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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8장, 야곱 생애 최고의 순간

LNCK 2012. 5. 28. 09:34

https://blog.naver.com/karamos/220310356378

 

◈창48장, 야곱 생애 최고의 순간           창48:8~16                2014.07.06.

 

서론

 

야곱의 생애 가운데 영적으로 가장 최고의 순간은 언제였을까요?

만일 여러분에게 야곱의 생애 가운데 최고의 사건을 하나 꼽으라고 한다면

어떤 사건을 꼽으시겠습니까?

 

창세기 28장의 아버지와 형을 피해 달아나며 꿈속에 하늘 문이 열리고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본 벧엘의 사건을 꼽으시겠습니까?

 

아니면 32장의 얍복강가에서 천사와 씨름한 사건을 꼽으시겠습니까?

아니면 33장의 형 에서와 화해하고 목숨을 부지한 사건을 꼽으시겠습니까?

 

그것도 아니면 130세에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되어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가 보낸 수레를 타고 애굽으로 내려가던 때를 꼽으시겠습니까?

 

히11장은 믿음의 장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온 믿음의 사람들의 믿음의 사건들을

한 장에 정리한 기록인데, 히브리서 기자는 야곱 인생의 최고 순간으로

창48장의 야곱이 바로를 축복한 사건을 꼽았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죽기 직전의 사건이 야곱 생애 최고의 순간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야곱 최후의 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 생각해 보겠습니다.

 

◑1. 야곱은 비로소 지난 일들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었다

 

야곱은 원래 성격이 부정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의 입에는 항상 불평이 가득합니다.

 

창42:36절에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언어 속에는 긍정적인 요소가 많지 않습니다.

창47:9절에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기 인생을 험악한 세월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야곱이 병들어 죽을 때가 되니까 드디어 감사의 말을 하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자신의 인생 147년을 회상해 보니 불평할 일보다 감사할 일이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 그는 먼저 복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합니다.

48:3~4절에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야곱은 도망자 신세가 되어 달아나고 있던 자신을 가나안 땅의 루스 즉, 벧엘에서

만나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 벧엘에서 야곱에게 세 가지 약속을 주셨습니다.

 

첫째, 네 후손이 번창하리라.

둘째,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되리라.

셋째,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하리라.

야곱은 그 때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좋은 부모님과 조부모님을 주신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48:15절에 “그가 요셉을 위하여 축복하여 가로되 내 조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의 섬기던 하나님”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아버지도 섬겼고, 할아버지도 섬기셨던 하나님을 내가 섬겨왔고,

그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좋은 부모를 만났고, 좋은 할아버지를 만났기 때문에

비록 재산이나 땅을 물려받은 것은 없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을 물려주신 것에 대해서 깊은 감사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자손들도 경건한 부모를 만나서 하나님을 섬기는 법을 배웠노라고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3) 그리고 15b절에는 “나의 남으로부터 지금까지 나를 기르신 하나님”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의 목자가 되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이 나의 목자가 되어 주셨다는 고백입니다.

야곱은 직업이 목자였기 때문에 목자가 하는 일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목자는 양을 보호해 주고 양의 길을 인도해 주고 양에게 꼴을 먹이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하나님이 자신의 목자가 되어 주셔서 목자가 양을 보살피는 것처럼

일평생 자신을 돌보아 주셨다는 사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6a절에 “나를 모든 환난에서 건지신 사자께서 이 아이에게 복을 주시오며”

야곱은 그 하나님을 ‘모든 환란에서 건지신 사자’(Angel of the Lord)라고 말하면서

성육신하기 이전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건진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고엘’입니다.

이것은 NIV영어성경에 ‘Redemption’이라는 단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자신이 대가를 지불하고 대신 구해주는 것을 뜻합니다.

 

악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 그리스도에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단지 예수라는 이름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사자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자기를 모든 환란과 악에서 구원해 주신 사자에게 감사하고 있습니다.

 

야곱은 나이 147세가 되어서, 지난 자기 일생을 회상하면서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감사하고,

자신의 평생을 인도해 주신 성령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순간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시103:2절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오늘 야곱이 감사하듯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야곱은 창48장 현재로 볼 때, 생애 가운데 가장 성화된(Sanctified) 사람이었다

 

창27장은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복을 주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창48장은 요셉의 두 아들을 축복하는 야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창27장의 이삭이나 창세기 48장의 야곱이나

눈이 어두워 앞이 보이지 않는 비슷한 상황입니다.

 

“이삭이 나이 많아 눈이 어두워 잘 보지 못하더니 맏아들 에서를 불러 가로되

내 아들아 하매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창 27:1).

 

“이스라엘의 눈이 나이로 인하여 어두워서 보지 못하더라” (창 48:10).

복을 주는 사람들의 눈이 모두 어둡습니다.

 

또 두 장면에는 모두 입맞춤이 있습니다.

27:26절에 “그 아비 이삭이 그에게 이르되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내게 입맞추라”

48:10절에도 “요셉이 두 아들을 이끌어 아비 앞으로 나아가니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입맞추고 그들을 안고”

 

그리고 차자가 장자를 앞질러 복을 받았습니다.

야곱이 둘째였고, 첫째 아들은 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이삭은 둘째아들이었던 야곱에게 복을 주었습니다.

야곱도 창세기 48장에서 손자들에게 복을 주는데,

요셉의 장자인 므낫세를 제쳐놓고 차자인 에브라임에게 복을 주었습니다.

 

이처럼 창세기 27장과 48장의 장면은 모든 점에서 비슷합니다.

한 시대를 지나 사건이 그대로 반복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 한 가지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창27장의 야곱은 사기꾼이었습니다.

형을 속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팔아가면서 거짓말을 했습니다.

신성모독에 가까운 죄를 지었습니다. 그래서 27장의 야곱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창48장의 야곱은 조금도 거짓이 없습니다. 야곱은 매우 진실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27장의 사기꾼을 뜻하는 이름 야곱이

48장에는 얍복강가에서 받은 이름처럼 ‘하나님의 황태자’를 뜻하는 ‘이스라엘’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147년 동안 야곱을 부지런히 연단하셔서

죽기 직전에는 최고로 거룩한 사람을 만들어 놓으신 것입니다.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본문 창48:1~7절에는 야곱의 인생에 잊을 수 없는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일 후에 혹이 요셉에게 고하기를 네 부친이 병들었다 하므로

그가 곧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과 함께 이르니 혹이 야곱에게 고하되

네 아들 요셉이 네게 왔다 하매 이스라엘이 힘을 내어 침상에 앉아 요셉에게 이르되

이전에 가나안 땅 루스에서 전능한 하나님이 내게 나타나 복을 허락하여 내게 이르시되

내가 너로 생육하게 하며 번성하게 하여 네게서 많은 백성이 나게 하고

내가 이 땅을 네 후손에게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이들 후의 네 소생이 네 것이 될 것이며

그 산업은 그 형의 명의하에서 함께 하리라

내게 관하여는 내가 이전에 내가 밧단에서 올 때에 라헬이 나를 따르는 노중

가나안 땅에서 죽었는데 그곳은 에브랏까지 길이 아직도 먼 곳이라

내가 거기서 그를 에브랏 길에 장사 하였느니라(에브랏은 곧 베들레헴이라)” (창 48:1~7).

 

위 구절에 의하면, 야곱 인생에 잊을 수 없는 기억은 두 가지 사건이었는데,

-벧엘에서 하나님께 복을 받은 사건이었고,

-밧단아람에서 20년을 지내다가 가나안 땅 헤브론으로 돌아오는 길에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잃은 것이었습니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야곱은 벧엘에서 세 가지 약속을 받았습니다.

네 후손이 번창할 것이라는 것과 가나안 땅을 차지하게 될 것,

그리고 네가 어디를 가든지 너와 함께 하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그 때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감사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잊지 못한 사건은 막내 베냐민을 낳다가 죽은 아내 라헬에 대한 기억이었습니다.

야곱은 죽기 직전에 라헬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의 아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라헬의 죽음을 아직까지도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내가 세 명이나 있는데도 한 명 잃은 것을 지금도 슬퍼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기 직전인데도 벧엘에서 하나님이 만나주신 것은 복인 반면

베들레헴에서 자기 아내 라헬이 죽은 것은, 하나님의 징계였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 인생에 하나님의 복과 징계가 교차되고 섞이면서

비로소 죄에서 벗어나 성화된 사람이 될 수 있었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기뻐하고 감사하고 좋아할 일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때로는 슬프고 눈물이 날 일도 많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가지를 모두 인생에 섞으셔서 우리를 성화시켜 주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은 이제 시력도 거의 잃고 육신도 쇠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그의 인생 가운데 가장 깨끗하고 맑고, 강한 상태가 되었던 것입니다.

 

▲히11:21절에 “믿음으로 야곱은 죽을 때에 요셉의 각 아들에게 축복하고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경배하였으며”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은 그 지팡이 머리에 의지하여 하나님을 경배하였습니다.

침상에서 누워 있다가 일어나서 침상에 걸터앉아 지팡이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경배하였을 뿐만 아니라 후손들에게 축복하는 거룩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경배한다는 것은 참으로 위대한 행위입니다. 이 얼마나 위대한 순간입니까?

하나님께 감사하고, 거룩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사람이 위대한 사람입니다.

 

◑3. 야곱은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영광스러운 미래를 바라보는 믿음이 있었다

 

야곱이 이제 병들어 죽을 때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요셉은 두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데리고 갑니다.

므낫세는 장자고, 에브라임은 차자입니다.

 

그러면 요셉은 왜 죽기 전에 손자들을 할아버지에게 데리고 왔을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예절상의 목적이고,

둘째는 보다 더 중요한 이유였는데,

그것은 아들들에게 ‘족장의 축복’(Patriarchal blessing)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주었던 복, 그리고 이삭이 야곱에게 주었던 복이 바로 족장의 축복입니다.

장자에게 베푸는 복이라고 해서 ‘장자의 축복’이라고도 합니다.

 

‘족장의 축복’은 복을 비는 대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면에서

매우 큰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상적으로는 야곱의 맏아들인 르우벤이 족장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는 자격을 상실하고 맙니다.

창35:22절에 “이스라엘이 그 땅에 유할 때에 르우벤이 가서 그 서모 빌하와 통간하매

이스라엘이 이를 들었더라 야곱의 아들은 열둘이라”

 

그는 서모 빌하와 통간함으로 아버지의 침상을 더럽힌 아주 못된 아들이었습니다.

그러니 그는 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장자였지만 장자의 명분을 차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장자의 명분은 누구에게로 넘어갔습니까?

역대상5:1~2절에 “르우벤은 장자라도 그 아비의 침상을 더럽게 하였으므로

장자의 명분이 이스라엘의 아들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으나

족보에는 장자의 명분대로 기록할 것이 아니니라

유다는 형제보다 뛰어나고 주권자가 유다로 말미암아 났을지라도

장자의 명분은 요셉에게 있으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자의 명분이 요셉의 자손에게로 돌아갔는데,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 중에서도 차자인 에브라임에게로 돌아갔습니다.

렘31:9절에 “나는 이스라엘의 아비요 에브라임은 나의 장자니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브라임이 장자의 복을 받게 되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의 양자로 삼았습니다.

요셉의 두 아들을 자기의 아들로 삼아서 복을 주는 것입니다.

48:5절에 “내가 애굽으로 와서 네게 이르기 전에 애굽에서 네게 낳은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는 내 것이라 르우벤과 시므온처럼 내 것이 될 것이요”

 

르우벤과 시므온은 야곱의 아들들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에브라임과 므낫세도 내 것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8절에 얼핏 이해가 되지 않는 의아한 내용의 기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요셉의 아들들을 보고 가로되 이들은 누구냐?” (창 48:8).

 

이 구절은 야곱이 17년 동안 손자들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은 야곱이 지금 요셉의 두 아들을 양자로 삼기 위해

법적인 절차를 밟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셉은 야곱의 질문에 “내게 주신 두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래서 야곱이 너의 두 아들은 이제 나의 아들이 될 것이라며 양자로 삼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재판을 받아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판사는 재판을 하기 위해 죄수의 모든 정보를 알고 있음에도 그에게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주소와 직업은 무엇이며, 나이는 몇 살이냐?”고 묻습니다.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닙니다. 판사는 그에 대한 신분과 정보를 모두 문서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판사는 반드시 이런 절차를 밟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심문을 가리켜 법적인 용어로 ‘인정심문’이라고 합니다.

판사가 이 절차를 밟지 않고는 재판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요셉의 두 아들을 두고 “이들이 누구냐?”고 묻고 대답을 들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죽음을 앞두고 “내가 죽기 직전에 무엇을 먹고 죽을 것인가?”,

“내 재산을 누구에게 남겨줄 것인가?”를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후손들의 먼 장래를 내다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이후에 후손들이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민족을 이루고

그들을 통해 메시야가 올 것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요셉의 두 아들은 애굽에서 태어나서 애굽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인 어머니 아스낫 밑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손자들이 애굽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임을 일깨워주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살아갈 땅은 애굽 땅이 아니라 가나안 땅임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살아가도록 가르치는 것입니다.

야곱은 죽기 직전, 손자들에게 영적인 교육을 강하게 하였습니다.

 

야곱은 눈이 흐려 잘 보이지 않지만, 손을 어긋 맞겨서 차자 에브라임에게 오른손을 얹었습니다.

오른손은 능력의 손이고 축복의 손입니다. 그리고 장남 므낫세에게는 왼손을 얹었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그것을 보고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17절에 “요셉이 그 아비가 우수를 에브라임의 머리에 얹은 것을 보고 기뻐 아니하여

아비의 손을 들어 에브라임의 머리에서 므낫세의 머리로 옮기고자 하여”

 

18절에 요셉은 “그 아비에게 이르되 아버지여 그리 마옵소서 이는 장자니

우수를 그 머리에 얹으소서”

아버지께 그렇게 하지 않기를 청했고, 어긋맞긴 손을 바르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아비가 허락지 아니하여 가로되 나도 안다

내 아들아 나도 안다 그도 한 족속이 되며 그도 크게 되려니와

그 아우가 그보다 큰 자가 되고 그 자손이 여러 민족을 이루리라” (창 48:19).

 

야곱이 지금 육의 눈은 보이지 않아도 영안이 열렸습니다.

그래서 “나도 안다 나도 안다 내 아들아”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했습니다. 내가 지금 차자 에브라임에게 오른 손 얹은 것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장자 므낫세의 족속도 큰 족속이 되겠지만

차자 에브라임이 더욱 큰 족속이 될 것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사시대에 가장 큰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였고,

분열 왕국시대에 북쪽이 열 개 지파, 남쪽이 두 개 지파였을 때도

북쪽 열 지파 가운데 대표격인 지파가 에브라임 지파였습니다. 아주 큰 족속이 된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후손들이 번창해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것을

바라보고 축복한 것입니다. 야곱은 영광스러운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론

 

불신자들은 노년기가 되고 죽음을 앞두게 되면 신체적으로 약해지고 비참해 집니다.

불신자들이 나이가 들고 늙고 병들어 힘이 빠지면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불쌍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그러다 죽으면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에 더욱 비참해 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은 야곱처럼 죽기 직전에도 영적으로 최고의 순간을 맞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성도의 죽음은 광명한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에 불과합니다.

성도들은 나이가 들고 늙을수록 더욱 영적으로 강성해지고, 더욱 인격적으로 성화되고,

더욱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 영원한 영광으로 들어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147세 죽기 직전의 야곱을 생각하면서 어떤 순간이라도 과거에 감사하고

현재에 성화되고, 미래에 소망을 갖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