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요셉에게 돌아온 야곱의 가족

LNCK 2012. 6. 25. 06:36

https://blog.naver.com/karamos/220309860254

 

◈요셉에게 돌아온 야곱의 가족     창43장    2014.06.01.

 

서론

 

성경에서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특별히 하나님이 오랜 고생 끝에 그를 높여주셨다는 점에서

그의 생애는 예수님의 생애와 매우 닮았습니다.

 

17세에 형들에게 붙잡혀 구덩이에 들어갔다가 노예가 되었고,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13년이란 시간이 지난 후에야 하나님이 그를 높여

30세에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도 마찬가지입니다.

 

빌2:8~9절에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예수님 역시 모진 수난 끝에 영광을 얻게 되셨습니다.

이런 점이 요셉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대표적 인물이라는 결정적 증거가 됩니다.

 

▲반면에 야곱의 가족들은 많은 점에서 ‘죄에 빠져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는 죄인들’을 예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야곱의 가족들은 요셉과 분리되었습니다.

 

요셉에게는 양식이 차고 넘쳤지만, 야곱의 가족들은 요셉과 분리되었기 때문에

기근으로 굶어죽을 처지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욱 불행한 것은

기근으로 굶어죽을 상황이 되어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전무한 것입니다.

 

그들이 살 수 있는 길은 오직 요셉에게 돌아가는 길밖에 없었습니다.

왜냐면 온 세상에서 양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오직 요셉 한 사람뿐이었기 때문이었죠.

 

야곱의 가족들이 살 길은 요셉을 찾아가는 길밖에 없습니다.

죄인이 살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야곱의 가족들이 요셉에게 돌아갈 수 있도록 섭리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이 일을 한 것 같아 보여도,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작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급격하게 이루어지지 않고 차근차근히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야곱의 가족을 요셉에게로 인도하신 하나님은 섭리의 어떤 방편을 사용하셨는가?”

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두 가지 방편에 대해 생각해 보고,

끝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하여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야곱의 가족을 요셉에게 인도하기 위해 사용하신 두 가지 방편 : 압박, 사랑

 

하나님은 압박과 사랑의 방편을 사용하셨습니다.

창43:1~14절에 기록된 압박의 방법과, 15~34절에 기록된 사랑의 방법입니다.

 

▲먼저 야곱과 그의 가족은 세 가지 면에서 심한 압박을 받았습니다.

이 압박은 그들이 이겨낼 수 없는 강력한 압박이었습니다.

 

첫째는 상황의 압박(Pressure of Circumstances)입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은 기근에 처해 굶어죽을 처지가 되었습니다.

창세기 42장에 기록되어 있는 애굽 1차 방문 때 얻어온 양곡은 이미 동이 났습니다.

 

기근이 곧 끝나리라고 막연하게 기대했지만 얻어온 양곡을 다 먹을 때까지

기근은 끝나지 않았고 7년이나 계속될 예정이었습니다.

 

기근의 때에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비를 내릴 수도 없고 양곡을 심어봤자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굶어죽지 않으려면 다시 가고 싶지 않은 애굽이라 해도 가야만 합니다.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애굽의 총리라 해도 봐야 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양곡을 구하는 방법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황의 압박, 즉 기근의 압박(Pressure of Famine)이었습니다.

 

둘째는 사람의 압박입니다. 애굽 1차 방문 시에 야곱의 아들들은

둘째 형 시므온을 인질로 내주고 말았습니다. 지금 애굽에 시므온이 인질로 잡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을 찾아오기 위해서는 애굽에 다시 가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애굽의 총리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 사람이 엄히 우리에게 경계하여 가로되

너희 아우가 너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너희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 (창 43:3).

 

“너희에게 아우가 있다고 말을 하지 아니했느냐? 그런데 너희 아우가 함께 오지 아니하면

내 얼굴을 볼 수 없다”는 말을 했었습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막내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면

인질이 된 시므온을 구할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더구나 양식을 얻을 수 있는 길도 없습니다.

 

야곱과 그 아들들이 가장 하고 싶지 않았던 일은,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에 가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른 해결 방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양심도 그들을 압박했습니다. 양심의 압박(Pressure of Conscience)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이 애굽을 1차 방문했을 때에 양곡을 위한 돈을 지불했습니다.

그런데 객점에 와서 자루를 열어보니 자기들 자루에 양곡도 가득 들었고,

지불했던 돈도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그대로 가지고 가나안 땅으로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이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도둑으로 몰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가서 총리에게 자신들의 무고함을 변호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43:19~22

 

이처럼 그들이 애굽에 2차 방문을 해서 가장 먼저 했던 일은 요셉의 청지기를 만나서

그 돈에 대한 해명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도적이 아니라는 설명이었습니다.

양심이 그들을 압박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해명에 대해 요셉의 청지기는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그가 이르되 너희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너희 하나님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재물을 너희 자루에 넣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니라 너희 돈은 내가 이미 받았느니라 하고

시므온을 그들에게로 이끌어 내고” 43:23

 

요셉의 청지기의 말은 꼭 요셉의 말과 같습니다. 너희의 돈은 내가 이미 받았고,

그 돈은 너희 아버지의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청지기의 말 속에서 요셉의 신앙적 영향력을 읽을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규모가 있는 사업을 경영하거나 수하에 많은 직원들과 함께 일하는 경우,

그들의 언행 속에서 ‘사장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이 나올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요셉처럼 복되고 거룩한 영향력을 미쳐야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사장님이 믿는 예수라면 이가 갈린다는 말이 나와서는 결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 사장님이 나가는 교회 방향으로는 고개도 돌리고 싶지 않다고 하면 매우 곤란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아랫사람에게 매우 좋지 못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요셉은 청지기들에게 아주 선한 영향력을 미쳤습니다.

 

△야곱과 그 아들들은 세 가지 압박-기근의 압박, 사람의 압박, 양심의 압박-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이 압박들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베냐민을 데리고 애굽을 향해 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목해야 할 사실은 그들을 압박한 것이 상황, 사람, 양심이었지만

그 배후에는 하나님이 일하고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압박하고 계셨습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사람의 주관 하에 진행된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하나님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실 때 압박하시기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나오지 않을 수 없도록 상황을 몰아가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압박의 방법만 쓰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방법도 사용하십니다.

채찍뿐만 아니라 당근의 방법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애굽 총리인 요셉에게 나아왔을 때 사랑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요셉은 그 형들이 베냐민과 함께 온 것을 보고 청지기에게 이렇게 명하였습니다.

 

“이 사람들을 인도하여 내 집으로 들이라!” 총리가 자기 집으로 초청하는 것입니다.

“짐승을 잡고 요리를 하라. 내가 이 사람들과 함께 먹을 것이니라!”

 

저는 대한민국 총리와 식사 한 번 해본 일이 없습니다. 그의 집에 들어가 본 적도 없습니다.

지나가면서 이곳이 총리 공관이라고 설명을 들어보았지만,

초청하지 않으니 밖에서 구경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양곡을 얻으러 온 사람이 어떻게 총리의 집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총리의 비서도 만나기 어려운 것이 현실입니다.

 

그런데 이 애굽 총리는 사람들을 자기 집에 들이고 짐승을 잡아 요리를 해서 대접하였을

뿐만 아니라 함께 먹겠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큰 사랑의 환대입니까?

그러나 환대를 하는데도 불구하고 야곱의 아들들은 총리의 호의를 의심하고 있습니다.

사랑을 의심합니다.

 

“그 사람들이 요셉의 집으로 인도되매 두려워하여 이르되 전일 우리 자루에 넣여 있던

돈의 일로 우리가 끌려드도다 이는 우리를 억류하고 달려들어 우리를 잡아 노예를 삼고

우리의 나귀를 빼앗으려 함이로다 하고” (창 43:18).

 

요셉이 자기들을 붙잡아 노예로 삼고 당나귀를 빼앗으려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엄청난 재산과 권력을 가진 애굽의 총리가 보잘 것 없는 당나귀를 탐낼 이유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들은 낙타의 가치에 절반도 안 되는 자신들의 당나귀를 탐낸다고 총리의 호의를 의심하였습니다.

 

그들이 의심한 이유는 그들 마음속에 악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들이 이기적이고 남을 속이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요셉을 봐도 그렇게 보인 것입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는 속담이 있지 않습니까? 지금 요셉의 형들은 총리의 극진한 사랑의

환대를 받았지만 그것을 의심하고 자기들의 당나귀를 빼앗으려고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도 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거저 주신 은혜를 의심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오라고 하면

‘하나님은 내가 가진 것이 탐이 나서 빼앗으려고 하는 게 아닌가?’하고 의심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재산이 있는 것을 알고 재산을 탐내서 내 재산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게 십일조를 빼앗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와 같이

하나님의 조건 없는 사랑을 의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당나귀나 탐내는 존재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요셉은 드디어 형제들 앞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아직도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은 채 현실적인 사랑을 나타내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의 의심에도 불구하고 사랑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아버지의 안부를 묻습니다.

 

“요셉이 그들의 안부를 물으며 가로되 너희 아버지 너희가 말하던 그 노인이 안녕하시냐

지금까지 생존하셨느냐 그들이 대답하되 주의 종 우리 아비가 평안하고 지금까지 생존

하였나이다 하고 머리 숙여 절하더라” (창 43:27~28). 요셉은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베냐민을 보고 너희가 내게 말하던 너희 작은 동생이냐고 물어봅니다.

형제들의 대답을 듣기 전에 요셉은 “소자여,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고

복을 빌어 주고 얼른 자기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요셉이 아우를 인하여 마음이 타는듯 하므로 급히 울 곳을 찾아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고” 43:30

요셉은 급히 안방에 들어가 울었습니다. 저는 이 구절만 읽으면 눈물이 납니다.

요셉이 얼마나 베냐민을 그리워했으면 울었겠습니까? 그리움의 눈물이요, 사랑의 눈물입니다.

 

요셉이 다 울고 나서 감정을 억제하고 얼굴을 씻고 나와 음식을 차리라고 명령합니다.

이 순간까지도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도대체 애굽의 총리가 어떤 분이길래

자기들에게 이렇게 귀한 음식을 베풀어주는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합니다.

 

요셉은 식탁에 형들을 앉힙니다. 그런데 장유의 순서대로 정확하게 앉혔습니다.

르우벤, 시므온, 레위, 유다, 단, 납달리, 갓, 아셀, 잇사갈, 스불론,

그리고 요셉 자신이 앉고, 베냐민이 앉았습니다. 12명을 순서대로 앉혔습니다.

자신을 제외하면 11명 아닙니까?

 

여러분, 11명이나 되는 형제를 순서대로 맞힐 수 있는 확률이 몇 퍼센트입니까?

11명 아들을 순서를 맞출 확률은, 10의 11승 분의 1의 확률입니다. 엄청나게 어려운 것입니다.

로또 복권에 당첨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한 여자의 자식들이 아니었습니다. 네 여자가 낳은 자녀들이었기 때문에

겉보기에 터울의 차이를 구분하기가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그들을 나이 순서대로 앉히고 음식을 풍성하게 주고,

막내에게는 다섯 배나 주었습니다. 그것도 요셉이 형들을 시험해 본 것입니다.

그런데 형들 가운데 아무도 “총리님, 질문있습니다! 어째서 막내에게만 다섯 배를 주시는

겁니까?”라고 따지는, 그런 경우 없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형들은 아우 베냐민에게 다섯 배를 주어도 시기심을 발하지 않았습니다.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기근가운데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

다 죽을 줄 알았는데, 막내 아우가 다섯 배를 먹는 것을 보니 참으로 감사하다는 마음을 품은 것입니다.

 

옛날 같았으면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과거에 요셉이 채색옷을 입었을 때

그 형들이 그를 시기 질투하여 죽이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형들이 성숙하게 된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목사 존 스토트는 회중을 대상으로 이와 같은 설문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당신이 교회를 나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그들의 대답이

지옥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말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위로하시며 복을 주시기 원하신다는 복된 소식 때문에 나오게

되었다는 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성도들은 대부분 사랑 때문에 교회를 찾아 나왔다는 것입니다.

압박도 중요하지만 사랑에 훨씬 더 강한 힘이 있습니다.

 

이솝우화에도 행인의 겉옷을 벗기기 위해 서로 힘을 자랑하며 다투었던

북풍과 태양의 이야기가 있지 않습니까?

겉옷을 벗길 때 강한 바람보다는 따뜻한 햇볕이 더욱 강한 힘이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압박을 하기도 하시지만 더불어 위대한 사랑을 보여주시는 분이십니다.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우리의 모든 죗값을 대신 치르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섯 배 이상의 복을 주시는 분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2.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야곱과 그 아들들의 반응

 

하나님은 압박과 사랑이라는 방법으로 야곱의 아들들을 요셉에게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야곱과 그 아들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습니까?

세 가지 반응을 보였습니다.

 

▲첫째는 제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먼저 아버지 야곱이 제정신을 차렸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절대로 베냐민을 보낼 수 없다고 하다가,

이러다가 모두 다 죽을 판이니 베냐민이 죽어도 이제는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내가 자식을 잃으면 잃으리로다!”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형국을 이판사판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베냐민을 보내지 않으면 다 죽는데,

베냐민을 보내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냐는 생각으로 제정신을 차리게 된 것입니다.

 

11~13절에 “그들의 아비 이스라엘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러할진대 이렇게 하라

너희는 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그릇에 담아가지고 내려가서 그 사람에게 예물을 삼을지니

곧 유향 조금과 꿀 조금과 향품과 몰약과 비자와 파단행이니 너희 손에 돈을 배나 가지고

너희 자루 아구에 도로 넣여 온 그 돈을 다시 가지고 가라 혹 차착이 있었을까 두렵도다

네 아우도 데리고 떠나 다시 그 사람에게로 가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죽으면 죽었지 베냐민은 절대로 안 된다고 버티던 야곱이었지만

하나님의 섭리에 굴복하게 된 것입니다. 압박이 가해질 때는 굴복하는 것이 지혜로운 판단입니다.

강한 압박이 계속 되는데도 버티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야곱은 제정신을 차렸습니다.

 

그리고 넷째 아들 유다도 정신을 차렸습니다. 장남은 르우벤이었지만 그는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르우벤이 아비에게 고하여 가로되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오지 아니하거든

나의 두 아들을 죽이소서 그를 내 손에 맡기소서 내가 그를 아버지께로 데리고 돌아오리이다” 42:37

 

장남이 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막내를 데리고 오지 않으면 내 아들 둘을 죽이시라”는 내용이었습니다.

할아버지에게 두 명의 손자를 죽이라는 말은 정신이 나간 말입니다.

 

그런데 유다가 제정신을 차리더니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43:8

 

르우벤은 자기 자식들에게 책임을 지운 반면, 유다는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고 말을 합니다.

유다가 제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유다도 사실 창세기 38장에서 엄청난 짓을 저질렀던 사람 아닙니까?

이방 여인가운데 창기를 찾아다니다가 자기 며느리를 창기인 줄 알고 범한 것이 유다 아닙니까?

아주 정신 나간 짓을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가 변화되어 제정신 차린 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다가 야곱의 아들들 가운데 지도자가 된 것입니다.

 

의아한 것은 창세기 42장에는 야곱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43장에 야곱이 정신을 차리니까 그 이름이 ‘이스라엘’이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유다가 아비 이스라엘에게 이르되 저 아이를 나와 함께 보내시면 우리가 곧 가리니

그러면 우리와 아버지와 우리 어린 것들이 다 살고 죽지 아니하리이다” (창 43:8).

 

제정신을 잃었을 때는 야곱(사기꾼)이었지만 제정신을 차리니까

이스라엘(하나님의 황태자)이 된 것입니다. 야곱과 유다는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했습니다.

 

▲둘째 반응은 야곱이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43:14

 

전능하신 하나님이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간절한 기도가 나왔던 것입니다.

히브리어로 엘사댜이(El-Shaddai)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뜻인데,

이는 아브라함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의 이름입니다(창 17:1).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니 우리 아들들을 하나도 죽지 않고 돌려보내게 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들들을 돌려보내 주시도록 기도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혹 자식을 잃게 하시면 나는 잃겠다고 완전히 포기하고 맡기는 기도를 했던 것입니다.

 

▲셋째로 야곱은 하나님의 긍휼(Mercy)을 의지하였습니다.

택하신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는 하나님을 믿었던 것입니다. 긍휼을 믿고 기도하였습니다.

 

14절에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여기서 은혜는 불쌍히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주시는 긍휼의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어떤 분은 “나는 기도할 줄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기도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내 자식, 우리 교회, 우리 나라를 불쌍히 여겨 주세요!”

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달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긍휼을 베풀어달라’입니다.

야곱은 제정신을 차리고 하나님의 불쌍히 여겨 주심을 믿고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그 가족들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결론

 

하나님이 야곱과 그 아들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유는 딱 한 가지입니다. 요셉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으로 인해 그들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총리의 집에 가서 음식을 먹고 다섯 배의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모두 요셉 때문입니다. 요셉을 알아보지도 못한 채로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알지도 못할 때, 하나님의 긍휼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연약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신 것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왜 이러한 환대를 받는지도 모른 채 호의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누구 때문이었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통치자, 만왕의 왕, 만주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받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겠습니까? 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시겠습니까?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 때문인 것입니다.

 

죄인들은 제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지금 자기가 가는 길이 천국 길인지, 지옥 길인지 잘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누구에게 가야 살게 되는 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죄인들은 예수께로 와야 삽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죄인들을 압박과 사랑을 통해

예수께로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로 나오면

하나님은 그로 말미암아 죄인들에게 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께로 나아온 자들에게 세 가지 복을 주십니다.

첫째는 죄를 용서해 주시는 사죄의 복(Blessing of Forgiveness)이고,

둘째는 천국에 당당히 들어갈 수 있는 의를 얻는 칭의의 복(Blessing of Justification)이며,

셋째는 살아가면서 때마다 일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수 있는 화친의 복(Blessing of Reconciliation)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압박이 있으십니까? 예수께로 나오라는 부르심입니다.

나는 이미 나왔는데도 압박이 있습니까? 그것은 더욱 가까이 나아오라는 부르심입니다.

 

베드로처럼 멀찍이 따라다니다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는 죄를 짓지 말고

가까이 나아오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싶은 목마름이 있으십니까?

그러면 예수님께로 나아오십시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때문에

우리에게 복을 주시고, 긍휼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오면 그가 널리 긍휼히 여기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우리나라를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하고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