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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는 종교

LNCK 2011. 7. 24. 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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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뻐하는 종교             살전5:1~18

 

김준곤 목사님 *<CCC편지> 1965년 10월 9일호

 

 

석가모니는 “인생은 고해다.”라고 말했고

생의지(生意志)의 비극을 비관한 쇼펜하우어는 죽음만이 고통(苦痛)을 벗는 최선책이라고 말합니다.

 

히브리 전도자 솔로몬도 허무의 선각자였고,

고난의 사람 욥의 심연은 니체의 〈비극의 탄생〉보다도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보다도

까뮈의 〈페스트〉나 사르트르의 〈벽〉보다 어둡고 숨이 막힙니다.

 

그러나 골고다에서 그리스도의 심장이 찢어지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절규하는 것은 그 어떤 것보다 인간의 비극과 저주가 절정에 달합니다.

 

인류의 지혜자인 괴테는 “인생아, 너는 근심 없이 기쁨으로 지난 날을 헤아려 보라.”고

우리에게 묻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도, 힘써 소유한 것들도, 저 태양도,

그리고 내 생명도, 생애의 한 순간도 모두 평온하지 않을 뿐더러 다시 되돌아오지도 않습니다.

 

인간의 지혜는 두 가지를 알아야합니다. 하나는 인생무상 허무요, 다른 하나는 신(神)입니다.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는 현대인에게 허무의식과 염세주의를 경험케 해야

올바른 인간 자세를 가질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참으로 허무주의이고 절대적 절망을 현실로 소유하려면 미쳐 버리거나 자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밤에 놀란 어린 아이가 어머니 품으로 달려들듯이 신에게로 뛰어와야 합니다.

 

▲생명의 환희

생명의 환희,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무게도, 색(色)도, 형(形)도, 양(量)도 없습니다.

어떤 개념이나 언어에도 담을 수가 없는 침묵 속에 부절이 살아 있는 신비한 힘입니다.

 

생명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섭취하고 배설하며 무엇인가를 위하여

억세게 쉼이 없는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은 연한 순이나 부드러운 꽃잎,

여인의 유방 같이 가냘프고도 부드러운 것이지만 굳은 바위틈을 뚫고 자랍니다.

 

생명, 그 정체는 몰라도 살아 있는 것들에게 형상을 입히는 조각가이며,

꽃씨 한 알올 담장 사이에 키워 가장 아름다운 색(色)으로 단장하는 화가이고,

이름 모를 산새에게 노래를 가르치는 음악가이며,

물과 흙과 태양 광선과 그리고 공기를 배합해서 온갖 유기물을 만들어 내는 화학자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희박하고 적은 원형질 하나를 여인의 뱃속에 심어 사람을 만드는 조화,

그리도 새롭고 그리도 풍성하고 싱싱한 그리고 거룩한 생명이며,

참으로 그는 태양을 믿고 바람과 땅과 친(親)하고 신을 믿는 경건한 존재입니다.

 

생명, 그것은 분명 죽음을 모르고 실망도 없습니다. 무엇보다 목적이 뚜렷합니다.

생명은 식물도 동물도 아닌 보이지 않는 그 무엇입니다.

시간 속에 있지 않은 영원한 것입니다. 생명은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끝이 오는 듯 싶어도 무엇인가를 완성하고 또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생명의 의미와 목적과 조화는 영원한 것이며, 그것은 분명히 신 안에 숨겨져 있는 것입니다.

생명을 받은 자는 스스로 있게도 못하고 없게도 못합니다.

 

생명은 거룩한 것이기에 생명을 생각하는 마음은 자연히 신을 향합니다.

그래서 슈바이처는 생명에의 외경(畏敬)을 그의 생의 철학으로 삼았습니다.

 

▲크리스천의 생명

크리스천의 생명은 사랑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생명은 기뻐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의 생명은 영원한 청춘입니다. 생명은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의 그림자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 있는 크리스천의 생명은 약속과 소망 가운데 있습니다.

씨앗 속에 들어 있는 과실이요 수태 속에 자라는 아이입니다.

신과 사량과 생명과 기쁨과 그리고 영원과 소망, 이런 것은 하나이고 분리할 수 없는 개념들입니다.

 

산다는 것은 신을 믿는다는 것이요, 사랑한다는 것이요, 기뻐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을 모르는 생명은 생명이 아닙니다.

 

단테는 만일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면 사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신과 남을 섬기는 생활속에만 보람과 기쁨이 있습니다.

권태는 나만을 위해 사는 곳에만 있습니다. 기쁨은 어떤 특정한 장소, 특정한 일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생활에는 기쁨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절대 긍정만이 있습니다.

 

▲기쁜 소식, 기뻐하는 종교

복음이란 말은 기쁜 소식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천국의 잔치에 초대한다고 하셨습니다.

크리스천의 날들은 모든 날이 축제의 날입니다. 그의 노래는 “나의 기쁨, 나의 소망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쉬운 맘뿐이네.”라는 찬양입니다.

 

옛날 다윗 왕은 왕의 체면도 잊어버리고 소고를 치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찬송하며 춤추고 기뻐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라고 하시면서 그와의 만남을 혼인 잔치로 비유했습니다.

‘기뻐하고 기뻐하라’는 말이 4복음서에만도 수십 번 있습니다.

사도들도 항상 기뻐하라고 권합니다. 그 기쁨은 충만하고(요 15:11),

그 예비한 것은 전부가 신량을 위한 것 같으며,

모든 눈에서 눈물을 씻고 애통도, 사망도 고통도, 아픈 것도 없습니다(계 22:4).

 

프랜시스는 태양도 달도, 별과 바람도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니 자기의 형제요 자매라고 생명의 송가를 불렀습니다.

물론 크리스천은 누구보다 인생이 쓰고 아프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는 경박한 낙천주의자는 아닙니다. 그의 기쁨은 높고 거룩한 것입니다.

그의 기쁨은 사건이나 어떤 조건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그의 기쁨입니다.

그것을 변경하거나 빼앗을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프랜시스가 태양의 송가를 시작할 때는 그가 병고에 시달려 설명의 위협을 받고 있을 때였습니다.

의사가 그에게 죽음이 다가옴을 고할 때 “죽음이여 나의 형제여”라고 쓸 수 있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빵을 구하듯이 즐거움을 구합니다. 성경은 기쁨을 성령의 열매라고 하였고,

항상 기뻐하라고 명령합니다. 성경에는 사량과 기쁨이 언제나 같이 동반되는 덕입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요, 기독교는 기뻐하는 종교요, 하나님의 나라도 기쁨과 사량이 있는 곳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그리스도 사건을 천국의 혼인 잔치로 비유한 적이 많습니다.

기도와 사랑과 소망과 믿음과 평안과 이런 덕들이 언급되는 곳에,

성령과 성자와 성부가 임재하는 곳에, 성도들이 묻힌 곳에는 으레 기쁨이 따랐습니다.

 

바울이라는 사람은 전도자라기보다도 성자라기보다도 기쁜 소식을 전한 제일인자인 것입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 4:4),

‘항상 기뻐하라’(살전 5:16), ‘소망 중에 기뻐하라’(롬 12:12),

고통과 시련 중에도 기뻐하라 하였고, 주님은 핍박과 죽음을 당하면서도 기뻐하라 하십니다.

병자에게, 문둥이, 노예, 사형수에게도 모든 순간 모든 환경에서 기뻐하라고 하십니다.

 

▲관능적 즐거움

세계는 흥행과 스릴과 오락과 쾌락의 추구에 미치다시피 되어 있습니다.

관능적인 것으로부터 정신적인 것까지 그 쾌락의 방법은 헤일 수 없이 많습니다.

오락과 흥행 사업은 어디에서나 홍성(興盛)댑니다.

 

그러나 관능의 도취 후에는 피로와 낙담과 권태와 구토중이 반드시 뒤따르고

침묵된 절망이 종착역입니다.

 

쇼펜하우어나 사르트르적인 염세와 절망의 예언자가 많이 나타나는 것도

이런 무드에서 생깁니다. 무신론과 염세주의는 사촌 관계업니다.

즐거움이란 모든 덕의 어머니(괴테)인 것입니다.

즐거움과 사랑, 이 두 날개가 부러진 현대인은 청춘의 비상이 없습니다.

 

현대의 질병은 믿을 수 있는 신조와 마옴의 노래를 상실한 데 있습니다.

참 즐거움이 고갈되어 버린 곳에는 온갖 환락과 관능의 도취가 난무하고

방종이 공허를 대치하나 즐거운 생명의 노래는 끊어진 지 오래입니다.

 

인간의 마음은 기쁨을 위하여 창조받았습니다. 인권의 기본은 결코 사회적, 정치적인 생활만이 아닙니다.

인간 생활에는 보다 깊은 단층이 있습니다. 마음의 꽃봉오리는 신이라는 태양을 향해 꽃을 피워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기쁨

현대인은 모두 기쁨을 모르고 사는 사람입니다. 태양이 없는 곳에 꽃이 피지 못하는 것처럼

신이 없는 마음에는 참 기쁨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곳에는 기쁨이 없고 감사가 없습니다.

사랑과 기쁨과 믿음과 소망과 감사가 모두 한 나무에 달린 열매요, 잎이요, 꽃입니다.

 

영원한 것, 그것은 신외에 그 어떤 곳에도 없습니다. 영원한 사랑, 영원한 청춘,

영원한 기쁨,…그것이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나에게 내주하는 성령의 현실입니다.

 

형제여, 자매여, 가난하고 외롭고 슬프고 고민하는 친구들이여, 기뻐하고 즐거워합시다.

그리스도가 나를 사랑하시고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 무엇이 이 기쁨을 빼앗을 수 있겠습니까?

 

기독교의 사랑이 정이나 느낌이 아니고 의지 행위이듯이,

기쁨도 사랑하려는 의지와 감사하려는 기도와 주를 향하는 헌신에서 결단되는 인격적인 창조의 덕인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주께 바라는 기약과 소망에서 생기는 부산물인 것입니다.

기뻐하고 기뻐하라는 것이 주의 뜻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기뻐할 이유를 가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