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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훈 장로

LNCK 2012. 7. 27. 18:00

◈하나님과 민족과 학교를 사랑한 애국자, 이승훈 장로    히12:1-3   출처

1864~1930

 

우리는 주일 아침마다 신앙의 선배들의 삶과 죽음을 되돌아보면서

많은 도전과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오늘은 하나님과 민족과 (오산)학교를 사랑한 애국자 이승훈 장로에 대해서

설교를 하겠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조만식 장로와 함께 오산학교를 일으켜 세운 분이었고,

주기철 한경직 함석헌 목사와 같은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을 일으켜 키운 분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3.1운동을 일으킨 애국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그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이고 모험적인 성격을 지닌 행동의 사람이었습니다.

 

 

◑1. 이승훈 선생은 오산학교를 일으켜 세운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살았습니다.

이승훈은 1864년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난 지 열 달도 되지 않아,

어머니를 여의고 할머니의 품에서, 가난과 고난의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할머니도 그가 열 살 때 돌아가시고, 곧 아버지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는 나중에는 세 차례나 일본 경찰에 의해서 투옥되고, 극심한 고문을 당했습니다.

제주도에 유배되는 불행한 삶도 살았습니다.

그는 고문의 후유증으로 항상 몸의 고통을 당하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은 가난과 고난과 불행의 삶 속에서도, 자기 삶에 충실했습니다.

가난과 고난과 불행이. 도리어 그에게 자극이 되었고 도전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는 열심히 공부했고, 사환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마다하지 않고, 시키지 전에 알아서 열심히 했습니다.

 

청년 시절에는 열심히 일을 했으며,

장년과 노년 시절에는, 나라와 교회를 위해서 열심히 봉사했습니다.

 

청장년 시절에는, 평양에 가서 장사를 해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1백억 가까운 엄청난 재산을 가진 대 사업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었다고, 돈 냄새를 풍기지는 않았습니다.

가난했을 대도 비굴하지 않았고, 부자가 되었을 때도 거드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항상 나라 걱정만 하고, 나라 살리는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1907년 어느 날, 일본의 침략의 손길이 깊이 뻗치고 있을 때

그는 답답한 마음으로 평양 거리를 헤매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우연히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게 되었습니다.

도산 안창호의 연설은 그의 가슴을 사로잡고 말았습니다.

 

도산은 “일본이 우리나라를 삼켜 먹으려고 하고 있으니

온 국민은 정신을 차리고, 썩어빠진 구습을 벗어버리고

한 마음 한 뜻으로 뭉쳐서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승훈은 자기보다 14살이나 연하인 안창호 선생에게 허리를 굳혀 인사하고

그의 손을 굳게 잡았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나라를 위해서 같이 행동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리고는 곧 머리를 깎고, 술과 담배를 끊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승훈은 곧 사재를 털어 고향 정주에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그가 43세 되던 1907년의 일이었습니다.  *평양 대부흥이 일어난 해

나라를 지키고 세우려면, 인재를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 그는 평양에서 선교사들이 병원과 학교를 세운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이 훌륭한 일들을 하는데, 자기는 한 발 늦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나가는 아이들을 볼 때마다, 깊은 관심을 기울이며 보곤 했습니다.

“저 놈은 눈망울을 보니깐 여간 총명한 게 아니야!”

 

어느 날 총명해 보이는 아이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정일선이라는 아이였습니다.

공부하고 싶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공부하고 싶지만 집이 가난해서 공부를 못한다고 했습니다.

 

그 아이를 데리고 그의 부모에게로 갔습니다. 부모의 허락을 받고

그 아이를 숭실중학교에 입학시켰습니다. 그는 나중에 훌륭한 목사가 되었습니다.

 

이승훈은 드디어 사재를 털어, 정주 오산에 오산학교를 세웠습니다.

오산은 정주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마을로 다섯 개의 산이 둘러 있는 마을이었습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는 일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승훈은 오산학교를 세운 다음, 자기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불러온 이인환이란 이름 대신 이승훈이라고 바꾸었고

호를 남강이라고 정했습니다.   *南岡  (산등성이 강)

 

오산학교는 처음부터 기독교 신앙으로 세운 학교는 아니었습니다.

나라를 살리기 위한 애국심으로 세운 학교였습니다.

그러나 3년 후(1910)에는 기독교 신앙으로 튼튼하게 세워졌습니다.

 

1910년 8월 한일합방이 되자, 이승훈 선생은 가슴을 치며 통곡을 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처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 9월 어느 날 평양 거리를 헤매다가

산정현교회로 발길을 옮겼습니다.

 

한석진 목사가 “십자가의 고난”이란 제목으로 설교를 했는데

그 설교에 이승훈 선생은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십자가에 나타난 희생과 사랑의 정신이

자기를 구원하고, 민족을 구원할 수 있다는 진리를 발견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날부터 예수를 믿기로 작정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참으로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고.. 민족과 나라를 위해서 살기로 결단을 했고, 1907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십자가의 예수를 믿기로 결단을 했으니  1910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미적미적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못합니다.

 

이승훈 선생은 예수를 믿은 지 3개월이 지난 1910년 12월,  

일본경찰에 붙잡혀 서울 총감부 구치소에 수감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했지만

그가 새로 가지게 된 십자가 신앙으로, 모든 고문을 얼마든지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물 고문, 매 달리는 고문 두들겨 패는 고문 등을 당했지만

모든 고문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는 구치소 동료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가 여기 구치소에 갇혀, 그 동안 수 없는 고문을 달게 받으면서

참아낼 수 있었던 것은 신앙의 힘이었지요.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신앙의 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저는 벌써 절망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는 구치소에서 이렇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우리 주님께서도 십자가의 큰 고통을 참아

당신의 뜻을 이루었듯이

저도 이 고통을 잘 참아, 당신의 높은 뜻을 이루게 하소서.”

 

그는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오산학교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1913년에 부임한 조만식 선생과 함께 오산학교를

기독교 신앙과 민족 사랑의 요람으로 키워갔습니다.

 

1916년부터 1919년까지 오산학교에서 공부한 한경직 목사는

이승훈 선생에 대한 회상을 이렇게 했습니다.

 

“그때 남강 선생이 우리 어린 학생들에게 주는 감화는 무어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정말 큰 것이었어요. 자기 사재를 다 털어서 학교를 세우고…

자기 집은 남촌에 있는데도 매일 학교에 나오시고…

한 60리나 되셨을 겁니다. [사실 그 때 남강은 55세였습니다.]

 

우리가 4학년인가 되었을 때요. 어느 날 저녁에 졸업반 학생을 한 너댓명 불렀어요.

가니깐 선생이 자리에 누웠어요. 우리가 가니깐 겨우 일어나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전에 끌려가서 일본 사람들에게 너무 매를 맞아서

언제나 일년이 되면 그 맞은 자리가 아프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 그러셔요.

 

그래 아프단 이야기를 하면서 매 맞은 그 푸릇푸릇한 자리를 보여요.

그때 3.1운동 일어나기 전인데, 그 선생의 말씀 잊지 못하는 건 이런 말을 해요.

 

‘지금은 일본 사람들이 모든 세력을 다 가지고 모든 걸 다 주장하니깐

일이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아.

그렇게 되니까 애국지사라는 사람들의 마음이 점점 변한다’고 탄식하시면서

 

마지막 말씀은

‘다만 너희들은 분명히 알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지

나 이승훈은 조선 사람으로 살다가 조선 사람으로 죽는다’

(여기서 한경직 목사는 목이 메어 울먹였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그 후에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노인이 그 이야기 하시려고 우리를 청했단 말이야, 특별히 그날 저녁에…

 

그러니깐 이제 그런 이야기는 도저히 잊을 수가 없단 말이야요.

그때 오산학교는 기독교 학교라서 채플 시간이면

남강 선생이랑 고당 (조만식) 선생이 보아주셨단 말이야요.

 

그때 남강이 나이를 잡수셨어도 말씀하실 때는 거저 불을 뿜어요.

그 정신이 살았거든 …

그래서 우리 남강 선생은 내가 잊을 수가 없고...”

 

남강 이승훈 선생은 사재를 털어 오산학교를 세우고

고당 조만식 선생과 함께 민족과 교회의 지도자들을 키운 민족의 지도자였습니다.

 

 

◑2. 이승훈 선생은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한 신앙인이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학교만 세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1910년 10월에는 정주에 교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평양에서 한석진 목사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믿기로 작정한지

한 달밖에 되지 않던 때였습니다. 그는 정말 화끈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를 믿은 지 한 달 만에, 교회당을 지은 사람입니다.

 

목재를 사 들이고 돌을 날랐습니다. 두 달 만에 아담한 교회당을 지었습니다.

교회의 이름을 <오산교회>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정주읍 교회를 시무하던 정기정 목사를 담임 목사로 모셔왔습니다.

그래서 정주에는 교육의 불길에 이어, 신앙의 불길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승훈 선생은 1910년 12월에 일경에 체포되어

2년 동안 갖은 고초와 고난을 당하다가, 1912년에야 오산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오산으로 돌아온 이승훈 선생은, 정기정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고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더욱 더 충성스럽게 섬겼습니다.

 

그러나 그는 또다시 105인 사건으로 형무소에 끌려가 온갖 고문을 당했습니다.

두 번째 투옥된 것이었습니다.

 

그때 나부열 선교사가 그를 찾아와 위로하며 격려했습니다.

그리고 <천로역정>이란 책을 전해 주었습니다.

그는 천로역정을 읽으면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가 감옥에서 기도하던 어느 날, 그는 놀라운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도하는 가운데 환상 중에 보게 된 것입니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창살을 향해, 무릎을 꿇고 간절한 마음으로

‘주여’라고 속으로 부르짖을 때.. 문득 창살과 햇빛이 온데 간데 없어지고

그보다 더 밝은 그리스도의 형상이, 눈앞에 환하게 나타나 보였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격하며 마치 신음하듯 ‘주님’이라고 외치며

두 팔을 앞으로 내 밀었습니다. 그는 이런 경험을 한 후

어떠한 고난도 이겨내며, 하나님 사랑과 나라 사랑에 진력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1915년 2월 감옥에서 풀려나왔습니다. 그가 52세가 되던 해였습니다.

그는 오산학교로 달려가, 그렇게도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학생들을 만나보고

그 길로 평양신학교로 달려갔습니다. 3월이었습니다.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신앙과 신학의 훈련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일군이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1년 동안 신학 공부를 하고, 다시 오산으로 돌아왔지만

그가 평양 신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그는 많은 동료 학생들에게

깊은 인격적 감화를 끼쳤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1916년 오산으로 돌아와서 장로로 장립을 받아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생명을 바쳐 받들어 섬겼는데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4년 동안

그의 신앙이 가장 뜨겁게 불타 올랐다고 합니다.

 

바로 그 4년 동안 한경직 목사가 오산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이승훈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오산학교는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민족의 학교였고

오산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양성하는 영적 도장이었습니다.

 

오산교회의 예배는 단정하고 질서정연해서

오산교회를 방문하는 저명한 목사들이

그 단정함과 질서정연 함에 감탄을 하곤 했다고 합니다.

 

이승훈 장로는 1919년 3.1 운동 때 다시 일경에 체포되어

3년 동안 평양 감옥에 투옥되었는데

그의 믿음은 감옥 안에서 더욱 더 두터워지고 굳건해졌습니다.

 

구약을 20번이나 읽었는데 특히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신명기, 시편, 이사야,

예레미아서를 읽으며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나라 사랑과 하나님 사랑을 굳게 다짐하며 자기의 몸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3. 이승훈 선생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33인 중의 한 사람이었을 뿐 아니라, 그는 3.1 운동의 주역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만약 그의 굳은 결심과 민첩한 활동이 없었다면, 그가 조금이라도 지체하였다면

3월 1일의 거사의 기회는 놓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승훈은 독립운동의 거사를 위하여 질풍 몰아치듯 서울에서 선천으로,

선천에서 평양으로, 또 평양에서 서울로 뛰어다녔다.

 

서울에서는 함태영, 박희도, 이갑성 등을 만나 동지로 포섭하였고,

만약 천도교에서 주저한다면 기독교 단독으로라도 행동할 계획까지 세워 놓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최린과 연락을 긴밀히 취하면서

천도교의 의견을 잘 조절하여 민족의 총의를 묶는데 훌륭히 성공하였다.”

 

이승훈 선생은 동분서주하면서 길선주 목사, 양전백 목사, 오화영 목사,

정춘수 목사, 김병조, 유여대, 이명룡, 함태영, 이갑성, 박도희 등을 설득해서

결국 기독교 지도자 16명이 33인 중에 포함되도록 했습니다.

 

하루는 이승훈 선생이 밖에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좌중의 사람들이 언성을 높여 떠들고 있었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순서에 대해서 33인 중 누구를 먼저 쓰느냐의 문제를 놓고

언성을 높이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이승훈 선생은 “지금이 어느 때라고 이러시오. 이것은 죽는 순서요.

죽는 순서로 손병희를 먼저 쓰시오” 라고 했습니다.

이 말 한 마디에 분위기는 조용해지고 순서는 쉽게 정해졌습니다.

(천도교) 손병희씨의 이름이 제일 먼저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명예를 양보했습니다.)

 

이승훈 선생의 열성과 지혜와 용기 그리고 이해관계를 초월한

의연한 태도가 없었다면

과연 3.1 운동이 질서 정연하게 결행될 수 있었을런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이승훈 선생의 전기를 쓴 오병학씨는 이러게 기록했습니다.

“3.1 운동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사건은 남강 이승훈이라는

한 사람의 진두 지휘로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기미년 독립 만세운동은 거의 남강 한 사람의 작품이라고 해도

그리 과언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부언했습니다.

“3.1 운동이 남강의 작품이었다면 그의 일생은 곧 하나님의 작품이었으리라.”

정확한 진술입니다.

 

이승훈 선생은 3.1 운동 후 세 번째로 일경에 의해 투옥되어

온갖 고초를 다 당했습니다.

 

그는 날마다 아침과 저녁 사이에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했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면 언제나 단정히 무릎을 꿇고 이렇게 통성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오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항상 이런 어려운 고난을 통하여

우리의 잘못을 깨우쳐 주시고

더욱 크고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도록 연단해 주시는 분이심을 압니다.

 

오 하나님이시여, 이 고난과 시험을 잘 이기게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은혜로 저를 지켜주셔서 제 마음이 약해지지 않게 해 주시고

담대함과 강건함을 주소서.”

 

그는 옥중에서 구약성경을 20번 신약성경을 40번이나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기도로 모든 고난을 이기고 1922년 7월 감옥에서 풀려났습니다.

오산으로 달려가서 불타버린 오산학교를 다시 재건했습니다.

 

그는 자나 깨나 이런 기도를 신음처럼 드렸습니다.

“하나님이여, 이 나라를 구하여 주옵소서!”

그는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순수한 애국자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지적할 것이 있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편협한 민족주의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조만식 장로가 민족과 나라를 사랑한 애국자였지만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는 아니었던 것처럼

이승훈 장로도 국수적이고 배타적인 민족주의자가 아니었습니다.

 

언젠가 누가 이승훈 선생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을 가리켜 민족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나 역시 한때는 우리 민족만을 생각하면서 살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을 믿기 시작하면서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지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성경을 통하여 이 땅에 많은 민족이 살고 있지만

전체 인류는 결국 한 가족이라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일본을 대항해 싸운 것은 그들의 불의 때문에 그런 것이지

절대로 민족이 서로 다르다는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이승훈 선생은 학교와 하나님과 민족을 사랑하는데 한 평생을 다 바치다가

1930년 5월 9일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오산학교에서 그의 장례를 사회장으로 성대하게 거행했습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떠난 지 44년이 지난 1974년 10월 3일

서울 어린이대공원 남쪽 폭포 옆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그의 나라 사랑과 민족 사랑을 기리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상 건립 위원장은 오산학교 출신인 한경직 목사였습니다.

한 사람의 삶이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를 보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이승훈 선생은 학교와 민족과 하나님을 사랑하며

    한 평생을 희생의 제물로 바치는 삶이 가장 값진 삶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도 우리의 청소년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민족과 교회를 사랑하고,

    그리고 세계의 백성들을 사랑하는 값진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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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글)

겨레의 선각자 도산 안창호 선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웅변가였다.

그러나 도산 선생이 웅변가였다 하여 사자후를 토한 것이 아니었다.

언제나 낮고 조용한 음성에 한결같은 톤으로 조근조근 대중을 설득하였다.

 

도산 선생의 연설은 그런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청중들을 웃고 울고 비분강개하고

그리고 투지가 끓어오르게 하곤 하였다.

 

도산 선생의 연설을 한 번 듣고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꾼 인물이 남강 이승훈 선생이다.

남강 선생은 평양 모란봉의 쾌재정에서 열린 도산 선생의 연설을 듣고는

자신만을 위하여 살던 삶에서 벗어나 겨레를 위한 삶을 살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그날로 당장 실천한 것이 세 가지였다.

 

첫째는 예수 믿기로 작정하였다.

둘째는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워 민족의 지도자들을 기르기로 작정하였다.

그래서 자신이 살던 마을에 세운 학교가 오산학교였다.

셋째가 상투를 자르고 술을 끊었다.

한 선각자의 호소력 있는 설득이 사람을 변화시킨 대표적인 예이다.

도산 선생은 어떤 자리에서나 연설을 마칠 때는

모인 회중들과 함께 주먹손을 움켜쥐고 함께 외치던 구호가 있었다.

 

"나가자!"는 구호이다.

 

"나가자!"는 "나라와 가정과 자신을 위하여“를 줄인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연회석에서 구호를 선창케 될 때는 도산 선생의 예화를 설명하고는

"나가자!"를 외친다.

 

지금 우리의 처지가 "나가자!"를 높이 외치며 미래를 향하여 함께 나아가야 할 때이다.

지금은 교회나 나라나 기업이나 모두들 한 마음으로 미래를 향하여

"나가자!"를 외쳐야 할 때이다. <김진홍 목사님 칼럼에서
.......................

 

◑남강 이승훈                    출처보기

 

# 1
1864년 4월 25일, 평안북도 정주의 한 가난한 시골집에 사내아이가 태어납니다. 그러나 아이가 태어난 지 채 열 달도 되지 않아 아이의 어머니는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할 수 없이 할머니의 품에서 자라던 이 아이, 그러나 열 살 때 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더니, 설상가상으로 얼마 후 아버지도 세상을 떠나 버립니다.

덩그마니 가난 속에 홀로 남겨진 이 아이의 어린 마음엔 한 맺힌 소망이 하나 있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 양반이 되는 소망이었습니다. 해서 그 길로 이 아이는 서당을 뛰쳐나와 놋그릇을 만들어 파는 유기상(鍮器商)의 점원으로 들어갑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사환에서부터 일을 시작한 이 아이는, 탁월한 근면성과 성실성으로, 3년 만에 수금하는 일을 맡을 정도로 신임을 얻게 됩니다.

얼마 후 결혼하게 된 그는 점원을 그만두고, 자신이 직접 놋그릇 장사를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더니 1887년, 그러니까 그의 나이 23세 때, 직접 유기 공장을 세워 기업가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는 공장의 노동환경을 혁신하였고, 반상의 계급에 구애됨 없이 모든 근로자를 평등하게 대우함으로써, 생산성과 품질 모두를 높일 수 있었고, 해서 그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으로 사업에 큰 타격을 입은 그는, 시골로 피난을 가게 됩니다. 하늘이 도우셨는지, 얼마 후 다시 돌아와 공장을 재건하고 재기에 성공하게 됩니다. 하여 이제야 그의 한 맺힌 꿈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인데요, 1899년 돈으로 벼슬을 사서 양반이 되고 싶은 꿈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일단 벼슬을 나고 나자, 내친 김에 가문의 이름을 빛내고 싶어진 그는, 오산 면 용동에 여주 이씨 마을을 세우고, 용동 공동체를 세웁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01년에는 그의 사업이 평양까지 진출하게 되었고, 서울과 인천을 오가며 더욱 열심히 사업을 전개한 결과, 마침내 국내 굴지의 부호가 되기에 이릅니다. 거기에 이탈리아 자본과 제휴하여 국제무역회사를 세워 세계무대로 진출하려는 야심 찬 계획까지 세웁니다.

그러나 1904년에 발발한 러일전쟁으로 또 다시 큰 타격을 입은 그는 다시 낙향하게 됩니다. 그로부터 3년, 그는 마치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거꾸러진 다음 아라비아 광야에서 그리했듯이, 시골에 칩거하면서 기울어만가는 나라의 운명을 놓고 고심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바로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입니다.

# 2
남강 이승훈 선생님, 그는 3.1운동을 주도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분입니다. 구한말에 태어나 일제 강점기까지, 지독한 수난의 세월을 살아야 했던 분, 그러나 그 어려운 시기에 해외로 도피하거나 망명하지 않고 끝까지 국내에 남아, 수난의 현장을 온 몸으로 지켜냈던 우리 민족의 지도자, 하여 지금까지도 온 국민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지도자, 남강 이승훈 선생님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확인했듯이 그가 처음부터 민족을 생각한 지도자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공부를 많이 한 분도 아니었습니다. 역사의식이 투철한 분도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어떻게 해서든 돈을 벌어, 자기 가문을 양반가로 일으켜 세우려는 이기적인 욕심으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틈바구니에서 남강은 힘없는 나라의 백성에겐 양반 상놈이 따로 없다는 소중한 깨달음을 얻게 됩니다. <나라가 힘이 있어야 경제도 살 수 있다!>는 엄혹한 현실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그렇게 3년을 지낸 남강, 어느 날 우연찮게 평양을 들렀다가 도산 안창호 선생의 강연을 듣게 됩니다. <우리 모두 힘을 합해 나라와 민족을 지킵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인재를 양성하는 교육 진흥 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이제 기성세대는 구습을 타파하고 술과 담배를 끊고 이 운동에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불을 뿜는 듯한 도산의 연설은 남강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나이로 치면 도산이 남강보다 14살 연하였지만, 감동을 받은 남강은 도산을 찾아가 허리를 굽혀 인사하며 그의 손을 덥석 잡았습니다. 그리고 이제로부터 이 나라의 회복을 위해서 도산과 같이 행동하겠노라 약속합니다. 내 가정만 양반 될 수 있다면 그만 이라던 생각에서, 우리나라 전체를 양반 국가로 만들어 세계 만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전한 것이지요. 그 길로 남강은 스스로 상투를 잘라 양반 행색을 벗어던지고, 술과 담배도 끊어버립니다. 남강이 도산을 만나 새 사람으로 거듭난 것인데요, 그의 나이 마흔 셋이 되던 1907년의 일입니다.

그 길로 고향에 내려온 남강, 이듬 해 사재를 털어 학교를 세우니, 그 학교가 바로 저 유명한 오산학교입니다. 오산학교를 세우고 첫 입학식을 거행하던 날, 불과 일곱 명인 입학생들을 앞에 놓고, 남강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나라가 기울어져 가고 있는데, 우리가 그저 앉아 있을 수만은 없다.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하지만, 더 귀중하고 다급한 일은 백성들이 깨어 일어나는 일이다. 오늘 이 자리에는 7명의 학생 밖에 없지만, 이내 70명, 700명이 될 날이 곧 올 것이다. 열심히 배우고, 일심 단결하여, 나라를 빼앗기지 않는 백성이 되기를 부탁한다.>

그랬습니다. 남강의 목적은 이 나라와 이 민족을 제대로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니 인재가 필요했고, 해서 학교를 세웠던 것이지요. 그러나 학교의 설립자인 남강은 자기 스스로를 학교의 심부름꾼이라 여겼습니다. 지난 세월 돈을 벌기 위해 유기그릇 공장의 사환을 자청했듯이, 이젠 민족의 지도자를 키우기 위해 학교의 사환을 자청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배운 것이 없다는 이유로 교장이면서도 교실에 들어가 가르치는 일은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훌륭한 선생님을 모셔오는 일, 운영 경비를 마련하는 일, 학생들을 모아 오는 일, 학교를 청소하는 일, 심지어 변소 청소까지, 철저하게 학교의 심부름꾼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교실 뒤에 들어와 학생들과 같이 배우는가 하면, 기숙사에서 학생들과 함께 먹고 자며, 그들과 대화하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남강은 이 백성이 깨어나야 함을 절실하게 깨달았습니다. 그의 교육 목표는 백성들의 깨어남이었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민주 의식을 가진 백성으로 깨우치는 일이었는데요, 왜? 민주 없이는 민족이 바로 설 수 없음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그랬습니다. 그의 교육 목적은 민족이요, 그의 교육 방법은 민주였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중요한 사실은, 민족을 살리기 위해서 남강이 시행했던 민주 교육의 내용인데요,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구하라!>는 원대한 목표를 실현하기 위한 그의 교육내용은 매구 구체적이며 기본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몸을 청결하게 유지하라, 마음을 깨끗하게 유지하라, 앉고 서는 몸가짐을 단정히 하라, 함부로 침을 뱉지 말라, 옷고름을 잘 매라, 내 집 안과 밖을 깨끗하게 청소하라. 모든 일에 부지런 하라, 이것이 나라를 세우는 지름길이다!>

한 마디로 자기 인생 하나를 반듯하게 세우지 못하는 사람이 나라와 민족을 세울 수 없다는 거였지요. 더욱 중요한 사실은, 이러한 민주 교육을 말로 한 것이 아니라 몸으로 했다는 점입니다. 남강 자신이 이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였다는 뜻인데요, 해서 아침이면 빗자루를 들고 동네를 청소하는 남강 선생님을 따라 온 동네 사람들이 함께 빗자루를 들고 청소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노력한 결과, 오산 학교 출신 가운데 수많은 지도자들이 배출되었고, 일본 관리가 된 사람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오산 학교는 보통 사람이 들어가 민족의 지도자로 거듭나는 정신적인 용광로 같은 곳이었습니다. 남강은 교육가였습니다.

# 3
하지만 남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일합방이라는 치욕의 순간이 오고야 말았습니다. 도산을 만난 지 3년 만인 1910년의 일이었지요. 그 해 9월, 남강은 쓰라린 가슴을 부여잡고, 평양 거리를 방황하다가 우연히 산정현교회로 들어가게 됩니다. 아니, 성령께서 그렇게 인도하셨던 것인데요, 마침 교회 안에서는 <십자가의 고난>이란 제목의 설교가 진행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자리에서 남강이 큰 은혜와 감동을 받게 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가 나 자신과 민족을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심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화끈한 성격의 남강은 그날부터 예수를 믿기로 작정합니다. 도산을 만나 삶의 목표를 새롭게 설정했던 남강, 이번엔 한석진 목사님을 만나, 그 분의 설교를 통해 영적으로 거듭나게 되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주님을 영접한 남강, 이번엔 교회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다시 사재를 털어 자신의 고향에 교회당을 짓기 시작합니다. 1910년 10월의 일이었는데요, 은혜 가운데 두 달 만에 아름다운 교회당을 완공하게 됩니다. 교회의 이름은 오산교회라고 지었습니다. 이제 학교와 교회를 통해 우리 민족의 미래를 책임질 후진들을 양성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 12월, 남강은 일경에 체포됩니다. 백성들을 깨우치려는 남강의 교육운동이 일제의 눈에 거슬렸기 때문입니다. 결국 남강은, 1911년 2월, 소위 <안악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죄목으로 제주도로 유배를 당합니다. 남강을 고향에서부터 가장 먼 곳으로 보냄으로 그의 교육 운동과 신앙 운동을 막아 보려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해 9월 <105인 사건>이 일어나자 남강이 연루되었다고 하여, 그를 다시 서울로 압송합니다. 그로부터 한 달을 취조한 일제는, 남강에게 징역 10년 형을 선고합니다.

이 과정에서 남강은 혹독한 고문을 당합니다. 물고문, 매질 고문, 거꾸로 매다는 고문, 전기 고문, 하지만 남강은 그 모진 고문들을 주님을 향한 신앙으로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남강은 구치소 동료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내가 여기 에서 수 없는 고문을 받으면서도 참아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신앙의 힘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면 나는 벌써 포기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랬습니다. 남강은 감옥에서 늘 이렇게 기도하곤 했습니다. <아버지 하나님!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의 큰 고통을 참아 당신의 뜻을 이루어 드렸듯이, 이 죄인도 이 작은 고통을 잘 참아 당신의 높은 뜻을 이루게 하옵소서!> 그렇게 기도하며 남강은 감옥 안에서 성경책을 읽기 시작했는데요, 놀랍게도 구약 성경을 20회, 신약성격을 100회 통독했다고 전해집니다.

그 후 1915년 2월, 남강은 가석방으로 풀려납니다. 그의 나이 쉰 두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출옥 즉시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1년 동안 수학합니다.

평양에서 다시 돌아온 남강, 1916년엔 장로의 직분을 받고, 오산학교와 오산교회를 더욱 열심히 섬깁니다. 이 때부터 3.1 운동이 일어난 1919년까지 남강의 신앙이 가장 뜨겁게 불타올랐던 시기라고 평가합니다. 바로 그 때, 오산학교에서 남강의 가르침을 받은 학생 가운데, 한경직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랬습니다. 남강은 이 민족의 교육가이며 동시에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 4
<우리 민족을 침략하는 일제를 향해, 마치 독수리가 닭 뜯어 먹듯 한다!>고 질타했던 남강, 그러나 동시에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것은 이 나라의 백성이 깨어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갈파하면서, <이 백성 모두가 깨어나 일심협력하면 다시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고 믿고 가르쳤습니다. 그는 오직 이 한 가지 믿음으로, 한일합방 이후 단 한번도 독립운동의 현장을 떠난 적이 없었으며, 단 한 순간도 독립운동을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를 멈춘 적이 단 하루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던 중, 드디어 때가 왔습니다. 마침 국제 정세도 독립만세운동에 유리한 듯 보였고, 남강이 감옥에서 만났던 동지들과 오산학교 출신의 제자들이 여러 곳에서 독립운동에 가담하고 있었습니다. 해서 오산을 중심으로 상해, 동경, 길림, 경성, 그리고 저 멀리 안동까지 은밀히 연락하며, 3.1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해 나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남강은 기독교계의 지도자들을 만나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것을 독려하여, 마침내 16명의 지도자들의 수락을 받아내기도 했습니다.

해서 남강의 전기를 썼던 오병학 선생은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기미년 독립 만세 운동은 거의 남강 한 사람의 작품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3.1 운동이 남강의 작품이었다면, 그의 일생은 곧 하나님의 작품이었습니다.>

그런데 독립선언서를 초안하고, 마무리 작업을 하던 어느 날, 예기치 않은 내분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할 순서를 놓고 의견이 대립된 것이었습니다. 특히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누구의 이름을 가장 먼저 쓰느냐의 문제를 놓고 언성을 높이는 추태를 보이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남강 선생이 큰 소리로 호통을 칩니다. <순서는 무슨 순서, 이건 죽는 순서란 말이요, 죽는 순서를 정하는데, 누굴 먼저 쓰면 어떻단 말이야?> 하면서, 옆에 있던 손병희 선생의 이름을 가장 먼저 쓰게 했습니다. 남강의 이 말 한 마디에 분위기는 다시 숙연해졌고, 그 후로 일은 잘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남강은 3.1 운동으로 인해 다시 투옥되었고, 3년간의 옥고를 치르게 됩니다. 이로써 그는 세 번에 걸쳐 모두 9년이란 수형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남강은 감옥 안에서도 날마다 기도하며, 지금 이 시련은 이 민족에게 영광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훈련과정이라 믿어,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도와 말씀으로 승리하였던 것입니다.

1922년에 출옥하여 고향으로 돌아온 남강은 1930년 5월 9일, 67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까지 학교와 교회의 심부름꾼으로 최선을 다하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 민족을 사랑하였습니다. 남강이 세상을 떠난 지 32년이 지난 1962년, 그에게는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고, 그로부터 다시 12년이 더 지난 1974년, 서울 어린이대공원 안에는 그를 기리는 동상이 세워졌습니다.

# 5

오늘은 우리 민족의 광복 60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인 동시에 온전한 광복, 곧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광복의 기쁨과 분단의 슬픔이 교차하는 주일이라는 뜻인데요, 기쁘고도 슬픈 이 날,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읽고 싶습니다. / 12:1-2 / (읽기)

감사한 것은 수난의 역사를 살아온 우리 민족에게 하나님은 위대한 증인들을 구름같이 허다하게 세워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가운데 남강 선생님을 오늘 다시 만났습니다.

남강 이승훈 선생님, 그 분은 히브리서 12장 1절의 말씀처럼, 인내로써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신 분이십니다. 또한 남강은, 자신에게 맡겨진 경주를 경주하되, 오직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만 바라보며 달리신 분이십니다. 십자가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통을 참으시며, 온갖 수치와 모욕과 부끄러움까지도 개의치 않으셨던 분, 해서 예수님을 꼭 닮은 분, 아니 예수님을 닮으려고 애를 쓰셨던 분, 오늘도 주님과 함께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셔 우리 민족을 위해 간구해 주시는 분, 바로 남강 이승훈 선생님이십니다.

그 분이 3.1운동으로 인해 세 번째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의 일입니다. 취조하는 일경이 남강 선생께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 한일합방에 반대하고, 독립운동을 일으킨 주범이 맞지?> 그러자 남강은 일경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부자유와 불평등 속에서 짐승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번 거사는 자유를 지키라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일이다. 한국의 독립은 우리 민족의 영광인 동시에 일본에게도 행복을 가져다주는 일이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은, 아직도 남강의 꿈을 온전히 이루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남강이 살아 계시다면 호통을 치실만한 일들이 오히려 더 많아진 세태를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온 몸으로 가르치고 온 몸으로 섬기고 온 몸으로 심부름하셨던 민족의 스승 남강 선생님이 그리워지는 주일 아침입니다.

우리나라를 양반국가로 세워 세계 속의 한국으로 만들고 싶어 하셨던 교육가, 민족자본으로 외국자본과 맞서야 한다며 민족 기업의 건설을 주창했던 뚝심 있는 기독 실업인, 사재까지 털어 학교와 교회를 세워 후진을 양성하여 민족의 미래를 대비했던 영적 지도자, 무엇보다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셨던 독립 운동가, 지금도 살아 우리를 깨우치며 이 민족의 나아갈 길을 비춰주시는 민족의 큰 스승 남강, 아니, 무엇보다 예수님을 닮으려고 노력하셨던 주님의 제자 남강 선생님, 그 분은 오늘 우리를 위해 141년 전에 보내주신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남강은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우리 차례입니다. 이제 우리가 남강의 후예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나부터 남강의 후예로 살아야 합니다. 한 사람의 삶이 한 나라와 민족의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 지를 남강의 모범을 통해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특별히 우리 후손들을 더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아들딸들을 남강의 후예로 세우고 가르치는 일에 더욱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먼저 난 선생 세대는 나중에 난 학생 세대를 위한 심부름꾼인 것을 잊지 마시고, 나에게 주신 모든 힘을 다하여 민족의 미래를 준비하고 이 나라와 민족을 세우는 일에 마음을 모아 주시기 바랍니다. 우리 동광 교회가 오산 교회의 정신을 이어가는 우리 민족의 등불, 동녘의 빛이 이 되기를 소망하며, 이 일에 함께 하는 모든 분들에게 주 성령께서 함께 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장 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