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소금 마5:13 -설교 스크랩, 출처-
◑세상을 맛나게 하는 조미료, 소금
▲소금 없는 세상은, 맛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소금을 비유로 드신 것은, 분명히 맛을 얘기하셨고,
맛을 생각한다면,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실 때의 의도는
세상을 누군가가 맛본다는 겁니다.
세상을 누군가가 먹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다는 겁니다.
설렁탕에 소금이 안 들어간 것을, 먹을 수 있겠어요?
지금 하나님이 설렁탕처럼 ‘세상’을 맛보신다고 하면,
성도들이 ‘소금’이 되어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 세상이 아주 ‘맛없는 설렁탕’처럼 되어버린다는 것이죠.
예를 들자면, 그것이 바로 ‘세상의 소금’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먹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태목사가 만들어 낸 말 아냐?
아닙니다. 요한계시록 보면, 라오디게아 교회에 하신 말 가운데
너희가 차든지 덥든지 하라. 아니면 내가 너희를 뱉어내리라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비유적인 표현이지만, 하나님께서 믿는 사람들을 ‘먹는다’는 표현을 하시지요.
‘사랑한다, 마음에 듣다’는 말을.. 먹는다고 표현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세상을 하나님이 맛보실 때, 우리가 소금이 되어드려야
하나님의 입맛에 간이 맞아서, 먹을 만한 음식이 되지 않겠느냐,
안 그러면 소금 없는 설렁탕처럼 버림을 받지 않겠습니까.
◑기독교 윤리운동의 전제 - ‘전적 부패’의 자각 total depravity
▲자칫 잘못하면, 유교적 도덕주의/율법주의로 흐를 수도 있습니다.
<부패하는 세상을 우리가 방지하는 소금의 역할을 하자>는 발상이
교회 안에서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정직한 자가 형통하다’ 라는 신념입니다.
정직하게 사업을 했더니, 사업이 잘되더라는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 외에도 검소함이라든지
-순결 운동 같은 행위들을 통해서,
순결하지 못한 세상, 정조관념이 점점 희박해진 세상,
사치가 범람하는 세상에서 검소함을 되살려 내자,
사기와 거짓이 넘치는 세상에서 정직으로
이 세상의 부패를 막아보자는 생각과 움직임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일본 사람처럼 정직한 사람들이 세상에 없습니다.
동시에 일본 사람들처럼 예수님 안 믿는 사람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런 윤리 운동도 기독교가 하면 좋겠지만,
오늘 이 ‘세상의 소금’ 비유를 통해서, 보다 근본적인 각도로 한 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부패한 세상에서, 정직하게 사는 나 한사람으로 세상을 바꿔본다고 합니다.
큰 효과는 없다 하더라도, 나만이라도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이
중요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부패한 인간의 본성은 마찬가지
그런데 한번 따져보죠.
지금이 더 부패했습니까/ 유교적 윤리가 지배하던 조선시대가 더 부패했습니까?
지금 사는 사람이 더 부패하다고요? 원칙적으로 틀린 말이에요.
왜냐하면, 사람은 원래가 옛날이나/지금이나 똑같이 부패한 본성을 타고 납니다.
그때는 많이 감추고 살고/지금은 아예 드러내놓고 사는.. 그런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사람의 원래 본성은.. ‘전적 타락’한 부패한 본성 그대로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똑같습니다.
조선시대가 지금보다 더 깨끗한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사람 속에 똑같이 있던 부패가,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 사회가 부패하지 않았다’고 말 할 수는 없습니다.
‘저 사람 많이 타락했어!’ 이 말도 틀린 말입니다. 기독교적인 말이 아니에요.
원래 타락하고 냄새나는 성질이, 겉으로 드러나 보인 것뿐이지,
(또 반대로 어떤 사람은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뿐이지)
사람은 원래 다 부패한/타락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더 이상 부패해 질 수 없을 만큼 이미 부패해져 있다>
는 것이 성경적 관점입니다.
그런 세상을, 내가 나타나서 정직을 외친다고
우리의 정직한 몇 번의 행위로, 세상의 부패가 방지 되느냐.. 하는 얘깁니다.
윤리운동도 하면 좋겠지만,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우리의 정직한 몇 번의 행위로 세상이 밝아질 것이라는
그 확신 자체가.. 어쩌면 ‘잘못된 율법주의’로 흐를 수도 있습니다.
▲주님이 사람을/세상을 보시는 관점 ... 다 똑같이 부패했다.
예수님께서 왜 죄인들, 세리, 창기들과 친구가 되셨을까요?
왜 매국노로 낙인찍힌 세리하고 같이 교제하셨습니까?
제가 지금 신정아 씨하고 어느 다방에서 커피라도 마시는 것이 사진이라도 찍히면,
신정아 리스트에 나도 올라가서 난리가 나지 않겠어요?
그런데 예수님은 랍비 신분에서, 거리낌 없이 창녀들과 같이 식사를 하십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친구’라고 말을 듣는가 하면,
심지어는 간음하는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를
돌을 치려는 사람들이
그 여자보다 덜하지 않게(똑같이) 부패한 모습으로 보셨습니다.
(땅에 손가락으로 뭘 쓰시니... 다 도망갔더라... 너를 치던 자들이 어디 있느냐?)
주님이 세상을 보시는 관점이 이렇다는 겁니다.
▲‘세상의 소금’이란 말씀의 전제
이런 예수님께서 너희가 세상의 소금이라고 말씀 하실 때,
그 말씀이, ‘너희는 애초부터 부패하지 않은 깨끗한 존재’이며
또는 ‘너희의 깨끗한 행동’을 통해서
이 세상이 밝아지고, 부패가 방지될 것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겠습니까?
아니지요. 우리는 철저히 부패한 존재입니다. 전적 타락한 존재들입니다.
▲인간은 원래 타락한 존재로 타고 났습니다.
예를 들면, 가끔 자식들을 보면 일탈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뭐 딸래미 책상을 치우다가 남자친구 사진이 나왔어요,
더 심하게 담배가 나왔다고 칩시다.
놀래지 마세요.
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착한 내) 딸의 마음속에
인류 역사를 통해 대대로 전해져 오는
더 이상 부패할 수 없는 부패성이 흐르고 있습니다.
정말 그 속에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들어있습니다.
그러면서 정을 떼세요. 기대도 떼시고.
◑소금이 되려면, 먼저 ‘자기 부패’를 철저히 자각해야
▲자기의 전적 부패를 자각하는 사람이.. 희소합니다.
자 이런 세상에서 소금의 역할을 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곱디고운 내 딸 안에
인류 역사를 통해 흐르던 부패가 들어있는데,
세상사람 모두 붙잡고 인터뷰를 해 보세요.
자기가 그런 존재임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어요.
심지어는 종신형을 받고 감옥에 들어온 사람도
자기가 여기 온 것, 사람을 죽인 것은.. 전부 다른데 이유가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 속에 있는 부패를 보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패한 세상에서 소금이 된다는 것은,
아무도 자기 속의 부패를 못 보고 있는 세상 속에서
자기안의 부패를 보는 사람들이.. 소금인 기독교인들입니다.
세상의 부패를 보기 이전에
너무 큰 자기안의 부패를 보는 자들.
이들이야 말로, 온전히 소금의 역할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될 수 있습니다.
▲자기 부패를 철저히 자각하는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모든 사람이 속이 한 없이 부패해 있으면서도
다 자기를 내 세우고 자기를 주장하고 살아가는 가운데
오직 하나님을 믿는 선민만이 소금의 역할을 하면서
자기를 주장할 수 없음을 알고 살아갑니다.
우리 기독교는 이런 삶의 태도를 지니고 살아갈 때,
우리의 입장, 정직, 검소, 순결 같은 도덕적 미덕에 대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포기해야 합니까? 그런 것은 아니죠.
내가 내 속의 부패를 보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보시면서 간이 맞아하십니다.
(자기 속에 부패를 못 보는 세상 속에,
자기 속에 부패를 보는 소금 같은 사람들이 섞여 있을 때,
간이 맞다는 뜻인 듯...)
자기 속의 부패를, 자기가 철저히 썩었다고 인정하는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시면서,
그 사람들 마음 안으로, 하나님께서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나 한사람을 이 땅위에서의 활동의 거점으로 삼으십니다.
그래서 내가 정직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은
내가 정직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들어오신 하나님이 내 안에서 살아가시는데,
다른 사람들이 나 보고 ‘저 사람은 참 정직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것이 기독교적입니다.
‘내’가 정직을 향해 갈 때는, 내가 정직을 할 수 있다고 믿는 거죠,
이것이 엄청난 위선(전적 부패와 정반대)입니다. 엄청난 부패의 악순환입니다.
▲먼저 자신의 부패를 철저히 자각해야.. 비로소 소금의 자격을 갖게 됩니다.
아까 세리와 창기 얘기를 했지만, 바리새인들은 얼마나 억울해요?
그 사람들처럼 정직하고 깨끗하게 산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 더러, 주님은 ‘회칠한 무덤’이라고 했어요.
겉은 깨끗하지만 속은 썩은 시체와 해골이 들어있다고 하셨어요.
너무 비참한 말 아니에요? 왜 그러셨습니까?
'자기 속의 부패'를 쳐다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금이 누구냐?
바로 자기 속에 썩은 시체가 들어있다는 것을 보는 사람이 소금이고,
내가 그 실상을 보면, 길이 열립니다. 그 속의 썩음이 없어지는 길이 열린다고요.
그 때만 하나님이 자기 속에 들어오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철저히 부패함을 인정하고/회개하는
그 사람을 통해 행해나가시는 것이,
즉, 소금의 역할/부패를 방지하는 역할이 비로소 일어납니다.
<첫 번째가 부패한 세상 속에서, 세상의 부패를 보지 않고
나 자신의 부패를 보는 자가 소금이다. 소금인 기독교인이다.> 라는 주장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의인 10명이 없어서 망했잖아요?
그들의 죄 때문이 아니라,
의인 10명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우리 가정에 적용해 봅시다.
내 자식을 볼 때, 내 기대에 맞지 않는 자녀의 일탈 행위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속의 부패를 내가 못 보고 설쳐대는 바람에.. 망할 수 있어요.
내가 의인이 되지 못하니까, 소돔과 고모라처럼, 자녀와 가정이 망한다는 겁니다.
다시 강조합니다.
내가 소금이 안 되고
내가 내 안의 부패를 못 보기 때문에,
자녀와 가정이 망하는 것입니다.
자녀와 남편이 그들의 빗나가는 일탈 행위로 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가운데 소금을 두신다
소금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그대로 있지만,
소금인 성도들이 맛을 내면서.. 간을 맞추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소금 이해를 잘 해야 해요. 소금은 세상을 변화시키지 않아요.
미역국 안에 소금이 들어갔다면,
소금이 미역국의 성분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에요.
그냥 미역국은 그대로 있고, 소금이 간을 맞추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면, 찐 계란 먹을 때, 소금에 찍어 먹든, 소금을 따로 손으로 집어 먹든,
계란과 소금이 따로 입에 들어가지만, 계란이 맛있게 느껴집니다.
마찬가지에요. 우리 가정이 ‘찐 계란/미역국/설렁탕’이라고 볼 때,
자식 형편없어, 남편 형편없어, 불평할 것이 아니라,
내가 소금이 되어서, 하나님의 입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그래서 간을 맞춰 드리면
그 가정을 하나님이 봐주신다는 겁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망시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세상이 다 소금 없는 세상이 되어서.. 하나님 입맛에 안 맞아요.
그러므로 세상을 바꾸려고 하고, 옆 사람을 바꾸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소금이 되면 됩니다.
그러면 세상이, 맛이 나게 되어있습니다.
▲자기 부패를 본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다들 잘 못 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자기가 나서서 사는 세상에서
내가 나서면 뭔가 될 줄 알고 교회도 따라 하는데,
우리가 나서서 정직 운동이라도 벌이면
세상이 바뀔 것처럼 정직을 외쳐대는 것, 왜 순결을 외쳐댑니까,
한 남자 한 여자 결혼해서 끝까지 사는 것이 순결이에요?
이미 속은 다 더러워 졌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온갖 정조를 다 더럽히고, 온갖 바람을 다 피고
돈 좋아하고 뭐 좋아하고 다 하면서
남녀만 같이 바람 안 피우면 그것이 깨끗한 겁니까?
우리 어머니도 그렇게 알고 계셨어요. 한 남자만 알았다고
당신이 깨끗한 줄 알고 계시는데, 천만의 말씀이죠.
(그렇다고 여러 사람과 살라는 말이 아니지요.)
그런 것을 주장하기 전에 이미 우리 자체가 너무너무 썩어있다는 것을 알면
당연히 십자가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 얘기를 하면 다들 ‘그건 기본이고’ 그래버립니다.
그 기본으로 돌아가세요. 그것이 기본이자 마지막이에요.
내 부패를 알면 내 속이 그렇게 썩었는데, 내가 자식을 만질 수 있어요?
어느 사람이, 치매 걸린 시어머니가 오물을 손에 묻히고 덤비는데
‘어머니, 손자 좀 봐주세요.’ 하며 맡깁니까?
오히려 그 손으로 내 손자 쓰다듬으려 하면, 으악 하며 피하지요.
그런데 참 담대해요 다들.
내 속에 오물(똥)과는 비교도 안 되는 부패한 근성이 있거든요,
그걸 가지고 자식을 막 만져요, 예쁘다고,
그리고 자식이 갈 길을 그 손으로 닦아요. 닦으면 닦을수록 더러워지는 거야,
참 용감해요, 어머니들. 자기 부패를 보면 그럴 수 없죠.
▲나의 부패가 적나라하게 표현된 십자가
그런 부패된 나의 실상을, 하나님은 어떻게 표현하셨나요?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부패한 우리 대신, 직접 못을 박아버리십니다.
직접 아들의 손에 못을 박으시면서
‘너희 모습이 이거다.
너희 손은 이렇게 못 박혀야 마땅한, 전적 부패한 손이다.’ 하십니다.
가시 면류관을 머리에 깊이 박습니다.
‘너희가 생각하는 것은, 전적 타락한 생각이야!
너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 이게 너희 모습이야.’
▲왜 믿는 사람들의 삶의 장소를, 죄악이 관영한 세상의 가운데에 마련해 두실까요?
구약에서 가나안 땅의 정복은 성경의 아주 큰 주제입니다.
그런데 그러지 말고, 사람들이 안사는 사막에다가 새 정착촌을 건설하면,
훨씬 쉽지 않았을까요?
(요즘 물만 갖다 대도 사막이 농장 되지 않습니까? 키부츠 농장처럼.
또 L.A.의 오렌지 밭도 사막에 물을 대서, 오렌지 밭을 만든 거잖아요?)
이사야서에 사막에 물이 넘쳐흐르리라, 말씀대로
애써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시내 광야나, 아라비아 반도에다가 가나안 복지를 만드시면 될 일이지,
왜 굳이 사람들 사는데, 그 한가운데 들여보내시면서
하나님이 염려로 머리카락 다 빠질 만큼, 가나안 사람을 본받지 말라고 걱정이세요?
뭐 하러 그 걱정을 하시냐고요. 굳이 정복을 하고 쑤셔서 집어넣으면서
‘가나안 사람들을 본받지 말라!’ 왜 그러시냐고요?
▲맹모삼천지교 아시죠? 자녀 교육하려고 3번 이사 했다는 것 아닙니까.
시장 통에서 기르니까 보는 물건마다 장사놀이를 해서 보는 것 마다 따라 하니까
세 번 이사를 하는 거예요. 잘 교육시키려니.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좋은 것으로 해 주려고.
서울의 강북에 있는 엄마가, 강남 엄마를 따라 잡으려고 합니다.
강남에 와서 실력을 길러야 좋은 대학을 들어갈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심지어는 위장 전입까지 하지 않습니까.
우리는 그렇게까지 하는데,
하나님은 거꾸로 죄악 많은 세상에, 왜 자기 백성을 쑤셔 넣으려고 애를 쓰실까요?
<세상 가운데, 십자가를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모르고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십자가의 삶(자기 전적부패를 인정하고, 십자가를 붙드는 것)을 보여주라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소금이 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모습을 전해야 합니다. 이 전제를 빠뜨리면 안 됩니다.
‘세상이 썩어간다’ 이런 얘기 할 것이 아니라, 내가 썩었다,
내가 썩은 그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죽으셨다,
그런 자세를 가져야지, 그런 것은 망각하고,
(무슨 의인이나 되는 것처럼) 죄악된 세상을 향해서 뭐라고 하는 것.. 아닙니다.
▲‘세상’에서 시선을 돌려 ‘내 안’을 보십시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계속 간을 보려고 합니다.
내가 소금이 되어드려야 하는데,
부패한 세상에서 나의 부패를 보는 자들이 소금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속성이 참,
남이 한 악한 일이 드러나는 것을 그렇게 재미있어 할 수가 없어요.
그것 보다 더 재미있는 일이 없어요. 이게 세상입니다.
자기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악하면 악할수록 좋아하는 것이 세상 사람이에요.
우리가 할 일은, 그런 시야를 내 안으로 돌리는 것,
내 부패를 알면, 십자가로 나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바로 저런 사람입니다, 하나님’ 하고 고꾸라집니다.
그러자마자,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면서
정직과 순결과 검소와 같은 건설적인 덕목들이 내가 행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으로, 성령의 열매로 맺혀지는 겁니다.
▲나의 전적 부패를 인정할 때, 환경이 변화되는 역사가 나타납니다.
내가 정직하다고 말하지 않는데,
사람들은 나를 보고 정직하게 산다고 말하게 되는 일이 일어납니다.
나는 정직을 주장하지 않고, 내가 정직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악한 사람이라고 신정아씨보다 더 거짓말을 잘 하는 사람이라고 고백을 하는데,
실제로 내가 사는 것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뒤져보면 거짓말이 없는 삶.
그것이 소금의 삶입니다.
‘정직하자’ ‘검소하자’ 라는 주장은 기독교적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정직할 수 없다’ ‘우리는 틈만 나면 사치한다.
혹시 검소하다면 바리새인처럼 의로 바뀔 뿐이에요.
이래 막히고 저래 막히고 부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입니다.
교회의 모토는 ‘우리는 정직할 수 없는 죄인들이다.’
‘우리는 순결을 주장 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 영혼이 더럽혀진 인간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를 변화시키느냐?
주님의 십자가 밖에 길이 없다고 해야.. 소금이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교회가 정직합시다, 정직한 자의 형통을 믿는다... 무슨 말이에요?
형통이라는 목적을 위해 정직을 수단으로 사용하잖아요,
자칫 잘못하면, 그런 제목들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보다 기초적 진리인
‘나는 정직할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십자가를 향할 수밖에 없다’ 나는 더럽다...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표방해야할 근본적 내용입니다.
'내가 정직하면 어찌어찌된다...'라는 식은, 차후에 주장할 내용입니다.
내가 만지는 모든 것이 더럽혀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으므로
십자가에 가서 죽는다. 이것이 소금들의 삶의 모습이고 생각의 내용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