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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조상들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믿음’

LNCK 2012. 12. 28. 14:11

◈믿음의 조상들에 부어주신 ‘하나님의 믿음’                 창30장

 

*김성수 목사 창세기 80강 중에서 https://matsy.tistory.com/7173454

 

성경을 읽다보면 가끔 ‘이런 내용이 성경에 꼭 기록될 필요가 있을까?’하는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은 처음부터 끝까지 자식을 많이 낳아서 야곱의 사랑을 독차지 하려는

야곱의 아내들의 경쟁과 암투와 시기와 질투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이 짓는 자식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보면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우리가 이런 걸 왜 알아야 하지요?

과연 남의 집 부인들의 지저분한 자식 낳기 싸움이

성경의 독자인 교회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얼까요?

 

우리가 이 이야기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그러한 지저분한 싸움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의 백성,

이스라엘 12지파의 조상들이 탄생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고고하고, 지적이며, 평온하고, 따뜻하고,

은혜로운 배경에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차갑고, 치사하며 심지어 무시무시하기까지 한 암투 속에서 태어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의 생애가 그러했듯이

그렇게 불가능하고 추악한 죄인들의 행태와 자격과 조건과 무관하게

하나님의 언약이 홀로 자유롭고 신실하게 이행되어져 가고 있는 모습을

우리는 오늘 본문 속에서 읽어 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과 야곱으로부터 말미암는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의 조상들은

자격과 조건을 갖추지 못한 자들에게 부어지는 하나님의 작정과 선택,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불가항력적으로 부어지는 하늘의 복과 은혜를 설명하기 위해 택해진

아주 훌륭한 모델들인 것입니다.            *자랑할 게 없게 하시는 거죠.

그래서 이스라엘의 열두지파의 조상들의 탄생이 이렇게 지저분한 것입니다.

 

우리는 야곱과 그의 아내들, 그들에게 쏟아 부어지는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를 보면서

바로 우리의 모습을 그 속에서 찾아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한 예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의 야곱의 행동을 한 군데만 찾아보고 가겠습니다.

 

(창30:37~43)

야곱이 버드나무와 살구나무와 신풍나무의 푸른 가지를 취하여 그것들의 껍질을 벗겨 흰 무늬를 내고

 

38 그 껍질 벗긴 가지를 양떼가 와서 먹는 개천의 물구유에 세워 양떼에 향하게 하매

그 떼가 물을 먹으러 올 때에 새끼를 배니

39 가지 앞에서 새끼를 배므로 얼룩얼룩한 것과 점이 있고 아롱진 것을 낳은지라

 

40 야곱이 새끼 양을 구분하고 그 얼룩무늬와 검은 빛 있는 것으로

라반의 양과 서로 대하게 하며 자기 양을 따로 두어 라반의 양과 섞이지 않게 하며

 

41 실한 양이 새끼 밸 때에는 야곱이 개천에다가 양떼의 눈앞에 그 가지를 두어

양으로 그 가지 곁에서 새끼를 배게 하고

 

42 약한 양이면 그 가지를 두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약한 자는 라반의 것이 되고 실한 자는 야곱의 것이 된지라

43 이에 그 사람이 심히 풍부하여 양떼와 노비와 약대와 나귀가 많았더라

 

야곱이 별짓을 다 하지요?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도록 정해진 사람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이미 복중에서부터 하나님에게 복을 받은 자라는 것을

어머니한테도 들었을 것이고, 베델에서 잠을 자다가 하나님에게서도 직접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스스로의 꾀와 지혜를 동원하여, 최선을 다해서 복을 얻어내기 위해

온갖 임기응변과 권모술수를 동원합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인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위의 에피소드 속에서도 야곱은 그야말로 복에 환장한 사람처럼 행동을 합니다.

 

야곱이 외삼촌과 계약하기를 야곱이 외삼촌의 일을 돕는 대가로

양과 염소 중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이 나면 그 것들을 품삯으로 취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외삼촌 라반이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들은 모두 자기 아들들에게 주어서

야곱과 사흘 길, 거리에 두었습니다. 야곱에게는 흰 양, 흰 염소만 맡긴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치는 양과 염소 중에서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이 도저히 나올 수 없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교배가 안 되니까요.

 

그런데 야곱은 단풍나무와 신풍 나무의 껍질을 벗겨서 흰 무늬를 내고

얼룩덜룩하게 만들어서 그 나무를 양떼가 와서 물을 먹는 개천 구유에 세워 두었습니다.

 

혹시 그렇게 얼룩덜룩한 나무를 양들과 염소들이 자꾸 보면

아롱지고 점 있는 것들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계산에서였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지요? 그건 전혀 과학적인 근거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가축이 수태할 때, 어미의 심리상태나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다는 생각에

양들이 물을 먹는 곳에 그 얼룩덜룩한 나무들을 세워두었던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양들과 염소들이 물을 먹는 곳에서 물을 마시며 교미를 한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어찌되었든 어떻게 해서든지 재산을 모으겠다는 야곱의 결연한 의지가 엿보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실제로 그 얼룩덜룩한 나무를 보고 물을 먹은 양과 염소들이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들을 낳았습니다.

 

혹자들은 그러한 그림 속에서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시는 구나’하는 엉뚱한 교훈을 얻곤 합니다만

그 이야기는 정 반대의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는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복 주시기로 약속하셨던

당신의 약속을 열심히 지키고 계신 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고

반면에 야곱은 자기의 꾀와 판단에 따라 자기 식의 신앙 방법으로 복을 얻어내려 하는

우매한 자들의 대표로 등장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행위에 하나님도 감동하여 복을 붓고 계신 것이 아니라

야곱이 하는 행위에 상관없이 하나님의 복이 그에게 부어지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은 가만히 있어도 하나님의 언약에 따라

어차피 주어지게 될 복을 스스로의 힘으로 쟁취하기 위해

자기들이 생각하는 엉뚱한 복을 목표지점으로 세워 놓고

자기들의 방식대로 열심히 손발을 움직이는 우매한 어떤 무리에게 경종을 울리는 그림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의 야곱과 두 아내, 레아와 라헬의 이야기도

어차피 하나님의 작정과 계획, 그리고 그 분의 언약 속에서 필연적으로 주어지게 될

이스라엘 열두지파의 조상들을

시기와 질투와 암투 속에서, 자기들의 꾀를 동원하여 열심히 낳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레아, 라헬)의 이야기를 거시적 관점에서 함의 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복은 창세전에 주시기로 작정된 모든 자들에게 반드시 주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간들은 조바심을 내면서, 하나님이 준비하신 하늘의 복이 아닌

엉뚱한 복을 자신의 목표지점으로 세워놓고, 그 복을 받아내기 위해

하나님을 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면서 고단한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133:3)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하나님이 당신 백성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참 복이 뭡니까? 영생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신적 성품과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영원한 하늘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게 바로 복의 실체이며 올바른 복의 정의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반드시 그 복을 주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오시기 전인 구약에서는 재산이 많아지고, 땅이 많아지며,

자녀가 많아지고, 장수하는 것 등으로 표현이 된 것입니다.

 

왜냐하면 구약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이기 때문에

그 하늘의 풍요를 설명할 길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성령이 우리에게 내려오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비로소 눈에 보이는 이 땅의 것들로 풍요를 설명해 주지 않아도

믿음으로 알 수 있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신약의 교회는, 하나님의 약속의 실체를

믿음을 통하여 알게 되었기 때문에

눈에 보이지 않는 약속만으로도,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알 수 있게 된 반면

 

구약 시대의 사람들은 그들이 비록 하나님의 백성들이라 할지라도

약속만으로 하나님 나라의 풍요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는 증거를 자꾸 보여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가 11장에서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을 쭉 나열해 놓고

그 다음에 ‘그들이 약속은 받지 못했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히11:13

‘증거을 받았으나 약속된 것을 받지 못하였으니’ 11:39

 

그러한 연유로 창세기에서 야곱에게는 양과 염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고 있는 것이고,

야곱의 아내들에게 자식들이 줄줄이 생기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지금 야곱의 이야기와 그의 아들들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는 바로 그 어긋난,

하나님의 복의 수여와

여전히 자기들의 배만을 위해 복을 쟁취하려 하는 인간들의 행위 사이의 괴리를

극명하게 대조시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당신이 계획하시고 작정하신 복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쏟아 붓고 계시고

인간들은 그러한 하나님의 열심 앞에서 엉뚱한 짓을 하고 있는 그런 모습입니다.

 

▲그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도 계속해서 나타나고 있죠.

그게 바로 우리의 모습인 것입니다.

 

그 차이와 갈등은 결국 얍복강 나루터에 가서야 해결이 됩니다.

야곱은 그 얍복강 나루터에서 환도 뼈를 가격당하고

자기가 추구하던 복이 진짜 복이 아님을 알게 되어

하나님께 진짜 복을 구하게 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바꾸어 주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은혜의 복은 우리의 행위나 자격이나 조건에 근거하지 않고

자유롭고 불가항력적으로 부어지는 선물이라는 것을 성경은 우리에게 주지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사43:1-2)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하나님께서 ‘야곱아, 이스라엘아’하고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십니다.

바로 우리 교회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너는 내 것이므로 반드시 내가 너에게 복을 부을 것이다’하고 다짐을 하십니다.

 

그런데 위 2절을 보면, 그 야곱과 이스라엘이 물 가운데로 지나가게 놔두시고 불 가운데 행하도록 놔두십니다.

어차피 복을 부어주실 거면 물 가운데 지나고 불 가운데 행할 때 건져 주실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물 가운데로 안 들어가고 불 가운데로도 안 들어 갈 수 있게 해 주시면 안 되나요?

 

왜 거기에 들어갈 때는 가만히 놔두시고

그 속에 들어가서 허우적거릴 때 구원해 주신다고 하시나요?

그게 바로 오늘 본문의 이야기와 똑같은 내용의 이야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복을 부으시기 위해 당신의 백성들의 삶에 끊임없이 간섭을 하십니다.

그런데 죄인들은 그 하나님의 뜻과 열심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이 아니라

수시로 자기들의 힘과 꾀를 동원하여 자기들의 복에 이르려 하기 때문에

물속으로 불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때마다 당신의 열심으로 그 속에서 건져내시고

당신의 목표지점으로 그 자녀들을 이끌고 가신다는

하나님의 열심과 인간의 무력함에 관해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머릿속에 잘 그려보세요.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과 작정 속에서 계획된 그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고 계십니다.

그 열심의 대상들이 어떠한 실수와 실패를 해도, 열심히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시기와 질투와 암투 속에서 이전투구를 하고 있는 야곱과 그의 아내들에게

당신의 작정 속에 들어 있던 아들들과 딸을 허락하십니다.

 

사기와 권모술수와 임기응변으로 자기의 배만을 위해 살고 있는 야곱에게

아롱진 것과 점 있는 것을 허락하십니다.

그들이 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의 반열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인간 쪽에서 발휘하는 것이 맞습니까?

아니면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부으시는 것이 맞습니까?

 

인간들은 계속 실수하고 실패하는데,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를 끌고 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믿음’이라는 단어는 우리 인간들에게 해당하는 단어가 아닌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물론 그 하나님의 믿음, 객관적 믿음이

결국에는 우리 성도들에게서 주관적 믿음을 격발해 내는 것이지만

그 주관적 믿음조차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사시는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히브리서에 의하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를 떠났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그랬다면 아브라함은 그렇게 수시로 넘어지면 안 됩니다.

그가 믿음으로 고향을 버리고, 믿음으로 고난을 감수하겠다고 나선 것이라면

흉년이 들었다고 금방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바로나 그랄 왕 앞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 속여 팔아먹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약해빠지고 불가능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믿음이 덮쳐버린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그의 코뚜레를 꿰어 모리아 산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믿음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전 인생을 이끌어

결국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의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히브리서는 <사라>의 믿음에 대해서도 크게 칭찬을 합니다.

그러나 사라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겠다고 하셨을 때 하나님을 비웃었던 사람입니다.

그걸 믿음이라 하나요? 그렇게 하나님을 비웃을 수밖에 없었던

불가능하고 무력한 사라의 인생에, 하나님의 믿음이 밀고 들어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결국 하나님마저 비웃었던 사라를

열국의 어미로 만들어 내시고야 마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기자는 <모세>도 믿음의 용사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믿음으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정말 그랬나요? 모세는 애굽 군사를 때려죽이고 벌 받을까봐 두려워서 도망간 것이지

자기의 믿음으로 애굽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떨기나무 불로 나타나셔서 당신의 명령을 하달하실 때에도

극구 사양하고 거부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셔서 부탁을 하시는 데도

그것을 거부했던 사람이 애굽에서 믿음으로 나왔다고요?

 

모세는 광야에서도 수시로 하나님께 투정을 부렸고

심지어 하나님 앞에서 혈기까지 부려 결국 가나안에 못 들어가는 인물로 성경에 기록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말도 어눌하고 혈기 등등한 모세에게 하나님의 믿음이 엄습을 하여

그를 이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자로 만들어 내시고 결국 하나님 나라에 세우시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히브리서 기자는 <이스라엘>도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고 믿음으로 여리고를 돌았다고 합니다.

이스라엘이 정말 자기들의 믿음으로 애굽을 나왔고 믿음으로 홍해를 건넜나요?

그랬다면 며칠이 못가서, 그렇게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하며 방성대곡을 했을까요? *정탐꾼 보고 후

 

그리고 그들은 결국 광야에서 모두 죽었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들에게 믿음이 있었답니다.

그것은 그렇게 불가능하고 연약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믿음이 뚫고 들어와 그들 가운데 거하시며

결국 그들의 옛 자아를(출애굽 1세대)모두 죽여 버리고 새 사람으로 만들어(출애굽 2세대)

가나안에 넣으시고 마시는 구속의 대하드라마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믿음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지금 속으로 굉장히 불쾌하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행위도 우리의 것이 아니고 우리의 열심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하더니

이제는 우리의 믿음도 우리 것이 아니라고 합니까? 그럼 우리는 뭐예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먼지에 불과한 자들이란 말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그러나 잘 이해 하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믿음이라고 하니까 어렵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 것 같은데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아버지가 가끔 자녀에게 ‘아빠는 너를 믿는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지요?

예를 들어 ‘아빠는 우리 아들이 성실하고 훌륭한 사회인이 되리란 걸 믿는다’라고 했을 때

그 아빠의 믿음 안에는 ‘내 아들이, 내 딸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자녀를 향한 아빠의 뜻과 아빠의 간절한 소원이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목숨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자녀를 향한 어떤 소원을 가진 아빠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고(omnipotence), 무엇이든지 다 알며(omniscience),

시간과 장소의 구애도 받지 않는(omnipresence) 그런 전지전능한 분이라면

그 아빠의 소원은 곧 현실이 되겠지요?

 

그게 바로 하나님의 믿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수여해 주시는 믿음, 내 자체 생산이 아니라.

그걸 성경의 다른 언어로 표현을 하면 하나님의 작정, 계획, 언약 등으로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믿음은, 우리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아버지라 부르며, 그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고 순복하는 자로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자녀가 되리라’입니다.

그게 하나님의 믿음의 내용입니다.

 

아담 안에서 불순종의 죄인들이 되어버린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 당신께 순종하는 당신의 자녀로 완성해 내고야 마시겠다는 하나님의 결심이

바로 하나님의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따라서 그러한 하나님의 믿음이 우리의 믿음을 완성시키시고 확정하시는 것이지

믿음은 절대 우리가 발휘하고 성숙시켜 내는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게 그거라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지만, 전자와 후자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전자에서는 인간의 자랑이 나올 수 있지만

후자에서는 결코 자랑이 나올 수 없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만일 성도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믿음’이 아닌 ‘자기의 믿음’을 조금이라도 의지하고 자랑을 한다면

그건 곧 ‘자기 의’가 되는 것입니다.

 

가끔 여러분의 믿음을 발휘하여 사업에 성공도 하고, 병도 낫고,

아이도 훌륭하게 키우고 싶었는데, 그것이 잘 안 되었을 때

‘내 믿음은 가짜인가 봐’하고 낙담하지 마시고

그렇게 자신의 믿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처럼

그 믿음이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그런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믿음’이 역사하는(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믿음은 자꾸 보잘것없이 무력한 것으로 폭로 되어야 하는 것이지

‘난 믿음으로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하는 오만과 방종으로 나타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나의 믿음은 자꾸 겨자씨로 폭로되고, 우리 주님의 믿음이 오롯이 드러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심으로 ‘난 정말 믿음 없는 자입니다’라는 고백을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불가능함을 반복하여 경험하고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게 되면

그 때부터 우리 안에 들어 있는 예수의 믿음이 발휘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 때는 정말 우리를 꽁꽁 묶고 있는 율법의 산, 자기 자랑의 산, 교만의 산이

바다로 던져지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며 짜릿한 신앙생활을 맛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자기 의 끊기  - 다윗

자기 의 끊기  - 베드로

자기 의 끊기  - 바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