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윌리엄 린튼 선교사

LNCK 2012. 12. 2. 23:05

https://www.kosi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5762

 

◈윌리엄 린튼 선교사

William Alderman Linton 1891-1960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국교회 성장 뒤에는

자신의 젊음을 바쳐 미지의 땅으로 찾아온 선교사들의 헌신이 있었다.

 

특별히 한국 선교에 있어 두 명문가가 있는데

언더우드 선교사 가문과, 린튼 선교사의 가문의

대를 이은 섬김은 잊을 수 없는 사랑이다.

 

언더우드는 미국 북장로교가 파송했던 대표적인 선교사였고,

윌리엄 린튼 선교사 (한국명 인돈)는 미국 남장로교가 파송한 선교사로

110여 년 전 이 땅에 찾아와 호남지역을 중심으로 복음의 초석을 놓았다.

두 가문은 모두 한국선교의 대를 이어 봉사한 신앙의 명문가문이다.

 

▲미국 남장로교 21세 최연소 선교사

 

윌리엄 린튼은 1891년 2월 8일 미국 조지아 주 토마스빌에서

아버지 텔 린튼과 어머니 폰더 앨더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912년 6월, 미국 조지아공대 전기공학과를 수석 졸업하고

제너럴 일렉트릭(GE) 입사가 예정된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지만,

1912 8월 23일 샌프란시스코 항을 출항하여 9월 20일 목포항에 도착, 입국했다.

 

미국 남장로교 21세 최연소 선교사로 한국에 들어와

군산 영명학교 교사로 교육선교를 시작했다.

 

1년 만에 한국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해 한글로 성경과 영어를 가르쳤으며,

1917년 전임 선교사가 한국을 떠나면서 영명학교 교장으로 임명됐다.

 

윌리엄 린튼은 주로 전주, 이리, 군산 등지에서 기독교 복음 전파와 교육 선교를 위해

종횡무진 다니다가 장티푸스에 걸려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기도 했다.

한남대 부지 선정을 위한 선교사들의 활동

 

한남대 건축현장

 

▲독립운동가 윌리엄 린튼

2022년 3월 윌리엄 린튼 선교사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됐다.

국가보훈처는 3.1절을 앞두고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군산 3·5 만세운동 주역으로 윌리엄 린튼 선교사를 발표한 것이다.

 

1919년 3.1만세운동 때에는 군산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감옥에 끌려갔다.

린튼 선교사는 일본의 부당한 압제에 분노했고, 한국의 억울한 입장을 이해하고 있었다.

군산 3.5만세운동 당시 교사들과 학생들의 준비를 은밀히 지원했다.

 

이는 호남 최초 만세운동으로 당시 참여 인원만 3만 70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이후 전북 지역에서 28차례에 걸쳐 만세 운동이 일어나게 된 촉매제 역할을 했다.

 

그는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간 뒤 애틀란타에서 열린 남장로교 평신도대회에 참석해

“한국은 평화로운 방법으로 손에, 손에 태극기를 들고 비폭력 시위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세계를 향해 자유 독립을 호소하고 있었다.”

라며 3.1운동의 정당성을 알리고 일제의 만행을 폭로했다.

 

또한 애틀란타 저널에 ‘한국인들이 어떻게 자유를 추구하는지에 대한 애틀랜타인의 증언’

이라는 제목으로 한국 상황을 알리고, 지속적으로 한국 독립의 필요성과 지원을 주장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재직했다.

일제의 신사참배가 가장 먼저 강요된 곳은 교육계였다.

 

린튼은 신앙 양심을 내걸고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였다.

1937년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해 신흥학교를 자진 폐쇄시켰다.

 

이때 호남지역에서는 전주 기전여학교, 광주 숭일학교, 수피아여학교, 목포 영흥학교,

정명여학교가 문을 닫았고, 순천 매산학교, 매산여학교, 군산 영명학교 등이 문을 닫았다.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은 선교사들에게 출국 명령을 내렸다.

1940년 10월 미국 영사는 선교사의 철수를 명령했다.

윌리엄 린튼은 가족을 이끌고 1940년 11월 14일 출국했다.

 

▲인재 양성을 위해 대전 한남대 설립

 

윌리엄 린튼은 한국이 국권을 회복하고 난 후 1946년에 다시 돌아와

신흥학교 교장직에 복직했다. 그는 인재 양성을 위한 대학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1948년에 대학 설립 준비에 착수하였으나 1950년 전쟁으로 설립이 지연되었다.

 

이후 1954년부터 2년 가까운 준비 기간을 거쳐

1956년 대전대학을 설립하였고, 대전대학은 후에 한남 대학교로 명칭이 바뀌었다.

 

윌리엄 린튼 선교사는 한남대 초대 총장을 맡았다.

그는 암 투병을 하면서도 대학 기반을 다지는 데 헌신했다.

대학 개교 후 병이 깊어져 미국으로 건너가 수술을 받고 완치되기도 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에게는 자신이 해야 할 사명이 남아있었다.

그는 학장 자리를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병상에 누운 채 미국으로 건너가

1960년 8월 13일 테네시 주 녹슨빌의 큰 아들 집에서 70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는 일제강점기 21세에 입국하여 한국전쟁과 전후 혼란기의 급변하는 한국 사회의

가장 큰 위기와 고통의 순간에 한국인의 따뜻한 친구로 48년을 헌신했다.

이밖에도 500여 교회를 세우는 등 교육을 통해 이 땅을 깨웠다.

 

한남대는 선교사 사택 일부에 ‘인돈학술원’을 개원하고 선교사들이 사용했던 생활도구와

각종 서적과 편지, 그림, 도자기 등을 원형대로 보존하며 린튼 선교사를 기억하고 있다.

윌리엄 린튼 가족사진

 

윌리엄 린튼과 샤롯 벨 선교사 결혼

 

▲윌리엄 린튼 가문의 한국 사랑

 

린튼 가문 머릿속에 아로새겨진 대한민국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윌리엄 린튼은 유진벨 선교사의 사위로,

지금도 후손들이 한국을 위한 봉사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는 유진 벨 선교사의 딸인 샬롯 벨과 운명적인 만남을 가졌다.

 

샬롯 벨은 아그네스 스콧 대학을 졸업했다.

윌리엄 린튼과 샬롯 벨의 결혼은, 린튼 가문의 사람들이 한국에서 뿌리를 내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학교와 병원을 설립한 유진벨(1대),

만세 시위운동을 지도한 윌리암 린튼(2대),

미해군 대위로 인천 상륙작전에 참전한 휴 린튼(3대),

북한 결핵환자를 돕는 유진벨재단 스티브 린튼(인세반) 회장과

한국형 앰뷸런스를 개발한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소장 존 린튼(인요한) 등이 후손이다.

 

한 나라를 사랑하고 한 민족을 사랑한다는 것은 이 린튼가의 사랑을 말하는 것이리라.

 

특별히 그의 아들 휴 린턴 선교사는 미국 PCA 선교부와 한국교회를 연결하고

무교회 지역에 복음전하며 상호협력 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후 미국 선교본부가 철수할 때는 고신총회에 선교부지를 이양해

열방을 향한 선교의 사명을 함께 감당하고 있다.

 

..............................................

 

◈윌리암 린튼5대째 한국사랑 "린튼네 사람들"       출처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외국인 선교사들의 이야기다.

 

민초들과 함께 뒹굴다가 지엄하신(?) 왕실과 인연을 맺기도 했던 이들은

또 일본 제국주의와 신사참배에 맞서 당당하게 싸우기도 했다.

 

대전의 한남대학교 안에는 주변의 대학 건물과는 다른 고풍스런 멋을 풍기는 한옥이

한 채 자리하고 있는데, 대학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인돈기념관이 바로 그것이다.

 

인돈 학술원이 사용하고 있는 캠퍼스 밖의 또 하나의 한옥 한 채는

지어질 당시의 옛 모습 그대로 옛 선교사의 족적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말로 ‘인돈’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구한말 외국인 선교사 윌리암 린튼을 기념하는

두 채의 한옥이다.

 

▲한남대학의 설립자이기도 했던 윌리엄 린튼과 그의 가족들의 한국에 대한 사랑과 인연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로 깊고도 깊다.

 

린튼의 장인인 유진벨(한국명 배유지)에서 시작된 린튼가(家)의 한국 사랑은

5대에 이르고 있어 한국의 역사와도 맥을 같이하고 있다.

 

알렌보다 한 해 늦게 미국남장로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온 유진벨은

의술로, 그리고 그의 사위 윌리엄 린튼은 교육으로 한국민에 대한 계몽과 선교사역을 펼쳤다.

 

여기까지라면 당시의 다른 여러 선교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린튼가의 한국에 대한 사랑은, 윌리암 린튼 이후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그의 아들 휴 린튼(한국명 인휴)이 미국에서 대학을 마치고 부인과 함께 한국으로 건너와

아버지와 외할아버지의 한국에 대한 사랑을 이어 나간 것이다.

 

특별히 휴 린튼은 해군 장교로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에도 참전,

한국과의 질긴 인연의 줄을 놓지 않았다.

 

선교사로 한국을 다시 찾은 휴 린튼 부부는

한국화된 미국인으로 전라남도 일대의 벽지와 섬지방을 돌며 선교를 했다.

 

현재의 광양제철 자리가 된 땅은, 휴 린튼이 미국 등지로부터 받은 선교비로

간척사업을 벌여 얻은 곳이다.

 

▲휴 린튼 부부의 한국사랑은 그대로 그의 자녀들에게 전수되어

스티브 린튼과 존 린튼으로하여 또다른 한국사랑을 실천하게 한다.

 

증조할아버지 유진벨을 기념하는 재단(유진벨재단, 이사장:스티브 린튼)을 설립하고

식량난과 질병으로 어려움을 겪는 북한동포를 돕는 일에 최선봉에 서 있다.

 

물론 이들의 우리말 실력은 흠잡을 데가 없을 정도다.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사람과 결혼하고 한국을 위해 일하는 이들을

한국인 친구들은 ‘보세품’이라는 농담으로 설명하고 있다.

 

‘메이드 인 코리아인데 미국으로 수출됐다가 다시 돌아온’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별칭은

린튼 가족을 잘 설명해주는 말이다.

 

보쌈과 곱창전골을 좋아하면서 한국말 잘한다는 이야기에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으면 할아버지께서 웃으실 것”이라는 말로 받아치는 그들은

자칭 한국사람이다.

 

린튼가의 4대에 해당하는 이들중 한국에서 살고 있는 막내 존 린튼은

그런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한국사람’으로 통한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외국인진료소 소장으로 일하는 그는

국내 의사면허를 가진 유일한 외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형 스티브 린튼을 도와 북한 어린이의 결핵 퇴치에도 큰 공헌을 하고 있다.

또한 그의 자녀들인 한나 린튼과 에스더 린튼이

한국에서 선조들의 한국사랑을 체험하며 꿈을 키워가고 있다.

 

1백4년 동안 계속되고 있는 ‘린튼네 사람들’의 한국사랑,

그들이 바라는 통일 이후에도 계속될것이라는 상상을 어렵지 않게 하고 있다.

 

 

 

◑유진 벨의 정신으로 북한에 복음 나누는 스티브, 존 린튼 형제

 

나라의 국운도 시들어가고 기아와 전염병으로 백성들도 시들어가던 1895년.

금발에 파란눈의 백인이 전라도 땅 끝으로 찾아왔다.

 

한 손에는 복음을 다른 한 손으로는 사랑을 갖고 전라도로 찾아간 사람은

미국 남장로교회의 파송을 받은 유진 벨 선교사. 

 

그로부터 1백년이 지난 다음 유진 벨 선교사의 후손인 린튼가 형제가

유진 벨의 이름 아래 갈라진 형제들의 땅 북한을 찾았다.

 

수 십년만에 찾아온 가혹한 기근과 결핵이라는 치명적인 질병으로 죽어가는

북한의 형제들을 살리기 위해 한 손에는 식량을 다른 한손에는 약을 들고 찾아온

그들의 손길은 삶의 희망을 찾아준 천사의 손길이었다.

 

지금까지 유진벨의 손길은 갈라진 형제들을 잇는 사랑의 가교로서의 역할을 든든히 감당하고 있다. 

유진벨재단(회장:스티브 린튼, 한국명 인세반)은 북한 결핵퇴치사업을 비롯해

의료지원사업을 벌이는 민간단체. 95년 식량지원으로 시작해

97년부터는 결핵퇴치사업을 본격적으로 전개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유진벨재단은 15만명에게 6개월간 투약할 수 있는 분량의 결핵약을 북한에 공급했고,

검진차량을 비롯한 다목적 차량 30여대 지원, 요양원을 위한 농기계 및 농업물품 지원,

수술실 설비 및 엑스레이 지원 등 결핵퇴치사업의 최전선을 지키는 든든한 보루가 되고 있다.

돈으로 환산하면 3백여 억원에 달하는 엄청난 지원이 이뤄졌다. 

 

선교지 할양 정책에 따라 순천, 광주, 전주 등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미국 남장로교 파송 선교사의 후예들이, 미국 북장로교회의 선교지역이었던 북한에서

의료지원사업을 벌이는 것은 흔치않은 인연이다.

 

린튼 형제의 부모였던 휴 린튼과 로이스 린튼 역시 전라도와 충청도 등 중부 지역에서

주로 활동했고, 린튼 형제 역시 그런 인연으로 전라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유진벨재단의 인요한(존 린튼) 박사는

"우리 형제가 어렸을 때, 결핵이 제일 무서운 질병이었는데

5남매 중 3형제가 병에 걸리기도 했다"며

"이 병을 퇴치하기 위해 어머니께서 40년 동안 무진 애를 많이 쓰셨는데

그런 가문의 이력이 북한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게 한 것 같다"고 전한다.

 

사실 유진벨재단의 북한 사역은 식량지원사업으로 시작했다.

유진벨 선교 1백주년을 맞이한 지난 1995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린튼 형제는 기근과 질병으로 고통 중에 있는 북한 사람들을 위해 식량지원사업을 시작했다.

 

심각한 지경에 처해 있는 북한주민을 위해 그들이 전해 준 것은 대략 1만여 톤의 식량.

그런데 97년 북한의 한 당국자가 결핵퇴치 사업을 제안해 왔다고 한다.

 

북한 사람들을 돕고자하는 유진벨의 순수한 정신과 성실한 지원을 통해 믿음을 갖게된

북한 당국이 유진벨 측에 당시 북한의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결핵의 퇴치를 제안했던 것.

 

물론 결핵을 퇴치하기 위해 40년간을 고군분투한 린튼 가문의 사연도

북한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여는데 일조를 했다. 

 

막상 결핵퇴치사업을 시작하려하자 린튼 형제는 적지않은 충격을 받았다.

엑스레이 필름이 없어 방사선을 그대로 쪼이며 환자의 상태를 검진하는 열악한 의료환경,

4~5개의 약을 지속적으로 먹어야 치료에 효과가 나타나는데

필요한 약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

기근으로 환자들이 굶주리는 상황 등등.

 

그래서 유진벨이 생각한 것은 결핵약 만이 아니라 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고 완쾌시키기 까지

필요한 각종 물품의 체계적인 공급이었다.

그리고 몇몇 지역만이 아니라 북한 전역을 대상지로 삼았다.

 

그 결과 유진벨은 현재 북한 인민병원과 요양소 등 60여 지역에 의약품과 농업용품 등

각종 물품을 지원하고 있다. 

 

인세반 박사의 경우 그 자신의 결핵을 두번이나 앓았지만 북한 사람을 살리기에

말 그대로 몸을 던졌다. 약을 전달하기 위해서 북한 전역을 돌고,

의료기구를 전달하고 사용법을 알려주면서 한 두달을 북한에서 보냈다.

그러면서 쌓인 상호신뢰는 그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을 만큼 단단했다. 

 

인요한 박사는 상호신뢰의 계기를 이렇게 설명한다. "북한에 보냈던 검진차량이 고장나

그것 때문에 북한 신의주로 가서 차 밑에 기어들어가 기름을 뒤집어 쓰며 차를 고쳤는데

그 뒤로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이렇게 상호신뢰를 형성한 이후로 결핵퇴치 사업만이 아니라 간염예방 등

의료 전반으로 사업의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이같은 사업을 진행하는 유진벨재단은 재정의 대부분은 국내외에 있는 한인교회 등

한국사람들이 대부분 감당하고 있다면서

남북간의 관계가 더욱 좋아져서 직접 지원이 가능하게 된다면

그 때 쯤에는 사업을 접을 수 있다고 전한다.

 

남북이 직접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그날이 빨리 다가오기를 바란다는

인요한 박사는 "뱃길, 차길, 기차길, 하늘길 가릴 것 없이 남북을 잇는 길들이 더 많아져서

남북이 만나는 일이 무조건 많아져야 한다"고 전한다.

 

남북이 대화하지 않고는 통일의 길이 열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인 박사의 진단이다. 

김대중 정권에서 진행됐던 햇볕정책과 비료지원 사업을 높이 평가한다는 인 박사는

"강원도 산골에 쌓여있는 석탄을 북한의 가정으로 보낸다면

햇빛정책 못지않은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한다.

 

겨울에 사용할 수 있는 연료가 없어 결핵환자는 물론 일반인들도

겨울을 너무 힘들게 나고 있다면서 석탄을 준다면

북한 사람들 몸과 마음을 한꺼번에 녹이는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한다.

 

민족의 아픔이 서려있는 6월. 긴장의 파고가 높아지고 있지만

유진벨재단의 린튼가 형제들은 남북이라는 또 다른 형제들을 이어주는 사랑의 손길이 되어

따사로운 햇빛을 우리 민족에 던져주고 있다.

 

 

◑北결핵퇴치 "패키지 지원이 필수“

유진벨재단 인세반 회장

 

북한 결핵사업 현황과 비전 소개10년 간 북한에서 결핵퇴치 사업을 벌이면서도

좀처럼 자신의 사역을 언론을 통해 소개하지 않았던 유진벨 재단의 회장 인세반박사

(Stephen Linton)가 최근 기자들을 만나 북한에서 진행하고 있는 결핵퇴치 사업의 결실과

통일문제까지 다양한 범주에 대한 자신의 소회를 밝혔다.

 

지난 9일 서울의 한 식당에서 기자들을 만난 인세반박사는

"한가지 분야에서 꾸준히 일하면 누구에게나 신뢰라는 게 쌓이는데

그간 북한과의 관계에서 그런 신뢰가 쌓인 것 같다"면서,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지난 10년 간 북한의 결핵퇴치 사업을 꾸준히 진행해 올 수 있었다"고 전했다.

 

그가 이끌고 있는 유진벨 재단은 지난 95년부터 북한에 결핵퇴치 약품과 장비 등을 지원해 온 단체로

현재 평안남북도와 남포시, 평양시내 등 45개 지역의 의료기관을 1년에 두차례씩 방문하고 있다.

 

특히 유진벨 재단은 평양에만 국한된 지원이 아니라

북한의 전역에서 사업을 펼치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유진벨 재단이 중점적으로 하고 있는 결핵퇴치 사업은 '펙키지 지원'을 통해 진행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인세반박사는 "펙키지 지원은 의료기관의 결핵치료 능력을 강화한 뒤에

이 기능을 꾸준히 유지시켜 나갈 수 있도록 돕는 복합 지원체계로

궁극적으로는 북한 전역의 의료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는 지원 방법"이라고 전했다.

 

이에 따라 유진벨 재단은 약품이나 의료기기 등을 일시적으로 지원하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거점으로 정한 북한 전역의 의료시설들을 꾸준히 지원하는

장기지원체계를 지향하고 있다.

 

장기지원을 하다보니 구호금액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문제에 봉착했다는 게

인세반박사의 설명.

 

그는 "결핵이라는 병은 내성이 강해서 치료를 시작하면 완치때까지 쉬어서는 안된다"면서,

"결국 후원이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게 관건인데

최근들어 모금이 줄어 들고 있어 지속적인 지원에 어려움이 많은 것이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통일에 대해서도 인 박사는 "10년 전과 비교해 볼때 남과 북, 그리고 국제사회가

서로를 바라보는 입장이 무척 변했다"면서,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남과 북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 교류 방안 등을 마련한다면

적당한 시점이 왔을 때 통일도 가능할 것"이라면서, 신중론을 펼쳤다. 

 

향후 계획에 대해 인세반박사는 "북한에 대형병원을 한개 세우는 것보다는

북한의 구석구석에 40개의 작은 병원들이 치료기능을 갖도록 돕고

더나아가 북한의 의료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관심을 두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