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의 변화 창41:37-43 2014.05.04.설교 스크랩
오늘 말씀 드릴 믿을 거리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의 변화에 대한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근거가 될 성경구절은 원래 요한복음 1장에
‘그를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
우리는 우리 신분의 변화에 대하여, 과소평가하거나 평가절하하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겸손함이나 또 온유함에서 비롯된다고 보이지 않고
자격지심이나 무지함이나 불신에서 비롯된다고 보입니다.
예컨대 누가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고 말하면
‘뭐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는데요.’라고 대꾸하고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라고 말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죠.’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이든 은혜든 이 모든 것을 흔한 것으로 만들어 버려서
오히려 가치를 상실하고 미사여구의 수준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생기는 신분의 변화를 그런 식으로 매도해버린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고, 하나님에 대한 불신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귀하고 특별하게 주는 것을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세상에 사람들이 많고 사람들이 다 비슷해 보이지만 그들의
지문을 검색하면, 어느 한사람도 똑같은 지문을 가진 사람이 없고 다 다릅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꽃이 정말로 숫자가 많고 다 똑같아 보이지만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면 그 눈꽃이 다 다르게 생겼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 제일 흔한 것이 사람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은 각 사람을 특별하고 고요한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더욱 그러합니다.
사람들의 흔함이, 여러분 각자의 특별함을 희석시키도록 하면 안 됩니다.
▶오늘 창세기 성경구절을 본문으로 채택한 이유는
그리스도인의 신분의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끌려갔을 때 그 신분이 무엇이었습니까? 종이었습니다.
노예의 신분으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다가 우여곡절 끝에 바로의 꿈을 해석하게 됐는데
애굽의 장차 7년의 풍년이 있다가 그 후에 7년의 흉년이 오게 될 텐데
그 흉년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풍년의 풍성함을 다 잊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풍년이 지속되는 동안에 곡식을 저장해놓으면
흉년이 왔을 때 망하지 아니하리라.. 이것이 요셉이 한 말입니다.
바로가 요셉을 좋게 여겨 애굽의 총리로 삼습니다.
그래서 요셉에게는 벼랑 간 신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감옥의 갇혀있던 죄수가
오늘은 손의 인장반지를 끼고, 세마포 옷을 입고, 금 사슬을 목에 걸고
바로가 타던 버금 수레를 타고, 무리가 그 앞에 가면서 엎드리라라고 외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탕자의 비유를 연상시키는 구절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앞에 왔을 때, 그 아버지가 그를 맞아준 것 뿐 만이 아니고
손에 가락지를 끼어주고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발에 신을 신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여주었다고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죄인이 예수님을 믿을 때에 일어나는
신분의 변화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법적인 면과, 실질적인 면이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우리가 알아야 되는 성경의 중요한 원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에는 두 가지 면이 있는데
-첫째는 법적인 면,
-둘째는 실제적인 면이 있습니다.
▶법적인 면은 무엇인가요?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적법한 명분, 효력, 근거를 말합니다.
계약서의 도장을 찍어서 공증을 받으면, 그 계약의 법적인 효력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든 천사든 마귀든.. 누구든 부인하거나 취소할 수 없는 근거를 말합니다.
왜 법적인면이 중요한가요?
우리의 신앙이 인간의 바람이나 염원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적법한 약속의 근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우리에게 당신이 그렇게 믿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라고 추궁할 때에
하나님의 말씀의 적법함을 내세울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법적인 면이에요.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의 약속에는 실제적인 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고,
우리가 그것을 실제로 경험하고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계약에 법적인 효력이 있어야 되지만, 법적인 효력만이 있어서는 유익이 없고
그 계약에 따라서, 우리가 돈을 받든/ 회사를 인수하든/ 집을 인수해야
실제로 유익이 있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누가 땅을 샀는데 땅문서를 금고에 쳐 박아두지 않아요.
만약에 그렇게 하게 되면 그 땅은 남이 들어와서 농사를 짓고
남이 들어와서 천막을 짓고 살게 될 것입니다.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면, 그 땅에 내가 계획한대로 집을 짓든가.
공장을 짓든가. 농사를 해서 소유권을 행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약속에도
법적인 면과 실제적인 면이 있는데
탕자가 아버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가 끼어준 가락지와
입힌 제일 좋은 옷과, 그리고 신긴 신발은, 법적으로 신분의 변화를 보여준다면
아버지가 그를 위해 베푼 잔치는 실제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신분의 변화를 경험experience하고, 즐기고 누릴 수 enjoy 있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은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있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그것을 실제로 얻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셨는데,
그 사실을 아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믿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그 땅으로 들어가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땅을 차지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의미가 있는 곳이 될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된 후에, 바로가 그에게 인장 반지를 끼워주고
또 세마포 옷을 입히고 목에 금사슬을 걸어준 것은
그의 신분의 변화를 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요셉은 자신의 변화를 실제로 어떻게 실감했느냐..
그가 버금 수레를 타고 길을 갈 때에 사람들이 그 앞에서 엎드리라라고 외쳤더니
사람들이 엎드린 것입니다.
엎드리라 외쳤더니 사람들이 엎드린 여기에
요셉이 신분의 변화에 따르는 권세와
그 권세가 무엇을 뜻하는지 효력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신분변화에 따르는, 영적인 권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결과로 그냥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는 거기에 따르는 권세가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하나님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권세는 목적으로만 존재해서는 쓸모가 없고
우리가 그것을 실제적/실질적으로 누리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거기에 필요한 것이 믿음입니다. 믿음.
◑여러분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영적인 권세를 주셨습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자면
▶첫째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있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에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은 그냥 주문을 외우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인장 반지와도 같은 것입니다. 계약서에 찍는 도장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께 올리는 청구서와 같은 것이라면
거기에 도장을 찍어야 되는데 내 도장은 아무 쓸모가 없고
예수님의 도장만이 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의 도장이 찍힌 것을 보실 때 결정을 하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중략
▶그 이외에도 예수님은 당신을 믿는 사람들에게 많은 권세를 부여하셨습니다.
마가복음 16장에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따르리니
저희가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냄이요. 방언은 새 방언을 말하며
뱀을 집으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나으리라’ 말씀하셨는데
사람들은 그 구절을
나를 믿는 ‘목사들에게는’ 이런 표적을 따르리니.. 라고 읽는지 모르겠어요.
심지어는 목사님 중에도 안 믿는 사람들 많아요.
예수님 말씀은 ‘나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표적이 따른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 중에 과연 몇 명이나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낸 자가 있으며
새 방언을 말하며 병든자에게 손을 얹은 즉 낫는 것을 경험한다는 얘깁니까?
이것은 은사의 요구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그리스도인의 신분에 변화에 따르는 권세를 알고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좌우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저도 그런 구절을 읽고 알고 있지만
제 신앙생활이 변변치 않기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합니다.. 라고 말씀하는 분이 계실 것입니다.
저도 젊었을 때 그런 문제를 가지고 많이 고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육신의 정욕을 쫓지 않고 성령을 쫓아 행해야 될 필요가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래야 마귀가 우리를 정죄하지 않고, 우리가 마음속에 담대함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 것은 이 땅에 행실이 완벽한 그리스도인은 없다는 사실이에요.
예수님은 너희가 나를 믿고 ‘행실이 완전한’ 사람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라고 말씀하지 않고
‘나를 믿는 자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삽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막지 못할 때에는
그 다음에는 우리의 죄를 지적함으로 정죄하고 우리를 위축시키려고 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신분의 변화를 경험하지 못하게 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이겨낸 힘은 믿음뿐이에요. 믿음은 배짱과도 같습니다.
성경 말씀에 ‘누가 정죄하리요. 누가 송사하리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대적하리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도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라’ 그러므로 마귀가 우리를 정죄하고
너는 죄인이다. 죄인인 주제에 무슨 방언을 하려고 하며
죄인인 주제에 무슨 영적인 권세를 사용하려고 하느냐.. 라고 우리를 누르려고 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기록되었으되, 그리스도 안에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하였느니라.
믿음은 배짱이에요.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하십니다.
그리고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43절에 ‘자기에게 있는 버금 수레에 그를 태우매
무리가 그 앞에서 소리 지르기를 엎드리라’ 요셉이 소리 지른게 아닙니다.
그 앞에 사람들이 요셉을 위하여 소리 지른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소리 지르게 하십니다.
여러분, 여러분 중에는 요셉 같은 특별한 사람에게만 해당 되는게 아닙니까?
그럼 탕자는 뭐가 특별해서 아버지가 그에게 반지를 끼워주고
제일 좋은 옷을 입혀 주었다는 것입니까?
탕자에게 해당된다면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권세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원수들이 예수님 앞에서만 엎드리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 앞에서도 엎드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엎드리라고 말하지 않아서 엎드리지 않는 것이지
엎드리라고 외치면 엎드리게 돼있습니다.
그것이 누구든 무엇이든 간에 엎드리라고 외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엎드리라고 생각하지 않아서 그런 것입니다.
질병이든 시험이든 재앙이든 빈곤함이든 우울함이든 엎드리게 돼있습니다.
엎드리리라고 외치치 않아서 그렇지 여러분이 믿음으로 외쳐보세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엎드릴지어다. 엎드리라 외치면 엎드리게 돼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이 주신 권세를 알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영적인 무지함은 변명의 여지가 없어요.
바울이 소아시아 어디에 갔을 때에, 바울이 귀신을 내 쫓는 것을 누가 보고
어떤 사람이 실험으로 귀신들린 자에게 이렇게 말을 했지요.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그랬더니 귀신이 대답을 했어요. ‘나는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
여러분 귀신이 예수님을 아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바울을 안다. 그랬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바울은 예수의 종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바울에게 주신 영적인 존재를 귀신들도 알더라.
여러분 우리가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끼워주신 가락지, 입혀주신 의의 옷,
신겨주신 신발이 주님의 권세를 보여줍니다. 암행어사가 마패를 꺼내는 것과 같습니다,
주님의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권세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됩니다.
우리는 너무 점잖아요. 위기의 순간에 우리의 점잖음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이번 세월호 사건에 왜 해경이 배에 들어가 구조하지 못했느냐?
그들의 주저함. 점잖음. 그것이 수많은 인명피해를 낳은 것입니다.
왜 들어가지 않습니까? 또 안에 있는 젊은이들은 왜 나오려고 하지 않습니까?
들어가려고 하지도 않고 나오려고 하지도 않고 주저하는 것, 점잖은 것이
위기의 순간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아요.
신앙적으로도 마찬가지에요.
우리는 너무 무력하고 너무 점잖고 너무 눈치를 보고 너무 주저합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에요.
교양적으로는 점잖을 수 있지만,
예수를 믿는데에 있어서는 점잖은 것은 영적인 시험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로 막는 자들이 있을 때에 외쳐야 됩니다. 엎드리라 외쳐야 됩니다.
신분의 변화가 그저 미사여구가 아니고 형식이 아니라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될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