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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지는 재앙 출9:1~7 2001.04.29.
출애굽의 목적이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목적이라고 하였습니다.
단지 자기 구원에 만족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섬기는 것이 출애굽의 목적입니다.
이것을 잘 알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은 사람을 구원하여 주기 위한 종에 불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보아도 우리 인간의 구원이 최고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 못하면
성경을 이용하여 계속 사람을 기쁘게 하고 사람을 섬기게 되는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1:10절에서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합니다.
이러한 말을 왜 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가 구원을 받았는데
왜 다른 복음에 그렇게 쉽게 빠져 드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전한 복음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 할지라도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다른 복음이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함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행함과 공로가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오직 은혜로 구원 얻는다는 것이 기쁜 소식인 것 같은데
왜 다른 복음으로 쉽게 빠지는가 하는 생각이 되시겠지만
그러나 오직 은혜로만 구원이 된다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도대체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사람에게 가능성이 없으면 오직 은혜로만 구원하여 내시겠습니까?
이것을 출애굽을 통하여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출애굽기를 보면서 바로는 적이고, 모세는 우리 편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영화를 볼 때 미국 영화를 가장 많이 볼 것입니다.
요즘은 우리나라 영화가 앞서기도 합니다만, 영화를 볼 때 언제나 미국은 우리 편,
미국에게 당하는 편은 우리의 적으로 보게 됩니다.
정의와 승리는 언제나 우리 편, 불의와 패배는 언제나 적 편이라는 공식이
우리 생각에 뿌리 박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성경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나를 바로의 입장에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얼마나 강퍅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바로가 당하는 재앙을 보면서
자기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면 저러한 재앙을 당하는 것이구나 하고서
눈여겨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중에 출애굽하고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을 때
너희가 나를 순종하지 아니하면 애굽의 모든 재앙을 너희에게도 내리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위한 구원이라는 것입니다.
단지 이스라엘을 위한 구원이라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목표라면
애굽의 재앙을 내리면 안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온갖 재앙을 이스라엘이 받았습니다.
이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로가 당하는 재앙을 보면서 ‘아 우리가 얼마나 고집이 세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자이구나’ 하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무리 고집이 센 바로 왕이라도
결국은 자신의 뜻을 이루어 내시고야 마시는 구나 하는 것을 또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섯 번째 재앙입니다.
지팡이가 뱀이 되는 것은 서론으로 본다면
피, 개구리, 이, 파리의 재앙을 통하여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드러나게 된 것입니다.
고대의 신의 개념이란 그 나라가 얼마나 크고 강하냐에 따라
그 신의 위대함이 드러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거대한 애굽의 신이 히브리 노예의 신을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알만큼 되었는데도
계속하여 고집을 부리는 것입니다.
피와 개구리는 흉내를 내었지만, 이후부터는 흉내도 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이는 신의 손가락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권능이니이다"(8:19) 여기서 '권능'이라고 옮겨진 말은 '손가락'을 뜻함.
그리고 파리떼 재앙에는 드디어 바로가 항복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파리떼가 사라지자 곧 마음이 강퍅하여서
하나님께 제사 지내러 가라고 한 것을 취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이 다급할 때는 신의 요구를 듣겠다 하고서는 그 위기가 지나면
다시 옛날 그대로인 것입니다.
이것을 속된 말로 화장실 갈 때 마음하고 나올 때 마음하고 다르다고 그러지 않습니까?
사정이 긴박하고 다급하면 무슨 말을 못합니까?
그러나 어느 정도 틈만 있으면 자기정당성을 들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지극히 당연하지만 섬기지 않는 이유를
사람들마다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몰아치시면 그제야 ‘하나님 제가 이제 하나님을 잘 섬기겠습니다’
하고서는 그 위기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식입니다.
▲그러면 몇번 하시다가 그만 두시면 되실텐데 그만 두시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의 언약을 반드시 성취시키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내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하여 낸다 그러시면
바로가 아무리 거절하여도 바로를 꺽어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건져 내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로가 거절하면 할수록 재앙의 강도가 깊어지는 것입니다.
재앙이 심하게 닥치는 것입니다.
드디어 다섯 번째가 되자 무엇을 치기 시작하십니까?
가축을 치십니다. 가축은 애굽인들에 신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출애굽 때의 애굽의 왕을 아멘호텝 2세로 추정을 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동물숭배자로 특히 소를 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집트에 남아 있는 벽화에 아멘호텝 2세가 소 밑에서 젖을 빨고 있는 그림이 있답니다.
그러니 소가 신이니 신의 젖을 빨아 먹는 자신도 신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짐승을 신으로 섬기게 된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로마서 1:23-24절입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버려두사
저히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왜 짐승을 섬기는 것입니까? 죄로 인하여 그렇게 된 것입니다.
마땅히 창조주를 섬겨야 할 인간이 사람을 섬기고, 짐승을 섬기고 피조믈울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 두신 결과 이들은 짐승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원히 찬양 받으실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피조물을 섬기고 있는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잔노가 하늘로부터 좇아 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나는 짐승을 섬기지 않는데,
그러나 이렇게 물어 봅시다. 왜 소를 섬겼을까요? 소가 얼마나 큰 재산입니까?
우유를 공급하고, 퇴비를 공급하고, 우리나라는 농사를 짓고, 나중에 고기까지 공급하고,
가죽까지 공급하는 그야 말고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큰 재산입니다.
우리나라가 몇십년전만 하여도 소가 농촌에서는 가장 큰 재산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를 귀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즈음 광우병과 구제역으로 가축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가축을 치던 사람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한두마리가 아니라 한번 병이 오면 거의 다 죽는 병이 왔을 때 얼마나 큰 재앙입니까?
지금까지의 재앙은 조금 불편하였지, 재산이 날아가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조금 불편하여도 견딜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가축의 재앙은 자신들의 커다란 재산이 날아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재앙의 깊이가 더하여 가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고집이 꺽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인들만 소를 섬긴 것입니까? 아니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엇을 만들어 섬긴 것입니까? 금송아지를 만든 것입니다.
소를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여호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짐승을 섬기던 나라에서 구원받아 나왔는데
광야에서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소를 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상입니다.
▲그리므로 오늘 우리도 다 소를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소가 재산이기에 우리가 재산을 믿고 사는 것이 소를 섬기는 것과 다를바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수가 없는 것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섬기지 않고 있다면 중간적인 입장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피조물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 때문에 재앙이 더 깊어지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예수 믿으세요’ 라고 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먹고 살만하면 그때 생각해 보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오늘날 예수 믿는 것은,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모이는 사교단체쯤으로 여겨지고 있는가 봅니다.
예수 믿지 않으면 큰일 납니다. 지금 하나님의 진노가 닥치고 있습니다.
당신이 먹고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여도 그들은 코웃음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렇다고 합시다.
그들이야 들을 귀가 아직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그런 반응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를 믿는다는 그래서 교회를 다니는 우리는 어떠한가를 물어보자는 것입니다.
과연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까? 아니면 피조물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까?
주님 외의 것은 모든 것이 다 피조물입니다. 우리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계속하여 피조물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택하신 자들이라면 그러한 피조물을 섬기는 것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아니하십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만약 우리가 계속하여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섬기게 된다면 하나님께서 손을 쓰시는 것입니다.
언제까지 항복하기 까지입니다. 결코 하나님께서 포기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이 한편으로는 무섭고 두렵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감사한 것입니다.
왜 그렇게 말할수 있습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언약하신 대로 이루어 가시는데
바로가 당하는 재앙과, 택한 자의 백성들이 당하는 재앙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바로가 당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심판을 당하는 것입니다.
거역하면 거역 할수록 재앙의 강도가 점점 더 심하여 가는 것입니다.
가축의 재앙 다음에 사람의 몸에 독종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우박입니다.
그 다음에는 메뚜기입니다. 그 다음에는 어두움,
드디어 장자의 죽음까지 재앙을 더하여 가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는 그러한 재앙에 결국 항복을 하지만 어떤 항복입니까?
심판을 당하는 항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어떤 항복을 받아 내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섬기는 자리로 항복을 받아 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차이점입니다.
바로가 열번이나 하나님을 거역하였는데
이스라엘은 한 여섯 번쯤 거역하다가 순종하였겠습니까?
아닙니다. 역시 열번이나 거역한 것입니다.
민수기 14:22-23절입니다. "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
내가 그 조상들에게 맹세한 땅을 결단코 보지 못할 것이요
나를 멸시하는 사람은 하나라도 그것을보지 못하리라 오직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좇았은즉
그의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이스라엘 백성도 열번이나 광야에서 반역을 하였습니다.
사건적으로 열번이라 하지만 그 사이 사이는 늘 반역으로 가득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가나안에 들어 갑니까? 못 들어 갑니다.
그러나 누구는 들어 갑니까? 갈렙은 들어 갑니다. 갈렙이 온전치 하나님을 좇았기에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하나님을 좇은 자만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당장에 모세는 구원받지 못하였나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으니까?
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질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도 자기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모세가 나중에 변화산에서 엘리야와 함께 예수님의 별세를 말씀하지요?
그러니 그러한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가 거절하자 계속하여 재앙의 깊이를 더하여 결국 항복을 시키십니다.
그런다고 바로가 천국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하나님을 반역하는데도
그리고 재앙을 받는데도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천국으로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왜요 불만이 있습니까?
있다면 아직도 자신이 어떤 자인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 닥치는 환난이나 고난이란 심판의 재앙이 아니라
세상의 것을 끊어 내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손길입니다.
한번 해서 안되죠, 두 번, 세 번, 정신 차릴 때 까지입니다.
그리고서 주님만을 의지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더욱 주님의 말씀에 경성하여
다른 것을 의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닥치는 모든 사건들이 우연히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우리의 주님을 의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임을 알고
감사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