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카리스마, 보통 사람

LNCK 2010. 2. 12. 23:54

 

카리스마, 보통 사람 - YouTube

 

◈카리스마, 보통 사람              겔11 :19, 마18 :1~5                모두 펀 글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겔11 :19

 

 

◑카리스마와 제도

 

우리나라 최상위법인 ‘헌법’은 사상의 자유를 얘기합니다.

그러나 하위법인 ‘보안법’은 그 사상의 표현을 제한합니다.

 

헌법은 ‘표현의 자유’를 얘기합니다.

그러나 영상 표현법은 영화에 등급을 매기고 ‘표현을 제한’합니다.

 

사상과 표현은 하늘이 모든 인간에게 준 권리이기에

기본적으로 누구에게나 ‘자유’가 있지만

그 자유가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다고 판단이 될 때

집단은 그 자유를 ‘제한’합니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판단의 권한이 어디에 있고

어디까지 제한할 수 있느냐가 항상 문제입니다.

 

이것은 종교, 신앙 행위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의 은사를 나누는 일에 있어서

특히 악령을 치유하거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있어서

은사를 받은 사람과 교권 church authority 은 자주 충돌을 합니다.

 

그러나

교권은 성령의 은사를 존중해야 하고

개인(은사자)도 교권의 판단을 존중해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주님으로부터 복음을 선포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평신도로서는 할 수 없는 설교의 허락을

교황님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이는 당시 교권의 허락을 받지 않을 뿐 아니라

교권을 부정하고 비판하며 복음을 선포하던

이단과는 다른 태도였습니다.

 

교황님으로부터 설교의 허락을 받았지만

그는 어느 교구를 가던지, 그 교구장의 허락을 또 받았습니다.

 

하루는 어느 교구에 들어가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그 교구장께 설교의 허락을 청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주교님은, 자기가 설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하며

프란치스코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밖으로 나가라고 내치셨습니다.

 

이에 프란치스코는 이쪽 문으로 나가더니, 저쪽 문으로 다시 돌아와

주교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왜 다시 돌아왔냐는 주교님의 물음에 프란치스코는

자식이 어떻게 아버지 곁을 떠날 수 있느냐고

여전히 주교님께 대한 애정과 존경을 보였습니다.

 

이를 보고 주교는 자신의 교구에서 설교할 수 있는 허락을 주었습니다.

교권을 존중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보고

교권은 그의 복음 선포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임을 인정하고

허락을 준 것입니다.

 

개인과 교권,

카리스마와 제도.

이것은 끊임없는 갈등의 관계이지만,

서로 존중해야 할 영원한 상대입니다.

 

성경에도 좋은 예가 나옵니다.

사도행전 5장은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당시 유다교의 충돌을 얘기하며

올바른 교권 행사의 한 예를 소개합니다.

가말리엘이라는 바리새인이

사도들의 말과 행위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면

인간, 즉 교권이 막아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내버려 두어도 결국 없어지고 말 것이라는 태도입니다.    <선>

 

 

◑참다운 카리스마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사회가 합리화 될수록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출현이 줄어든다’고 합니다.

따라서 카리스마를 지닌 지도자에게 충성을 바치는 관행은

사회가 합리화 될수록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 피터 드러커는

‘리더십과 카리스마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잘라 말하며

팀 경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종교계에서도 나타납니다.

요즈음 신자들은 권위적인 성직자보다는

친절하고 꾸밈이 없는 성직자를 더 좋아합니다.

 

진정한 카리스마를 보여주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그분은 섬기러 오셨다고 말씀하셨고(마20 :28), 그 말씀 그대로 사신 분입니다.

내 능력을 내 욕심을 채우기 위해 쓰면.. 집착이 되고 죄가 됩니다.

내 능력과 재능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카리스마입니다.

그것을 주님과 교회와 세상에 봉사하는 데 써야 합니다.            <섭>

 

 

◑사회학자 막스 웨버가 말한 인간사회를 지배하는 3가지 권위

 

①카리스마적 권위 Charismatic authority 

전쟁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전쟁영웅이나,

미래의 미지의 사실을 족집게처럼 정확하게 집어내는 예언자나,

많은 사람들을 감동으로 몰아가는 지도자나,

학생들의 마음에 감명을 끼치는 교사 - 등에게서 이런 권위가 있다.

 

이 카리스마적 권위는 어떤 면에서 감성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권위는 따르기가 참 쉽다. 마음이 움직이니까 그렇다.

그러나 이런 카리스마적 권위도, 히틀러 같은 경우에서 보듯이,

온 세계를 불행으로 몰고 갈 수 있다. 언제든지 문제를 일으킬 수 있다.

 

②전통적 권위 traditional authority

가정의 전통, 사회의 전통에 근거해서 부여되는 권위이다.

카리스마적 권위가 카리스마에 근거해서 부여되는 권위라면,

전통적 권위는 전통에 근거해서 부여된다.

 

가문에도, 사회에도 대대로 내려오는 어떤 전통적 권위가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 옛날의 ‘양반 상놈’도 일종의 전통적 권위이다.

이런 전통적 권위도, 급변하는 세상에서, 따르기가 사실상 쉽지 않다.

 

예를 들면, 어떤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이 있다고 할 때

부모는 그 일을 아들이 이어받기 원하지만, 아들은 그것을 싫어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전통적 권위도 따르기는 쉽지 않다.

 

③법률적 권위 legal authority

권위(자)는 법과 제도 뒤에 숨어있기 때문에 ‘얼굴 없는 권위’ 라고도 한다.

카리스마적 권위가 감성에, 전통적 권위가 전통에 의존하는 반면,

법률적 권위는 이성에 의존해 있다.

 

법과 제도가 이성적으로 합리적일 때, 사람들은 그것을 따른다.

그러나 이런 법률적 권위도 사람들은 따르기 싫어한다.

 

예를 들면, 세금은 법률적 권위에서 부과되는 것이지만

세금 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위 3가지가 ‘사회를 지배하는 3가지 권위’라고 막스 웨버가 지적했는데,

    제/설교자가 보기에 한 가지가 빠져있다. 그것이 바로 ‘신(정)적 권위’다.

 

▲신정적 권위란? divine authority 神定的

하나님이 부여하시는 권위이다.

 

인간은, 가치 면에서, 인권 면에서 다 평등하지만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에게 권위를 부여하신다.

 

남편과 아내 관계에 있어서는, 남편에게 그 권위를 부여하셨고

부모와 자녀 관계에 있어서는, 부모에게 그 (신정적) 권위를 부여하셨다.

 

하나님이 부여하신 권위이기 때문에, 자녀들은 인정을 해야 하고

그것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 포인트이다.

가정은.. 전통적 권위이기에 앞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신정적 권위인 것이다.

 

또한 '교권 church authority' 역시 신정적 권위임을 알고, 우리가 존중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춘)

 

 

◑카리스마가 없으신 예수님

 

▲철저히 보통 사람으로 사셨던 예수님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한국식으로 말하면 ‘철수’, 미국식으로는 ‘존’입니다.

당시에 가장 흔한 이름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철수'로 사셨다는 뜻입니다.

                                             *관련글; 나를 그냥 예수라고 불러다오

 

예수님은 마귀에게 3가지 시험을 당하실 때,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그것을 극복하신 것이 아니라,

철저히 <보통 인간>으로서 그 시험을 다 극복하셨습니다.

                                            ☆관련글 : 인간으로서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

 

예수님은 물위를 걸으셨습니다. 그러니까 공중을 걸어 다니실 수 있으신데,

일상에서는 그 기적을 사용하지 않으시고

항상 그 건조한 모래땅을 다리 아프시도록 터벅터벅 걸어 다니셨습니다.

<보통 인간>으로 말입니다.

 

목마르면.. 여인에게 물 좀 달라고 해서 얻어 마시시고,

피곤하시면.. 배타고 가시다가 낮잠을 주무시는가 하면,

슬픔에 북받치면.. 체면 같은 것 다 무시하시고, 엉엉 우셨습니다.

 

<메시야적 기적을 드러내실 때를 제외하고는...>

철저히 인간으로 사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모든 식사 때마다 5병2어를 만드신 것은 아닙니다.

광야에 사람들이 배고픈 것을 보시고 불쌍한 마음이 드셨을 때,

그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요지는, 특별한 기적이 일어날 때가 있었지만,

예수님은 평소에 ‘보통 사람으로 사셨으며’

기적을 행했다가도 즉시 ‘보통 사람으로 돌아오셨다’는 것입니다.

 

    ※참고로, <급하고 강한 바람처럼>책에서 멜 테리 (현지인) 목사는

    동티모르(인도네시아)에서, 일어난 놀라운 기적을 간증합니다.

    그 중에도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은 여러 번 일어났고,

    외국인들이 실제로 그 기적을 현장에서 목격하였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멜 테리 목사는 미국으로 초청되었습니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아무리 기도해도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이

    일어나지 않더랍니다. 

    그리고 이런 내적 음성이 그에게 들렸답니다.

    '저기 수퍼마켓에 가서 포도주를 사라!'

 

        일단 선교지라는 특수상황에서,

        그것도 '수퍼마켓이나 병원이 없는 정글이나 오지'에서는

        기적이 잘 일어난다는 특수성을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러나 정글이나 오지는, 기적 말고는, 다른 대책이 없으니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멜 테리는, 성찬식을 해야 되는데, 정글에 포도주가 없으니까..

        그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포도주가 많은 미국에서는 그런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 기적이 필요가 없으니까요.

        하나님도 당신이 만드신 '자연법칙'을 존중하신다는 뜻이 되겠고,

        '기적의 종 멜 테리'도 결국은 보통 사람이라는 뜻도 되겠습니다. 

 

     비슷하게 우리도, 하나님이 응답해 주실 때, 막판 끝에 가서야 응답해 주십니다.

     다른 대책이 없을 때, 비로소 하나님은 응답해 주시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다른 대책이 있을 때, 하나님은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그 대책으로 해결하기 원하십니다.

     우리는.. 걸어다니시고, 배고프시며, 우물가에서 물을 얻어서 마시신 예수님처럼,

      보통사람으로서 충실하게 삽시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은 쉽게 착각합니다.

자기 예언이 좀 맞으면.. 금방 자기가 무슨 ‘큰 예언자’가 된 것처럼 착각합니다.

 

자기 예언이 잘 맞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늘 예언이 잘 맞는 것은 아닙니다. 틀릴 때도 꽤 많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한 때 족집게처럼 예언을 맞추었다 하더라도,

그 예언이 끝나면.. 그는 즉시 ‘보통 사람’의 자리로 내려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자기 스스로 24시간 365일 연속 ‘특별한 쪽집게 예언자’로 산다면..

결국 잘못되기 십상입니다.

 

그렇게 ‘보통 사람’으로 겸손히 내려온 사람에게

하나님은 또 다시 새로운 예언을 계속 주실 것입니다. (신유, 능력 마찬가지)

 

예수님도 가지지 않으셨던 '인간적 카리스마'를 가지려고 애쓰지 맙시다.

그저 바보처럼 섬기는 사람이.. 올바른 신자입니다.

 

 

.....................................................

 

 

 

◑관련글 :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제자들이 주님께 와서 묻습니다.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

이 말씀의 배경은, 제자들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막 주님을 따르기 시작한 때가 아닙니다.

본문의 배경은 주님과 3년간 생활한 때에 일어나는 대화입니다.

 

제자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으므로,

그 주님을 따르는 삶에 대한 보상을 받는 차원에서, 제일 으뜸이 되길 원했습니다.

최고의 명성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하늘나라에서는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라고 물은 것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그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3년이나 나를 따른 너희들이

제일 위대하다’ 라는 대답을 듣기 원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주님께서 한 어린이를 불러 세우십니다.

그 어린이 한 명을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말씀하시기를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을 낮추어 이 어린이와 같이 되는 사람이다."

이 때 제자들의 반응이 어떠했을까요?

 

▲사실 그 당시 어린아이들의 처지를 알고 나면, 상황을 더 실감나게 이해하게 됩니다.

옛날 그리스 로마 시대에는, 아이로 태어난다는 것은 무척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낙태가 편만했고, 비록 낙태되지 않아 세상에 태어나도,

가정에서 버림받기가 일쑤였습니다.

 

병약한 아이나, 원하지 않는 아이들은.. 다반사로 산 속에 버려지곤 했습니다.

 

그래서 동물에게 잡혀 먹히거나, 혹시 지나가는 사람이 보면

집에 데리고 와서 노예로 부려먹곤 했다고 합니다.

 

유아시기를 넘기는 아이들이 약 2/3가 되는데, 

겨우 살아남은 이 아이들은 아버지의 소유가 됩니다.

아버지는 마음대로 자녀를 죽일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의 약 반 정도가 8살을 넘깁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어린아이를

'누가 가장 위대합니까?'라고 질문하는 제자들 앞에 세워 놓으신 것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세워진 그 아이 모습이.. 밝고 아름답고 명랑한 모습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둡고 고통스러운 모습이었을까요?

그림으로 된 성서책들을 보면

예수님이 예쁜 아이들을 안고 축복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화가들이 자기들이 생각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그린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어린아이들의 모습은 그렇게 귀엽고, 예쁘고,

명랑한 아이들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 당시 어린아이들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여자와 아이들은) 사람 수에 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소유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시대적 상황에서, 주님께서 제자들 앞에 ‘어린아이/어린아이 같은 자’를

‘큰 자’라고 세우십니다.

 

이렇게 당혹해 하고 있는데, 한 수 더 떠서 말도 안 되는 말씀을 또 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나를 받아들이듯이

이런 어린이 하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곧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이 거지와 같은 아이를 받아들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잠시 ‘받아들이다’(영접하다)는 의미의 영접이란 단어를 풀어 보겠습니다.

이 말은 원래 뜻은,

‘낮은 사람이 높은 사람을 모시는 것’으로 해석함이 옳습니다.

 

▲그렇다면 이 장면을 우리는 이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보잘 것 없는 어린아이를 영접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즉, ‘낮은 자가 높은 자를 받아드리는 것’을 뜻합니다.

 

곧 '하찮은 어린아이들보다 더 낮은 자가 되어서, 어린아이를 영접하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 비천한 어린아이들보다 더 낮아 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지들을 영접한 적이 있으십니까? 자선은 베풀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거지들 보다 더 낮아져서 그들을 영접하라' 하면 당황하지 않겠습니까?

제자들은 아마도 고개를 흔들다 못해 분노했을지도 모릅니다.

 

제자들은 어릴 때, 이미 어린아이의 고통을 다 겪어 보았습니다.

그런데 또 다시 그 고통으로 들어가라 하십니다. 그 뿐 아닙니다.

어린아이보다 더 낮아지라고 주님은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그때야 비로소 그토록 원하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은,

다른 말로, 가장 낮고 천한 자보다 더 낮아져서, 그를 섬기라는 뜻인데, 

곧 자신의 ego를 완전히 무시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자신의 ego(자아)를 세우기 위해,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길 원했는데

천국에서는 실제로 자신의 ego를 완전히 버리는 길밖에.. 다른 길이 없음을 보게 됩니다.

 

그 후 제자들은 어린아이만 보면 갈등이 시작됩니다.

"저렇게까지 해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될 필요가 있나?"

그런데 이들은 갈등하면 할수록, 자신의 ego를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리고는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점점 되어 갔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ego를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시진 않으셨습니까?

여러분의 ego를 위해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시길 원하시진 않으셨습니까?

우리에겐 갈등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저렇게까지 하면서..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될 필요가 있나?"

 

이 갈등을 시작하신 분들은 언젠가는 자신의 ego를 죽이실 것입니다.

그리고는 천국에서 위대한 자가 되어 가실 것입니다.

 

▲소화 데레사는 'little flower'(소화)로서,

가장 작은 자로 이 땅에서 살다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된 성자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소화, little flower라고 할 때, 고상한 느낌이 듭니다마는,

들판에 가면 발에 밟히는 작은 들꽃을 연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 소화 데레사(St. Therese)가 쓴 글을 보면,

그가 얼마나 작은 자로 살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씁니다.

"제가 언제나 작은 한 톨의 모래로 남아 있게 기도해 주세요.

그래서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는, 모든 눈에 숨겨진,

단지 주님만 볼 수 있게 말이에요..."

 

이 분은 늘 큰 자가 되길 원하는 세상에서, 모래처럼 작은 자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평범한 소녀가 되길 원하셨습니다. 하나님만 아는 자기가 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한 톨의 모래와 같이 되길 원했습니다.

 

소화 테레사가 세상을 떠날 때,

수도원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친구들 눈에 띄이는 일은 하질 않았습니다.

오직 주님 눈에 띄이는 일만 하길 원했습니다.

 

세상 사람들 눈에는 안 띄어도, 주님에게만 보여지는 삶을 사는 것,

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우리도 이처럼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올>       

 

                             ▣ 리더쉽, 목회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