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 유다의 후손들아 네 가슴에 양철북을 울려라 (창44:32~34) (tistory.com)
◈창44장, 유다가 종으로 낮아짐
*김성수 목사 창세기 94강 중에서 발췌
우리는 지난주에 요셉이 자기 형들을 모함을 하면서까지 골탕을 먹이는 이유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요셉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아버지가 될 자기 형제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본 모습을 폭로당하고, 그들의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의 택한 백성으로 성숙되어지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반복해서 그들을 시험했던 것이라 했지요?
그렇게 요셉의 형제들은, 그러한 요셉의 시험과 모함을 거치면서
종의 자리까지 아래로 내려가게 됩니다. ‘우리가 당신의 종이 되겠나이다’
요셉이 그 형제들에게 바랐던 것이 성취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요구하시는 성화의 완성지점이 바로 거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簒奪)하고
왕의 자리에 올라 마치 자기들이 이 세상의 왕이라도 된 것처럼 거들먹거리고 있을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찾아가셔서 그들의 실체를 폭로 시키시고
그들을 다시 하나님의 종의 자리로, 순종하고 복종하는 자리로 끌어내리시는 것이
바로 성화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로 완성이 되어져 가는 것이지,
착하고 능력 있고 멋진 사람으로 변해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건 당연한 열매일 뿐입니다.
그걸 잘 분별하셔야 합니다. 그러한 성화의 열매들은
자기부인이라는 전제에서 자연스럽게 맺혀져야 하는 것이지
그것 자체가 목적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한 성화의 열매들은 가시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로 그 형제들의 대표로 유다가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다는 열 두 형제의 대표임과 동시에
모든 하나님 백성들의 대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그에게서 자기부인의 모습이 나오지요?
유다는 요셉 앞에서 자기 형제들을 위하여 홀로 종이 되겠다고 나섭니다.
당시의 종은 주인의 말에 목숨까지도 내 놓아야 하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따라서 유다의 그러한 고백은 자기 생명을 요셉에게 맡기겠다는 선언이었습니다.
유다는 그렇게 요셉 앞에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부인하는 자로 서게 되는 것입니다.
누구 앞에서? 요셉 앞에서요.
그런데 그러한 유다의 고백을 받는 요셉이 어떻게 묘사가 되고 있습니까?
은잔을 가지고 점을 잘 치는 자로 묘사가 되고 있지요?
그건 유다와 다른 형제들 앞에서, 요셉이 영적 존재의 상징으로 서는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요셉이 유다와 그의 형제들 앞에서 자신을 차별화 시키는 것입니다.
그게 말이 됩니까? 요셉이 은잔으로 점을 치다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자신을 형제들 앞에서 영적 존재로 차별화시키기 위해
자신을 신출귀몰 점치는 자로 묘사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영적 존재 앞에서 완전히 무력하고 불가능한 자로 형제들이 서게 된 것이고
그 형제들의 대표로 유다가 앞으로 나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유다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된 나머지 형제들의 모습이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 모습은 바로 우리 성도의 삶 속에서 격발되어 나와야 하는 모습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굶어 죽어야 할 자기 부모와 형제들을 위해 종이 되어
먼저 그 삶을 산 사람이 누굽니까? 요셉입니다.
따라서 유다가, 지금 자신의 생사여탈을 빼앗기고
종의 삶을 살아야 하는 형제들의 모든 짐을 대신지고 자신이 홀로 종이 되겠다고 나선 것은
요셉이 죽어야 할 자기 형제들의 대표로 먼저 종이 된 것과 똑같은 상황인 것입니다.
물론 요셉이나 유다는 그러한 ‘대신 희생의 삶’의 정확한 내용을 잘 모르는 상태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삶이 어떤 삶인지 잘 알고 있지요?
그 삶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앞서 먼저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성도가 좇아 살아야 하는 성도의 삶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에게 궁극적으로 요구가 되는 삶이
바로 그 십자가의 삶임을 고지하시기 위해
마지막 시험대 앞의 유다에게서 그 삶을 끄집어내시고야 마시는 것입니다.
마지막 시험대를 통과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나와야 할 삶이
바로 그 삶이라는 것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형제를 위하여 종의 삶을 자처하는 그 삶이
패배의 삶처럼 보이고, 실패의 삶처럼 보이지만
그 삶이야말로 하늘의 왕의 삶인 것입니다. 어떻게 아냐고요?
요셉의 꿈이 그것을 설명해 주는 그림인 것입니다.
형제를 위해 종이 되어 애굽으로 팔려간 요셉에게 부모와 형제들이
모두 머리 숙여 절을 하는 꿈이 바로 그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종이 되어 섬기는 모습이 실제로는
하늘 왕의 삶이라는 것을 알기 쉬운 그림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이제 유다가 그 바통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유다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종이 되겠다고 자기를 부인한 그에게 영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지요?
똑같이 세상이 그에게 절을 하는 상황이 일어나야 합니다.
그게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예언인 것입니다.
(창49:8~10) 유다야 너는 네 형제의 찬송이 될지라
네 손이 네 원수의 목을 잡을 것이요 네 아비의 아들들이 네 앞에 절하리로다
유다는 사자 새끼로다 내 아들아 너는 움킨 것을 찢고 올라 갔도다
그의 엎드리고 웅크림이 수사자 같고 암사자 같으니 누가 그를 범할 수 있으랴
10 홀이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치리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시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미치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요셉에게 일어났던 일이 유다에게 예언이 되고 있지요?
오늘 본문인 창세기 44장의 유다의 고백과
창세기 49장의 야곱의 유언은 이렇게 연결이 되어야 이해가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한 유다의 대신 희생의 삶이 예시하던,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옵니까?
유다지파에서 나옵니다.
왜 오늘 본문에서 유다가 다른 형제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겠다고 나섰는지가
더욱 선명해 지지요? 유다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것입니다. 성경은 요셉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희생과 그 대신 희생에 의한 승리를 작은 그림으로 먼저 보여주고,
유다의 삶과 그를 향한 야곱의 유언을 통하여 조금 더 선명하게 십자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유다지파에서 나온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왕 다윗을 통하여
조금 더 선명한 십자가 그림을 보여줍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기 전에 아무 죄도 없이 사울에게 핍박을 당하지요?
하늘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신 희생의 모델로 다윗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윗의 후손으로 대신 희생의 본체인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는 것입니다.
보세요. 대신 희생의 삶을 경험한 이들의 신분이 모두 무엇입니까? 왕입니다.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전부 그 앞에서 절을 해야 하는 왕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땅에서 희생하고, 쫓기고, 당하고, 져주고, 섬기는 삶을 살더란 것입니다.
그 삶이 성도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왜요?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니까요.
▲따라서 요셉과 유다와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미리 산 것이 되는 것이고,
우리 성도는 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좇아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 신앙의 목적지는, ‘나’가 아닌 다른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나를 비우고 나를 희생하는 종의 자리여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삶을 예수님께서 직접 내려오셔서 본보기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게 바로 하늘 왕의 삶임을 가르치시기 위해 하늘의 왕이 직접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장차 하늘나라의 공동 상속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하늘의 주인으로 살 우리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는 자명하지요?
당해주고, 져주고, 세상에게 쫓기고, 섬기고, 희생하는 삶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는 이 땅에서 작은 자처럼, 감추어진 자처럼,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입니다.
고지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예수가 그렇게 감추어진 분으로 살다가 가신 것처럼
우리도 감추어진 자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이해를 돕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성경이 성도들을 가리켜 ‘빛’이라고도 하고, ‘등불’이라고도 하지요?
(마5:14~16)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말은 우리 성도가 이 세상에서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함을 고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 삶을 가리켜 ‘착한 삶’이라 하십니다.
그 착한 삶의 어원은 히브리어 ‘토브’입니다.
그 ‘토브’라는 단어가 어디서 처음 쓰였다고 했지요?
창세기 1장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어구에서 처음 쓰였다고 했지요?
그러니까 ‘착함’이라는 것은 ‘피조물이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의 목적에서 의도하신 대로
하나님께 순종하여 움직이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착함’입니다.
자신의 목숨까지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려놓은 예수의 삶이 바로 착한 삶의 표본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등불의 삶인 ‘착한 행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보여 지게 되느냐 말입니다.
예수의 삶이 어떠했습니까?
연한 순처럼 약한 모습이었고, 감추어지고 숨겨진 종의 모습이었습니다.
심지어 모함을 당해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순종을 해야 하는 삶이었습니다.
▲똑같은 비유가 기록된 마가복음으로 가면 조금 더 선명하게 이해를 하실 수 있습니다.
(막4:21~25) 또 저희에게 이르시되 사람이 등불을 가져오는 것은
말 아래나 평상 아래나 두려 함이냐 등경 위에 두려 함이 아니냐
22 드러내려 하지 않고는 숨긴 것이 없고 나타내려 하지 않고는 감추인 것이 없느니라
23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24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25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잘 보세요. 주님께서 ‘등불은 드러나야 한다’라고 말씀을 하시고는
22절에서 ‘그 등불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 숨겨졌고, 나타내기 위해 감추어졌다’
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이중 부정이니까요. 그렇지요? 그 말이 무슨 말입니까?
이 세상의 등불로 살아야 하는 성도가 등불로서 세상에 드러나게 되는 방법은,
마태복음의 표현대로 바꾸면, 착한 행실로 살게 되는 방법은,
하나님에 의해 먼저 ‘감추어지고 숨겨지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굉장히 의외지요?
우리가 생각하는 ‘드러나는 등불’은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부자가 되고,
도덕적, 윤리적 바른 삶을 잘 살아내고 해서,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는 것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은 등불이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감추어지고 숨겨져야 한다’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라는 등불은 높이 들려서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 아니라
감추어지고 숨겨지는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게 ‘등경 위에 선 성도’라는 등불의 실체입니다.
이 역설을 이해하세요? 등불이 말 아래 있으면 안 된다고 하시면서
그렇게 등불이 말 아래 있지 않고 밖으로 드러나는 방법을 제시하시는 데
감추어지고 숨겨지는 방식으로 말 밖으로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밑 절을 보시면 그렇게 감추어지고 숨겨짐으로 해서 밖으로 드러나게 되는
성도의 삶의 구체적인 적용이 나옵니다.
24절을 보시면 주님께서 ‘너희의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거기에서 ‘헤아리다’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메트레오’는 ‘측량하다, 되로 재다’라는 뜻입니다.
거기서 ‘되’라는 말은 바로 윗 절의 ‘말’(모디오스)이라는 단어와 같은 단어입니다.
그 ‘헤아리다’라는 말을 쓰시기 위해 ‘말’이라는 단어가 위에 동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헤아리는 자들은 그 헤아림으로 돌려받을 것이고 더 받을 것’이라고 하시고,
25절에는 ‘있는 자가 받는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헤아림’과 ‘있음’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지요?
헤아리는 자가 받을 것이고 있는 자도 받는다고 하니까요.
그렇다면 주님이 등불들에게 요구하시는 헤아림의 정체가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을 헤아린다는 것이 무슨 말입니까? 내 생각으로 판단한다는 말입니까?
그렇다면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주님이 그걸 칭찬하시겠어요?
여러분, 사람들은 항상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하여 소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물과 사건을 판단할 때 그 자신만의 세계관이라는 안경에 의해 판단을 합니다.
돈이라는 알이 끼워져 있는 세계관을 소유한 사람은 돈이라는 안경알을 통해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명예라는 알이 끼워져 있는 세계관을 소유한 사람은 명예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들에게는 돈이 많고 높은 명예를 지닌 이들이 힘 있는 자이며
가난하고 못 배운 사람들은 발톱의 때로도 안 보입니다. 그게 그들의 헤아림입니다.
반면에 하나님이라는 안경알을 통해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하나님 중심으로 그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돈이 많든 적든, 명예가 있든 없든, 잘났든 못났든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오직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는가 아닌가로 사람과 사물과 사건을 판단합니다.
예를 들어 자식이 공부를 못해서 대학도 못가고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힘을 세계관으로 갖고 있는 자들에게 그 자식은 실패자일 뿐입니다.
그게 그들의 헤아림입니다.
그런데 만일 그 일을 통해 자식이 자신의 무력함과 불가능함에 대해 깊이 자각을 하고,
오직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만이 우리의 소망의 대상이 되어야 함을 깊이 배웠다고 생각해 보세요.
세상의 힘을 판단 기준으로 하여 그 자식을 헤아리는 사람은
매일같이 욕지거리나 해 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동행이라는 판단 기준을 가진 사람은 그 자식을 헤아릴 때
자랑스러운 자식으로 헤아리게 될 것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의 헤아림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헤아리는 자는
그 하나님 기준의 헤아림으로 남에게서 돌려받게 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힘으로 세상을 헤아리는 사람들은 똑같이 그렇게 헤아림을 받게 되지만
하나님 기준으로 세상을 헤아리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러한 헤아림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업적이 없어도 되고 대단한 공로가 없어도 됩니다.
단지 그가 그의 인생 속에서 ‘하나님과 함께 했는가, 아닌가?’로만 헤아림을 받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걸 은혜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를 아는 이들은
다른 이들을 이 세상의 힘을 기준으로 하여 평가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감추어지고 숨겨지는 모습인 것입니다.
이 세상의 힘을 기준으로 하여 평가될 때에는 보잘것없고 나약해 보여도
하나님 기준의 평가에 의해서는 하늘의 왕으로 헤아림을 받게 되는 그런 삶,
그것이 바로 등불인 성도들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 중심의 헤아림이 없는 자는 있는 것,
구체적으로 성경적 지식이라든지, 봉사라든지, 헌금이라든지 자신이 종교 행위로 쌓아둔 것들조차
모두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들이 등불이 되어서 세상을 비추는 방법이 뭡니까?
감추어지고 숨겨진 삶, 그러니까 이 세상의 힘과는 무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을 헤아리는 그런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게 등불의 삶입니다.
그게 세상을 비추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삶을 살다가 가셨던 것입니다.
하늘의 왕이신 그 분이 감추어지고 숨겨지셔서,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만 순종하는 종으로서의 삶을 살다가 가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분을 가리켜 ‘세상의 빛’이라 일컬으셨습니다.
빛이 왔는데 세상이 알아보지 못했다고 하지 않아요? 그렇습니다.
세상은 빛을 알아볼 실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늘의 빛은
이 세상에서 감추어진 모습으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빛은 그런 빛입니다. 감추어짐으로 드러나고 숨겨짐으로 드러나는 그런 빛입니다.
그런데 하늘의 빛이라는 사람들이 레이저 광선이 되어서
그 빛으로 다른 사람들을 죽이고 있다면, 그게 온당한 일입니까?
드러나는 빛은 반드시 레이저 광선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빛은 사람을 파괴합니다.
아닙니다. 숨겨지세요. 감추어 지셔야 합니다.
안 그러면 있는 것마저 모두 빼앗기게 된단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있음’이라고 내세우는,
하나님과 자기부인에 근거하지 않은 종교 행위나 선행 같은 것에 관심이 없으신 것입니다.
그건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없애 버리실 수 있는 그런 ‘있음’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주장하는 있음은 하나님에 의해 기각 당하게 될 것이고,
우리가 부인되고 우리에게서 ‘있음’이 아닌, ‘없음’을 발견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서 낮아질 때
우리는 진짜 ‘있음’으로 헤아림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꾸 낮아지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게 오늘 본문의 유다의 삶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감추어지고, 숨겨지고, 낮아지고, 섬겨주고, 하는 삶을 살다보면
때로 우리가 낙담을 하거나 낙망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오히려 그 삶이 저주받은 삶처럼 느껴지고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와는
아주 소원한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믿고 소망으로 이겨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