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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한 사람

LNCK 2012. 10. 21. 18:43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한 사람          막10:17~31           12.06.10.설교스크랩



요즘 캠퍼스에서 전도를 하다보면

영적인 세계에 관심을 가진 자들을 만나보기가 정말 어렵습니다.

저는 전도할 때 항상 “학생, 사람에게 영혼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렇게 물어 봅니다.


그러면 여러 반응이 나옵니다.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학생들은 “잘 모르겠는데요” “별 관심없는데요” 하면서 도망가 버립니다.


저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면서 노래 듣고, 스포츠 중계 보고,

친구들과 카톡하는데 관심이 많지.. 영적인 세계에는 별로 관심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아주 특이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의 관심은 영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향해 달려와서 꿇어 앉아 물었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마태복음에 보면 이 사람은 청년이었고(마19:22), 누가복음에 보면 관원이었습니다(눅18:18).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재물이 많은 부자였습니다. 야! 얼마나 좋은 양입니까?


이 청년은 여러 가지 면에서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젊다는 것도 큰 재산이죠. 건강과 젊음, 얼마나 소중한 자산입니까?

관원으로서 높은 관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세상의 명성과 부를 다 가지고 있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영생의 문제였습니다. 그의 영혼에 참 만족이 없었습니다.

영생에 대한 확신이 없고, 왠지 불안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민고민 하다가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와 좀 비슷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니고데모보다 더 훌륭하죠.

니고데모는 나이가 지긋했는데 이 사람은 청년이니 얼마나 사랑스럽고 귀합니까?


어쨌든 인간은 소유로 만족할 수 없고, 영적인 문제가 해결 되어야만 합니다.

예수님은 이 청년을 어떻게 도와 주셨습니까?


▶1. 첫째로, 예수님은 이 청년에게 죄인된 자아를 발견 하도록 도와 주셨습니다.

이 청년의 질문이 무엇이었습니까?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는, 자신도 무슨 선을 더 쌓으면, 영생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는 성실했습니다. 부지런했습니다. 지성적인 청년이었습니다.

열심히 사는 모범적인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실력도 쌓고, 재물도 쌓고, 사회적 명성도 쌓았습니다.

이제 선만 더 쌓으면 완벽의 경지에 이르지 않을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물어 보았습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그러나 인간이 선한 일을 많이 행한다고,

무슨 선을 쌓는다고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에베소서 2:8절에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고 하였습니다.


구원과 영생은 하나님이 일방적인 은혜로 주시는 선물이지,

우리의 노력과 의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말씀하셨습니다.

18절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이 말씀은 예수님이 선하지 않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을 선한 인간의 차원으로 끌어내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절대 선이 되십니다. 우리 인간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인간의 차원으로 끌어 내려서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되고자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이전에 있던 센터에 한 분은, 청년 때에 굉장히 순수하고, 겸손하고, 부지런하고,

싹싹하고, 예의 바르고, 그렇게 선할 수가 없었습니다. 얼굴부터 선하게 생겼습니다.

일대일 시간에 정확하게 나타나고, 모든 모임에 절대적으로 참석합니다.

또 청소를 얼마나 잘하는지.. 정말 너무나 사랑스러운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예수님을 잘 영접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스스로 너무 선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실제로 정말 선하고, 부지런하고, 봉사 잘 하고, 뭐 나무랄 데라곤 한 곳도 없었습니다.


공부는 별로 못해요. 학점이 선동렬의 방어율. 0점대를 기록하였습니다.

그러나 인격만은 최고가 되고 싶은 거예요.


이런 사람들의 문제는 신앙생활도 자신의 인격도야와 자아완성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볼 때는 너무나 착하고, 선한데 속으로 교만합니다.

자신의 허물과 죄를 절대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내면문제가 드러나면, 그동안 쌓아온 자기 의가 무너지기 때문에

죽는 줄 압니다.


이런 양 돕기가 가장 어렵습니다.

차라리 세리출신이나 중풍족속, 사마리아, 돌탕(돌아온 탕자) 출신들은

좀 처절하지만, 자신들이 죄인인줄 알기 때문에 돕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자기 의와 성실로 똘똘 뭉친 사람은

차돌처럼 단단하기 때문에, 뚫고 들어가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부자관원청년에게 계명의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속여 빼앗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예수님의 의도는, 이 계명의 거울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죄인된 자기를 발견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20절. “그가 어짜오되 선생님이여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갈수록 태산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족족 바른 말로 받아 넘기니 얼마나 힘든 양입니까?

그러나 과연 이 청년이 하나님의 계명을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요? 정말 그렇게 했다면.. 사람이 아니죠.


이것은 마치 부모님이 아이에게 ‘공부해라’ 말하면 ‘공부 다 했어요’ 그렇게 대답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기는 물론 그날 공부할 양을 다 마쳤다고 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생각이고, 공부를 다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는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는데

계명의 세계가 얼마나 깊고 높은데 다 지킵니까?

살인이나 간음은 그렇다 치더라도

거짓증언 하지 않는 것, 부모를 공경하는 것.

그 계명을 누가 감히 다 지켰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로마서 3:10에 보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롬3:20).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존귀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나 허물지고 거짓되고 추악한 죄인인가?

겸손히 인정하고 회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형편없는 죄인인 것을 인정하고 회개할 때

비로소 죄사함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선물로 영생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어려서부터 착실하게 선하게 살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의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더러운 누더기와 같습니다.


사도바울은 이전에 자기같이 의롭고 선한 사람이 없다는 자기의로 충만하였습니다.

“나는 팔 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니라(빌3:4-6)”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흠이 없는 자요, 완벽에 가까운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이 뭘 몰랐을 때이고, 자신이 정말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 섰을 때

어떻게 고백했습니까? “내가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요, 죄인 중에 괴수였노라(딤전1:13-15)”


세상에 나같은 죄인이 없다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흉악한 죄인, 죄인의 우두머리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열심과 성실의 기준으로 하면 무흠한 사람, 완벽한 인간,

방어율 0점대의 사람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가 철부지 어린아이였을 때 생각이고,

영적인 눈을 떠서 하나님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니, 왕 죄인, 흉측한 죄인,

감히 고개를 들 수 없는 죄인, 심판받아 마땅할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그가 죄인된 자아를 깊이 발견했을 때 주님이 그를 만나 주시고

죄사함의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때 그의 마음에 영생의 기쁨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딤전1:14~15)”


제가 앞에서 말했던 그 형제분도

너무나 자기 의와 성실로 똘똘 뭉쳐서, 예수님을 영접하기 힘들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하고, 양도 열심히 치는데.. 그 마음에 기쁨이 없습니다.

죄인된 자아발견이 없고, 겉으로만 의로운 척 하려고 하니.. 얼마나 힘듭니까?


그가 이처럼 이중적인 생활을 하다가 마침내 곤고한 내면을 견디지 못하고

어느 날 밤에 몰래 홍등가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 사건을 말미암아 그는 자기 의가 완전히 무너져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자신이 얼마나 위선적이고, 음란하고, 추악한 죄인인가

자신을 깊이 발견하고, 회개하고, 예수님의 사죄의 은혜를 덧입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의 영혼은 정말 하늘을 나는 새와 같은 자유함을 덧입게 되었습니다.


사람 앞에서 의인인 척 하고 사느라 지옥 같았던 삶을 청산하고

영생의 기쁨이 그 마음에 넘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워싱턴에 선교사로 가서, 충성스럽게 하나님 역사를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진실되게 죄인된 자신을 인정하고 죄사함을 받을 때

우리 마음에 영생의 기쁨이 충만하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막2:17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이번 여름수양회를 통해서 우리가 죄인된 자신을 깊이 발견하고

죄사함을 받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 하늘로부터 쏟아 부어 주시는

진정한 자유, 영생의 기쁨, 천국의 감격을 충만히 누릴 수 있길 기도합니다.


▶2. 둘째로, 예수님은 자신의 재물을 팔아서

적극적으로 나누어 주는 삶을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사랑하사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21


지금 이 사람의 문제는 뭐가 부족하고 결핍되어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진 것이 너무 많아서 문제입니다.

재물이 너무 많고, 타이틀이 너무 많고, 거기다 종교적 열심까지 지나칠 정도로 강렬했습니다.

문제는 그런 열심과 열정이 다 <자기를 위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부자가 되고, 내가 관원이 되고,

내가 고매한 인격의 소유자가 되고, 내가 자아완성에 이르는 것.

그것이 그의 인생의 목표였습니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까?


그는 다른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영광과, 이웃에 대한 배려와 섬김.. 그것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는 다 훌륭한데 한 가지가 부족하다. 너의 실력, 너의 능력, 너의 인격.

그것을 너를 위해서 쌓아두지 말고, 적극적으로 팔아서 다른 사람에게 나눠 주어라.

그리하면 하늘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여기서 예수님은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십니다.

세상 보화는 자기를 위해서 열심히 긁어모으고 쌓아둘 때 얻을 수 있지만,

하늘 보화는 반대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을 위해서 내가 가진 것을 열심히 팔고, 베풀고, 나눌 때

하늘의 보화가 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저는 최근에 <베트남의 장요나 선교사님의 간증집>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는 연세대 상대를 나와서 벽산그룹 비서실장을 거쳐 건설회사를 차렸습니다.

국보위를 거쳐 국회의원까지 출마했습니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대비해서 부산에 요트장을 건설한,

잘 나가는 건설사 사장이었습니다.


그런데 1985년 어느 날, 그의 나이 40세에 전신마비가 와서

10개월 동안 식물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는 본래 모태신앙이었고, 둘째 아들이 끓는 물에 빠져서 죽게 되었는데

주님이 살려주시는 큰 은혜도 체험했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돈 버는 재미와 쾌락에 빠져,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를 하나님이 하루아침에 병신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는 병상에서 자신의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자신이 파월장병으로 갔던 베트남에, 1990년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그동안에는 자신을 위해서 쌓는 삶을 살았지만

앞으로는 적극적으로 베푸는 삶을 살고자 결단한 것입니다.


베트남은 공산주의 국가이고, 우상종교도 많고,

정글지역이 많아서 선교활동하기가 정말 힘들었습니다.

감옥에도 7번이나 가고, 죽을 고비도 수없이 넘겼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선교지를 떠나지 않는 이유는

그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저는 1986년에 이미 죽었습니다. 10개월간 한마디 말도 못하고 꼼짝도 못하는

식물인간으로 있던 저를 주님이 살려 주셨으니 제가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그는 스스로 이렇게 결심했다고 했습니다.

“한국군 32만명이 베트남에 파병되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고 괴롭혔던가?

베트남전에서 한국인이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죗값을 내가 사랑의 빚으로 갚자.

이 영광스러운 전쟁에, 내 자신을 남김없이 드리자.


나의 시간, 나의 은사, 나의 힘, 나의 가족, 내가 입고 있는 옷까지도

나의 것으로 결코 생각하지 말자.

주님의 사역을 위해 내 생명까지 모든 것을 바치자”


그는 자신의 침대도 관으로 짜서 만들고 그 위에서 잤습니다.

언제든지 순교할 각오를 한 것입니다. 그가 좋아하는 말씀은 갈2:20절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입니다.


그가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주고, 베풀고자 하는 자세로 살았을 때

그는 너무나 행복하고 기뻤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간증집 제목이 <정글에 천국을 짓는 사람>입니다.


그는 한쪽 눈도 실명상태이고, 건강이 좋지 못해서 지팡이를 집고 다니지만,

‘죽으면 죽으리로다’는 각오로 모든 것을 드려서 선교역사에 헌신했을 때

하나님은 어마어마한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베트남에 157개의 교회와 11개의 병원, 캄보디아에 9개 교회,

라오스에 11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자신을 7번이나 감옥에 가두었던 베트남 정부는 지난 2008년에

외국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수교평화훈장까지 주더라는 것입니다.


참 신기하죠, 그가 이 세상에서 돈과 명예를 다 얻고 더 많은 것을 얻고자 발버둥쳤을 때,

그는 방탕한 죄에 빠져 결국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회개하고 모든 것,

심지어는 생명까지 후진국 백성들을 위해서 다 팔아서 주고자 했을 때

그는 천국보화를 얻고, 정글에 천국을 건설하는 위대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 그대로입니다. “가서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본문에 이 부자 청년도 만약 이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면

베트남의 장요나 선교사님처럼 천국보화를 소유한 값진 인생을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부자 청년이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면

예수님의 13번째 사도가 되어서 인류역사에 길이 빛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 하였습니까?


“그 사람이 재물이 많은 고로 이 말씀으로 인하여 슬픈 기색을 띠고 근심하며 가니라” :22


그는 자신이 쥐고 있는 너무 많은 재물로 인해서

하늘보화와 13번째 제자가 되는 축복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그에게 있어서 재물은 복이 아니라, 독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천국보화를 소유하고 영생을 맛보기 원한다면

내게 있는 소중한 것을 기꺼이 팔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나의 소중한 시간과 물질, 나의 인간적인 꿈과 야망을 과감하게 팔아 버리고,

예수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 사명을 위한 희생과 헌신의 길을 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8:34~35)”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열심히 파셨습니다.

시간을 파시고, 날품을 파시고, 마침내는 생명까지 십자가 위에서 다 파셨습니다.

마지막 남은 피 한 방울까지 우리를 위해 다 파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 숨을 거두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다 이루었다”

세상 사람은 대부분 자신의 욕망을 채웠을 때, 자신의 야망을 완수하였을 때

“다 이루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100% 다 희생하고, 베풀고 주었을 때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성취는 우리의 성취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정반대입니다.

주고 베풀고 나누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목표였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비참하게 되고 망했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부활 영광에 이르게 되셨습니다.

가장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보좌 우편, 천국 보화를 얻게 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죄인들을 구원하는 생명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게 되었습니다.


사도바울도 이전에 자신이 자랑스럽게 여기던 것들을 다 배설물로 여기고,

모든 것을 다 바쳐 생명구원역사에 헌신했을 때

얼마나 보배롭고 영광스러운 인생을 살았습니까?


그는 사도행전 20:35절에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부자 청년은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23절을 봅시다. 예수님은 떠나가는 부자청년을 억지로 붙잡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제자들에게 힘주어 말씀하셨습니다.


“재물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사람이 막상 자신의 소중한 것들을 팔아서 하나님께 드리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아무리 이기적이고 깍쟁이같던 사람도

성령께서 역사하시면 또 헌신적인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27절,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아니하니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부자들도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29~30절을 같이 읽어 봅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주님은 분명히 약속하십니다.

주와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소중한 것을 팔고 희생하고 헌신하고 진심을 드린 자는

반드시 축복해 주시되 백배로 축복해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현세의 복과 내세에 복을 다 주십니다. 물론 박해를 겸하여 받습니다.

그러나 그 박해조차도 은혜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니 얼마나 은혜가 됩니까?


아무 고생도 없고 아픔도 없다면 금방 타락할 것입니다.

우리는 시련과 핍박에도 감사해야 합니다.

주와 복음역사를 위해, 한 영혼을 위해 흘리는 눈물은 다이아몬드보다 값진 보석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귀가 한 성도를 쓰러뜨리려고 공격을 했습니다.

마귀가 그 성도의 가슴을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의의 흉배를 붙이고 있어서 해치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머리를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구원의 투구를 쓰고 있어서,

역시 해칠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에는 그의 아킬레스 건을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발에 평안의 복음의 신발을 신고 있어서 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성도는 의기양양하게 웃으면서 돌아서려고 하는데

마귀가 마지막으로 그의 지갑을 향해 화살을 쏘았더니,

그걸 맞고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모든 면에서 완벽하게 무장했다고 생각했는데 한 가지가 부족했습니다.

물질생활에서 헌신과 희생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사단의 시험에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 웨슬리는 “지갑이 회개하지 않는 자는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그처럼 아브라함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셨을까?

항상 자신을 소개하실 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

고 하셨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하나님이 본토친척 아비집을 떠나라고 하시자

모든 것을 버려두고 떠났습니다.

100세에 낳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했을 때.. 기꺼이 순종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주님께 드리고자 결단하고 순종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크게 축복하셨습니다.


그 후손이 하늘의 별과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게 하셨습니다.

그 후손 가운데서 메시야 예수님이 나게 하시고 큰 민족,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아브라함은 본문에 이 청년보다 나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나이가 젊은 것도 아니고, 관직에 오른 것도 아니고, 많은 재물을 모은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순종과 헌신이 있었습니다.

그때 그는 영생과 천국보화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나의 가장 소중한 것을 기꺼이 주님께 드리므로,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나누므로

하나님이 부어주시는 하늘의 기쁨과 감격을 풍성하게 누리고,

또 현세의 복도 덤으로 주시는 은혜를 체험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