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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 2439

LNCK 2010. 5. 7. 08:13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되다              마11;1~9          Mike Bickle 성경강해 25강 요약



◑예수님의 절대 선하심을 믿어야


▲하나님은 언제나 선하십니다.

하나님 나라의 기본이 되는 진리 중 하나는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방식은 언제나 선하시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오늘날에도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바로 이 진리의 바탕 위에 세워져왔고, 또한 계속 세워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선하게, 사랑으로 그의 백성들을 인도하신다는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능력을 사용하시는 경우도,

‘우리를 사랑으로 선하게 인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능력을 나타내 보여주시는 경우는

언제나 그 동기가 사랑에 의해서motivated by perfect love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일을 <사랑의 동기로> 행하십니다.

예수님의 계획보다 더 좋은 계획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지혜보다 더 완전한 지혜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지혜를

우리를 선하게, 사랑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사용하십니다.


그러니까 우리 각자는

내가 무슨 좋은 일/위급한 일이 닥치더라도

예수님은 반드시

완전한 사랑과, 무한한 지혜로

나에게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의 동기는.. 100% 순수하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를 사랑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혹시 욥의 고난과 같은 절망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허락하시는 예수님의 동기motive를 확실히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고, <감사 찬양>합니다.

비록 내게 닥치는 현실이

환란과 풍파가 밀려오더라도

그것을 허용하시는, 예수님의 동기는

언제나 완전한 사랑과, 완벽한 지혜로

결국은 나를 선하게 인도하시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완전한 사랑과 무한하신 지혜로

나를 결국 선하게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신뢰할 뿐만 아니라, 신뢰 차원을 넘어서, 찬양하게 됩니다.


우리를 위하여 행하시고

우리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이

그 동기가 순수하신 사랑이요, 그 완전한 지혜임을 신뢰하게 될 때

‘오 주님, 왜 이토록 저를 사랑하시는지요. 감사합니다. 찬양드립니다.’

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헌신은, 억지로, 의무적으로, 마지 못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감사하는 만큼,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고, 그 분께 헌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의심(실족)할 때도 있습니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마음 한 구석에서, 예수님을 (약간이라도) 의심합니다.


‘왜 내게 이런 불행과 불상사가 닥쳤을까?

이것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가 아닐까?’

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그 완전한 지혜로 행하심을 의심합니다.


물론 마귀가 역사해서 욥에게 불행이 일어났습니다.

그런 마귀의 역사도, 근원으로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이 욥을 믿어주신 대로, 욥은 그 시련을 승리했습니다.

그리고 갑절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마귀가 역사해서 불행이 닥치든지,

그것이 역사하도록 하나님이 허락하시든지,

하나님의 완전한 사랑과, 완전한 지혜를 신뢰하고 믿어야 합니다.


문제는 그런 믿음이, 내게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일평생 주님과 교제하며, 믿음의 연단을 받으면서,

때로는 불같은 시험을 통과하면서.. 내 믿음의 내공이 점점 쌓아져 가는 것입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너희 믿음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1:3~4


▲예를 들면, 가장 민감한 재정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성도는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을 수 있습니다.

그때 즉시로 드는 생각은

‘예수님이 마땅히 나를 도우셔야 할 일을.. 하지 않았다’고... 의심합니다.  


(자녀가 사고를 당해서, 크게 다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병원에서 암 판정을 받을 때도 마찬가지고,

주님을 힘써 섬기다가, 사역 가운데 심한 고난을 겪을 때도 마찬가집니다.)


‘주님, 제가 오래 동안 주님을 신실하게 섬겨왔는데,

그 결과가.. 결국 이런 것이었군요.’

하며 주님을 실망하고, 그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러나 괴로워할수록 자기만 손해입니다.

슬럼프를 질질 끌면서, 하나님을 의심하고, 원망하는 것은

문제 해결의 시간을 더욱 지연시킬 뿐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았던 세례요한


▲혹자는,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예수님을 의심했다고 해석하지만..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가 감옥에 갇혔을 때, 예수님을 의심(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했다고 보는 이유는,

아래 구절 때문입니다.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11:2~3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이 구절에 근거해서, 심지어 세례요한조차도..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의 메시아 되심을 의심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은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예수님의 메시아 되심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는, 이어지는 본문에, 예수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요한의 제자가 떠난 뒤에.. 예수께서 모인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다)

화려한 옷 입은 사람이냐? (아니다)

예언자를 보려고 광야에 나갔느냐? 그렇다.

그는 예언자보다 더 나은 사람이다.’   마11:~9  


예수님 말씀에, 세례요한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아니었습니다.

즉, 바람이 부는 대로, 시류와 여론에 따라서

자기 주장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님에 대해 실족하지 않았다.


    참고로,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에 대한 해석으로,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세례요한을 두고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로 지칭하셨다’고 해석하는데,

    (이 해석 역시, 세례요한도 ‘인간인지라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반어법’입니다.       (반어법 : 너 미워.. 사랑한다는 뜻)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가 세례요한을 지칭하는 것까지는 맞지만,

    반어법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요점은 ‘갈대가 아니다’는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세례요한은, 의심을 살만한 질문을 했을까요?

(그의 질문 내용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

요한이 옥에서 그리스도의 하신 일을 듣고 자기의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께 여짜오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마11:2~3


저(마이크 빅클)는, 세례요한이 <자기 제자들을 위해서>

자기 제자들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모든 일을 요한이 추진했다고 봅니다.


지금 본문 마11:1~11절의 주제 구절, 핵심구절은 이것입니다.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는 복이 있다.’  마11:6  

쉬운성경에는 ‘나를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예수님 때문에 실족/의심하는 것>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전체 주제를 놓치지 마십시오.


    세례요한은, 감옥에서, 이제 자기가 곧 죽을 것을 내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제자들은, 스승 요한이 곧 죽는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아마 예수님이 기적적으로 구해 주시리라.. 믿고 있었을 것입니다.


    만약에 자기들의 스승이 곧 죽고나면,

    그 제자들이 얼마나 실족하겠습니까?

    ‘아니, 그렇게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종이, 왜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야 하나?’


    이런 일을, 자기 죽음을 앞두고, 미리 예견한 세례요한은,

    ‘자기 제자들이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자기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묻게 했던 것입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지금 상황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가장 흔들리고 있는 질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올바로 알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보내어 ‘당신이 메시아이십니까?’를 물어보게 했고,

예수님은 ‘내가 메시아가 맞다’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 자신이 죽으면,

자신의 제자들이 모두 흩어지지 말고, 예수님을 계속 따르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 핵심적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가서 듣고 보는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나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마11:4~5


이에 대한 해석은  세례요한의 갈등과 예수님의 답변   또는   오실 그이가 당신입니까? 을 참조하세요.



▲마치는 말

저는, 전 세계의 젊은 크리스천 사역자들을 만나면서

예수님께 대한 그들의 열심,

때로는 금식까지 하면서, 주님을 열심히 좇는 것을 보면서..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은,

그들이 재정적 어려움에 봉착하거나,

기타 여러가지 괴로운 일을 당하면

쉽게 ‘예수님으로 인하여 실족하는’

‘예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는’ 그런 장면을 여러 번 목격했습니다.


본문의 ‘세례요한의 제자들’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무슨 어려운 일을, 욥처럼 겪게 되더라도,

절대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하지 말 것은,

(서두에서 설명했습니다만)

예수님의 모든 섭리의 동기motive는

온전한 사랑 완전한 지혜로 행하심입니다.


비록 현실은, 내게 어려움으로 나타나지만,

그 풍랑의 동기는 perfect love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사랑  

그러므로 어떤 상황에서든지, 절대로 예수님을 의심하면 안 됩니다.

결국 합력하여 선을 이루고, 결국에는 내게 좋은 결과로 나타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평소에 예수님은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의심하는 우리에게도, 예수님은 똑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 믿음이 어디에 있느냐?’


여러분, 믿음을 사용하세요.

믿음을 가지세요. 굳세게 하세요.

시험이 올 때, 예수님으로 인해 실족함/섭섭함/의심이 생길 때

믿음으로 이기세요.


믿음을 보여드리세요. 예수님께.

예수님이 ‘참으로 기이히 여기시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실제로 우리는 믿음이 하루아침에 완성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을 바치기까지 수 십 년이 걸렸던 것처럼

많은 경험을 치른 후에,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절대 예수님을 의심하지 않는,

그 완전한 사랑과 완벽한 지혜를 믿는

그런 욥같은, 세례요한 같은, 아브라함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오늘도 ‘믿음으로’ 승리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 사 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