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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33장, 야곱의 승리와 실패

LNCK 2012. 12. 27. 10:04

https://blog.naver.com/karamos/220307677888

 

◈야곱의 승리와 실패           창33장 9~17           2014.02.16.

 

서론

 

창세기 33장에는 야곱과 에서가 극적으로 화해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모든 일은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씨름에서 이긴 결과입니다.

 

본문 10절에 “야곱이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형님께 은혜를 얻었사오면

청컨대 내 손에서 이 예물을 받으소서 내가 형님의 얼굴을 뵈온즉

하나님의 얼굴을 본 것 같사오며 형님도 나를 기뻐하심이니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형님의 얼굴을 뵈오니 하나님의 얼굴을 뵌 것 같다는 말은 아첨의 말이 아닙니다.

간밤에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는데, 내가 하나님의 얼굴을 뵙고 나니까

형님 얼굴을 뵈어도 하나님 얼굴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얍복강가의 기도는 표면적으로 볼 때 야곱이 하나님을 먼저 찾은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야곱을 먼저 찾아오신 사건입니다.

하나님이 오셔서 야곱을 만나주셨기에 씨름도 가능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란 ‘인간이 시작하는 것 같아 보여도 사실은 하나님이 먼저 만나주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기도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시고, 용기를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것이 기도생활에 나타나는 위대하신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창세기 33장은 야곱의 위대한 승리가 그림처럼 나타나 있습니다만

빛이 강하면 그림자도 짙어지듯이, 곧바로 야곱의 실패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본문과 대조, 대비되고 있는 것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본문의 진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야곱의 위대한 승리와 실패가 그림처럼 대조되고 있습니다.

 

◑1. 야곱의 승리

 

1절에 “야곱이 눈을 들어 보니 에서가 사백인을 거느리고 오는지라”

형 에서가 400명 군대를 거느리고 오는 것은 기정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400인 군대를 맞이하는 야곱의 감정은

창32장과 33장의 내용이 같지 않습니다.

 

창32:7절에 “야곱이 심히 두렵고 답답하여 자기와 함께 한 종자와 양과 소와 약대를 두 떼로 나누고”

이 때까지만 해도 야곱의 마음은 심히 두렵고 답답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얍복강가의 기도를 통해 야곱은 평안하고 담담한 마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400인을 거느리고 와도 야곱은 스스로의 감정을 제어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얍복 강가의 기도를 경험한 야곱은 영적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고, 성숙해졌기 때문에

자기 감정을 다스리는 편안함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감정대로 말하고, 행동하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감정은 수시로 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감정보다는, 이성과 신앙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에게 나아갈 때, 여종과 자식들을 제일 앞서 보내었고,

그 다음에 많은 사랑을 주지 않았던 아내 레아와 그 자식들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사랑하는 아내 라헬과 그 아들 요셉을 두었습니다.

 

여기에는 야곱의 교활한 계산이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창32장의 야곱과 33장의 야곱은 완전히 다른 모습입니다.

32:24절에서는 야곱이 제일 뒤에 있었지만

33장에서는 야곱이 맨 앞으로 나아갑니다. 굉장히 상반된 모습입니다. 33:3

 

▲이처럼 하나님의 성전(Holy War)은 다릅니다. 하나님이 앞장을 서서 싸우시는 것입니다.

민14:14절에 “주께서 낮에는 구름기둥 가운데서, 밤에는 불기둥 가운데서

그들 앞에서 행하시는 것이니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광야를 방황할 때 하나님이 어디에 계셨습니까?

하나님은 늘 그들 앞에서 갈 길을 인도하시고 먼저 싸워주시는 분이셨습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더니 하나님을 닮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맨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내 자식들은 내가 보호하겠다! 죽어도 내가 먼저 죽겠다!”고 앞장 선 것입니다.

이제야 남편과 아버지로서 제대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맡긴 것입니다.

 

아하수에로 왕의 왕비가 된 에스더가 유다 백성들의 생명을 살리기 위해서

“죽으면 죽으리이다”라며 규례를 어기고 왕 앞에 나아갔던 자세와 동일한 것입니다. 에4:14

 

야곱은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내가 죽어도 먼저 죽겠다는 심정으로 앞으로 나아간 것입니다.

야곱은 스스로 감정을 제어할 줄 아는 사람, 용기 있게 가족들 앞에

당당히 나설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본문 33:3~4절은 감동적인 만남의 장면입니다. 야곱은 위대한 승리를 거두게 되었습니다.

에서가 20년 전 했던 마지막 말은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는 것이었습니다. 27:41

 

에서는 지금 400명 군사를 이끌고 오면서 이 결심을 실현하려고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20년 만에 만난 아우가 100세에 가까운 97세의 노인이 되어

환도뼈가 위골이 된 채 절뚝절뚝 다리를 절며, 땅에 몸을 일곱 번이나 굽히며 다가오는 모습에

마음속에 있던 모든 미움이 눈 녹듯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살의가 제거된 것입니다.

 

33:4절에 “에서가 달려와서 그를 맞아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

에서의 마음이 언제 변했는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만, 분명한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잠21:1절에 “왕의 마음이 여호와의 손에 있음이 마치 보의 물과 같아서

그가 임의로 인도하시느니라” 하나님이 에서의 마음을 바꾸신 것입니다.

 

▲위대한 주석가 매튜 헨리는 “하나님이 우리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 가운데

원수들의 악행을 막아주시는 은혜(Restraining Grace)도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사울 왕이 그렇게 다윗을 죽이려고 해도 그를 죽일 수 없었던 것은

하나님이 막아주시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을 만나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얼굴을 대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언제 바꾸시는지 그 사람의 마음을 은밀히 변화시켜

원수를 친구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은 단순히 용서의 차원을 넘어서서 아름다운 화목의 차원까지 나아갔습니다.

서로 “안고 목을 어긋맞기고 그와 입맞추고 피차 우니라”는 것은 단순한 용서가 아닙니다.

모든 악의가 사라지고 화해와 사랑의 관계가 된 것입니다.

 

▲야곱은 인생의 넘어야 할 최대고비를 넘었습니다. 사선 즉, 죽을 고비를 넘은 것입니다.

야곱이 위대한 승리를 취하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었던 결과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얼굴을 뵈면 구원이 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도 얻게 되지만,

위기로부터의 구원도 얻는 것입니다.

 

시편 80편 3절에 “하나님이여 우리를 돌이키시고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유대인들이 부르던 노래였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유대인들에게 얼굴 빛을 비춰주셨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해방을 얻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고비가 있다면 주님의 얼굴을 뵙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얼굴 빛을 비춰 주실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고비를 넘자마자 실패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2. 야곱의 실패

 

야곱과 에서는 이제 서로 미워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위협을 주고 두려움을 느끼는 관계가 아닙니다. 예물도 받고 이제 완전히 친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에서는 야곱에게 제안합니다.

 

“에서가 가로되 우리가 떠나가자 내가 너의 앞잡이가 되리라” 33:12

세일산으로 가서 같이 살자는 제안이었습니다.

 

얍복 강가 브니엘에서 세일산까지는 120km나 되는 먼 거리입니다.

이 세일산은 어마어마한 바위산인데, 현재 요르단의 페트라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바위가 얼마나 큰지 이 바위의 갈라진 틈으로 1/3정도 다녀오는데 2시간이 넘게 걸립니다.

 

저는 세상에 그렇게 큰 바위를 처음 봤습니다.

그런데 에서와 그의 후손들인 에돔 족속이 이 바위산 굴에 살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형과 화해를 했지만 같이 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습니다.

33:13~14절에서 핑계를 대는 야곱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야곱이 그에게 이르되 내 주도 아시거니와 자식들은 유약하고

내게 있는 양떼와 소가 새끼를 데렸은즉 하루만 과히 몰면 모든 떼가 죽으리니

청컨대 내 주는 종보다 앞서 가소서 나는 앞에 가는 짐승과 자식의 행보대로 천천히 인도하여

세일로 가서 내 주께 나아가리이다.”

 

형이 먼저 가시면 저도 천천히 세일산으로 따라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에서는 야곱에게 친절을 베풉니다. “내가 내 종자 수인을 네게 머물리라” 33:15

내 종들로 너를 보호하도록 하면 어떻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 제안도 사양합니다.

 

▲33:16~17 “이 날에 에서는 세일로 회정하고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은고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이후 야곱은 얍복강에서 서쪽으로 8km 떨어진 숙곳이라는 곳으로 갔고, *세겜성 가까운 곳

에서는 남쪽으로 120km를 가서 세일산으로 갔습니다.

 

야곱은 그곳에서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짐승를 위해서 우릿간을 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릿간이 바로 히브리어로 숙곳입니다.

 

출12:37절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할 때에 라암셋에서 발행하여

처음으로 진을 친 곳도 숙곳입니다. 하지만 이름만 같을 뿐 다른 장소입니다.

 

▲에서는 남쪽을 향해 세일산으로 갔고, 야곱은 서쪽을 향해 숙곳으로 갔습니다.

그러면 야곱은 왜 하필 숙곳에 가서 집과 우릿간을 짓고 정착했겠습니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형 에서를 따라가기 싫어서 였을 것입니다.

또 나중에 세일산을 가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숙곳에 한동안 살다가 드디어 요단강을 건너서 세겜성으로 갑니다.

숙곳에서 세겜성을 가려면 요단강을 건너서 약 40km를 가야 합니다.

세겜성 65km 남쪽에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야곱은 세겜성에서 은 100개를 주고 세겜성의 추장 하몰의 아들들로부터 땅을 구입하였습니다.

추장의 아들들로부터 땅을 구입해서 장막을 짓고 단을 쌓았습니다.

 

18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19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20 거기에 제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 불렀더라’

 

야곱은 세겜의 땅을 사고 텐트를 치고 단을 쌓고

그 단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하였습니다.

 

‘엘’은 ‘능력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이고, ‘엘로헤’는 ‘엘로힘’입니다.

역시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야곱의 새로운 이름입니다.

그러므로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는 말의 뜻은 ‘능력의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야곱은 숙곳에 정착해서 좀 살다가 세겜으로 가서 단을 쌓았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숙곳과 세겜에 정착한 것은 무엇이 실패입니까? 그것이 왜 문제입니까?

창28:20~22절에 야곱은 벧엘에서 잠을 잘 때에 돌베개를 베고 자다가

천사가 오르락내리락하던 것을 보고 ‘이것이 하늘의 문이요, 하나님의 전이로다’하고

돌을 세워놓고 기름을 붓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야곱이 벧엘로 와서 그 돌로부터 시작해서 하나님의 전을 만들겠다는 서원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창35:1절에 야곱에게 그 서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35:1

하나님도 벧엘로 올라가라고 말씀하셨고, 야곱도 벧엘로 가겠다고 서원을 하였습니다.

 

세겜에서 45km 내려가면 벧엘이고, 거기서 20km 내려가면 예루살렘이고,

거기서 30km 내려가면 헤브론입니다.

 

야곱은 45km를 더 내려가지 않고 세겜에 정착한 것입니다.

세겜에 정착해서 거기서 땅을 사고 장막을 짓고 단을 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세겜에서 단을 쌓을 때 자기 가족들은 여전히 이방 신상을 섬기고 있었습니다.

아내들은 이방신에게 드렸던 귀걸이를 여전히 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세겜에서 단을 쌓았지만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세겜에서 큰 하나님의 징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하나 밖에 없는 딸 디나가 세겜 추장의 아들에게 겁탈을 당했습니다.

고명딸 하나가 청소년 시절에 밖에 나가 강간을 당했으니

아버지 야곱의 마음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었겠습니까?

 

우리 누이를 이렇게 만든 자가 누구냐? 라고 분노한 아들들은

동네의 남자를 다 죽이는 살인자들이 되었습니다.

야곱의 딸은 겁탈당하고 아들들은 살인자가 되어

세겜에 한 시라도 더 이상 머물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창34장의 내용인 것입니다.

 

야곱이 세겜 성 앞에 단을 쌓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33:18~20

도리어 큰 징계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야곱의 아내들은 여전히 이방신상을 품에 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신에게 바친 귀걸이를 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너는 세겜을 떠나 벧엘로 올라가라” 하셨을 때,

자기 아내들의 손에 있는 이방신에게 드리던 귀걸이를 다 거두어

세겜 땅 상수리나무 아래에 다 묻고 벧엘로 올라갔던 것입니다. 35:4

 

▲야곱이 숙곳과 세겜에 머무는 것은 영적인 발전이 아니었습니다.

영적인 타협이었고, 영적인 불순종이었습니다. 야곱의 실패였습니다.

영성이 진보한 것이 아니라 후퇴했던 것입니다.

 

야곱은 위대한 승리 직후에 실패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3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1) 첫째는 야곱이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벧엘에 세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되도록 하겠다는 서원을 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서원하고 잊어 버렸습니다.

 

전5:4절에 “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하나님께 서원한 것은 반드시 갚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서원한 것을 갚지 않는 사람을 두고 우매자라고 하십니다.

야곱은 그것을 망각하고 갚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실패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2) 둘째는 야곱이 태만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경계해야할 두 개의 ‘만’이 있습니다.

바로 ‘교만’과 ‘태만’입니다. 야곱은 승리한 후에 태만해졌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나면 그 복을 유지하기 위해서 더 큰 은혜가 필요하게 마련인데

형 에서와 화해를 하고 나니까 나태해진 것입니다.

 

이런 예는 성경에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노아는 홍수 후에 포도농사를 해서

그 소출로 포도주를 만들어 마신 후 취해서 벌거벗고 장막에 누웠다가

인류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는 실수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주 받은 자손을 남기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다윗도 30세에 왕이 되어 40년을 통치하고 70세에 죽었습니다.

7년 반은 헤브론에서 통치하였고, 후에 예루살렘의 여부스 족속을 쫓아내고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33년 6개월 동안 북쪽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를 모두 통치하는

남북통일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다윗의 가는 곳마다 사방의 모든 적들을 다 이기게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혼자 있을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하루는 왕궁 옥상을 거닐다가

목욕하는 아름다운 여인 밧세바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와 간음사건이 일어나고

그의 집안과 온 나라는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나태가 큰 위기를 불러온 것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도 갈멜산에서 바알 선지자 450명, 아세라 선지자 400명, 도합 850명의

거짓 선지자들과 혼자 영적인 대결을 벌였습니다.

그리고 거짓 선지자들을 죽여버리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의 직후, 북이스라엘의 왕 아합의 아내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겠다고 공갈

협박하니까 갈멜산에서부터 브엘세바 남쪽까지 200km 넘는 거리를 단숨에 도망갔습니다.

 

거기에 하루를 더 가서 로뎀나무 아래 거하며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으니,

아버지 날 죽여 주시옵소서!”라고 고백했던 사람이 바로 엘리야입니다.

이처럼 영적인 나태 이후에는 엄청난 위험이 따르는 것입니다.

 

밤에 은혜를 받았으면 낮에는 더 큰 은혜가 필요합니다.

젊은 시절에 은혜를 받았으면 노년기에는 더 큰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늙어서 나는 이제 교회를 그만 나가야 되겠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노년기에 하나님께 더욱 가까이 나아가고 더욱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영적인 나태는 엄히 경계해야 합니다.

 

3) 셋째로 야곱이 에서에게 단호한 거절의 대답을 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세일산으로 가자고 할 때에 “나는 서원한 것이 있어서 갈 수 없습니다”

라고 단호하게 거절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야곱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TV 프로그램 가운데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것이 있습니다.

자주 시청하지는 않지만 가만 보니 아이들 가운데서도 부모를 몹시 괴롭게 하는 아이들이 있었습니다.

 

밥만 먹고 반찬은 먹지 않는 아이, 동생을 때리는 아이,

하루 종일 우는 아이 등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동심리 전문가가 와서 2시간만 교육시키면 이런 아이들도 바뀝니다.

신기할 정도 바뀝니다. 그 비결 중 하나가 ‘엄마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단호하게 끝까지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동심리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아이들에게 안 되는 것을 자꾸 해주면

그 아이는 절대로 잘못된 행동을 고칠 수 없다고 합니다.

저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다는 것을 그 프로그램을 보고 알았습니다.

 

여러분, 성도들이 직장 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식 자리에서 사장님이 “자네는 교회 집사라지만 이것은 곡식으로 빚은 곡주니까 괜찮아.

한 잔 들게”라고 말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기서 사장님이 말씀하시는데

내가 한 잔은 마셔야 되겠다고 하면 두 잔, 세 잔은 일도 아닌 게 되어 버립니다.

이후에는 완전히 자신의 신앙을 방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 위기가 찾아올 때 신앙인은 단호하게 잘라 말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장님! 침례교회 집사를 어떻게 보고 이런 것을 주십니까? 저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이것을 마시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 다음부터는 절대 술을 권하지 않습니다.

 

저도 신학교 다닐 때 학원 강사를 하는데 원장이 자꾸 주일에 와서 보충수업을 하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교회 전도사라 갈 수 없다고, 자꾸 오라고 하면 그만두겠다고 대답했더니

주일은 안 오는 것으로 알겠다고 했습니다. 처음부터 단호하게 딱 잘라야 합니다.

우리가 우물쭈물하면 죄와 마귀는 그 틈을 타서 자꾸 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결론

 

야곱이 세겜에서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 후, 그곳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하였습니다.

세겜에서 야곱은 순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벧엘로 가지도 않고 세겜에 정착했고, 자기 아내들은 여전히 우상 제물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발견합니다.

성도가 반만 순종한 상태로도 얼마든지 예배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지금 지갑에 부적을 소지하신 분 계십니까? 제가 불신자들을 전도해서 집에 심방을 가보면

그때까지 부적을 붙여둔 집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가차 없이 다 떼어줍니다.

그런데도 저는 여태껏 죽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많은 부적을 찢어버렸는데도 죽지 않았습니다.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야곱은 단을 쌓았다가 도리어 큰 재앙만 당했습니다.

그런데 야곱이 그 모든 우상제물들을 상수리나무 아래 묻고 벧엘로 올라가

하나님께 단을 쌓으니까 아무도 야곱을 건드리지 못하고 자자손손 큰 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손들이 왕권을 누리게 되는 특별한 은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려도 우상을 품고 불순종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로는

어떤 복도 받을 수 없습니다. 승리한 후에 승리를 지키는 더 큰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려도 순종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려서

예배가 삶에 큰 복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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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naver.com/kaikk/60013047811

 

야곱이 에서를 보낸 후 브니엘 거기서 가까운 숙곳에 이르렀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야곱은 숙곳에 이르러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짓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으므로

그 땅 이름을 숙곳이라 부르더라”.

 

그리고 그곳에 자기를 위하여 집을 지었습니다. 가축을 위하여 우릿간을 지었습니다.

이곳은 잠깐 머누는 것으로 간주된 곳이 아닙니다. 장기간 거류한 곳임이 분명합니다.

짐을 짓고 우릿간을 지을 만큼 여기에 오래 있을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그는 갈 곳이 있었습니다. 28:19-22절에서 하나님께 돌아와서 벧엘에 하나님의 전을 짓고,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잊고 지금 숙곳에 머물러 있을 작정을 한 것입니다.

 

사람은 은혜를 받고 신앙의 체험을 하고 나면 안이해 지기가 쉽습니다.

모든 문제가 풀리고 평안할 때, 거기에 안주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이 목적이었다는 듯이 거기에 죽치고 앉아 있으려 합니다. 그러나 기억해 보십시오.

야곱이 머물 집을 짓고, 우릿간을 지을 곳은 숙곳이 아닙니다.

 

거기는 지나가는 길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땅,

하나님과 약속한 땅 벧엘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을 망각했습니다.

 

어윈 루처의 책 ,「삶을 전환시키는 습관의 비밀」에 있는 내용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우리의 내면을 보게 하시는 데는 더 큰 목적이 있다.

그런데 우리는 겨우 조그마한 것을 깨달은 것에서 만족하고 만다.

즉, 기껏 결혼 생활을 보호받고 싶다든가 죄책감에서 해방되고 싶다든가 하는 선에서

우리의 기도 제목이 멈추어버린다.

 

우리의 이러한 무지는 하나님을 잘 모르는 데서 비롯된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하시는 뜻에는 관심이 없으며,

또한 당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동기를 가지고 신앙생활에 임하는지를 여실히 증명해준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회개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데까지 이르기를 원하신다.」

 

문제가 해결된 곳이 우리의 안식처가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더 하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방해가 제거되었다고 일이 성공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 출발입니다. 시작입니다. 야곱처럼 꿈도, 언약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이런 순간에, 가장 큰 은혜를 체험한 브니엘의 순간에 신앙의 안일함이 바로 틈을 탑니다.

 

거기에 하나님과 상관없이 안주하며 비전도 없이 머무르려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배부르고 안전한 곳이 우리의 머무를 곳이 아닙니다.

거기가 사실은 순례자에게 있어서 가장 위험한 자리입니다.

비전을 잃어버리게 하는 자리입니다. 숙곳이 문제입니다.

브니엘을 체험한 후에 혹시 숙곳에 머무는 사람은 없습니까?

 

그곳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신앙의 숙곳의 특징이 무엇이냐는 말입니다.

17절 “자기를 위하여” 그리고 “그의 가축을 위하여” 일하는 상태입니다.

자기와 소유를 위해 사는 인생은 숙곳에 머물러 있는 신앙인입니다.

 

안주하고 비전을 잃어버린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곳을 떠나야 합니다.

그 수준에 머물러 있으면 안됩니다.

 

▲무엇을 위해 사는가!(18-20절)

 

야곱이 요단강을 건너 들어간 곳은 세겜 성읍 앞이었습니다.

그 안에 들어간 것은 아닙니다. 18-19절을 보십시오.

“야곱이 밧단아람에서부터 평안히 가나안 땅 세겜 성읍에 이르러 그 성읍 앞에 장막을 치고,

그가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아들들의 손에서 백 크시타에 샀으며”.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백 크시타나 주고 그 밭을 샀을까요?

세겜 성읍의 혜택을 누리며 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세상에 미련을 두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는 세속 도시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하고, 거기와 접촉된 지점에 자리를 잡고

그곳을 바라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약속한 땅을 놔두고, 세상에 속하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은혜의 강에 발을 담그지도 않은 상태입니다.

은혜 받은 후에 이런 어정쩡한 상태가 신앙인들에게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수준의 신앙 상태를 한 마디로 표현한 것이 바로 “엘엘로헤이스라엘”입니다. 33:20

야곱은 놀랍게도 세속도시 앞에 장막을 치고, 거기에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철저히 자기 중심적인 신앙의 단면을 보여주는 표현입니다.

오스왈드 샌더스의 책 「영적 지도력」에 있는 내용의 일부입니다.

자기중심이란 교만의 충동적 표현 중 하나이다. 그것은 자기의 재간과 중요함을 나타내고자

자신을 과대하게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이다.”

 

“엘엘로헤이스라엘”은 자기를 과대하게 생각하는 교만의 충동적인 표현입니다.

그렇게 자신에 대해 자만하기에 세상 속에 들어가지도 못하지만,

그 세상을 포기하지도 않은 모습입니다.

 

이런 엉거주춤형은 자기 중심적인 욕망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에 형성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자기의 하나님이라고 자기 중심적인 신앙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이것과 대조되는 고백이 나중에 35:7절에서 엘벧엘이라는 말에서 나옵니다.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원래 “벧엘”이었는데 이렇게 바꾸어 부른 이유가 바로 이 “엘엘로헤이스라엘”

즉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자기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의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엘엘로헤이스라엘이라는 곳에서 엄청난 재난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엘벧엘”은 죄를 짓고,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의 집에 돌아가서 외친 고백입니다.

세속도시 중심에서 성전중심으로 신앙이 바뀐 것입니다.

자기중심에서 하나님중심으로 신앙의 전환이 이때에야 비로소 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야곱의 신앙 수준이 자신을 위해 사는 수준임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예배를 드려도 자기가 중심이된 예배입니다. 자기를 위한 하나님이기에 자기를 위한 예배입니다.

제단을 쌓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제단이 아니었습니다.

 

이기적인 신앙, 이것은 없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유치한 신앙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나중심의 하나님이실 수 없습니다.

이런 신앙에 머물러 있는 한 시험을 계속 당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제 34장에서 그 집안에 엄청난 비극이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밖에 없는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고, 납치되고, 자기의 아들들은 사깃꾼, 살인자, 강도가 되고,

한 도시가 몰살당하는 비극이 벌어집니다.

 

바로 앞에 쳐다보고 살았던 그 세속도시에서 그런 비극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은혜 받은 직후라도 하나님을 자기중심적으로 섬기다가 이런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중심으로 철저히 살아가면 놀라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성주 인터내셔널의 대표 김성주씨는 사업을 시작하면서 중대한 결심 한가지를 결정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업을 할 때 없어서는 안 될 세 가지가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술입니다. 술을 먹지 않으면 우리나라에선 사업이 힘들다고 합니다.

둘째는 돈봉투입니다. 즉 뇌물 없이는 절대 일으킬 수조차 없다고 합니다.

셋째는 정직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사업을 해서는 사업경영이 안 되는 나라가

대한민국이기 때문에 사업하는 사람들은 술자리를 2차 3차 가지고 돈봉투가 왔다갔다해야 하며,

뇌물은 물론 세금 또한 정확하게 신고하지 않고 장부를 이중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고 애기 하곤 합니다.

 

이것이 세상이 말하는 부축척의 유일한 방법이며 정석이고 가장 빠른 길이라는 것입니다.

김성주 사장은 ‘나는 이렇게는 사업하지 않겠다’고 선언을 하였습니다.

술자리며 접대도 안 할 것이고, 온갖 뇌물이나 봉투의 거래 또한 않고, 세금을 정직하게 신고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 경영원칙이며, 하나님 나라의 법이라고 결정하였습니다.

 

1년 동안 철처하게 경제계 안에서 외면을 당하였습니다.

여자가 사업을 하고 깨끗한 척은 혼자 다하고 철저히 세상에서 무시당했습니다.

 

여러분도 하나님만을 바라보고 가는 길에 보다 쉽게,

세상과 동역하며 또한 세상의 풍요로움에 안주하고 싶을 때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기회를 포기하고 다 포기하는 것이 정말 잘 하는 것인지

괴로워 할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당한 김성주 사장은 몇 년 뒤 사업을 완전히 역전시켜 버렸습니다.

갖은 고통과 아픔이 순간순간 있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모든 것을 밀고 나갔을 때

오늘의 성공이 있었습니다.

얼마 전 대학생들이 가장 본받고 싶어하는 기업가가 김성주사장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부디 자기중심의 신앙에서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회복되시길 바랍니다.

거기에 바른 신앙의 자세와 이로말미암는 진정한 행복과 승리가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