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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음란한 죄에서 벗어나십시오

LNCK 2008. 1. 2. 22:28

https://www.youtube.com/watch?v=SAQ9IT1nSmg

◈이제 음란한 죄에서 벗어나십시오       요일5:18, 마5:28         출처

*출처 동영상의 16분부터 녹취

◑음란물의 배후에는 마귀의 역사가 있다

여러분이 이제 음란의 유혹을 받을 때, 그것이 음란한 동영상이든지
음란한 사이트든지, 음란한 사진이든지.. 그런 음란한 것과 관련된 것의 유혹을 받을 때 
여러분이, <그 배후에 역사는 악한 영, 사탄>을 보아야 합니다. (*영적 분별이 있어야 돼요)

그건 단순히 유혹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돼요. 

사탄은 이미 상당히 성공을 했어요. 
이 점에 대해서 경건한 성도들에게 엄청난 성공을 했습니다. 

▲작년 말에 아주 충격적인 미국 뉴스가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보수적인 사람들이 포르노 물을 더 많이 본다는 겁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포르노물을 보는데 1위 라는 어떤 통계 조사가 있습니다만
실제로 그런 면도 일면 있으니까 그런 보도가 나왔겠죠. 

우리 한국 사람들이 음란물을 굉장히 많이 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들이 있어요. (아래 설명 나옴)

근데 미국도 그런 문제가 있습니다. 
미국에서 포르노 물을 가장 많이 보는 도시가 유타 주가 1등입니다. 

근데 이 유타 주가 굉장히 절제된 주입니다. 거의 몰몬교도들의 센터지요. 
몰몬 교도들은 굉장히 가족 중심의 생활을 강조합니다. 
굉장히 절제된 생활을 강조하고, 미국에서 가장 술집이 적은 주가 유타 주에요. 

그런데 그 유타 주가 포르노 물을 가장 많이 보는 주라는 겁니다. 
그리고 온라인 성인물을 가장 많이 보는 면에서도 유타 주가 1위를 차지한답니다. 

하버드 대학교의 벤자민 애들만 교수가 이 문제를 연구했어요. 
'가족과 결혼에 대해서 보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 
한 남자와 한 여자만의 결혼을 지켜야 한다. 혼전 성관계는 안 된다.' 

이런 아주 보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포르노를 더 많이 봐요. 

우리 식으로 말하면, 기독교인들이 포르노 물을 더 많이 볼 수도 있어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실제로 기독교인의 비율이 높은 주, 낮은 주, 
평일에 온라인 성인물 접속하는 것을 쭉 이렇게 조사해 보면 

미국에서 기독교인의 비율이 높은 주의 포르노물 접속률이 
기독교인 비율이 낮은 주와 별 차이가 없어요. 

다만 주일 예배 시간에는 훨씬 접속율이 적어진다고 합니다. 
예배당에 가 있으니까요.

이게 더 비참한 거지요. 
차라리 주일 아침 예배 시간에 접속률이 더 많으면 
'이 사람들이 교회 안 가니까 그런가 보다' .. 이럴 텐데 

주일 낮 예배시간에는 접속율이 확 줄어들었다가 
예배시간이 끝나면 접속율이 또 확 늘어나고... 이건 진짜 비참한 거지요. 

그러면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성인물을 본다.. 이런 뜻이 확실한 것입니다.

애들만 교수는, 이 연구를 보면, 성인물에 대해서 겉으로는 아주 배타적인 사람들이 
실제로는 훨씬 더 많이 그것을 접속해서 본다는 거예요. 

자기가 겉으로는 '포르노 사이트 안 돼요. 그런 거 보면 안 돼요' 

이런 사람이 실제로는 더 많이 본다는 거지요. 

'그럴 줄 알았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근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여러분이 한 번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음란물을 보는 것이 (실제 음란 관계보다) 죄책감이 훨씬 덜 하기 때문이에요. 

-실제로 음란한 일을 행하는 것과
-음란물을 보는 것,
이 둘 사이에서, 후자가 훨씬 더 죄책감이 덜 해서, 죄를 짓기 쉽다는 것입니다. 

실제로 간음하고, 룸살롱에 가서 방탕하게 살고, 정말 타락한 삶을 사는 것에 비하면, 
그냥 포르노 영상 같은 거 보고 해소하는 게 훨씬 죄책감이 덜하다는 것입니다. 
일종의 차선의 선택인 거죠. 그러니 보수적인 사람들이 더 많이 접속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그런 생각이 있어요. 
실제로 행동으로 음란하게 살고, 방탕하게 살고, 아주 난잡한 이성교제를 하고, 

성관계도 아주 자유롭게 하고.. 그런 것 보다는 

잡지나, 그냥 동영상을 혼자서 조용히 보는 것이 훨씬 죄를 덜 짓는 거다... 
이런 생각이 이게 무서운 거라는 거죠. (배후에 마귀 역사를 못 보니까요!)

▲그러니까 아주 보수적인 사람들, 이런 사람들도 음란의 유혹은 있어요. 
근데 노골적으로 그렇게 살 용기가 없어요. 
만약 그러면 너무 많은 비난을 받으니까요. 

완전히 인간관계가 다 깨지고, 
자기의 사회적인 위치나 지위가 다 무너지니까 그건 도무지 겁이 나서 못 하겠고..
(대신에 포르노를 선택하는 겁니다.)

옛날 같으면 그냥 그렇게 살았죠. 
근데 지금은 인터넷이라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자기 혼자 있는 공간에서 얼마든지 그런 영상으로 
실제로 경험하는 것 같은 기분을 간접적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니까.. 

보수적인 사람, 겉으로는 음란한 것에 대해서 굉장히 거부감이 있고 
또 그런 것을 배척하고.. 이런 사람이 속으로는, 자기 혼자서는 
그런 걸 굉장히 탐닉하고 빠져드는.. 이런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기독교 청년들에게도, 이런 문제가 있어요. 
또 이런 문제는 목회자들이나, 성직자들에게도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의 기준

근데 여러분, 꼭 명심해야 합니다. 
오늘 혹시 여러분 중에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나요? 

'그래도 내가 밖에 나가서 죄 짓는 거보다는 낫잖아? 
그런 음란물 가지고 그저 그냥 내 욕구를 해결하는 정도가..' 

실제로 어떤 분은 그런 생각을 하시는 분도 있어요. 
'목사님 그래도 실제로 그런 식으로 욕구 발산을 하게 해 줘야
그래야 아주 굉장히 심각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이렇게 이야기 하는 분도 있어요. 

이건 정말 성경을 몰라서 그렇고,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절대로 그런 태도를 가지고 계시지 않았어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점에 있어서 충격적인 말씀을 하시는데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이미 간음했다는 것입니다.  마5:28

그러니까 여러분, 마음에 음욕을 품는 것은, 실제로 간음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네 눈이 실족하게 하거든, 네 눈을 빼 버려라. 
차라리 그러고 천국 가는 게 낫다!'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세요. 

▲예수님은 왜 이러실까요? 
단순히 음란한 문제를, 또 포르노물을 본다든지 이런 문제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어떤 윤리적인 문제 정도로... 
또는 자기절제의 문제 정도로... 예수님은 보지 않으신다는 겁니다. 

그것은 그 속에 역사는 악한 마귀가 그를 사로잡는 문제입니다.  *설교 주제 

그러니까 악하고 음란한 마귀가 사로잡고 들어오는 자리가 어디냐면 
사람의 마음입니다. 마음! 

우리가 실제로 간음을 했느냐, 
아니면 마음으로만 내가 음란한 것을 즐겼느냐? 
마귀에게 있어서는 둘 다 똑같아요. 

우리가 더 원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으로만 짓는 음란이에요. 
왜요? 
훨씬 사람에게 죄책감이 덜하니까요.

사람이 실제로 간음을 하게 될 때는, 벌써 외부적으로 주위에서 통제가 들어옵니다. 
목사님이 심방도 오고, '집사님 그러면 안 돼요, 이제 돌아와야지요.' 
지난 주간에 술집에 있는 것을, 어느 성도님이 봤다는 제보가 있던데...?'

뭐 이런 문제들이 있으니까, 실제로 막 음란하게 살고 방탕하게 살면 
문제가 심각해 져요. 
그러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가족들이나 주변 사람들이 다 말립니다.

자기도 괴로워요. 정말 굉장히 비참해지지요. 
'나는 완전히 정말 저질이고.. 이러다가 진짜 지옥 가지...' 

그런데 이게 그냥 음란물을 보는 정도 쯤으로, 
또는 마음으로 그냥 음란한 생각을 품는 정도 쯤으로는
'어휴, 이러지도 않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하면서 본인이 정당화하고, 허락을 하는 거예요. 

다시 말하면 <마귀가 자기 마음을 지배하는 것을 허락하는 거지요. 
그게 더 무섭다는 겁니다!> 

내가 음란의 영을 방어하는 게 아니라, 허락을 하고 있는 거니까요. 


◑적용

1997년도에 유로 코스타에 강사로 오셨던 K장로님이 
예수 믿고 나서도 한동안 포르노 영화를 계속 보았다고 합니다. 

그때 당시 1997년도 당시는 지금처럼 인터넷 상황이 아직 아니었어요. 
우리 한국에서는 포르노 영화를 거의 볼 수가 없었어요. 
동네 비디오 방에서 부끄럽게 빌려 보는 정도였어요.

그런데 영국에 유학을 가서 보니까, 거기는 성인 영화를 보는 그런 지역이 공개되어져 있었어요. 
누구든지 가서 얼마든지 그런 성인물들을 볼 수가 있는 그런 환경이 되어있었어요. 

그렇다고 해서 유럽이 전체가 다 그런 분위기는 아니지만 
그렇게 허락이 되어져 있는 아주 개방적인 사회입니다. 

한국 유학생이 가서 조금 적응이 되고 난 다음에 
그 성인영화에 깊이 빠져버리는 거예요. 

한국에서 워낙 통제된 사회속에서만 있다가, 
가 보니까 '세상에 어떻게 이런 것이 이렇게 다 공개되어 있지?'
그래서 완전히 포르노 물에 빠져서 살았어요. 

특히 이제 직장에 취직하고 출장을 가거나 하면, 집에서도 떠나지요. 
그러니까 출장 업무가 끝나고 난 다음에는, 영국 런던으로 돌아오기 전에는 
완전히 포르노 영화 상영하는 곳이 어느 도시마다 있으니까 
거기 가서 밤새도록 그런 영화를 보고 런던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시에 본인은 생각할 때, 내가 그렇다고 무슨 다른 여자가 생긴 것도 아니고, 
내가 그렇다.고 해서 무슨 집창촌에 간 것도 아니고 
영화만 본 거야.. 영화만! 

자기 마음에는 '이런 정도까지는 괜찮아!' 

▲근데 문제가 생기는 것이, 자기가 출장만 갔다오면 
아내가 아프던지, 아이들이 아프던지.. 하여튼 누군가가 심하게 아파서 
거의 죽어갈 정도가 되었던 거지요. 

처음에는 그것과 연관성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출장만 갔다오면 그런 일이 생기니까 
왜 그런가, 왜 그런가 하다가... 

출장 갔을 때, 자기가 런던의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포르노 물을 보는 것, 그것 때문일까? 

'아이고 설마 그 이유는 아니겠지.. 내가 무슨 큰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그 영화 값이라고 해야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거는 그냥 스트레스를 푸는 정도이지...' 

근데 '그래도 혹시 모르지..' 하는 생각 때문에 
그가 실험을 3번 해보기로 했어요.

세 번을 해 봐야, 그 연관성을 정확히 알 것 같다고 해서 
세 번을 스스로 시험해 보았습니다. 어떤 실험을 했느냐면,

출장 가서 돌아올 때까지, 아침저녁으로 매일 집에 전화를 하는 거죠. 
'괜찮냐?' '괜찮아요.' 
'아무 일 없냐?' '아무 일 없어요.' 
출장 오기 전날까지 아무 일이 없었어요. 

그리고 이제 밤새도록 가서 포르노 영화를 보고 
그 다음날 아침에 집에 와서 문을 여니까 
아내가 죽어 가고 있어요. 

'어휴 이것 때문인가?' 
그래서 3번 해 보기로 했으니까 

그 다음에 또 출장 가서 또 똑같이 매일 확인해 보니 아무 일 없었어요. 
그런데 마지막 날, 또 그렇게 포르노 영화 보고 집에 돌아와 보니까 
이제는 아들이 거의 죽어가고 있었어요.

이러면 거의 세 번까지 안 해봐도 깨달아야 될텐데... 
3번 시험해 보기로 작정했기에, 또 한 번 더 시험해 보았다고 합니다.

세 번째도 똑같은 일이 벌어지는 걸 보고 
그제야 집 현관에서 무릎을 꿇고서
'하나님, 하나님께서 그것을 싫어하시는군요!'

그 유학생들 앞에서, 그 장로님께서 자기 과거의 아주 적나라하고 솔직한 경험을 
간증했습니다.

근데 유학생들은 거의 대부분 다 그 문제에 실제로 빠져 있었어요. 
지금은 뭐 인터넷으로 다 그 보다도 훨씬 더 심한 것까지 볼 수 있다고 그러니까 

뭐 이제는 상황이 또 전과는 다르겠지만.. 

유럽에 유학 와 있는 한국의 유학생들은 
당시에 그런 문제들에 심각하게 사실 빠져 있었던 상황이에요. 

▲여러분, 왜 이럴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있는 거지요? 
하나님은 왜 이렇게 하나님의 택하여 쓰시는 자에게 
이 문제를 이렇게 심각하게 물으시는 거죠? 

마음의 문제입니다!
내 마음이, 우리가 예수님을 영접해서 왕으로 모시는 자리이기도하고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내가 겉으로는 예수를 믿어도 
속으로는 완전히 마귀의 종노릇 하게 만들려고... 
마귀는 우리 마음을 지배하기를 원합니다. 

근데 우리에게 있어서 가장 그 문제에 대해서 취약한 부분이 
음란의 문제, 
특히 청년들인 여러분들에게는 더 그렇죠. 

아직 주님과의 관계가 성숙이 안 돼 있고, 
예수님과의 친밀함이 자라지 않은 상태에서 
마귀는 금방 내 마음을 (음란으로) 지배하고 들어오죠. 

마음이니까, 겉으로 드러난 게 아니니까, 
그러니깐 얼마나 교묘하게 숨어 들어와있는지요.. 

▲제가 성도들을 위해서 안수 사역을 할 때, 그 때 마다 느끼는 것이 있어요. 
그 마음에 주인이, 하나님이 아니라, 딴 주인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전혀 드러나지 않아요.

특히 어릴 때부터 듣고 보았고 경험했던 것 중에 
음란함으로 인하여 자기 속에 들어온 더러운 악령..

성폭력 이든지 또는 어릴 때 자기가 원치 않았던 경험이었을지라도 
성적인 감각에 일찍 눈이 열린 거예요. 
그러면서 자기속에 음란함이 들어와 버렸어요. 

그것이 자기속에서 이제는 주인 노릇하는 거죠.
음란의 영이 자기를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이건 정말 심각한 문제죠. 
하나님의 사람들이, 성령께서 나를 통하여 역사하실 때, 그게 문제가 안 되겠어요? 
(충돌이 일어나고, 성령께서 나를 통해서 자유롭게 역사하지 못 하십니다.)

▲성도의 자위행위 문제... 논란이 있습니다. 
최근 <크리스천투데이>의 조사에 의하면
평신도와 성직자 중에 1/3 정도는 자위행위가 나쁘다. 
1/3은 나쁠 게 없다. 
나머지 1/3은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 이렇게 의견이 나뉩니다.

그만큼 자위행위에 대한 판단은 지금 혼란상태에 있습니다. 
성도에게 자위행위가 괜찮은거냐?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요즘에 세상적인 심리상담가들은 자위행위를 허락해 주는 분위기입니다. 
'너무 과하지 않다면 허락해 줄 수밖에 없다.' 
그게 일반적인 세상적인 분위기예요. 

네, 기독교 목회자들은 이 문제를 어떻게 방침을 정해 줘야 될지, 
지침을 줘야 될지 좀 혼란한 상태 있습니다. 

'상황에 따라 판단이 달라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 
자위행위에 대해 죄라고만 딱 단정할 수는 없지 않느냐?' 
이런 추세가 솔직히 이제 거의 대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간음하고는 다르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으로 성관계를 갖는 것과는 다른 문제로 보기 때문이죠.

그리고 또 어떤 분은, 자위행위를 허용해 주면 
실제로 성범죄로 이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면서
그래서 그런 식으로 욕구를 해소해 줘야, 그게 긍정적인 면도 있다고 봅니다.
그런 욕구에 계속 매이지 않게 해 줄 수 있다면서
허락해 줘야 된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 예수님은 뭐라고 대답 하실까요? 그게 중요한 거지요. 
예수님은 이 문제에 뭐라고 대답하실까요? 

예수님은 절대 No 라고 보십니다. 절대 안 된다!
왜 그렇지요? 
역시 마음의 문제입니다.
마음의 문제인 겁니다. 

자위행위 그게 뭐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쳤느냐?
또는 어쩔 수 없는 생리적인 작용이냐? 그런 문제를 떠나서 
자위행위와 마음이 밀접하게 상관관계가 있다는 거예요. 

자위행위를 허락해 준다는 것은
그러니까 마음에 음란한 것을 허락을 하게 되는 겁니다. 

자위행위를 통해 음란한 것을 생각하도록, 그것을 마음에 품도록... 
내가 허락해 준다는 것입니다. 그게 결정적인 문제예요.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얼마나 중요한 건가를 알고 나면 
이 문제에 대해서 그대로 답이 나와요. 

일례로, 담배가 아주 해롭다고 그러는데.. 그래서 순한 담배가 나오지요. 
근데 의학적으로는 순한 담배가 더 해롭다고 합니다. 
왜냐면 순하니까 아무 경계심 없이 더 피우는 겁니다. 독한 담배보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지만 
하여튼 독한 담배보다 순한 담배가 건강에 좋겠다는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지요. 

그러다 보니 오히려 더 니코틴에 중독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거기에 마음을 열어 놓고 있으니까요! 

자 실제로 음란한 생활을 하는 거 하고, 
그저 자위 행위 정도로 그걸 푸는 거하고.. 
여러분 이건 절대로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요.

▲오래 전에 어느 교회의 집사님 아들은, 여러분 또래의 청년이었어요. 
아주 성실하고 순진하고 착하고 조금 내성적이고 
교회 안에서 늘 예배에 참석하고, 새벽기도, 금요철야에도 참석하고..
어머니는 혼자 되신 분인데, 어머니에게 아주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근데 어느 날, 전화가 왔는데 강간으로 인해서 지금 구속이 돼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 청년이 강간죄를 짓다니.. 제가 경찰서에 가서 그를 만났어요. 

근데 이 청년이 포르노 물에 빠져 있었던 것이에요. 
포르노 물을 보다가 안 마시던 술을 마시고 
그리고는 어두운 골목길에서 여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그리고는 그냥 그런 죄를 지은 거죠.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마음에 허락을 해 놓으면, 그 다음에는 어떤 형태로 전개될지는... 
이제는 자기 의지하고 상관없이 일이 번질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파는 일에 '마음'을 열어주고 나니까 
은 30에 예수님 팔고 제정신이 돌아왔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되고 말았죠.

똑같아요. '마음을 조금 열어주는 정도는 괜찮겠지..' 
'마음으로 짓는 죄는 뭐 괜찮겠지..' 
이것은 마귀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전략이에요. 

내 마음을 열어주면 
그것으로 여러분은 완전히 마귀의 종이 되는 거지요. 
그러면 비참한 삶이 뒤따릅니다.

▲그런데 항간에는 '이제 가면을 벗자, 너도 그렇지? 나도 그렇다.
이제 우리가 타락한 죄인임을 인정하며 살자!'

그런데 이게 경건의 방향으로 가지 않고, 방임의 방향으로 갈 수도 있습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고 살자!' .. 이게 굉장히 매력적인 메시지 일수도 있어요.
청년들이 쉽게 빠져듭니다.

다만 그 방향이 경건으로 가야되는데.. 
자기 죄성을 인정하면서... 방임의 방향으로 가면 안 됩니다.

'아 이제 자유다! 그렇구나, 내가 그동안에는 위선의 탈을 쓰고 살았구나!' 
'이제 진짜 내가 참 자유의 메시지를 들었네! 
모든 사람은 다 어쩔 수 없는 죄인 이래!
그거 아닌 척 할 거 뭐 있어? 나도 이제 솔직하게 살래!'  

 

여기까지는 좋은데, 그 다음 단계는 반드시 경건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이것도 무서운 미혹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얼마든지 죄를 이길 수 있어요. 

여러분 속에 들어와서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 마귀를 
여러분 자신이라고 인정하면 안 됩니다.

속으면 안 됩니다.
여러분 속에 들어와서 계속 음란을 부추기고 
여러분을 계속 죄 짓게 만드는 그 존재가, 여러분 자신은 아니잖아요? 
그걸 여러분 자신이라고 말하면 안 돼요. 

'우리는 그런 거야, 어쩔 수 없이 그런 거야!' 
이거는 완전히 마귀에게 속는 메시지입니다. 

여러분을 음란하게 충동하는 것은 마귀입니다. 
그렇다고 여러분이 스스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에요. 


◑여기에서 십자가의 복음이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복음은, 바로 그 문제에 대한 완전한 답이에요. 

예수님은 여러분 스스로가 해결하지 못하는 죄를 담당하셨어요. 
그래서 십자가에서 해결 하셨어요. 
그리고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오셨어요

그래서 여러분 안에 오신 그 예수님으로 인하여 (동행하는 삶을 통해)
여러분이 이제 그 죄를 이기는 자가 됩니다. 

여러분 안에 오신 그 예수님을 여러분이 이제 알게 되기를 시작하면서부터 
여러분이 그 예수님과의 교제가 깊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여러분은 그동안에 전혀 생각지 못했던 놀라운 존재가 
여러분의 마음에 임하여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 죄의 종노릇 하는데서 벗어나게 돼요. 
마귀가 여러분을 사로잡으려고 하는 것에서부터 
여러분들이 더 이상 끌려가지 않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오신 예수님 때문이에요. 

정확한 표현이 요한일서 5장 18절에 나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 하느니라'

하나님께로 난 자는 다 (계속) 범죄하지 않아요. 
여러분 중에는 아직까지 그 점에 대해서 

실제로 개인적으로 확신이 안 드는 사람이 있을 겁니다. 

여러분 안에 계신 예수님을 여러분이 여전히 지식으로만 알고 있지 
그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실제로 친밀한 교제의 대상이 아직 못 되고 있기 때문이에요. 

이것이 여러분이 육신에 이끌려 사는 이유예요. 
예수를 믿고도 음란에 이끌려 사는 이유는 오직 하나예요.

여러분 안에 오신 예수님이 아직도 여러분에게 실제가 아니신 것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을 알아가는 과정이, 아직 이제 초보단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실제로 주님을 알면서도 
동시에 육신의 힘에 훨씬 더 강한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 음란 문제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님과 친밀한 교제가 깊어지는 겁니다. 

예수님이 여러분 안에 살아계시면 
너무나 분명하게 여러분에게 느껴지는 것이
여러분이 예수님 앞에 항상 있다는 것입니다.
그 사실이 너무 분명하게 느껴지는 거예요.

▲그게 바로 요셉의 삶이없어요.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을 때, 그는 죄를 못 지었어요. 
요셉에게 유혹이 안 됐을까요? 유혹이 됐을 거예요. 
그러나 요셉은 죄를 지을 수가 없었어요. 

여러분 중에는 죄 안 짓기가 어렵다고 하는 분들이 있지요. 
그건 아직 요셉처럼 하나님의 임재를 모르기 때문이에요. 

여러분도 이제 주님의 임재를 알게 되면 
죄를 지으라고 해도 못 지어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죄짓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죠.
사람들이 나를 쳐다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이 보고 계신다고 생각하면, 죄를 못 짓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내 속에 모시고, 늘 동행하는 삶을 살면.. 죄를 이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죄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서부터.. 이제 벗어나야 되요.
그건 마귀가 완전히 여러분을 속이고 있는 거예요. 
지금 이 예배자리처럼, 많은 사람들과 같이 있어 보세요.
죄의 유혹을 이길 수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자기 혼자 있을 때는,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에 눈이 열리는 것이 열쇠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길 수 있다는 분명한 믿음을 가져야 돼요.

▲미국 듀크대학교의 윌리엄 윌리먼 박사에게 6살 난 아들이 있었는데 
하지 말라고 하는 일을 자꾸 하는 바람에 
1번 2번 주의를 주다가, '한 번만 더 하면 너 매를 맞는다'.. 경고를 했어요. 

근데 그 아이가 또 같은 잘못을 또 범했어요. 
약속을 했으니까 아빠가 매를 들었습니다. 
종아리 걷어 올리고 매를 딱 때리려고 하는데 
이 6살된 아이가 아버지를 향해 소리를 질렀어요. 

'아빠 나 때리면 안 돼, 아빠 나 때리면 안 돼! 
왜냐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셔, 나는 예수님 꺼야!' 

그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이렇게 놀라운 복음을 적용했는지 놀랍습니다. 
자기는 예수님 꺼야 라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 건데 왜 아빠가 나를 때리느냐? 하는 거죠.
'이 몸은 아빠가 때리면 안 돼!' 

그래서 그 교수님이 정말 어이가 없어도 참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그 아들의 그 말을 통해서 
'아 그렇구나, 나도 마귀가 나를 유혹해 올 때, 내가 저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되는데.. 
마귀 너 나한테 터치 못 해! 
너는 나를 사로잡지 못해! 왜냐면 나는 예수님 꺼야!' 

'왜 나는 그렇게 못 했을까?' 
그분이 그렇게 자기 고백을 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진리에요. 
여러분은 십자가로 인해서 이제 주님 것이 되었어요. 

그것을 여러분이 정말 믿고 인정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여러분 이제 음란의 죄에서 이기려면 제일 먼저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고 인정해야 돼요. 

예수님 안에서 이제 여러분의 몸은 주님의 것이에요. 
주님이 값 주고 사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계속해서 무너지는 것에서 
처음에는 그렇겠지만
주님과의 친밀한 교재가 깊어질 때는 
그 다음에는 주님으로 인하여 얼마든지 여러분이 음란의 유혹에서 이겨져요. 

근데 문제는 그렇게 되기까지가 문제인 거예요.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에 대해서 아직 잘 모르겠고 
육신의 유혹은 너무 강하고, 알기는 알겠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육신에 이끌려서 사는
이런 단계를 어떻게 해야 되나요?

▲그래서 교회가 있는 거예요. 교회가 그 일을 서로 도와주라는 겁니다. 
여러분이 형제들끼리, 자매들끼리 영성일기 나눔 방을 따로따로 해 드리는 이유는 
'고백의 공동체'가 될 수 있게 해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여러분이 계속해서 넘어지는 죄에 대해서 
여러분이 서로 고백하는 시간이 있어야 돼요. 

요한일서 1장 9절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를 깨끗하게 싯겨주신다'고 했어요.

자백을 통해서 내가 계속 부딪혀오는 죄의 무너지는 곳에서 
내가 다시 씻어지고, 다시 일어나고 하는.. 
이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너무나 놀라운 축복이에요. 
죄의 종노릇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죄로 인하여 내가 넘어졌어요. 죄를 지었어요. 
그때 하나님이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방법이 
자백해! 네가 그랬다는 것을 자백해!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 말은 '이제 다시 시작해, 다시 주님과의 관계를 시작해'라는 말입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아직까지 주님과의 관계는 
그냥 지식으로만 알고 있고, 실제적이지 못하는 지체들이 실제로 너무 많습니다. 
그럴 때는 서로 서로가 주님을 대신해 주는 역할을 하는 거예요. 
서로 서로가! 

그래서 교회 안에 이 '고백'이라고 하는 것이 허락이 되어야 됩니다. 
잘못 일을 한 사람에게, 죄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그것을 고백할 수 있고, 그걸 받아 줄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교회로 우리를 모이게 하신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그래서 역사상 부흥의 때는, 교회 공동체 안에 꼭 '고백'이 있었어요.

천주교에서 하는 고해성사 하고는 조금 의미가 달라요. 
그건 신부님이 예수님처럼 역할을 하는 것이니까요. 
우리에게는 속죄를 위해서 예수님 대신에 누군가가 있을 필요가 없어요. 
예수님 그분이 속죄해 주세요.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분명한 믿음이 없는 경우에는 
죄책감에 계속 눌려서 삽니다. 
내가 용서 받았다는 선언을, 양심의 자유를 갖지 못해요. 그 믿음이, 확신이 안 생기니까요.

그래서 여러분들 사이에 서로 그 점(고백)을 서로 도와 주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영성일기 나눔방을 통해서, 여러분들이 무너졌을 때는 고백하고.. 
그리고 같은 지체들이 그것을 서로 받아 주고...

'얘는 굉장히 저질이네.. 얘는 우리 방에서 빼 줘요.' 제발 그렇게 하지 말고 
그 일을 위로하고 격려해 줘야 돼요. 
숨기는 거 보다 드러나는 게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다 공개하는 것은 오히려 또 다른 시험을 가져올 수 있지요.  

우리가 다 성숙 했다면, 우리는 어디서든지 고백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 하니까.. 

 

여러분이 영성일기 나눔방을 통하여 
형제들끼리 자매들끼리 서로 자기가 무너졌던 일을 고백하고 
그리고 그것을 말씀에 의해서 서로 용서 받았음을.. 
주님이 그를 깨끗게 하셨음을 서로 선포해 주고.. 

그러면 여러분 놀라운 일이 벌어져요. 
정말 이기게 된다니까요. 

그리고 주님을 분명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주님은 지금 나와 같이 계신다!'

주님을 느껴요. 주님의 호흡을 느껴요. 그럼 끝났어요. 
더 이상 죄는 나를 사로잡지 못해요. 

죄의 유혹은 내가 느낍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죄의 유혹을 느껴요. 
육신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그러나 그 죄의 유혹이 나를 사로잡지는 못해요. 
왜 내게는 주님이 너무 분명히 함께 해 계시니까요.

그러나 주님과의 친밀한 교제가 끊어지면 
그때부터 나는 육신의 종이 돼버립니다. 
주님과의 계속되는 관계가 열쇠입니다.

자 음란한 죄에서 이길 수 있느냐?
답은 이길 수 있어요. 

어떻게 이기냐? 
주님이세요. 예수님이세요!
승리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이 주님 앞에 정직하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제가 음란에서 이기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계획인 것을 믿습니다. 

저에게 예수님이 분명한 실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나를 계속해서 육신과 세상과 음란으로 끌고 들어가려고 하는 마귀에 대해서 
제가 더 이상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님이시고, 내 마음의 왕이십니다. 
제가 내 마음속에 아무 것이나 허락하지 않겠습니다. 

주여 제가 계속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 저를 승리의 길로 인도해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