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가 오시기 까지 창49:10 *김성수 목사 창103강 후반부
(창49: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이건 야곱이 유다에게 준 축복의 유언입니다. 여기에서 ‘실로’는 지명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실로가 오시기까지’라고 그 실로를 마치 인격체처럼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서로 가면 실로가 어디인지 잘 나와 있습니다.
(렘7:12) 너희는 내가 처음으로 내 이름을 둔 처소 실로에 가서 *실로 : 성소가 있었던 자리
내 백성 이스라엘의 악을 인하여 내가 어떻게 행한 것을 보라
실로는 보시다시피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을 처음 두고 지으신
하나님의 장막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첫 장막을 떠나십니다.
(시78:56~60) 그럴지라도 저희가 지존하신 하나님을 시험하며 반항하여 그 증거를 지키지 아니하며
저희 열조 같이 배반하고 궤사를 행하여 속이는 활 같이 빗가서
자기 산당으로 그 노를 격동하며 저희 조각한 우상으로 그를 진노케 하였으매
하나님이 들으시고 분 내어 이스라엘을 크게 미워하사
실로의 성막 곧 인간에 세우신 장막을 떠나시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신 처음 장막에서 떠나시는데
그 이유가 당신 백성들의 패역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신 아담이라는
존재가 타락을 하자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셨지요? 그 그림과 비교해서 이해를 해 보세요.
그런데 이 시편 78편을 잘 읽어 보시면 거기에 요셉과 유다의 이름이 거명이 됩니다.
(시78:67~72) 또 요셉의 장막을 싫어 버리시며 에브라임 지파를 택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유다 지파와 그 사랑하시는 시온 산을 택하시고
그 성소를 산의 높음 같이, 영원히 두신 땅 같이 지으셨으며
또 그 종 다윗을 택하시되 양의 우리에서 취하시며
젖양을 지키는 중에서 저희를 이끄사 그 백성인 야곱, 그 기업인 이스라엘을 기르게 하셨더니
이에 저가 그 마음의 성실함으로 기르고 그 손의 공교함으로 지도하였도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싫어 버리시고, 유다 지파를 선택하십니다.
바로 이 이야기가 유다의 축복 사건에 미리 예언 되고 있는 것입니다.
▲잘 들어보세요.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바에 의하면
야곱의 장자 르우벤은 자기의 서모인 빌하를 강간하는 바람에 장자권을 잃었습니다.
차자 시므온과 셋째 레위는 자기 분을 다스리지 못하고
세겜의 족장과 그 땅 남자들을 모조리 도륙을 하고 약탈을 한 관계로
장자 권을 얻지 못했습니다.
그 야곱의 첫 세 아들은 모두 타락한 인간의 특성을 보여주는 모형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라 했지요?
그럼 장자의 명분은 누구에게로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까?
당연히 넷째 유다에게 이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대상에 보면 장자의 명분이 요셉에게로 갔다고 나옵니다. (대상5:1-2)
그런데 진정한 하늘의 장자, 예수 그리스도는 유다의 족보에서 나옵니다.
장자의 대가 유다로부터 이어진다는 것입니다. 누가 진짜 장자입니까? 요셉입니까? 유다입니까?
둘 다 아닙니다.
성경에서 장자라 함은, 진짜 장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모형으로 담고 있는 이들을
장자라 합니다.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요셉은 무죄한 자로서 모함을 받고
수난을 당함으로 말미암아 죽어야 할 부모 형제들을 살려내는 예수의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그 예수의 모형인 요셉 앞에,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징인 나머지 형제들과
부모들이 엎드리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말미암아
천지만물이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리는 그 현실을 미리 모형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그런데 시편 78편에 보면 그 요셉의 지파를 하나님이 버리셨다고 하지요?
그것은 요셉이 아무리 예수님의 모형의 역할을 훌륭하게 해 내었다 할지라도
그 역시 진짜 메시아는 아님을 상기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 지파가 하나님에 의해 유기가 되는 것입니다.
그럼 유다는 왜 장자의 대를 잇게 된 것인가?
유다는 야곱의 넷째 아들로서 순서상으로 장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의 삶 속에서도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삶이 예표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창43:8~9)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내가 그의 몸을 담보하오리니 아버지께서 내 손에 그를 물으소서 내가 만일 그를
아버지께 데려다가 아버지 앞에 두지 아니하면 내가 영원히 죄를 지리이다
유다가 베냐민을 애굽으로 보내지 않으려는 아버지 야곱에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베냐민을 살려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있는 장면입니다.
실제로 유다는 애굽에서 동생이 궁지에 몰리자 당당하게
애굽 총리 앞에서 자신이 종으로 남을 테니 동생을 보내달라고 간청합니다.(44:32~34)
어떻게 유다가 이런 희생과 헌신의 사람이 되었을까요?
유다는 원래 이기적이며 자아 중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아들들의 죽음의 책임을 며느리에게 돌리며 자기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챙겨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 때 며느리 다말이 약속의 후손의 탄생을 위해 자신이 창녀가 되는 희생과 헌신의 사람으로
등장을 하는 것입니다. 며느리 다말이 창녀가 되어 망해버려야 하는 유다의 집안에
약속의 후손이 태어나 그 집안이 축복의 가정이 되는 것입니다.
거기에서 유다는 십자가의 원리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의 희생으로 다수가 축복을 받는 그 하늘의 축복의 원리를 유다가 터득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희생과 헌신으로 많은 이들이 살아나게 되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를
배운 유다가
아버지와 애굽 총리 앞에서 바로 그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로
자신의 몸을 내어 놓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원리로 메시아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의 후손으로 메시아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도 유다도 모두 실로에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인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 세상의 그 어떤 훌륭한 사람도, 그 어떤 탁월한 인재도 메시아 일 수 없고,
그 어떤 방법으로도 메시아의 사역을 대신 할 수 없음을
메시아의 모형인 그 두 사람을 통해 보여주고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버린 실로에 진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조금 전에 함께 살펴본 것처럼 실로는 처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이 두어진 장막입니다.
쉬운 말로 구약의 옛 성전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옛 성전은 다른 말로 율법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요셉과 유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지만
실체로서의 예수는 아닌 구약의 성전과 율법과 제사의 모형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그 요셉과 유다가 희생과 헌신과 낮아짐의 모형으로 등장은 했지만
그들의 그것이 사람을 축복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둘 다 장자의 역할은 했지만 장자일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들을 밟고 바로 그러한 모습으로 진짜 장자이신 예수가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구약의 옛 성전을 가리키면서, 그 성전을 헐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 모형으로서의 실로는 축복의 실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율법의 실로에서는 이미 하나님이 떠나버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옛 성전이 상징하던 진짜 참 성전이신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주님은 그 옛 성전이 되셔서, 즉 율법이 되셔서 죽으시고
삼 일만에 부활을 하심으로 당신의 약속을 지켜 내셨습니다.
(요2:19-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이 성전은 사십 륙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뇨 하더라
그러나 예수는 성전 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지금 이 구절에 나오는 성전을 오늘 본문의 ‘실로’로 바꾸어서 읽어보세요. *실로는 성막이죠.
예수는 하나님의 이름이 처음 두어졌던 실로를 허무시러 오신 진짜 실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로’라는 지명이 마치 인격체인 것처럼 ‘실로가 오실 때까지’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세기 49장의 유다에게 주어진 축복에
요2:19~20절의 내용이 이미 계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지명인 실로가 의인화 되어 기록이 되어 있는 지 아시겠지요?
구약의 옛 성전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상징하는 제사가
수천 년간 드려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제사가 인간의 구원에 유효하지 못했던 것처럼
요셉과 유다의 희생으로 형제들과 집 안 사람 들이 살아나고 축복을 받는 일을
경험하기는 했지만 그들이 진정한 왕일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를 향한 유언에서 진짜 왕이 오게 될 것임이 고지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이 실로가 되셔서, 죽으시고 장사된바 되셨으며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심으로 우리의 사망이 다 날아가 버린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나인성 과부의 아들이나 야이로의 딸이나
죽은 나사로의 애곡의 현장에서 그들을 살려내시는 표적을 보여주셨는지 아시겠지요?
우리 성도의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는 그 사망의 증상들은 다 뭡니까?
교육용 교보재일 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자들이 영원히 처하게 될
사망과 멸망의 저주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것이었는지를
몸으로 조금 체험하라고 그러한 사망의 증상들을 경험하게 하시는 것일 뿐입니다.
그 사망의 증상들이 여러분을 멸망시킬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 사망을 종으로 부리며 당당히 일어나십시오.
그건 여러분 것이 아닙니다.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입니다.
아니 여러분의 삶 속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들이
지금 여러분에게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고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늘의 왕들입니다. 그까짓 사망과 사망의 증상들에게 짓눌리지 마세요.
반용부봉, 우리는 그렇게 면목 없이 예수님의 등에 업혀
하나님 나라에 입성을 하게 된 수지 맞은 성도들입니다.
그 애곡과 애통의 사망을 잔치로 바꾸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굳게 믿고
잠시 여러분에게 닥쳐온 고난과 고통의 시간들 잘 이겨내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