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켄지 호주 선교사 가문 여러 자료 스크랩, 편집
James Noble Mackenzie 1865~1956
1910~1938 조선 사역
데이비스 선교사의 순교가 불을 지펴서,
호주에서 해방 전까지 78분이 넘는 선교사가 부산 경남으로 입국했는데,
그 중에 한 분, 멕켄지 선교사는, 손양원 목사님에게 깊은 감화를 주신 분이다.
(※캐나다장로회의 윌리엄 맥켄지 선교사와 구별 요.)
◑맥켄지 선교사의 청년 시절 및 뉴헤브리디즈 선교사역
우리가 살고 있는 호주 가까이에 위치한 바누아투란 나라를 아십니까?
이 나라의 국장엔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존재한다’고 적혀 있죠
인구 20만 명의 작은 기독교 국가이지만
이 나라에도 깊고 어두운 상처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173년 전 1839년 런던선교회에서 파송한 존 윌리엄스 목사가 패티스 선교사가
바누아투 도착 다음날 식인종으로부터 비참하게 살해됩니다
캐나다 출신 조지 고든 선교사 부부도
그리고 형을 살해한 식인종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끄거운 열정으로
바누아투에 선교사로 입국한 제임스 고든 선교사도 차례로 식인종의 습격을 받아 순교합니다
오랜 세월 후 1894년 12월 고든 선교사 후계자로 제임스 노블 맥켄지 선교사 부부가
바누아투에 산토 섬에 도착합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을 글을 읽을 줄도 몰랐고
세례 받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맥켄지 선교사 부부가 10여년 동안 헌신한 결과
650여명이 문맹에서 해방되고
330여명이 성찬식에 참여합니다
맥켄지 선교사는 이곳에서 사역하는 동안
사랑하는 아내를 열병으로 잃었습니다
맥켄지 역시 그곳 기후에 더 견딜 수 없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우리의 조국 한국 선교사로 지원했습니다
맥켄지 선교사가 새 선교지로 떠나던 날
식인종의 나라 산토섬의 가난한 원주민들은 선교사와의 작별을 아쉬워 하며
칡뿌리, 활, 화살을 팔아모은 200파운드나 되는 몫돈을 선교사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그 돈이 그들도 처음 들어보았을 한국 선교의 씨앗이 되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감동케 합니다
...................
그는 1895~1909년, 조선으로 오기 앞서, 뉴헤브리디즈(바누아투)에서
선교사역으로 헌신했다. 주1)
그는 거기서 아내를 잃고, 호주로 돌아와서 잠시 쉬다가
“한 번 더, 주여! 나를 고난과 파멸의 길로 이끌어주옵소서. 주여! 한 번 더!”
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호주선교회의 일원으로서 1910년 부산에 도착한다.
아내를 잃고 부산에 온 맥켄지 선교사는,
당시 경남 진주에서 교육선교사로 사역하던 호주여성 메리와 재혼한다.
◑맥켄지 선교사의 부산 한센병환자 사역
맥캔지 선교사 부부는, 특별히 부산의 나환자들을 사랑하며 돌보았다.
당시 조선의 정서는, 한센병 환자들을 사람 취급 하지 않았다.
그렇게 천대와 멸시를 받는 사람들을, 맥켄지 선교사가 돌본 것이다.
그래서 이런 선교사들의 노고로,
과거에 우리나라 한센병 환자들은, 거의 다 크리스천이었다고 한다.
맥켄지 선교사는, 1938년에 호주로 돌아가기까지
28년간 한센병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그들을 섬기는 사역을 했는데,
나중에는 한센병에 대한 전문가가 되어, 의사면허도 받았다고 한다.
부산에서 한센병자들을 섬기던 맥켄지 선교사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도전을 받은 조선의 20대의 한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가 바로 손양원 (목사님)이다.
손양원은 25세 때, 첫 사역지가 부산 감만동 한센병자 교회였다.
1926년 3월, 경남 성경 학교에 입학을 한 후에 동인이가 한 살 되었을 때
부산 감만동 한센병자 교회 전도사로 부임하였다.
당시 감만동 교회는 6백여 명의 대부분이 한센병자들이었다.
호주 선교사 맥켄지 Mackenzie의 지도를 받으면서
부산 나병원 교회 전도사로 사역하기 시작하였다.
(손양원 당시 전도사가, 애양원 교회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평양 신학교 2학년 때,
애양원 교회에 사경회 강사로 초청된 것이, 그 인연의 시작이었다.)
한국교회의 큰 별, 손양원 목사를 감화시킨 그 공적만 해도,
맥켄지 선교사의 사역은, 천국에서 별과 같이 빛날 것이다.
그는 부산 감만동에 있던 나환자촌 <상애원>과,
부산 용호동에 세워진 <나환자의 집〉등지를 돌며 치료를 시작했다.
맥켄지의 한국 이름은 ‘매견시’이다.
◑맥켄지의 딸, 헬렌 맥켄지 (매혜란), 케서린 맥켄지 (매혜영)
Helen Pearl Mackenzie
1913~2009 (1952~1975 부산 사역)
▶맥켄지 선교사는 4녀 1남을 두었는데,
5째인 아들은, 2살 때, 부산에서 죽는다. 사진 상단.
첫째 딸 헬렌과 둘째 딸 캐서린은, 부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위 사진 가운데 두 어린이)
그들은 평양 외국인학교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호주로 가서 대학을 마치고, 의사가 되어서,
1952년, 부산에 의료선교사로 돌아온다.
1938년 호주로 귀국한 맥켄지 목사는 1956년 호주에서 세상을 떠났지만,
또 자기 두 딸을 한국에 보낸다.
1952년 당시는 한국전쟁(625)상황이었다.
큰 딸인 의사 헬렌 맥켄지와 동생이자 간호사인 캐서린 맥켄지는
전쟁이 나면, 가급적 다 떠나려하는데, 이들 자매는, 도리어 한국에 들어온 것이다.
물론 거기에는 아버지 맥켄지 선교사의 기도후원이 있었을 것이다.
그들 자매는, 처음에는 부산진교회의 유치부실을 빌려서, 의료사역을 시작한다.
이것이 나중에는, 부산에서 유명한 <일신기독병원>이 된다.
부산에 사시는 분들은, 자기나 자기 가족 가운데,
거의 다 일신기독(산부인과)병원에서 출산한 가족력이 있다.
두 의료 선교사의 도움으로, 출생한 아기는 22만명이라고 한다.
이들은 6·25사변이 일어나 우리 민족이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을 때
헌신적으로 의료사업을 펼쳤다.
이 병원은 국내 굴지 산부인과병원으로 자리잡아,
1982년 11월 <일신기독병원>으로 승격했으며
지금은 시설 확장으로 320병상의 종합병원이 되었다.
지금은 좋은 산부인과 병원이 전국에 많지만,
1950~70년대 당시에는, 출산하다 산모가 사망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기 때문에,
안전하고 믿을만한 산부인과 병원으로서, <일신 산부인과>는 부산에서 큰 신뢰를 받았다.
그리고 평생을 헌신했던 그들은, 1972년에 병원을 한국 측에 환원하고 호주로 귀국했다.
그러나 맥켄지 가문의 선교사들이 뿌린 복음의 열매는
나무가 자라나 계속 숲을 이루고.. 열매를 맺어갈 것이다.
맥켄지 자매 선교사들이 떠나면서, 이 병원은 재정적으로 어려워졌다.
1972년 당시는, 아직 우리나라가 재정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이었다.
이 병원이 힘들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또 있었는데,
산부인과 병원이지만, 낙태 시술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1972년 이들 의료 선교사 자매(맥켄지 선교사의 딸들)가 떠날 때,
호주 국영TV가 와서, 이들 자매의 수고와 헌신을 찍어서, 호주 TV에서 방영했다.
1974년에, 당시에 10억이 넘는 돈이 호주에서 모금되었다.
지금 가치로 따지면, 상당한 액수가 될 것이다.
그래서 <일신산부인과 병원>은, 당시 재정위기를 극복하고.. 오늘까지 남아있을 수 있었다.
매혜란 선교사의 제자인 일신기독병원 전정희 총동문회장은
"제자들에게 '소외된 사람을 내 가족같이 돌보며, 불의에 타협하지 말고
공과사를 분명히 하라'는 조언을 자주 하셨다"고 회상했다.
특히 검소한 생활이 몸에 배인 것으로 유명하다.
더운 여름은 부채질로 참아내고, 변변한 나들이옷조차 없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호주 귀국 무렵, 병원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모아 전해 준 위로금은
일생 유일의 목돈이었지만, 이마저도 전액 병원 발전기금으로 내놨다.
특유의 소박한 삶은, 아직도 제자들과 지인들 사이에서 회자되며
정신적 계승이 이뤄지고 있다.
선조의 선교정신을 이어받아 믿음의 본을 보이며
세상 명예보다는, 고결한 삶을 선택한 것을 말이다.
매혜란 선교사는 1972년 병원 설립 20주년을 맞아
운영권을 한국인에게 모두 일임하고 호주로 귀국한 후
신학을 공부하며 소박하게 남은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호주로 귀국할 때도 조그만 가방 하나가
20여 년 한국 생활을 정리하는 짐의 전부였다고 (2009 소천)유족들은 전했다.
한국인보다 더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 매혜란, 매혜영 선교사는
한국에서의 사역을 물어보는 이들에게 늘 한결같은 답을 했다고 한다.
"한국전쟁 당시 가장을 잃고 눈물을 흘리던 산모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이 아기 잘 낳고 안 죽고 살아나니 얼마나 감사했는지요.
저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봉사와 박애의 정신을 전하며
만족감을 얻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답니다."
▶여기서 맥켄지 선교사의 딸들인, 이 의료선교사 자매를 소개하는 이유는,
우리나라 성도님들은, ‘선교사’라고 할 때,
해방 이전에 들어온 선교사들만.. 주로 기억하고 있다.
1950년대 이후에 들어오신 선교사들은, 거의 기억하지 않는다.
1950년대 이후, 625전쟁의 참화로, 한국이 폐허가 되어 있었을 때,
우리나라가 오늘날 이렇게 놀랍게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전후 당시 선교사들이 분명히 한 몫을 감당해 주셨다.
선교사들이 본국에 편지를 써서, 많은 재정적 도움을 호소하였고,
실제로 그런 도움을 받아, 오늘날 우리가 OECD국가에 가입하는
그런 ‘빚’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결코 안 될 것이다. 펀 글
이 두 분은, 독신으로 사역하셨다.
노년에도, 멜버른에서, 두 자매가 서로 의지하며 함께 사셨다.
동생은 2005년도에, 언니는 2009년도에 소천하셨다.
호주 멜버른에 가면, 이 자매 선교사님들의 묘지가 있다. ↙
자세히 보면, Helen Peral Mackenzie (매혜란)
아빠 엄마가 진주에서 만났으니까, 영어 미들 네임에 '진주' Pearl를 넣은 것이다.
◑매혜란 선교사 무궁화장 추서
22만 명의 한국 아기를 받아낸 ‘파란 눈의 산파’에게
2012.04.06일 보건의 날을 맞아 국민훈장 가운데 첫 번째 등급인 무궁화장이 추서됐다.
보건복지부는 이날 한국 산모들의 건강을 위해 헌신해온 일신기독병원 설립자
고(故) 매혜란 여사에게 훈장을 추서했다고 밝혔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보건의료 유공자를 찾아, 2011년 12월부터 일반인의 추천을 받아 결정했다.
국민이 뽑은 첫 무궁화장의 주인공인 셈이다.
지금까지는 병원이나 의료 관련 단체의 추천을 받아 훈장을 수여했다.
매혜란 여사의 원래 이름은 헬렌 펄 매킨지.
호주 출신인 목사 아버지가 1910년대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한 게 한국과 인연의 시작이다.
그는 부산에서 태어나 평양외국인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국으로 돌아갔다.
호주행을 택한 것은 의료기술을 배워 한국에 돌아오기 위해서였다.
멜버른 의대를 졸업한 뒤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다.
간호사 동생과 1952년 부산 동구 좌천동에 일신부인병원을 세웠다.
30대 후반의 미혼 여의사는 전쟁으로 쑥대밭이 된 부산 경남의 골목길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혼자 힘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조산사를 교육하는 데 힘썼다.
지금까지 일신기독병원을 거친 조산사는 2600명에 달한다.
1960년경 병원에서 1kg도 되지 않는 미숙아가 태어났다.
부모는 “자식이 이미 8명이나 있으니 이 아이는 포기하겠다. 알아서 하라”며
병원에 아기를 두고 나가버렸다. 부모를 원망할 여유도 없었다.
그는 “일단 생명부터 살려야 하지 않겠느냐”며 아기를 지극정성으로 돌봤다.
호주에서 인큐베이터도 들여왔다. 하늘도 정성에 감복했을까.
6개월이 지나자 아이의 앙상했던 뼈에도 조금씩 살이 붙었다.
아이 부모를 수소문했다. 혹시 병원이 치료비를 내놓으라고 할까 봐 주저하며 부모가 찾아왔다.
그는 “아이를 잘 키워 달라”며 당부의 말만 건넸고, 아이 엄마는 눈물을 흘렸다.
부모는 매혜란 여사의 뜻을 기리겠다며, 아이 이름을 병원명과 같은 ‘일신’으로 지었다.
어느 날 한 산모가 병원 밥을 먹다 펑펑 울었다.
그가 이유를 물으니 산모는 “나는 미역국을 먹고 있는데 집에 있는 애들은 굶고 있다”고 말했다.
“일단 몸부터 추스르라”고 다독거렸다. 다음 날 산모가 퇴원할 때,
그는 미역과 음식거리를 한 아름 안겨줬다.
가정형편을 뻔히 알기에 혹시라도 몸조리를 못할까 봐 걱정해서였다.
당시 병원에서 일했던 정춘숙 일신기독병원 계장은
“매혜란 여사는 환자가 돈이 없다고 치료를 못 받아서는 안 된다는 신조를 가진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산모들이 돈 걱정 때문에 야반도주하는 일도 빈번했다.
원무과 직원들이 “돈을 받으러 집으로 찾아가야 한다”고 할 때마다
매혜란 여사는 “그러지 말라”고 만류했다.
매혜란 여사는 1976년 한국인에게 병원을 위임하고 고국으로 돌아갔다.
여생을 그곳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보내다
2009년 9월 18일 9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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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맥켄지 선교사의 청년 시절 및 뉴헤브리디즈 선교사역 (이상규 교수)
제임스 노블 맥켄지(James Noble Mackenzie)는
1865년 3월 7일 스코틀랜드에서
아버지 케네스 맥켄지와 어머니 케더린 사이에서, 7남매 중 6번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맥켄지가 5살 때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맥켄지의 삶은 순탄하지 못하여, 16세가 되던 1881년 일자리를 얻기 위해 집을 떠났다.
그는 1882년 봄 글라스고로 갔다.
그곳에서는 무디, 생키 등 미국의 부흥사들에 의해 전도 운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신앙 부흥 운동의 열기 속에서 맥켄지는 깊은 영적 체험을 하게 되었다.
무디의 설교를 통해 은혜를 받은 그는, 1883년 봄,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러나 이 결심을 이루기에는 현실적인 제약이 너무도 많았다.
우선 생활 대책이 서지 않았고,
목사가 되기 위해서는 대학 교육과 신학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했다.
맥켄지는 1885년 1월 중국으로 파송되는
‘케임브리지 세븐’의 선교사 파송 예배에 참석하였는데
이것은 그의 생애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케임브리지 세븐’이란, 명문 케임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유능한 청년 7명이,
자신의 모든 희망찬 미래를 뒤로 하고, 해외 선교를 위해 생애를 바치기로 하고
중국으로 향했던 젊은이들을 의미한다.
이들의 헌신은, 당시 영국의 해외선교에 큰 확산을 가져왔다.
맥켄지는 여러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1885년 글라스고 대학에 입학해
1891년 봄에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그 해 가을에는 자유 교회(Free Church of Scotland)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였다.
그는 당시 세계 선교 운동에 큰 영향을 주었던
‘학생 자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에 참여하였다.
▶한편 맥켄지로 하여금 선교사의 길을 가도록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사람은
존 페이튼이었다.
존 페이튼 John Paton 은
20세기의 가장 훌륭한 선교사 중의 한사람으로 일컬어지는데,
그는 1858년 스코틀랜드의 개혁 장로교회(Reformed Presbyterian Church)의
파송을 받아 뉴 헤브리디즈로 가서 일한 개척 선교사였다.
그는 죽음의 위험과 고통스런 날을 인내하면서 복음 전파만이 아니라
피선교지의 삶의 환경을 개선하는 데도 중요한 기여를 했던 인물인데, 후
일 그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선교사로 이적하였다.
그가 1881년부터는 영국과 영국의 영향 하에 있는 나라들을 순방하면서
선교집회를 열고 뉴 헤브리디즈 선교를 위한 기금 모금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가 여러 후원자를 통해 얻은 후원금으로 데이스프링(Day spring)이란 이름의
배를 구입하고 여러 섬들을 순회하면서 복음을 전파하고
시약을 베풀었던 일은 유명한 일로 남아 있다.
페이튼이 1894년 글라스고를 방문하고 글라스고 대학 강당에서 강연할 때
맥켄지도 이 모임에 참석하였다.
이 때가 1894년 1월 14일 주일 오후였다. 1월 17일의 모임에도 다시 참석하였다.
이 페이튼과의 만남을 통해
그는 선교사로서의 삶을 확실히 분명히 결단하게 되었고,
과거에는 중국을 생각했으나
이제는 식인 습관과 무지와 폐습에 빠져 있는 뉴 헤브리디즈(바누아투)로 가기로
작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맥켄지가 페이튼의 강연을 들을 때, 지금 필요한 것은,
사실 선교 기금이 아니라, 선교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확신을 얻게 되었다.
이 확신은 그로 하여금 뉴 헤브리디즈 선교를 자원하게 만들었다.
매켄지는 매주일 모이는 해외 선교를 위한 기도회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그의 이 선한 열심은 또 다른 축복이기도 했다.
그는 이 기도회를 통해 후일 그의 아내가 된 마가렛 켈리(Margaret Kelly)를 만났고
또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마가렛 켈리는 1870년 1월 17일 생인데,
콩고에 선교사로 갈 목적으로 간호사 훈련을 받은 여성이었다.
이후 이들은 함께 뉴 헤브리디즈의 산토(Santo) 지방에서 일하도록
페이튼으로부터 정식 부름을 받았다.
이들은 선교지로 가기 전인 1894년 7월 3일 결혼하였다.
매켄지 부부는 1895.04.04. 시드니를 떠나, 04.11.에 뉴 헤브리디즈(바누아투)
에 도착하였고, 이곳에서 다시 배를 갈아타고 산토(Santo)로 향했다.
그는 드디어 임지에 도착한 것이다.
그는 이곳에서 건강상의 이유 때문에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이곳을 떠나기까지
15년을 일했다.
우선 그는 이곳 언어인 노구구(Nogugu)어 공부에 진력하였다.
그러나 그의 언어 선생의 죽음으로 인해 독학으로 언어 공부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는 인내하면서 이곳에서 복음을 증거하였고, 언어에 진보가 나타나자,
1896년 8월에는 성경 공부를 먼저 시작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노력이 열매에 1897년 3월 25일에는 첫 열매를 얻었다.
즉 이날 그는 12명의 현지인들에게 세례를 배풀어 원주민 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선교사들에게 있어서 뿌린 씨앗의 열매를 보는 일은 항상 즐거운 법이다.
그러나 그는 이 기쁨과 함께 많은 반대와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다.
이국의 문화, 이국적 풍습, 특히 식인 습관이 남아 있는 문명의 오지에서
삶을 가꾸어 간다는 것은 대단히 힘겨운 일이었으나
그보다 어려운 일은 복음의 대적들이었다.
이들의 계속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 모든 일들을 감내하면서 15년의 날들을 보냈다.
그는 1908년 12월 4일 열병으로인해 사랑하는 아내와 사별했다.
이 때 그녀의 나이 38세였다.
그의 아내를 앗아갔던 열병은 맥켄지 자신과도 무관할 수 없었다.
그 자신도 심각한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고
이제 그 열대 지방에서의 생활을 다시 검토해 보지 않으면 안 되었다.
멜버른으로 돌아가 있던 맥켄지는 다시 임지로 돌아갈 것인가를 고심했다.
의사는 맥켄지가 산토를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민하던 그는 15년간 일했던 산토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는 1909년 5월 빅토리아 장로교 해외 선교부(Foreign Mission Committee)
에 임지를 한국으로 옮겨 주도록 정식 요청했다.
맥켄지는 해외선교부가 아니라 여전도회 연합회(PWMU) 산하에 조직된
청소년 선교단(Young Peoples Mission Band)의 선교 후원을 받고,
이 단체의 첫 선교사로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는 모든 준비를 갖추고 1910년 1월 초 한국으로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1910년 1월 5일 멜버른을 떠난 그는 선편으로 시드니로 향했고,
다시 그곳에서 엠파이어 호(S. S. Empire)를 타고 시드니를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이곳에서 행한 그의 선교활동이 얼마나 힘겨운 것이었는지는
산토 섬에서 쓴 그의 일기 제목을 보면 알 수 있다.
“노고구(Nogogu)에서 야만적인 사람들이 교회 공격,
주일아침 예배시간에 교인들에 대한 괴한들의 소총 공격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고국 호주로 돌아와서
“한 번 더, 주여! 나를 고난과 파멸의 길로 이끌어주옵소서. 주여! 한 번 더!”
라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 기도가 응답되어, 조선으로 오게 된 것이다.
그리고 호주선교회의 일원으로서 1910년 부산에 도착한다.
아내를 잃고 부산에 온 맥켄지 선교사는,
당시 경남 진주에서 교육선교사로 사역하던 호주여성 메리와 재혼한다.
나중에 이들 부부사이에 태어난 첫째 딸, 둘째 딸이
<부산 일신산부인과>를 세우고, 의료 선교사로 또 헌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