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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의 설교개발 / 이중표 목사

LNCK 2011. 8. 13. 16:47

◈목회자의 설교개발              행6:1~10          출처 ‘우림과 둠밈’에서 스크랩

                                                           

전국목회자세미나 제1회 (1987.06.15~19) 기간 중 선포된 말씀 


서론 목회자의 최대 과제는 설교를 어떻게 개발해 가느냐 하는데 있습니다.


설교는 목회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목사는 설교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목회라고 하는 것은 교회(건물이 아님)를 먹이는 사역을 말합니다.

그래서 목회의 전부가 설교입니다. 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목사님들이 설교한 그대로 형성된 것입니다.

개교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목사의 설교 이상도 이하도 아닌 수준에 와 있습니다.

그래서 목회개발은 설교개발이라는 말과 통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에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는 말씀에

목회의 원리가 숨어 있습니다.


우리가 목회하면서 말씀을 제쳐놓고 얼마나 정력을 낭비하고 있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말씀을 제쳐놓고 심방한다, 말씀을 제쳐 놓고 행정 한다,

말씀을 제쳐놓고 교육한다, 말씀을 제쳐놓고 전도하는 것 등등은

궁극적으로 말해서 목회에서 외도하는 것입니다.



◑1. 본론시작 말씀이 왕성해서 부흥한 초대교회


초대교회 사도들은 말씀의 중요성을 성령의 감동으로 알았고,

그 말씀으로만 선포했으므로, 예루살렘의 제자의 수가 많아졌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믿는 무리가 많아졌다’는 것 보다

‘말씀이 왕성해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행6:7, 행12:24, 19:20참조.


말씀이 왕성해져서 거둔 열매 중의 하나가 스데반 집사였습니다.

사도들이 말씀을 제쳐놓지 않고 말씀을 중심으로 하여 외친 가운데

신앙을 배우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스데반은 집사로서 말씀을 증언하였고(행7장)

이어서 순교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교회를 볼 때 이같이 말씀이 왕성합니까?

그렇지 못합니다. 말씀은 왕성해지지 않고 교회당만 왕성해집니다.

날마다 교회 건물이 생기고 커집니다. 기도원도 많이 생기고,

설교가 한정 없이 쏟아지지만 생명의 말씀은 풍성하지 못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홍수가 넘칠 때 식수에 기근이 있다.’

장마로 물은 많지만, 마실 수 있는 음용수는 오히려 적어진다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기독교인이 많아졌지만 진실한 의미의 기독교인은 적습니다.

설교 횟수가 그렇게도 많아졌건만, 생명의 말씀은 적은 상태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교인들의 수만 많아진 이유,

생명의 말씀이 선포되지 않는 이유를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저는 지금 한국교회가 위기에 처해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의 100년 역사를 회고해 볼 때 지금처럼 믿는 사람들이 많았던 적은 없습니다.

반면 지금(1987)처럼 기독교가 사회 속에서 그 영향력을 잃어버린 적은 없었습니다.


3·1운동 때에 지극히 적은 수의 기독교인이 있었지만 역사를 주도하였습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왕성해지면, 반드시 타락과 관계가 깊어짐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에 불교가 왕성해질 때 신라가 망했습니다.

고려도 샤머니즘 화된 불교 때문에 망했습니다.

조선은 유교가 왕성할 때에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윤리를 가르쳐야 할 유교가

지리도참설로 변질하여 마침내 국운을 기울게 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이렇게 많아진 것은 말씀의 능력 때문인지,

말씀의 변질 때문인지를 물어봐야 합니다.

우리 민족의 장래를 위하여 진지한 성찰이 요구됩니다.


 

◑2. 교회의 양식은 예수그리스도


목회자의 일생의 과업은 양을 먹이는 것입니다.

양에게 먹이는 양식은 바로 하나님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실 때 ‘베들레헴’에서 나셨는데, ‘떡집’이란 뜻입니다.

또 예수님이 구유에 누우셨는데 구유는, 짐승의 ‘먹이통’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떡으로 왔고, 구유에 누우셔서 떡이 되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잊고 타락하자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시키려고, 예수님이 먼저 ‘생명의 떡’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먹는 양식은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요6:57


교회가 구제를 안 하고 무엇 하느냐고 비난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세상적인 빵을 먹이는 곳이 아니라, 예수를 먹이는 곳입니다.

바로 이것이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입니다.


어떤 신학자들은 마25:35~40절 말씀을 단편적으로 해석하여

‘가난한 자가 곧 예수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렇게 비약한다면 국민복지가 좋아져 가난한 사람이 없어진다고 하면,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는 유명무실해진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교회의 최우선의 과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민중에게 먹이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신24:19~22)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곡식을 남겨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구호의 대상이었습니다.

여기서 신약적인 의미로 볼 때.. 객은 안 믿는 자들, 아버지의 집이 없는 길가는 나그네입니다.


고아는 아버지 없이 버려진 안 믿는 자들이고,

과부란 예수 신랑 없는 안 믿는 자들을 뜻합니다.

또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네 감람나무를 떤 후에 그 가지를 다시 살피지 말고..

네 포도원의 포도를 딴 후에 그 남은 것을 다시 따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신24:19~21)


이와 같이 ‘남겨두라’는 것은 오늘날의

하나님이 없는 사람들에게 말씀의 떡을 먹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또 감람나무에서 짜낸 기름처럼 성령의 능력을 받게 해야 합니다.


그런 반면 포도나무의 포도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증거 하여야 된다는 의미로 생각해보면 더욱 은혜가 됩니다.


오늘날 교회가 주어야 할 양식을 하나님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나 쓰러져 있는 사람을 보고

제사장이나 레위인은 그냥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름과 포도주를 상처에 바르고

마시게 한 후 주막집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강도 만나 쓰러져 신음하는 이웃이 우리 주변에 많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주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곧 생명을 주어야 합니다.


 

◑3. 순수한 말씀을 먹이시라


설교란 신령한 양식을 요리하여 저들에게 먹이는 것이며,

교회는 음식점과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목사는 신령한 음식을 개발하여 먹여 주는 요리사와 같습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한번은 친구들과 함께 오장동 냉면집에 갔었습니다.

골목집에 손님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손님이 많은가..

마담 얼굴이 잘생겼나 보니까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집도 볼 것이 없었습니다. 단 한 가지 냉면 맛이 기가 막혔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교회의 목사 얼굴도 볼 것 없고,

교회 건물도 볼 것 없더라도 음식 맛을 잘 내는 요리사 같은 목사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한신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처음 한신교회는 32평 아파트에서 월세를 지불하면서 예배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몰려와 1부, 2부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100여 명이 넘게 되었습니다.

헌금도 한 달에 몇 백만 원이 들어와, 그 당시 기장교단에서 최고의 예산을 세웠습니다.


3년이 지나자 연 예산액이 1억을 넘었습니다. 다락방에서 그렇게 성장한 것입니다.

그 원리는 무엇입니까? 다름 아닌 순수한 말씀 때문에 그런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요즈음 음식 맛을 내는 화학조미료가 인체에 해롭다고 선전합니다.

의복은 가공섬유가 인체에 나쁘다고 합니다.

그리고 자연식품을 권장합니다. 자연 그대로가 좋다고 합니다.


설교 말씀도 마찬가지 이치입니다.

설교에 필요이상으로 가공을 하면, 교인들의 영혼에 해롭습니다.

순수한 말씀이란 곧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선포할 때에 위대한 능력이 나타납니다.

오늘날 말씀의 능력이 상실된 것은, 말씀의 순수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역사를 말씀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인물을 선택하셔서, 그들에게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브라함에게 주신 말씀이 대대로 이어지는 역사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로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출 3:10)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스라엘 건국과정에서 사무엘을 부르셔서 예언(말씀)하게 하셨고,

예레미야, 에스겔 모두 하나님 말씀을 선포함으로써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이루어지도록 도왔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은 설교로 시작되었습니다.

가르치는 일, 치료하는 일, 설교하는 일 중에서

설교하는 것이 그의 최우선적 사역이었습니다.


이렇게 중요한 설교를 우리는 소홀히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심방이나 다른 용무로 시간을 허비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을 전하는 것이 최우선의 사역임을 깨닫고

사도들도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않다”고 말했습니다.

말씀보다 교회 행정하고, 구제하는 것이 더 중요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네가 날 사랑하느냐”하고 3번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사랑한다고 대답할 때 예수님은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21:15~17).


‘양을 치라’고는 1번 부탁하셨고, ‘양을 먹이라’고는 2번 부탁하셨습니다.

     KJV 성경에는 3번다 양을 먹이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양을 치라’는 것은 교회 행정, 교육, 심방을 의미합니다.

‘양을 먹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말씀 선포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양들에게 말씀 먹이는 일에 2/3를 투자해야 합니다.

다른 데에 더 많은 시간과 정력을 쓰면 주님께서 책망하십니다.


심방 가서도 설교해야 합니다. 설교 속에 문제의 해답이 들어있습니다.

요즈음 상담이 중요시되고 있습니다만, 상담이란 것도 케리그마 상담이어야 합니다.


미국에 척 스미스 목사는 목회초기에 하루에 다섯 명씩 상담을 하였습니다.

10년이 지났을 때 교인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그때의 가정문제, 심리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느냐 물으니

그들의 대답은 목사님 설교 듣고 해결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척 스미스 목사님은 그들의 문제에 관계된 설교 테이프를

상담하러 오는 교인들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느니라”(롬10:17) 했습니다.

교인들의 믿음은 설교를 들을 때에 형성됩니다.

목사의 설교만큼 교인들의 믿음이 성장합니다.


그러므로 교인들을 변화시키려고 한다면

목사 자신의 설교를 먼저 변화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해결되지 못합니다. 오직 듣는 말씀으로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4. 복음적 설교를 개발하시라


설교의 발전사를 상고해 보면, 기독교와 설교와의 관계를 알 수 있습니다.

설교가 포사이스(P.T. Forsyth)는 “기독교의 흥망은 설교에 달려있다”고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므로

그 선포된 말씀으로 교회가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설교가 그 시대에 한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유일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설교자가 하나님의 방법과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의 왕국은 침체한다고 말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성장과 발전의 시기가 5시대가 있었습니다.

1) 그 첫 시기가 사도행전과 바울이 살았던 1세기이고,

2) 두 번째가 크리소스톰과 어거스틴이 활동했던 4세기,

3) 세 번째가 아시시의 성 프랜시스가 활동했던 13세기이며,

4) 네 번째가 루터와 칼빈의 활동하던 16세기,

5) 다섯 번째가 스펄젼과 휫필드의 18~19세기입니다.

이 시대에는 설교가 가장 왕성한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이와 반대로 설교가 침체되어 있던 시대에는 기독교도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암흑시대와 14, 15, 17, 18세기가 거의 그러했습니다.

기독교가 공인되고 가톨릭에 의해 의식화되자 말씀이 쇠퇴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전반적인 침체라는 결과가 뒤따랐습니다.


복음이 있고 교회가 있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말씀과 함께 살고 말씀과 함께 죽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시대의 교회 수준은, 목회자가 선포하는 말씀의 수준 그대로이며,

강단의 설교 수준 이상의 교회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설교자의 설교를 듣는 사람이 많았을 때, 그 설교가 능력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챨스 피니가 외칠 때에는 술집에 파리가 졸고, 교도소의 간수가 졸았다고 합니다.

왜냐면 그런 곳에 사람이 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영국의 요한 웨슬리 목사님이 설교를 할 때는, 영국이 위기에서 구출되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시민혁명이 일어날 위기에서, 웨슬리 목사의 설교가 영국을 구했습니다.

(같은 시기에 프랑스는, 시민혁명이 일어나, 많은 유혈사태가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 수만 명이 모여들고 있어도,

목사의 설교에 교인들이 열광하고 울며 아멘 하는데도

사회에 아무런 변화를 일으키지 못합니다.

술집이나 교도소는 자꾸 늘어가기만 합니다.

한 마디로 교회에 말씀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역사에 아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면 그것은 ‘말’이지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면 역사를 창조하고, 민족혼을 일깨우며 교인들을 변화시켜서

초대교회 스데반 집사와 같이 순교자가 나오는 그러한 말씀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것은 말씀을 선포하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이 바로 케리그마의 개발입니다.


설교는 열심히 외쳤다고 해서 설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전했느냐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설교의 내용은 성서 말씀입니다. 성서의 내용은 또 무엇입니까?

성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있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합니다.

성경대로 설교하는 것은, 성경의 주제인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입니다.


구약을 분류해 보면 율법서, 역사서, 예언서, 시문학서입니다.

여기서 시문학서는 개인 신앙체험이기 때문에 잠시 예외로 하면

율법서, 역사서, 예언서입니다.


율법서의 중심은 무엇입니까? 제사장입니다.

역사서의 중심은 누구입니까? 왕입니다.

예언서의 중심은 누구입니까? 선지자입니다.


율법서는 제사장들이 짐승의 피를 흘려 백성의 죄를 속죄하는 의식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역사서는 왕들이 역사를 다스리는 것을 계시합니다.

예언서에서 선지자는 무엇 합니까? 그 시대에 말씀을 선포합니다.


구약에 있어서 아브라함, 모세 같은 제사장은 무엇을 보여주었습니까?

그들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피흘려 만백성의 죄를 속죄할

대제사장으로 오실 것을 예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위대합니다.


왕 중에서 다윗이 위대한 것은

이스라엘 국토를 확장시켰다거나 나라를 안정시켰다는 데에 있지 않고,

장차 오실 만왕의 왕을 계시한 데에 위대함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선지자 중에서 이사야가 제일 먼저 나옵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고난을 계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사7:14, 사53장).


이처럼 구약에 등장한 위인들은 그들의 지혜와 능력 때문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신약에서의 위대한 제자라고 하면, 베드로, 요한, 바울을 들 수 있는데

그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위대한 목회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자입니다.

강단에서 말할 때에나 웃을 때에나 모두 예수님을 생각나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의 메시지의 알파요 오메가는

예수 그리스도요 설교의 중심이 그리스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필립 부룩스(Phillp Brooks)라는 유명한 설교가는

언제나 한 통의 편지를 서랍 속에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그 내용은‘목사님 저는 주일마다 목사님의 설교를 듣습니다.

그러나 설교를 듣노라면 목사님의 얼굴은 잊어버리고,

예수님의 얼굴과 십자가를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라는 한 청년이 보낸 편지였다고 합니다.

설교자는 예수님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사는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상담도 심방도 대화도 말씀 중심이어야 합니다.

어느 장소, 어느 위치에 있건 목사는 목사입니다. 인간적인 것이 필요 없습니다.

왜냐하면 목사는 표본적으로 세워진 그리스도의 대사이기 때문입니다.


모함을 당해서 인간적으로 시험을 당할 때에라도

목사의 위치를 지키고, 말씀대로만 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밀레네에서 장로님들에게 고별 설교를 할 때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 한 것입니다.

복음을 올바로 선포한 것입니다.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거리낌이 없이 여러분에게 전하여 가르치고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언한 것이라. 행20:21


이런 말씀의 본질을 알고 전할 때에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설교의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때 나타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 예언된 대로 오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제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 케리그마 입니다.

이것을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 베드로의 설교요,

바울의 설교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설교가 제일 쉬우면서도, 제일 어렵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가장 지루한 설교가 되기 십상입니다.

삶이 케리그마 적이 되지 못하고, 지식으로만 전하려 할 때..

전하는 자도, 듣는 자도.. 다 지루해 하고,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설교자는, 그 복음적 설교를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복음적 설교보다, 자기계발적 설교를 잘 하는 사람을, 유능하게 칩니다.

 

그 복음적(케리그마적) 설교의 맥을 이어갔던 사람들이

칼빈, 휘필드, 에드워즈, 웨슬리요, 스펄전, 찰스 피니입니다.


이런 분들의 말씀은, 2천년 교회사에서 교인들을 회개시킬 뿐만 아니라

능력을 나타내서 역사를 변화시켰습니다.


초대교회의 베드로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아 어찌할꼬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행2:44).


오늘날 목사의 설교를 듣고

무엇을 가져다가 서로 나누어 가지자고 하는 교인이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설교에 능력이 없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늘 어떻게 하면 저 부자의 것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줄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주기 위해서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으로는 안 됩니다.

오직 말씀을 선포해서 말씀의 은혜로 감동이 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야 초대교회처럼, 자발적인 유무상통의 역사가 일어나서,

사회적 양극화가 해소될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것이 주인이시니 내 것, 네 것이 없이

다 필요한 자에게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 땅에서 성서적 원리를 말한다면, 성전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들은 성전을 건축한다고 하지만, 성전이란 신학 상으로 이 세상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구약의 예루살렘 성전을 헐라고 하셨습니다. A.D. 70년에 헐렸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모슬렘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지상에서 성전은 없어졌습니다. 성전을 새로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몸으로 성전이 되셨습니다.


구약에서 성막은 하나님이 친히 모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기 위한 것이었지만,

솔로몬이 지은 성전은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백향목궁에 거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받아 성전을 지었습니다.


사람의 왕으로 웅장한 궁궐에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서는 초라한 장막뿐인 것이 송구스러웠던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솔로몬이 아비 다윗의 뜻을 받들어서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 성전으로 인하여 백성들이 타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성전 안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성전이 되어서 역사 속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움직여야 하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는 성전이 없었습니다. 교인들 자체가 성전 이었습니다.

이제 교회당은 크게 건축할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함께 예배드리기 위해서 짓는 것이지

거기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은 아닙니다.


오늘날의 교회를 구약의 솔로몬 성전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지상에 성전은 허물어지고 없습니다. 예수님이 세우신 성전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우리 몸이 성전입니다. 교인들을 성전으로 삼은 것이 말씀의 능력입니다.


제가 잘 아는 유능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분 말씀을 듣는 교인들은 모두 감탄합니다.

동·서양의 위대한 석학을 인용하면서 유창한 언어로 설교하십니다.

그래서 교인들이 설교가 끝나면 ‘야! 참 똑똑하구나’, ‘참 말 잘한다’고 평가합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말씀의 능력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목사는 무식합니다. 증거 할 것은 예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교인들은 박사, 석사 가리지 않고 ‘예수를 위해 죽어야지’,

‘예수님이 나의 전부지’하고 살아갑니다.


사도 바울은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고 했습니다.


설교는 아름다운 말이 아니라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외쳐야 합니다.

성령은 케리그마를 선포할 때에 역사하십니다.

성령은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영입니다.

성령이 오셨을 때부터 예수님을 증거 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말할 때 성령이 역사는 것이지

다른 것을 말할 때에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음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성령의 도우심을 끝없이 구해야 합니다. 이것이 영성개발입니다.

설교를 준비할 때 잠잠히 기도하고 영감을 기다려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없고,

성령의 감동이 없이는 말씀을 받을 수가 없고,

성령의 감동 없이는 말씀을 증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E. M. 바운즈는 영혼을 죽이는 설교를, 기도 없는 설교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강단 밑에 꿇어 엎드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령의 능력을 얻도록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설교에 있어서 또 중요한 한 가지는 커뮤니케이션입니다.

청중에게 설교가 잘 전달되고 있는지 그 반응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 교단에 시골 교회에서 목회하시던 목사님이 계셨습니다.

그 분의 설교시간에 교인들 대부분이 졸았습니다.

한 할머니가 설교를 듣고 나오시다가

“나는 한 마디도 못 알아들으니 교회를 헛 다니는 게 아닌가?”하니


다른 할머니가 “우리 목사님 설교야 잘하시지만, 우리 늙은이가 무식해서 못 알아듣는 거야.

그저 믿고 왔다갔다 하면 천당 갈테니까 다니기나 해.”라고 말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못 알아듣는 설교를 한 것입니다.

할머니나 대학교수나 설교 듣는 것은 같습니다.

설교를 머리에다 하면 못 알아듣는 교인들도 있지만, 마음에다 하면 알아듣습니다.


마음이란 죄지으면 괴롭고, 슬프면 울고 싶은 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한 것입니다.

초대교회 사도들은 마음에 찔리는 설교를 했습니다.

자신의 설교가 마음에 전달되고 있는지, 교인들이 알아듣기 쉬운지를 되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알아듣게 하는 쉬운 설교는.. 사랑이 담긴 설교입니다.

사랑이 있는 사람은 그 사랑 때문에 그 언어가 현실화 됩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 때문에 알아듣는 말로 설교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사랑하는 자녀에게 알아듣는 말을 합니다.

아직도 알아듣지 못하는 설교를 하고 있다면 기술 부족이 아닙니다.

예수님 마음을 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마음을 가지면 그 언어가 달라집니다.



◑5. 말씀으로 민족의 한을 풀어야 한다.


저는 이번 3·1절에「의인의 침묵과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예언자적 설교를 하고

교인 세분을 잃어버렸습니다. 예언자 설교만 하면, 교인이 떨어져 나갑니다.

돈 있는 사람들에게 역사적 의식이 있는 예언자 소리는 거부당합니다.


저는, 설혹 교회에 가난한 교인들만 남더라도, 계속 외쳐갈 것입니다.

민족을 사랑하고 민주화를 위하여 외쳐야 합니다.

의인이 침묵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의 심판 아래 놓여져 있습니다.

교회가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의 멸망이 그러했습니다. 의인 롯이 침묵하고 있었습니다.

마음만 괴로워했지 말하지 않았습니다(벧후2:7~8). 그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이 멸망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많은 사람들이 “호산나, 호산나”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저들을 잠잠케 하소서”하니,

“저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고 대답하셨습니다.


그 돌들이 어떻게 소리 지릅니까? 예루살렘 성전의 돌들의 소리입니다.

저들이 호산나 다윗의 자손 예수를 증거하지 않으면

성전의 돌들이 와르르 무너지며 소리를 낼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면서 우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설교자는 울지 않고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의 영이 우리 앞에서 울게 합니다. 저는 눈물이 강단을 적십니다.



결론  이 민족의 의인은 곧 목사입니다.


목사가 의인이 되어서 의인의 소리를 외쳐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주후 70년에 디도 장군에 의해 멸망당한

예루살렘 같은 역사가 되고 말 것입니다.

목사는 끝없이 의인의 소리를 외쳐 민중의 한을 교회가 수용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의 한은 모세가 말씀으로 바로에게 가서 풀었습니다.

에스겔, 예레미야와 이사야가 그 한을 풀었습니다.

목사가 이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한을 풀어 주지 못하니까

역사가 악순환을 되풀이하게 된 것입니다.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여, 이 민족의 한을 올바로 풀어주는

역사적 사명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나라와 민족이 심히 어려운 가운데 놓여 있습니다.

민족의 한을 푸는 교회가 되고, 말씀의 능력으로 민족 역사를 바로 세워갈 수 있는

목사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기도하십시다.


“주님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민족의 살 길은 하나님 말씀 밖에 없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주의 종들이 말씀을 제쳐놓은 연고로

주님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은 있으나 살아있는 말씀은 없고, 말씀의 모양은 있으나 말씀의 능력이 없어서

역사의 불의와 악이 한 치도 후퇴하지 않고 있사옵니다.

오, 주님이시여. 말씀을 제쳐놓은 한국강단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거룩한 종들이 이성산에 와서 강단의 능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부르짖사오니

베드로에게 주신 말씀의 능력, 스데반에게 주신 말씀의 능력, 바울에게 주신 능력을 주시옵소서.

이 능력을 가지고 돌아가 한국 교회의 새로운 불씨가 되어

새 역사의 강단에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