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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벨의 믿음이란 말의 의미

LNCK 2008. 8. 11. 21:25

 

◈아벨의 믿음이란 말의 의미      창4:4, 히11:4       2010.10.17.녹취

 

김성수 목사 로마서 3강 41~60분

 

◑아벨 그룹 ..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

 

성경은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이유를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고, 단 한 마디로 설명하고 있다.

히11: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이다.

아벨의 제사는 믿음의 제사였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믿어서’와

‘믿음으로’의 차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아벨이 ‘믿어서’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인이 된 것이다.

 

‘믿어서’는 그 믿음을 발휘한 사람에게 초점이 있는 것이지만,

‘믿음으로’는 믿음의 주인께서 그 믿음을 어떤 대상에게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믿음으로’는 그 믿음의 소유주 하나님 에게 초점이 있다.

 

▲믿음의 주인, 소유주는 하나님이시다.

‘나는 네가 이렇게 될 것을 믿는다.’ 하실 때

그 아버지는, 당신의 소원을 이루실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믿음이 그 아버지의 믿음대로 자식을 만들어 내고야 마는 것이..

그게 구원의 이야기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당신의 백성들에게만 주신다. 사용하신다.

그 백성들은 하나님의 믿음에 의해서,

다른 말로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해서 무상으로

하나님께 열납이 되는 제사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곡식으로 드리는 가인의 제사는 가치가 없고,

짐승으로 드리는 아벨의 제사는 가치가 있다는 것은.. 꼭 맞는 것이 아니다.

 

제사를 드리는 자의 형식은, 일차적으로 아무런 가치가 없다.

또한 레위기에 곡식제사(소제)도 나오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가 무엇에 의해 격발 되었는가가 중요하다.

물론 그렇게 하나님의 믿음을 선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삶은

어떤 목표 지점을 향해 끌려가게 되어 있다.

 

그런데 그건 그들이 행한 행위 때문에 믿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그를 그렇게 선한 행위로 끌고 가는 것이다.

 

그래서 아벨이 양을 치게 된 것이다.

여러분, 그때 당시에는 양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동물이었다.

인간이 육식을 하게 된 것은 노아 홍수 이후부터였다. 그 전까지는 채소만 먹었다. 창9:3

 

그런데 창4장에서 아벨이 뭐하러 양을 쳤겠는가?

굳이 양을 치던 목적이 있었다면 (먹을 수도 없는 양을) 가죽을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거기에다 창세기에 나오는 양은 ‘어린양’이다. (히. 세온)

왜 어린양을 치고 있을까? 먹지도 못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믿음을 부어준 자들은, 이 세상에서 약게 못 산다. 아주 비효율적으로 산다.)

 

아벨의 관심은 아버지 어머니가 입고 있던 옷에 있었다.

양털과 양가죽은 그때 유일하게 부끄러움을 가리는 용도로 썼다.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입혀주신 옷이 무죄한 짐승의 가죽이었다.

그게 예수의 모형인 어린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생산되는 옷이었다.

 

인간의 부끄러움을 가리는 목적의 옷이었다.

믿음을 받은 성도는 바로 거기에 관심을 두게 된다.

그래서 아무 짝에도 자기의 힘을 쌓는 데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그 부끄러움을 가리는 양을 키웠던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 이끌고 가는 사람들의 일상이다.

바보 같은 일상, 손해 보는 일상, 약지 못한 일상!

그래서 이 바보들은 세상에서 늘 당해요..

 

하나님이 그렇게 끌고 가신다. 믿음을 받은 성도는 자신의 죄를 바라보게 되고,

그걸 가리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두게 되며 거기에 집중하게 되어 있다.

육신의 힘을 내는데 필요한 먹거리에만 몰두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의 믿음을 선물 받은 아벨은, 먹지도 못할 어린양을 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죄를 가리울 하나님의 은혜에 집중하고 있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열심히 만들어내시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왕노릇이 우리를 그 자리로 끌고 간다.

 

그래서 히11:4절에 믿음으로 아벨은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의 대접을 받았는데,

하나님이 ‘아벨에 대해 증거’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 예물에 대해 증거 한다..’ 고 하셨다.

 

왜 하나님은 아벨에 대해 증거 하지 않고, 그 예물에 대해 증거 하실까?

예물은 어린양이었다.

‘인간의 죄는 바로 어린양의 희생으로 말미암아 가려지게 된 거야’ 하시며

그 예물을 증거 하시며

‘네가 이런 내 은혜에 의해 의인이 된 것이야..’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아벨의 믿음은, 하나님에 의해 준비되어서, 아벨에게 무상으로 부어진 것이지,

아벨이 스스로 만들어 낸 게 아니다.

 

아벨이 뭔가 잘나서 아벨의 제사를 받으신 게 아니라,

하나님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의 공로에 의해서 구원된 자만 받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아벨의 이름은 ‘하벨 nothing’ 이란 뜻이다.

그래서 우리는 nothing 으로 스스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런데 나를 구원해 주셨다. 소름끼치도록 좋고 감사한 일이다.

 

이렇게 죄인 중에 괴수된 나를..

그런데 그걸 덮어셨다 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렇게 명쾌하게 성경에 나올 때마다 소름이 끼치도록 좋다.

그래서 찬송이 저절로 나온다.

 

◑가인 그룹..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사람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못한 자들은,

효율적이고 경제적인 것에만 눈을 돌린다.

자신의 힘을 키우고 쌓은 먹거리에만 집중한다. 가인처럼..

 

그들의 일상은 자신의 가치를 쌓고, 위상을 높이는 데에 집중된다.

그래서 왕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안 가는 것이다. 자기 일상 챙기겠다고,

소도 사야하고, 밭에도 가봐야 하고, 장가도 가야하고,..

 

▲가인은 자기 제사를 받지 않으신 하나님께 화를 냈다.

‘왜 내 제사를 안 받어?’ .. 이것은 자기가 하나님보다 더 높다는 것이다.

 

‘나는 너보다 더 위대해! 내가 너를 경배하려고 제사 드리는 것이 아니라,

내 가치를 챙기려고 제사드렸던 거야, 그런데 왜 내 것을 안 받아?’ 하며 화를 낸 것이다.

 

여러분이 신앙생활 열심히 하며 집 팔아서 헌금하고 했는데,

하나님이 몇 배로 튀겨주시지 않고,

오히려 여러분의 삶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허락하시면 화가 난다...

그거 아니라는 것이다. 가인 같은 사람이다.

 

그것은 자기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한 엉터리 선행이다.

가인은 자기 행위에 스스로 가치를 부여했고,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해, 자기 행위, 자기 제사를 지키기 위해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하나님이 진짜 받으시는 그 제사를 없애버렸다.

 

그래서 아벨을 죽여 버렸다.

그래야 내 제사를 지킬 수 있고, 내 행위(선행, 제사)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바리새인들이었다.

자기들의 율법 지키기 위해서 ‘그거 아니다’ 라고 이야기하는

올바른 제사를 드리러 오신, 진짜 제사를 드리러 오신 예수를 죽여 버린 것이다.

 

그 이야기를 앞서 창세기부터 하고 계시는 것이다.

아벨과 가인의 이야기는, 그런 인간의 역사를 앞서 모형으로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아벨(하벨 nothing)로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택한 자를 부수어 가신다.

 

그래서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님을, 아벨nothing, 파울로스(작은 자)임을 깨닫게 하신다.

 

이렇게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서,

‘나는 하나님께서 어린 양의 피로 덮어주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저는 혼돈, 공허, 흑암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나를 덮어주시지 않으면

멸망의 자리에서 영영 헤어 나올 수 없는 절망적 존재입니다..’

라는 자기부인의 고백을 하는 자리로 내려가게 된다.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 밖의 사람들은, 혼돈과 공허 속에 자기가 세운 법을 집어넣고,

자기가 행한 행위를 집어넣어서, 스스로 그 혼돈의 틀을 세우고, 공허를 메우고,

흑암을 밝히겠다고 열심을 부리겠다는 자들로 살게 된다. 자기 우상화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을 철저하게 부수어 가신다.

일말의 가능성도 없게 만드신다.

그래야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 노름판에서 돈 많이 잃은 사람에게 개평을 준다.

그 이유는, 차비해서 집에 가라는 목적이다.

그런데 사람은 그 개평 받아서 또 도박한다.

 

인간은 일말의 가능성만 있으면,

끝까지 그걸 가지고 자아성취와 자아실현의 도구로 쓰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도하셔서 다 털어버리신다. 발가벗겨 버리신다.

그게 우리 인생이다.

그런데 그래야 그제야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주신 예수 붙든다.

지푸라기라도 가능성이 남아 있으면, 그걸로 자아성취와 자아실현의 도구로 삼아,

자기 의를 내세우려 한다.

 

물론 십자가를 의지하지만, 철저히 의지하지 않고,

그저 그것마저도 자기를 아름답게 꾸미는 장식품 정도로 의지한다.

 

그것(개평)까지 탈탈 다 털렸을 때, 집에 와서 ‘여보 미안해!’ 하고 회개하듯이

인간이 지푸라기라도 완전히 다 털렸을 때 비로소 ‘주님 미안합니다!’

하고 두 손 들고 회개하며 돌아오는 것이다.

 

주님은 신부인 교회에게 그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신다.

‘신랑(하나님) 잘못했어요!’

그래서 바울이 자신의 편지마다 바울로스(나는 작은 자입니다)라고 시작한 것이다.

그게 복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은 인간욕망의 전시장인 이 세상에서는 절대 이해되어질 수 없다.

 

▲이런 설교를 하면

‘누가 그런 복음에 수긍하겠어요?

아휴 지가 망했으니까, 아주 합리화도 잘 시킨다.

니가 안 망했어봐, 그래도 그런 얘기 하겠어?’ 또 이러고 나온다.

복음을 이해를 못 한다.

 

큰 자가 되어야 하고, 이겨야 하고, 내 가치를 챙겨야 하는 것이 인간세상에서의 성공인데,

복음은 그걸 막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해 못 한다. 복음을 거부한다.

 

◑자기가 안 부수어지고, 인간의 성공, 도덕(세상 가치)을 붙잡는 사람들

 

그런데 인간의 성공, 도덕, 인간의 선이라는 것.. 그거 사실은 별 거 아니다.

인간의 욕망이 거래되고 있는 그 역사라는 시장판을 한 번 보면,

인간들은 모든 것에 가치를 매겨서 시장에 내어놓는다. 거기엔 도덕과 윤리도 있다.

 

인간은 모든 것에 가치를 매긴다. 선악 구조를 놓는다.

그것이 힘의 논리가 세상에서 생존해 가는 논리다.

자기들에게 유익되는 것을 ‘가치’요 ‘선’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 자기들끼리 짜고서!

 

그런데 인간들이 어떤 것에 가치를 매겨서 그것들을 서로 사고판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인간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고, 그것 자체가 인간 죄성의 표출이다.

그 안에 인간의 교활한 자아성취의 욕망이 숨어 있다.

이것이 자본주의인데, 그 안에는 인간의 교활한 죄성, 악마성이 숨어 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백화점을 쇼핑하는데,

2백만원 가격표가 붙은 옷을 슬쩍 보았다.

안 보는 척 하면서, 다시 자세히 보았다. 2십만원이 아니라, 분명히 2백만원이었다.

 

그건, 자기를 높이고 이 세상 모든 것의 주인이 되고 싶어 하는 인간들에게 어떻게 인식 되는가 하면,

‘2백만원 주고 이 옷 살 수 없는 사람은, 이 옷 쳐다보지도 말아라!’ 이런 심리를 부추긴다.

 

아무 것도 아닌데, 핸드백에 4백만원(3천불)짜리 가격표가 붙어 있으면,

‘4백만원 주고 이 핸드백 살 수 없는 사람은, 이 핸드백 쳐다보지도 말아라!’

하는 심리가 숨어있다.

 

그때 인간은 정복욕이 막 발동한다.

‘그래? 언젠가 나는 너에게 복수 한다. 돈 벌어서 사고 말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예수를 믿고 성도가 된 사람이

어떻게 3천불짜리 핸드백을 살 수 있을까? (지금 핸드백들 감추지 마세요!)

 

그래서 쇼핑을 할 때마다,

성도는 속으로 명품 가게 앞을 지나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하고 지나간다.

 

그런데 한 10번쯤 그렇게 외치고 나서는, 그 다음날 가서는 그 핸드백을 사 버린다.

돈이 모자라면, 카드를 긁어서라도 사 버린다.

 

그러면 ‘사탄아 물러가라!’ 하던 신앙은.. 사탄에게 져버린 것인가?

자기 속으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자기가 그래도 쇼핑을 할 때, 무려 10번씩이나 ‘사탄아 물러가라’를 외치며

속히 사탄에게 굴복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0번 정도나 그것을 뒤로 미루고 미룰 만큼,

그 정도의 경건이면..

크게 칭찬할 정도는 아니더라도, 낙제할 정도도 아니니

적당한 선에서 타협하여, 11번째 쇼핑 때는, 그 핸드백을 기필코 사고 마는 것이다.

(비슷하게 남자들은 자동차에 집착한다.)

 

모든 인간은, 마지노선 앞에서 절대 그것을 이길 능력이 없다.

이기는 척 하는 것이다. ‘사탄아 물러가라’를 한 10번 정도 외치는 것으로써!

베르그송이 그것을 ‘미끄러짐의 위장’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너무 자학하지 마시라.

비록 11번째 쇼핑으로 그 가방을 사고 말았지만, (미끄러졌지만)

‘그래서 나는 예수가 필요 한거야! 내게는 선이 없구나! 위장은 있어도..’

그걸 깨달으시고, 자신에 대해 철저히 절망하실 수 있다면,

그래도 3천불 투자한 본전은 좀 뽑는 셈이 된다.

 

그렇게 인간의 행위는, 사실 하나님 앞에서 큰 가치가 없다.

인간의 선악구조에 의해서 정의된 인간의 도덕과 윤리가

하나님 앞에서 전혀 다른 모양으로 판정된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된다.

(하나님은 인간의 선악구조의 선악을 인정하지 않으신다는 뜻인듯)

 

비트겐슈타인의 말처럼,

죄인의 행하는 모든 것이 죄고, 의인이 행하는 모든 것이 의이다. 선이다.

무용수가 춤을 추는 게 아니라, 무용수의 일상의 삶이 춤이다.

 

죄인은 죄인이라서,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이 죄이다.

의인은 의인이라서, 이 세상에서 죄같이 보이는 것을 자행하면서도

합력시켜서 선을 이루는 데로 가게 되어 있다.

 

그렇다고 인간의 도덕과 윤리를 무시하면서 살게 되지 도 않는다.

내 안에 성령이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행위를 근거로 해서, 이게 신앙이 좋은 거나 나쁜 거다 하며

우리 수준에서 판단하지만, 그게 아니다.

도덕과 윤리를 많이 행하는 자가 신앙이 좋은 사람/못한 사람이 아니다.

 

작은 자로 내려간 사람이 신앙이 좋은 사람이다.

착한 일 많이 하면서 여전히 어깨 뻣뻣이 들고 다니는 사람이 큰 사람(신앙이 어린)이다.

 

◑‘믿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인간의 불가능함과 무력함을 전제한다.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찾아가셨다.

75세 때.. 가능성이 있는가? 얼마간 생산 능력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인간이 자기 가능성으로 만들어낸 것이 이스마엘이다.

 

그런데 백세가 되었다. 가능성이 완전히 없어졌다.

이제는 본인도 알고, 세상도 알고 있다.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그때 믿음으로 찾아가셔서, 하나님께서 그 믿음의 열매를 허락하시는데,

그 믿음의 열매가 이삭이다.

(그래서 이삭은 80세나 90세에 낳을 수 없었다.

반드시 완전히 절망한 상태에서, 즉 백세가 되어서야 낳아져야 했다.)

 

▲그 이삭의 이름 뜻이 ‘(비)웃음’이다.

완전히 마른 막대기가 된 백세, 90세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하나님의 믿음’이 갔더니

 

그 하나님의 믿음이 그들의 삶속에서 어떤 열매를 맺느냐 하면,

‘나는 하나님이 말씀하셨을 때 비웃은 자예요..’ 라는 열매를 맺게 하셨다.

이것이 믿음의 열매이다. (믿음마저도.. 인간의 믿음은 ‘의가 없다’는 말인듯)

 

우리가 믿음의 열매로 뭐 대단한 업적과 공로를 만들어 내는 게 아니라,

‘나는 비웃은 자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을 때 비웃은 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은혜 주시지 않으시면 그때 죽을 뻔 했습니다.’

이 고백 하는 것이 성도의 믿음의 열매이다. 그것이 성화의 절정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그냥 병 낫고, 소원 들어주고, 문제 해결되고,

그런 잡교가 되어 버렸다. 우리는 계속 내려가야(겸손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신부로서 그분께 목숨 걸고 순종하는 자로 내려가는 것이

그게 엡5장에서 신부의 도리이다.

 

거기서 말한 ‘신랑 신부의 도리’는

이 땅의 신랑신부에게 하신 얘기가 아니라, 신부인 교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신랑 되신 하나님을 그렇게 ‘주로 섬겨라’는 것이다.

철저히 낮아지라는 것이다.

 

세상은 점점 악해져간다. 신랑이신 하나님을 높이지 않는다.

내가 주인이라는 것이다. 아니다. 하나님은 그 꼴 못 보신다.

우리 신랑은 사흘에 한 번에 북어 패듯 패더라도 신부인 교회를 복종시키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만 붙들어야 되구나..’ 라고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사도바울이 파울로스 작은 자 라고 자신을 고백한 것이다.

‘나는 이렇게 작은 자, 못난 자, 낮은 자인데, 우리 신랑이 너무 큰 분이라

내가 큰 사람이 된 것이야!’ 이게 올바른 신앙이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작은 자로 몰아가실 때,

그래서 마구 부수어 가실 때..

오히려 기뻐하시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