찬이 거의 구별되지 않았습니다.

 

떡을 뗐다는 것은, 그들이 성찬을 통해 예수님을 기억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과 잔을 나누시면서, '이것은 내 살이요 내 피니,

이것을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고 말씀하셨어요.

 

성찬이야말로,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가장 정확하게 바로 보여주는 성례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처럼 사셨던 그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12:1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예수를 바라봅시다. - 우리말 성경)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세상 사람들이 '너는 바보 아니야?'라는 그 조롱과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십자가를 참으신 그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

 

2.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웃을 바로 보살피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 바보입니다.

 

2: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이들은 모든 물건을 함께 쓰며,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고 말씀합니다.

 

이 구절은, 결코 공산주의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사유재산을 금하는 말씀이 아니고, 강제적 재산공유가 아닙니다.

자신의 재산이 여전히 있었으나, 남의 필요를 따라 자발적으로 나누는 '기부'였습니다.

 

이들이 금한 것은 사유재산이 아니라, 이기심을 금한 것입니다.

이들은 어떤 공동소유나, 사회적 평등 이념을 추구한 공동체가 아니었어요.

그런 이념을 추구하지 않아도, 어떤 필요가 생길 경우에,

필요에 처한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자기 것을 조금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세상과 너무 다른 바보 아닙니까!

 

자기 소유를 왜 자기 소유로 여기지 않습니까.

세상에서는 이런 사람들을 바보라 말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바보처럼, 가난한 자의 필요가 보일 때마다,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여러분, 필요는 욕심과 다릅니다.

자기는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욕심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간절히 필요로 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엄청난 사치일 수도 있습니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어려운 가난 속에 살고 있어도,

지구 반대편에 사는 다른 지구촌 사람에게는, 부유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상의 필요를 바로 보살피는 공동체이어야 합니다.

지금 재난, 극심한 궁핍 가운데 있는 필요를 보면서도

그들을 바로 보살필 수 있는 공동체!

여기서 바로는 '올바른'도 되지만 '즉시로'라는 뜻도 됩니다. 둘 다 포함합니다.

 

저희의 비전은, 앞으로 미래 30년 후에, 저희 교회가

지금까지 저희가 해외선교에 헌신한 만큼

이웃의 필요를 보살피는 그 헌신도 같이 병행해 나갔으면 좋겠습니다.

 

해외선교를 줄여서, 국내 구제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선교 헌신도 더 올라가지만, 우리 이웃의 필요를 돌보는 일도, 그만큼 헌신이 같이 올라갔으면 좋겠습니다.

 

<더 멋진 세상>을 통해 세계 기근의 필요를 채울 뿐만 아니라,

우리의 사회적 책임/긍휼 사역을 통해서, 우리의 이웃을 돌보고 바로 보살피는

때를 따라 보살피는 그런 공동체!

그것이 '예수 바보 공동체'입니다.

 

3. '예수 바보'란 예수님을 세상에 바로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2:43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사도행전에 나타난 성도들은, 그 당시 사람들로부터 두 가지 반응을 받았죠.

-첫째는 두려움입니다.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일으킬 수 없는 기적들이 그들을 통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갑자기 신비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습니까? 아니죠.

 

하나님께서 이 복음이 증거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임했다는 것을 그들에게 나타내기 위해서,

기사와 표적을 그들을 통해 주님이 일으키신 것입니다.

 

놀랍게도 세상에 똑똑하다는 사람에게는 기적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어리석어 보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사람에게

기적이 나타날 줄로 믿습니다.

 

저희 교회 미래 역사에 이런 기적과 표적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물론 기적과 표적을 인위적으로 추구하는 교회가 되면 안 됩니다.

 

복음 증거를 위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해서 병든 자를 정말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우리 모두가 기도하고, 복음 증거를 애쓸 때

기적과 표적이 자연스레 나타나는/뒤따르는 공동체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는,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과연 우리 교회가 이 세상에서, 지역주민들로부터 여전히 칭찬을 받을 수 있을까요?

 

사실 저희 교회가 많은 성도들이 모이는 관계로, 교통량이 증가해서

근처 주민들에게 본의 아니게 불편을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교회가 나눔의 사명 감당을 잘 해서, 지역 주민들에게도 칭송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지금 저희는 한 달에 한 번씩, '승용차 타지 않고 대중교통 이용하는 주일'로 지키는데,

이런 저희 노력들이, 지역주민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줄 줄 믿습니다.

그런 마음들이 모여서 쌓일 때, 세상 사람들로부터 교회가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칭찬은 하루아침에 얻어지지 않습니다. 이벤트나 쇼로 얻어지지 않습니다.

꾸준하게 우리가 세상의 필요를 돕고,

그저 내부적으로 싸우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세상을 섬길 때,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칭찬할 것입니다.

 

그럴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습니다. :47

여러분, 우리가 인위적으로 사람을 더하는 것은, 그냥 세력 확장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더하시는 교회는,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는 것이죠.

우리가 할 일은 단 한 가지, 예수 바보가 되는 길 뿐입니다.

 

예수님을 바로 보고, 세상의 필요를 바로 보살피고,

그리고 세상에 예수님을 바로 보여줄 때,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구원 받는 자들을 날마다 더하게 하실 줄 믿습니다.

 

온누리교회가 또 다른 30년이 지난 후, 창립 60주년을 맞이할 때는

'온누리교회는 예수바보교회. 예수바보행전을 살았던 교회다'라고 평가 받게 되기 바랍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가 만든 구호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이렇게 불러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함께 걸어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사도행전에 삶의 살았던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예수 바보로 살아가는,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하여 바보같은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주님,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오니 주께서 우리를 붙잡아주시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