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하는 아들, 내 기뻐하는 자 마3:16-4:11 인터넷설교 스크랩
◑안식년 가서 받은 응답
▶저는 지난 두 달 동안 안식년의 시간을 가지면서
영적인 그리고 다소나마 정서적인 회복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제 개인적인 QT시간이 좀더 활성화되어서
제가 하나님의 음성을 민감하게 들을 수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외국에 나가 있는 동안 QT 재료를 두 번 제가 바꾸었어요.
제가 일상적으로 하던 것이 아닌, 다른 외국의 책자를 가지고 QT를 했는데,
이상하게 그 짤막한 기간 동안 똑같은 본문이 두 번 나오더라구요.
그리고 본문을 통해서 거의 똑같은 메시지를
하나님이 제게 말씀하시는 음성으로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설교의 내용입니다.
▶제가 안식년을 보내면서도 제 마음 속에 가득 차 있었던 중요한 생각이 있었다면
그것은 솔직히 우리 교회의 미래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막 이제 공사가 신봉리에 진행되는데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지?
주차장은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또 아무래도 내년엔 우리가 성전 본당 건축을 시작해야 될 터인데
이러한 일들을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것인지?
안식년이라고 쉬러 갔지만, 제 머리 속에 교회의 미래에 대한 생각들이 가득 차서
한 순간도 자유할(쉴)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우리 교회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 가야 합니까?’
이런 기도를 제 QT시간마다 주님 앞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두 차례에 걸쳐서 오늘 본문을 보여주시면서
제게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어요.
'나는 네 미래의 사역보다도,
교회의 사역보다도 더 커다란 관심은
네가 내 앞에서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더 관심이 있다.
교회가 잘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네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어떤 목사가 되느냐?
그것이 나의 더 커다란 관심이다'
라고 하나님이 제게 말씀하시는 것 같은 음성을 들었어요.
'네가 정말, 내가 사랑하고 내가 기뻐하는 자가 될 수 있느냐?
그러면 나머지 일은 내가 책임지지 않겠느냐?' 이런 하나님의 음성이었습니다.
◑더 사랑스럽고 더 기뻐하는 자로 만들어 가신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되면서
요단강에서 세례요한에게 침례를 받고 나오시는 그런 장면입니다.
바로 그 순간 그의 머리 위에 비둘기 같은 성령님이 임하시고
또 하늘 문이 열리면서 하늘에서 한 음성이 나서 말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리고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들었으면 이제 당연히 그 다음에 예측 되는 사건은 뭘까요?
이제 예수님 앞에는 신바람 나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질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사건 바로 직후에 마태4:1절부터는 이렇게 나옵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갑자기 사건의 흐름과 맥을 깨는 파격적인 말씀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바로 이 시점에서
예수께서 광야로 나가사 마귀에게 시험을 받게 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신 어떤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저는 그것이, 방금 전에 하늘의 문이 열리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그리고 내 기뻐하는 자라는 놀라운 사랑의 음성과
이 광야의 시험이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 3장과 4장이 서로 다른 장으로 분류되어 있었기 때문에
3장과 4장을 연결시켜서 묵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 QT시간에 이 3장과 4장이 같이 연결되면서
이 말씀은 새로운 빛으로 제 앞에 다가왔습니다.
하나님이 인정(내 사랑하는...)과 시련(마귀에게 이끌리사...)을 동시에 주시는데,
도대체 어떤 의도가 있었을까요?
<그것은 분명 이 광야의 시험을 통해서
그가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더 사랑하는 아들로
기뻐하는 자지만, 더 기뻐하는 자로 빚어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과 계획이 있었다는 사실을
먼저 우리는 결론적으로 전제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받으신 '시험'을 번역할 때,
영어 번역에서는 temptation(유혹)이라는 단어가 쓰여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명한 세계적인 성서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여기서 ‘시험’의 희랍어 '페이라제인'은 그 의미상으로 볼 때,
temptation유혹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차라리 test라는 단어가 훨씬 더 그 의미상으로 적합하다고 지적합니다.
(그만큼 포괄적 의미의 단어입니다. ‘고난’도 됩니다.
유혹, 테스트, 고난.. 셋 다 포괄적인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 test는 파괴적인 것이 아닙니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test를 줄 때,
그것은 학생들을 골탕을 먹이거나, 좌절시킬 목적으로 시험을 주지 않습니다.
시험test에는 깊은 뜻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그 시험의 과정을 통해서 자기의 실력을 알아차리고,
자기의 부족함을 깨닫고, 그 부족을 보완하고 보충할 때
한 단계 더 성숙이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에게 바로 이런 시험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세 차례의 시험이죠. 바로 이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가 더욱 더 사랑하는 자가 되고, 그의 더 기뻐하는 자가 되기 위한
어떤 기대를 갖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제자인 저와 여러분들을 향한 하나님의 기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사랑하시면서도
오늘 사랑하는 그의 아들과 딸들을 데리고 광야로 이끌고 가셔서
그 찬바람 부는, 그 고독한, 그 굶주린 외로움의 광야 속에
저와 여러분을 두시고 시험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험의 폭풍우 속에서, 이 시험의 광야 속에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이 음성을 들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이야. 네가 나의 기뻐하는 자가 되기 위함이야!'
라는 그런 음성을 우리는 들을 수가 있어야 합니다.
◑1. 물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test
▶자, 지금 예수님은 광야에서 금식을 시작하고 계십니다.
이 순간 사탄은 마귀는 그의 결정적인 허점인 배고픔을 시험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시험을 단순하게 배고픔의 시험만이라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것은 경제력에 대한 시험입니다.
예수님에게는 그가 명령하시기만 하면
돌을 변하여 떡덩이가 되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자신에게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능력을 어떻게 사용하느냐가 이 시험의 초점이었던 것입니다.
이 시험은, 돈이 없는 사람들이 받는 물질의 시험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이, 그 물질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test>입니다.
내 욕심을 따라서, 내 뜻을 따라서,
내게 주어진 혹은 내가 원하는 대로 그 물질을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사용할 것인가?
라는 선택의 시험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주의 제자들인 우리도 오늘 이 세상의 광야에서 동일한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날마다 이 물질을 사용할 때마다,
물질을 요구하고 물질을 원할 때마다, 우리는 이 시험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이 인생의 광야에서 이 물질의 시험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날마다, 아니 오늘도 이 시험 앞에 직면해야 합니다.
과연 내가 물질을 사용하는 일에 있어서 철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물질을 사용하고,
물질을 사용하되, 물질로부터 자유한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인생의 광야를 여러분과 저는 걸어가고 있을까요?
아니, 그러잖아도 어렵고 궁핍한데
만약 하나님의 뜻대로 물질을 사용하고 사업을 한다면
내 사업 망하고, 나는 패가망신하는 것이 아니냐고
항의하실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의 약속이 뭐예요. 하나님의 약속이 뭡니까?
만약 우리가 정말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의 뜻이 가장 중요한 초점이 되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내 인생과 내 물질을 사용하기로 결심한다면
나머지는 주님이 책임지신다. - 이게 성경의 약속이 아닙니까!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시시리라 마6:33
내가 물질의 욕심에서부터 참으로 자유한 인생이 될 때,
하나님은 나를 바라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고 싶어 하십니다.
‘너는 정말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가 기뻐하는 사람이야!’
◑2. ‘자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test
▶두 번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이 시험의 본질은
<내가 사람의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인정만으로 살아가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의 본성 안에는 하나님의 인정보다도
사람의 인정과 박수를 구하고 싶은 끝없는 욕심이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물론 당연한 칭찬과 격려는 괜찮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사람의 인정과 사람의 박수에 굶주린 나머지
인생의 장에서 쇼를 하기 시작할 때, 허영의 쇼를 하기 시작할 때
하나님은 그런 내 마음 속에 숨어 있는 동기를 살피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내 진정한 자아, 벌거벗은 자아의 모습을 통해서,
내 진실성의 정체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인정받는 삶을 구하기보다
사람의 박수에 굶주린 나머지,
자랑, 부풀리기, 눈가림식의 쇼를 통해서 인정받고 싶어하는 허영의 쇼 말입니다.
▶제가 QT를 할 때 하나님은
내 안에 그런 유혹의 시험이 있다는 사실을 주께서는 제게 지적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인정보다도
교회가 커가니까 큰 교회 목사라는 그런 인정 앞에
더 기쁨과 더 커다란 그런 마음의 위로를 삼았던 내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내 인기, 명예 시험을 통과해야할 필요가 있다고
주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더 사랑하는 자, 더 기뻐하는 자’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라는 마귀의 시험을 거절하신 주님은,
사람의 인정이나 사람의 박수보다는
하나님의 인정을 구하는 사람의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3. ‘우상’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test
▶세 번째는 네가 나한테 절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주겠다는 시험입니다.
이 시험의 본질이 뭡니까?
이것의 본질은 네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로써 살아갈 수가 있느냐?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자로써 살 것을 기대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마귀의 시험은 뭐예요? 천하만국의 영광을 약속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귀의 의도를 볼 수가 있습니다.
사단은, 우리가 사탄을 숭배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많은 경우,
이 같은 자기의 동기를, 혹은 자기의 정체를 숨기고
그의 미끼만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천하만국의 영광’입니다.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은 사탄을 숭배하기를 원하십니까?
물론 “노(No)”라고 부인할 것입니다. 누가 마귀를 숭배하기를 원하겠어요!
그러나 그들에게 돈을 보여주십시오. 그들에게 출세를 보여주십시오.
혹은 그들에게 성공을 보여 주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성공 때문에, 혹은 그 출세 때문에, 혹은 돈 때문에
신앙을 버리고, 그리고 양심을 타협하는 일을 너무나도 쉽게 자행할 것입니다.
여러분 그 때, 우리가 만약 그렇게 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사탄을, 그리고 마귀를 경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의 경고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이 시험을 들고 찾아오는 사탄,
‘천하만국의 영광’이라는 미끼를 가지고 다가오고 있는 사탄을 향해서
우리 주님은 어떻게 말씀하십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만 섬기라.
▶이것은 내 인생의 장에서 우상숭배를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는 결심입니다.
성경이 강조하고 경계하는 우상 숭배는 골로새서에 보면 탐심입니다.
탐심은 곧 우상 숭배이니라. 골3:5
그 탐심이 어떤 종류의 탐심이든지 간에
모든 탐심에는 우상숭배적 요소가 있습니다.
네 여러분, 우상의 본질을 알아야 합니다. 우상은 피조물입니다.
우상은 창조주가 아닙니다.
우린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탐하면서도
그것을 만드신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천하만국의 영광. 그것은 대단해 보이지만, 매혹적이지만, 굉장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에 불과해요.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마귀는 이 모든 것을 만드신 하나님에게서 시선을 떼고,
하나님의 만드신 피조물의 영광에 우리 시선을 빼앗기도록 유인하고 있습니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롬1:25
◑헨리 나우웬의 시험에서 승리
▶헨리 나우웬이 하버드 교수직을 버리고 장애인 공동체에 가서
그가 첫번째로 쓴 책이 “The Return of Prodigal Son” 「탕자의 귀향」입니다.
거기서 그는 자기가 탕자였다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부도덕한 생활 속에 빠져 있던 사람, 죄인만 탕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나우웬은 자기도 탕자였다고 고백을 합니다.
허영을 찾아서, 욕망을 찾아서 그리고, 사람들의 인정을 찾아서
저 먼 나라로 떠나갔던 자기는 탕자였다고,
그리고 자기는 외로웠다고,
자기는 방황하고 있었다고
자기의 자아는 춥고 어두운 밤을 지나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몇 사람의 장애인 공동체에서 장애인들을 섬기면서,
비로소 자기는 집에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고향에 돌아왔다,
자기의 참된 모습을 찾았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탕자의 귀향’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또 하나의 책을 써요. “아담” 이라는 책을 씁니다.
‘아담’은 그 장애인 공동체에 있었던 한 장애인 소년의 이름입니다.
그 아담을 섬겨주고, 아담의 발을 씻겨주고, 한 장애인을 섬기면서
그는 이 아담 안에서 새로운 아담을 발견합니다.
둘째 아담. 즉 예수님을 발견합니다.
그 순수한 영혼 속에서, 사람들은 지체아라고 말하지만
사람들은 병신이라고 말하지만,
그러나 이 순결한 영혼을 섬겨주고, 그를 도와주면서
그는 그 아담 안에 있었던 둘째 아담이신 예수를 새롭게 만났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자기를 도와주는 헨리 나우웬이, 이 신부가 너무 고마워서
이 아담이라는 소년이 더듬거리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 나….나는 당신이 너무 좋아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 순간 그는 이 음성을 들었다고 고백합니다.
이 더듬거리는 말속에 고백되는 이 한 장애인의 음성 속에서
그는 하늘의 음성을 들었다고 말을 합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인류는 끊임없이 인생의 광야에서 이 시험들을 겪어 왔습니다.
인류 역사의 처음부터. 아담 때부터 그랬습니다.
마귀가 에덴의 동산에 찾아와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보여주었을 때,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인류는 실패했습니다. 저도 실패했습니다.
우리 모두도 실패했습니다.
그래서 삶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삶의 진정한 주소를 현 주소를 잃어 버리고,
그리고 춥고 외로운 광야에서 방황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헨리 나우웬은, 장애우를 섬기면서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현존하는 예수 그리스도, 둘째 아담을 발견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단강 수세 직후에 이 음성을 처음 들었지만,
3번의 시험을 이기실 때마다 계속적으로 이 음성을 들으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인정을 더욱 견고하게 받으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똑같이 그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 음성을 들려달라고, 주님의 인정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해도
그 음성은 잘 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내 사랑하는 자, 기뻐하는 자'로 잘 인정해 주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물질을 함부로 제 마음대로 쓰고,
세상 자랑을 추구하고,
탐욕의 우상을 섬기면서, 두 주인을 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시험test에서 승리할 때,
내 주변 사람들을 섬기면서 ‘둘째 아담’을 발견할 때
우리도 헨리 나우웬처럼, 주님의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라.
주님은 우리가 성공하고, 출세하고.. 그런 유한하고 현세적인 것에 관심 없습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관심은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고, 내 기뻐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인터넷설교 스크랩. 연도 알 수 없음. [주제별 분류] 크리스천 인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