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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50장, 그 아들의 죽음의 선물

LNCK 2012. 1. 9. 00:18

◈창50장, 그 아들의 죽음의 선물           2020.09.25.녹취, 정리

 

◑도입

본문은 창세기 마지막 장인 50장입니다. 
본문을 읽어보면, 조금 의아해 집니다. 
왜냐면 <창세기> 라는 위대한, 성경의 첫 번째 책을 마무리 하시면서 

하나님은 본문 창50장의 내용을.. 경이로운 탄생의 이야기라든지, 
혹은 기쁨이나 즐거움을 의미하는 결혼의 이야기라든지 
이런 내용들로 끝내시면 참 좋을 텐데, 

왜 하나님은 하필 2번의 장례 이야기(야곱의 장례, 요셉의 장례)를 배치시키심으로써
죽음의 이야기로 창세기의 피날레를 장식하시는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창세기를 '죽음'으로 마무리 지으시는 것일까요?

야곱의 죽음, 
야곱은.. 구원 받은 우리를 예표합니다.
그래서 야곱의 죽음은, 구원받은 자의 죽음으로.. 창세기를 마무리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제 요셉의 죽음,
요셉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요셉의 죽음은.. 구세주의 죽음을 예표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의 죽음, 그리고 사실 147세에 죽은 야곱의 죽음과 
110세 죽은 요셉의 죽음에는, 불과 54년 정도 되는 시간 차가 있습니다. 

왜 그런데 야곱이 죽고 나서 54년 정도가 지난 후에, 죽은 요셉의 죽음을 
지금 딱 함께 배치시켜시면서 
하나님은 <창세기>의 이야기를 
'요셉, 바로 그 아들의 죽음'으로 마무리 지으십니까?

▲창세기는 크게 창조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창조 1~2장
또한 그 창조의 최고봉인 인간의 타락에 대한 이야기,  *타락 3~11장
그리고 또 하나는 구속입니다. *구원 12~50장

창조, 타락, 구속이.. 창세기의 3대 중요 주제죠.
그래서 '구속'에 관한 이야기인 창세기를 마무리 지으시면서 
하나님은 그 아들의 죽음을 마지막에 딱 배치시키시면서 

'구속이란 결국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
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요셉, 그 아들을 죽음을 마지막에 배치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창조하셨던 인간이 타락하고 부패하여 
야곱과 같이, 유다와 같이.. 이런 삶을 살아가고 있지만 
결국 그들은 구원을 받게 되는데 
어떻게 구원받게 된다는 것입니까?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이 위대한 마무리를
그 아들(요셉)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그 아들의 죽음과 함께
하나님의 마음속에 있던 것이 몇 가지 확증되어짐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딱 마무리 짓고 싶어 하시는 메시지들이 
몇 가지 함께 등장하고 있는데, 

▲1. 첫 번째는 그 아들의 죽음과 함께 <용서>의 확증이 드러나 있습니다.

15절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형들이 지금 두려워하고 있어요. 
혹시 '그 아들'이 우리를 미워해서, 아버지가 죽은 후에, 우리에게 악으로 갚지나 않을까?'  

17절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무슨 말입니까? 지금 그 아들들은 요셉에게 와서 뭐라고 말합니까? 
'아버지가 유언했는데, 너는 형제들에게 그들의 악행에 대하여, 허물과 죄를 대하여 
아무 것도 말하지 말아라. 용서해 줘라'라고 아버지가 유언했다는 것입니다.


17a절에 보니까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인간 실존에 대하여 
설명할 수 있는 모든 게 다 나와요. 즉 허물, 죄, 악..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존재론적으로 허물과 죄로 죽은 자들입니다. 
허물 뿐이요, 죄밖에 없는 존재이지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그런 악행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그 형들은, 그 아들에게 행했던 
자기들의 존재론적 허물과 죄 때문에 행했던 그 악행 때문에 

'혹시 그 아들이 우리를 미워해서 죽이지는 않을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죠. 
두려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여기에 대하여, 이미 그 아들은 선포했었어요. 
45:5 '요셉이 형들에게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소서 그들이 가까이 가니 이르되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이미 그 아들은, 그 형제들을 위하여 용서를 선포했단 말이죠. 

19절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a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들의 악과 허물과 선으로 바꾸셨고,

자기 가족과 세상 모든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서, 요셉을 먼저 보내신 것이니까,

그 형들의 죄와 허물 이전에, 더 큰 그림으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역사였다...

하면서 형들의 죄의 용서를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요셉은 이미 45:5절에서 용서해 주었지만, 
50:19~20절에서 그 용서를 확증해주고 있습니다. 컨펌을 해 준 거죠.

 

그렇게 해줄 필요가 굳이 없었지만, 형들이 워낙 두려워하니까

그 용서를 확증 confirm 해 준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당시에 요셉은 아직 살아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17세에 애굽에 노예로 팔려와서,

보디발의 가정에서 종노릇을 한 것이나,

시위대 감옥에서 지낸 일들은.. '요셉의 죽음'이나 다름 없죠.

요셉은 애굽에서 총리가 되기 전까지 13년 동안.. 죽음과 같은 생활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자기 죽음에 대한 허물을, 형들에게 돌리지 않고,

굳이 돌리자면, 하나님 아버지께 돌리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형들을 용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 아들(하나님의 아들 예수님 예표)은,

자기 죽음의 허물을, 오늘날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의 죄와 허물을.. 우리에게 돌리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용서를 믿는 성도들은,

본문의 형들처럼, 자신의 죄로 인해 걱정, 염려, 불안에 떨 필요 없습니다.

 

진정 회개했다면, 성령의 인도와 감동으로 회개한 성도들은,

그 아들의 <용서>를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재차 확인을 그 아들께 요구해도, 그 아들은 컨펌해 주실 것입니다.

 

본문 19~20절은, 그 아들의 <용서의 확증>에 대한 사실을,

오늘날 우리에게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는 거죠. 

 

▲2.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그 아들이 죽음과 함께 
하나님께서 확증지어 주고 계시는 두 번째는 바로 <사랑의 확증>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용서하셨다.. 라는 확증을 지어 주셨어요. 
근데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셨다는 확증을 넘어서
그들을 향한 사랑이 보여지고 있습니다. 

20절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가뭄과 기근 가운데서 여러분에게 생명을 주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이 당신들을 사랑하셔서 
그 아들 요셉을 세상으로 보내셨고, 

하나님이 고난 속으로 보내셨고, 감옥속으로 보내셨다.. 라고 말하면서, 

용서를 넘어선 사랑을 지금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형들이 예표하는 죄인인 우리들은, 

오늘날, 그 아들의 '사랑'을 확실히 믿어야 하겠습니다. 본문에 그게 확증 confirm 되어 있잖아요.

불안해 떠는 형들에게, 그 아들이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 라는 그 사랑은 어디에서 보여지는 것입니까? 
요3:16절을 보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깨닫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질 때문입니까? 내가 받았던 복 때문입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지위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은 딱 한 가지로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그 독생자를 보내신 것에서 드러나죠.

하나님이 그 아들을, 하늘 보좌에서부터 땅으로 보내신 것에서부터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저와 여러분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는 것이 
거기에서 보여지는 거죠. 

하나님이 또한 그 아들을 이 땅으로만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이 땅에 가장 낮은 구유로 보내셨습니다. 
결국은 무덤으로까지 보내셨단 말입니다. (그 아들이 애굽에 보내진 것처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을, 여러분들은 언제 확인하십니까? 
내가 기도의 응답을 받으면? 
내가 선물을 뭘 좀 가지면?  No!

아니요, 하나님의 사랑은, 한 가지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우리에게 보내신 것,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선포되어지는 것만 아니라 확증지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것이, 그 아들을 보내신 것에도 드러나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확증되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 보내어진 아들이, 그 세상 고난을 지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확증됩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오직 그 아들의 죽음만 언급되고 있어요. 
다른 형들의 죽음은 나오지 않아요.


그 아들이 죽음과 함께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신 것입니까? 
그 아들을 세상으로, 고난 속으로 보내시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고

(형들을 사랑하여서 요셉을 앞서 애굽에 보내셨죠)

그 아들의 죽음을 50장에 언급하심으로써, 그렇게 창세기를 마무리 지으시면서, 
하나님이 우리의 대한 사랑을 확증해 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애굽에 보내진 것, 애굽에서 죽은 것.. 이 모든 것이

형들과 형들의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었다는 말입니다.

요셉이 그 말을 한 것이죠.  위 20~21절에!

형들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사건과 대화를 통해서, 그게 다시 한 번 확증(컨펌)된 것입니다.

그런 확증으로.. 창세기가 마무리 지어지고 있다는 거죠. 

 

▲3. 그 아들의 죽음과 함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확증시켜주시는 세 번째는
바로 <구원의 확증>입니다.

24절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는다.' 
그런데 자신의 죽음 뒤에 그는 뭐라고 말합니까? 
'나는 죽지만 하나님은 나의 죽음 이후에 당신들은 돌보실 것이다.' 

그런데 그 돌보심이 어떻게 해요? 
이 땅에서 인도해내서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는.. 결국 무엇입니까? 

출애굽하여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세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로 이르게 하실 것이라는.. 
구원에 대하여 선포하고 있습니다. 

'나는 죽지만 나의 죽음 이후에 하나님이 너희(형)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라고 선포하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여기서만 끝내지 않고 25절을 읽어보시면 
아주 독특한 내용이 하나 나옵니다.

25절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실 것이라'는 그 맹세에 대하여 
확증지어 주기 위해서 그가 뭐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당신들은 분명히 세상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약속하신 땅에 이렇게 될 것이다'
근데 그때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라' 이렇게 말합니다.

야곱의 죽음, 요셉의 죽음이 거의 비슷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어요. 
장례 때 향을 쓰고 해서, 아주 멋지고 존귀한 죽음을 맞이해요. 

그런데 야곱의 죽음과 요셉의 죽음에는 단 하나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야곱은 죽음과 동시에 약속의 땅으로 바로 가게 됩니다. 
야곱은 죽음과 함께 가나안 땅에 바로 입성을 해요. 

근데 왜 요셉은, 자기가 죽으면 가나안 땅에 묻어달라고 바라지 않아요. 
죽음 이후에도 애굽에 그들과 함께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해요?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이 돌보실 거다. 그래서 너희를 구원해 내실 것이다. 
그때에 나의 해골도 메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서, 나를 가나안에 묻어달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만약에 하나님이 너희들을 건져내서 구원해서 가나안 땅으로 데리고 가지 않는다면 
나도 애굽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해 내어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해 가신다면, 
그제야 나도 비로소 하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약속의 땅에 묻히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 남아있는 자손들과 모든 백성들에게 있어서 
'우리를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다' 라는 것을 
요셉은 뭘로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까? 

'너희들의 구원과, 나의 해골의 약속의 땅 입성은 연결되어 있다' 라는 것을 말하고 있죠.

그러니 요셉도 '너희가 구원 받지 아니하면, 나도 가나안 땅에 그 뼈를 묻지 못 한다' 
라는 것을 통해서 
'내가 반드시 너희들을 인도하여 구원할 것이다' 라는 것이 확증되어 지고 있죠.

'너희들이 구원받아 이 땅을 떠날 때까지, 내 뼈도 여기에 남아 너희와 같이 있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요셉의 유언은 지켜져서, 여호수아 때, 요셉의 유해(뼈)를 가지고 나와

가나안에서 장사 합니다.

수24:32 '또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 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으니' 


말씀을 정리하면, 
그러면 지금 그 아들의 죽음과 함께, 죽음 전후로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여 주고 계십니까? 

 

그 아들의 죽음과 함께 용서에 대한 확증,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증,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증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원이란 결국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구속의 이야기는 결국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되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들의 죽음과 함께 언급되는 용서와, 사랑과, 구원이 있는데 

우리가 한 가지 또 반드시 명확하게 짚고 넘어가야 될 것은 
구원은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 주어지는 것이지만 
그 죽음과 함께 주어지고 있는 하나님의 용서와,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확증을 
믿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 아들의 죽음이 지금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 아들이 죽음과 함께 주어지는 하나님의 메시지,
이 죽음을 통해서 용서와 사람과 구원이 확정되어 지고 있어요. 

이제 우리에게 무엇이 요구되는 것입니까? 
그 하나님 믿는 믿음이 우리에게 요구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창세기를 마무리 하시면서, 그 위대한 창조 이야기, 
그리고 그 뼈아픈 타락 이야기, 
그러나 그것을 뒤집어 엎으시는 하나님의 구속의 이야기는 
어떻게 마무리 되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으로 말미암아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에 의하여 드러나고 있는 그분의 용서와 사랑과 구원에 대한
메세지를 믿는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생각해야 될까요?
모든 것을 다 잊어버려도, 창세기가 길잖아요. 

우리가 창세기 이야기를 일일이 다 기억 못 해도
이 마지막 메시지는 마음에 새겨야 하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구원받은 것입니까?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보내신 
그 아들을 죽음 때문이라는.. 이 창세기의 마지막 메시지를 우리의 마음 깊숙이 
새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야곱의 그 존귀한 죽음, 야곱이 그 죽음을 통하여 구원을 완성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그 강을 건너 들어가는 그 모습, 
그리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 죽음.. 
그 죽음은 어떻게 되어진 것입니까? 

바로 요셉, '그 아들'의 죽음을 통해서 주어졌다.. 라는 것을 마음에 새기면서 
우리의 구원이 그 아들의 죽음에 달려 있었다는 거죠. 

그리고 그 사실을 믿는 믿음의 달려 있다는 것을 기억하며 
이 메시지를 우리의 평생에 새기고, 잊지 않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버지를 믿는 자녀들의 삶

실직을 당한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실직 후 몇 달이 지나자

가족을 위해서 아무데나 들어가서 일을 해야 되겠다고 조바심을 내다가

어느 회사에 들어갔는데, 마침 그 회사에서 판매원을 시켰던 것 같습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길거리를 헤매면서 무언가를 파는 세일즈맨 말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 딸, 4학년 아들이 수심이 서린 눈으로 아빠를 바라봅니다.

아빠는 집에 들어와서 절대 티를 내지 않고 명랑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눈 여겨 보면, 매일 아빠 구두가 엉망인 채 집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걸었는지 구두에 먼지가 가득 앉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달도 안 되어 구두 앞창이 덜렁덜렁 떨어졌습니다.

 

이것을 본 자녀들이 매일같이 아빠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를 물어도,

아빠는 설명을 안 합니다. "나 일이 많아 열심히 뛰어서 이래."

이 정도로 대꾸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아빠는 구두 살 돈도 없어서 운동화를 샀습니다.

 

그때 부터 이 큰 딸의 소원이 '어떻게 하면 아버지 구두 한 켤레 사드릴까?

그래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까?'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큰 딸이 밤을 새워 가며 고민한 결과,

학교 갈 때 버스를 타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먼 길인데도 부모 몰래 걸어서 학교를 다니면서

몇 백 원씩 저금통에 계속 넣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힘든 것을 견디면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자기 동생도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야, 너 왜 버스 타지 않고 걸어가니?"

동생이 고개를 푹 숙이고

"나, 아빠 구두 사는데 보태고 싶어서, 누나처럼 요즘 걸어 다녀!"

 

"그래. 너 얼마 모았어?"

"나 이제 2천원 모았어. 누나는?"

"나는 이제 5천원 됐어. 우리 조금만 더 모으면 아빠 구도 사줄 수 있을거야?"

 

실제로 자기를 낳고 키워주며 사랑해주는 아빠를 기쁘게 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버스를 타지 않고 힘겹게 학교에 걸어 다니며

푼돈을 모으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오늘도 예수 안에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보실 때마다 큰 꿈을 가지고 바라보시며 기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만약 그와 같은 거룩한 목적이 우리 가슴 속에 있고,

그 거룩한 목적이 우리의 쉬지 않는 기도가 있다면

우리는 진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