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자가 세상에 줄 것 마6:30~33 스크랩 글
▲꽃이 피는 계절이면, 소월의 시가 생각납니다.
산에는 꽃이 피네
갈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산에는 꽃이 지네 꽃이 지네
갈봄 여름 없이 꽃이 지네
▲너무나 당연한 계절의 변화도... 그 속에 하나님의 은총이 있다.
노아와 그 가족일행이 대홍수가 끝난 후에 방주에서 나와
제사를 지낼 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창8장
“땅이 있는 한, 뿌리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
파종과 추수, 더위와 추위, 사계절의 변화, 밤과 낮의 교체는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일상적인 생활리듬입니다.
그래서 구태여 누가 간섭하지 않아도
저절로 굴러가는 자연의 이치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서기자는 우리에게 말하기를
그렇게 너무도 당연하고 일상적인 것, 자연의 이치와 계절의 순환까지도
사실은 당연한 것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의 약속이고
창조주 하나님의 은총인 것을 성찰하게 합니다.
▲일상 속에서 신비를 발견해야...
우리는 성령의 임재와 역사를 경험하기 위해서
항상 비상한 체험을 해야 할 것이라고 미리 걱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도원이나 부흥회 같은 특별집회에 참석해야만
성령의 신비로운 임재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사실 우리의 일상생활이 타성에 젖어 있고
너무나 심령이 여러 가지 일로 분산되고 산만해져 있어서
한가지 일 곧 성령체험에만 집중하기 위해
그러한 기도원을 찾거나 부흥회에 참석할 필요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말은, 성령은 그러한 특별한 때와 장소에서만
역사하시고 현존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니 도리어 성령은 지극히 일상적인 일과 경험 속에서
그 신비로우신 빛과 영광을,
구름사이의 해처럼 문득 드러내십니다.
▲흥망성쇠, 성공실패, 생로병사도 마찬가지... 그 속에 신비와 은총이 있다.
땅이 있는 한 파종과 수확,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은
단지 자연 속에 있는 인과율의 법칙이나
지구의 자전공전의 주기적 운동을 말하려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이 말씀을 확대해서 적용하면,
땅이 있는 한 인생과 역사현장에는 끊임없는 흥망성쇠, 성공실패,
건강과 질병, 전쟁과 평화, 탄생과 늙어죽음,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의 투쟁이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자연 발생적인 일들입니다.
그러니 어찌 보면 그런 일들이 우리시대에만 있다고 놀랄 필요도 없고,
탄식할 필요도 없다는 말입니다.
문제는 항상 있는 그 일상성(자연 발생적) 속에 현존하는 비범한 것,
일상성 안에 항존하는 신비자 하나님의 은총,
보존하시고 생명을 지키시려는 의지,
하나님의 긍휼과 축복을 감지하고 그것을 음미하는 일이 중요한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의 눈이 너무 현실적이어서,
일상적인 일 속에서 비범한 것이 현존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맹인이 되어 있다는데 있습니다.
염려와 걱정에 너무 사로잡혀 있어서 ‘일상 속에 계시는 신비하신 이’,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거의 느끼지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삶의 궁극적 목적은, 의식주 해결이 아니다.
예수께서 가난하고 지친 군중을 보면서, 공중에 날아가는 새를 보라,
들에 핀 백합화를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뭘 먹고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은 항상 우리에게 걸림돌이 되지만,
그래도 그 말은 진실이고, 정말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듣고 있는 청중은 하루식량이 걱정이었던 가난한 민초들이었습니다.
끼니 걱정 안하고 살 수 있는 풍족한 중산층이 아니었습니다.
이 말씀은, 날마다 교회에 나와 설교 말씀만 듣고, 성경만 읽고 있노라면
의식주 문제는 하나님이 모두 해결해 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공중 나는 새 한 마리가 하루를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는가를
잘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 그런 의미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척박한 중동의 토질과 뙤약볕 아래서 백합화 한 송이가 꽃피어나기 위해서
얼마나 힘겨운 노력을 다하는가를 잘 아시는 예수님께서
낭만적 의미로 그런 말 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입니다.
공중에 나는 새, 들의 백합화, 얼핏 보기에 저절로 쉽게 사는 것 같지만,
현실은 결코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문제의 초점은, 의식주문제, 정치문제, 이념문제, 경제성장, IMF 극복은
살아가기 위해서 해결해야 할 일이지만,
우리의 전존재를 사로잡아 바쳐야 하는 궁극적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나그네 여정을 걸어가는 동안 우리에게
의식주 문제는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
삶의 목적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습니다. ★
우리는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기 위해서 먹을 때, 밥 한 그릇은 거룩한 생명의 떡이 되지만,
먹기 위해서 살려고 할 때는, 밥한 그릇은 썩어질 물질로만 남게 됩니다.
▲‘여행’의 예
우리가 여행 목적과 방향을 잊어버리고
‘여행가방 꾸리는 일’에만 전 관심을 쏟느라고
정작 여행다운 여행을 못하고 일생을 다 허송해 버리는 사람이 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성직자의 사명
시인, 예술가, 성직자는 그 점을 다른 사람보다 좀더 분명하게 의식하고
다른 사람들의 잠자는 영혼을 깨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일상 속에 살며시 와 계신 거룩한 분의 현존,
신비이신 하나님의 감추인 얼굴,
일상적인 일 속에 와 계시는 성령의 영광스런 빛과 음성을
보고 듣는 사람들입니다.
일상의 과정 어느 순간 속에 침투해 들어오시는
그 무엇이라고 규정하기 힘든 그것을,
살포시 안아주시는 사랑의 가슴을,
보통사람보다 좀 더 예민하게 감지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어떤 때는 빽빽하게 들어찬 아파트 단지 안에서
아장아장 걸어가는 두서너 살 박이 아이들 걸음마 속에서
그것을 보기도 할 것입니다.
어떤 때는 후드득 떨어지는 꽃잎들 속에서
주님의 발자국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사랑’ 속에서 발견되는 주님의 현존
어떤 사람이 무신론자이든 신앙인이든
이미 사람으로 태어난 그 때부터 모든 인간은 (자기가 알든, 모르든)
일상 속에 현존하는 신비의 은혜와 능력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일상적인 것 속에서 경험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피부로 느끼게 되는 경험 중 가장 구체적인 것은 사랑의 경험입니다.
진정한 사랑은 사람들의 영혼을 맑게 하고,
무엇이 귀중한 일이고 무엇이 버려도 될 지엽적인 일인지를 분별하는
혜안을 뜨게 해 줍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은
사물의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을 분별하는 눈이 열릴 뿐만 아니라,
잠시 있다가 사라져 버릴 가치와, 영원한 가치를 분별하고
그 안에서 영원을 맛봅니다.
▲일상의 사랑
물이라는 물질은 물을 마시고 얼굴을 씻음으로서
물이 그렇게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되듯이,
하나님은 사랑으로 계시고, 성령은 사랑의 능력과 현실로
우리 가운데 계시는 것입니다.
일상의 사랑 가운데
성령님을 통해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가까이, 조용히, 체험하시는 은혜가 여러분 가운데 있기를 기원합니다!
<인터넷 설교 발췌, 요약, 00.11.13. *원제목 : 일상속에 계시는 생명의 영
▲세상 사람들이 성직자들에게 원하는 것
그렇습니다. 위 글의 ‘▲성직자의 사명’처럼,
종교인, 성직자들의 사명은
이 세상 사람들이 일상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임재를 발견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도와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집전하고, 기도를 드리며, 강론과 집필 등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원하고 신비한 영생의 가치', 또는 '현존하시는 하나님’ 등을
늘 깨우쳐 주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비록 불신자라도,
유아세례, 결혼식, 회갑연, 장례식 등을 기독교식으로 치르기를 좋아합니다.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도 좋아합니다.
사람들은 돈 버느라 매일 정신없이 분주하게 살아가지만,
자신이 ‘본질상 영원한 존재’임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직자가 마치 ‘새마을 연수원 강사’처럼
경제이론을 거론하며, 소득 몇 만 불 시대를 열자고 외치는 것,
또는 TV [아침마당]에서 나오는 것처럼 ‘현실적으로 사는 문제’를 주로 강론한다면
‘현실적 문제’를 논하지 않을 수 없겠지만,
만약 그것이 강론의 ‘주된 주제’가 된다면
성경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도 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편집자
*관련글 : 평범한 삶을 비범하게 살아라 ▣ 리더쉽, 목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