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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45장, 야곱의 소생

LNCK 2012. 12. 29. 08:31

https://blog.naver.com/karamos/220310355595

 

◈야곱의 소생         창45:21~28

 

서론

 

야곱은 일평생 갈등 속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인생은 한 마디로 갈등의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쌍둥이 형 에서와 갈등을 시작했습니다.

형 에서가 태에서 먼저 나가려고 하니까 야곱이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았습니다.

태아가 얼마나 손이 컸으면 발뒤꿈치를 잡았겠습니까?

그는 나면서부터 갈등을 시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형 에서로부터 장자권을 빼앗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장자권을 빼앗긴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고 죽이려 하였을 때

그는 외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밧단아람으로 도망쳤습니다.

 

그곳에서 20년을 지내는 동안에도 그는 외삼촌 라반과 계속 갈등했습니다.

열 번이나 품삯의 문제를 두고 라반과 다툰 것입니다.

 

형, 외삼촌과 갈등했던 그가 이제는 세겜 사람들과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밧단아람으로 온 지 20년이 되었을 때, 야곱으로 그 곳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가나안 땅에 도착해서 세겜에 정착해 살게 되었는데,

야곱의 아들들은 세겜에 살고 있는 남자들을 죽이게 되었습니다.

동네 사람들과 갈등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후 헤브론에 정착해서 살 때에도 야곱은 아들들과 갈등했습니다.

아들들 사이에서도 많은 갈등이 일어났고, 야곱과 아들들의 사이도 좋지 않았습니다.

 

야곱이 사랑하는 아내 라헬의 소생인 요셉과 베냐민만 사랑한 것을

다른 형제들이 시기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갈등 끝에 형들은 17세 된 요셉을 노예로 팔아먹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이 짐승에 찢겨 죽었다고 생각하며 슬퍼하고 있었으니

자식들과 좋은 관계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창42:36절에는 자식들을 원망하는 야곱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아비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로 나의 자식들을 잃게 하도다

요셉도 없어졌고 시므온도 없어졌거늘 베냐민을 또 빼앗아 가고자 하니

이는 다 나를 해롭게 함이로다” (창 42:36).

 

야곱의 인생에 요셉을 잃고 난 이후 22년의 시간은 어둡고 슬프고 가슴이 멍들어

소망이 끊어진 참담한 세월이었습니다.

130세가 된 야곱의 지나온 인생은 온통 갈등의 세월이었습니다.

 

그러니 야곱의 삶은 일반적인 삶을 사는 우리와 큰 차이가 없습니다.

기쁘고 즐거운 일도 가끔 있지만 우리 인생에는 주로 갈등과 슬픔과 괴로움이 많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야곱에게 매우 기쁜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애굽으로 양곡을 얻으러 갔다가 돌아온 아들들이 놀라운 소식을 전해 준 것입니다.

“요셉이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세계 최고 강대국인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만약 17세가 된 아들이 집을 나가서 죽은 줄 알았는데, 어느덧 39세가 되어

미국의 국방부 장관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그가 최고급 자동차를 보내주고,

100만 불을 보내주며 ‘이 돈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오세요!’ 라고 했다면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 소식을 접한 야곱의 영혼은 소생되었습니다.

오랜 세월 눌리고 슬퍼하다가 갑자기 소생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의 영혼이 순식간에 소생 된 것은 아닙니다.

야곱은 세 가지 단계를 거쳐 그 영혼이 소생되었습니다.

 

◑1. ‘야곱이 그들의 말을 믿지 못하여 어리둥절 하더니’ 45:26

 

놀라운 소식을 접한 야곱은 기색하였습니다. (과거 개역성경)

이것은 믿을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짐승에 찢겨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이 여전히 살아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기색’(氣塞)이라는 단어는 잘 사용하지 않습니다만,

한자로 ‘기운 기’자에 ‘막을 색’자를 씁니다. 이를 풀어서 ‘기가 막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야곱이 너무도 심한 정신적 충격으로 인해 ‘기가 막혀 까무러치게 되었습니다’(fainted, stunned)

    *그러므로 '어리둥절'은 별로 좋은 번역은 아닙니다. '얼이 빠졌더니'가 좋습니다.

 

▲시38:8절에 “내가 피곤하고 심히 상하였으매 마음이 불안하여 신음하나이다”

다윗은 죄악에 빠져 있었을 때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내가 ‘약하고’, ‘눌리고’, ‘마음에 고뇌가 있고’, ‘고통의 신음소리를 낸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잘 때 보면 간혹 끙끙거리며 신음소리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영혼이 기색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에 기운이 없고, 피곤하고, 약하니까

밤새 끙끙거리며 신음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야곱은 갑자기 들은 놀라운 소식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전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야곱이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26절에 그 이유가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고하여 가로되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어 애굽 땅 총리가 되었더이다

야곱이 그들을 믿지 아니하므로 기색하더니” (창 45:26).

 

그것은 바로 야곱의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야곱의 영혼은 불신앙으로 말미암아 졸도할 지경이 된 것입니다.

 

사실 요셉이 살아 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말은 전혀 믿지 못할 말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요셉의 어린 시절에 꿈을 통해 계시해 주시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두 번씩이나 꿈을 꾸게 하셨습니다.

 

첫 번째 꿈은 요셉이 곡식을 거둘 때에 요셉의 곡식단이 가운데 일어서니

형들의 곡식단들이 요셉의 단을 향해 절을 하는 꿈이었고,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열 한 별이 요셉을 향해 절을 하는 꿈이었습니다.

이렇게 똑같은 내용의 꿈을 두 번 겹쳐 꾸게 된 것은 이것이 헛된 꿈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백한 계시임을 의미합니다.

 

창37:11절에 “그 형들은 시기하되 그 아비는 그 말을 마음에 두었더라”

야곱은 요셉의 꿈 이야기를 마음에 두었습니다.

그러니 요셉이 살아 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야곱은

“이제야 그 꿈이 이루어졌구나!”하며 기뻐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이 주신 계시를 잊어버렸습니다.

마음에 두었다가 곧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요셉은 정녕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야곱은 믿음을 잃어버리고 불신앙에 굴복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아니하면 그 영혼이 기색하게 되어있습니다.

영혼이 부흥하거나 살아날 수 없습니다. 기색의 원인은 불신앙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의 영혼이 기색하고 기가 막힌 상태에 있다면 불신앙이 있는지를 잘 살펴보시고,

불신앙을 버리시고 믿음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2. 야곱의 기운이 ‘소생’하게 되었다 (27절)

 

45:27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에게 말하매

그들의 아버지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서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소생’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하야’라고 하는데, 구약성경에 239번이나 사용된 단어이며,

‘부흥’을 의미하는 전형적인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기운이 소생되었다는 말은

야곱의 영혼이 부흥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시편 85편 6절에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

합3:2절에도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본문의 ‘다시 살린다’는 말과 ‘부흥’은 똑같은 히브리어 ‘하야’로 쓰여 있습니다.

 

▲야곱의 영혼이 부흥되었습니다. 기운이 샘솟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는 요셉이 전해준 말 때문이었고, 둘째는 요셉이 보낸 수레를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 아비에게 고하매

그 아비 야곱이 요셉의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창 45:27).

 

그렇다면 요셉이 전한 말은 무엇이었습니까?

45:4~13절에 요셉의 말이 두 가지 요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두려워하지 말라(Do not be afraid!)는 것이었습니다.

45:5절에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요셉의 형들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을 팔아먹었으니 감옥에 집어넣고 복수하면 어떡하나하는 고민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실은 야곱도 많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양곡을 얻으러 자식들을 애굽에 보내놓고 막내 베냐민까지 보냈는데,

베냐민까지 잡히면 어떡하나?” “자식들이 안 돌아오면 어떡하나?”

“이러다 굶어 죽으면 어떡하나? 우리 가문은 멸망하게 되겠구나!”하는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의 말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영혼이 부흥하는 것은, 인생에 대한 두려움이 극복되어야 가능합니다.

 

신구약 성경에 “두려워하지 말라”는 구절을 찾아보면, 수 십, 수 백 번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약이나 신약이나 백성들을 향해 계속해서 하신 말씀입니다.

 

“천만 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시 3:6),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였은즉 두려워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이까” (시 56:11),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 41:10),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요 14:27).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지만 마음속에 질병 문제, 사업 문제, 자녀 문제 등으로

갖가지 두려움이 있는 분들은 모든 두려움을 과감하게 버리시고, 영혼이 부흥하게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하게 살아가라!”고 계속해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둘째는 지체하지 말고 애굽으로 오라는 것입니다.

성경에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표현은 주로 ‘세상으로 간다’,

‘죄에 빠진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습니다만 이번의 경우는 다릅니다.

 

가나안 땅에 있으면 죽을 수 밖에 없으니 애굽으로 와서 살라는 것입니다.

살되 나일 강 삼각주 근방의 고센이라는 땅을 따로 마련해 놓았으니

거기에 와서 애굽의 문화에 동화되지 말고 살라는 의미입니다.

애굽으로 와서 큰 민족을 이루고 살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왔다는 것을 들은 바로 왕도 요셉의 가족들을 기쁜 마음으로 초청합니다.

45:18절에 “너희 아비와 너희 가속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애굽 땅

아름다운 것을 주리니 너희가 나라의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왕은 말도 참 근사하게 합니다. “너희 아비와 너희 가속을 이끌고 내게로 오라!”

왕의 한 마디 말은 엄청난 영향력이 있습니다.

 

여러분, 바로의 한 마디도 이렇게 놀라운데, 하나님의 말씀은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내게로 오라!”

 

45:18b절을 보니 “아름다운 것을 주리니”와 “기름진 것을 먹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20절에는 “너희의 기구를 아끼지 말라 온 애굽 땅의 좋은 것이 너희 것임이니라”

애굽 온 땅의 명품은 전부 너희 것이라는 의미이고, 기름지고 맛있는 것을 제공하겠다는 것입니다.

“바로도, 요셉도 오라!”고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예수 그리스도도 오라!”고 하십니다.

 

▲야곱과 그 아들들이 애굽으로 오는 것은 창15:13~14절의 예언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구절은 아브라함에게 예언해 주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예언하신 말씀이 지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의 자손들이 요셉 덕분에 애굽의 고센 땅에 와서 30년은 호강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후 왕이 바뀌고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왕이

번성한 야곱의 자손을 종으로 삼고 혹사시켰습니다.

 

야곱의 자손은 노예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400년 동안 200만 명이라는

아주 거대한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한 가문이 이렇듯 하나의 큰 민족을 이루었다는 것은 아주 놀라운 일입니다.

 

▲요셉은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갈등과 절망 속에 있는 죄인들에게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믿기만 하라!” “그리고 나 있는 곳에 오라!”

 

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바로 예수님이 계신 천국입니다.

마11:28절에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게로 오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너무도 분명한 말씀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말을 할 때 노중에서 다투지 말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45:24절에 “이에 형들을 돌려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당신들은 노중에서 다투지 말라 하였더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으로 오라고 말씀하시고, 천국으로 오는 여정 길에

서로 다투지 말고 화목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 13:35).

 

▲야곱의 영혼이 소생된 첫째 이유는, 두려워하지 말고 애굽으로 오라는 요셉의 말 때문이었습니다.

둘째 이유는 요셉이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수레는 바퀴가 달려 있고 앞에서 소 두 마리가 끄는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야곱이 130세라는 늙은 나이에 어떻게 애굽까지 갈 수 있었겠습니까?

야곱은 아마도 여행하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갖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 요셉이 보내준 수레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가나안 땅에서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야곱은 이제 수레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애굽을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수레뿐만 아니라 나귀도 스무 필을 보냈습니다.

수나귀 열 필에는 애굽의 아름다운 물품을 싣고

암나귀 열 필에는 아버지에게 길에서 공궤할 양식을 실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이 준비된 것입니다. 야곱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야곱이 수레를 보더니 소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수레와 나귀 스무 필이 왜 중요할까요?

그것은 요셉이 살아있다는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살아있지 않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들은 요셉이 살아있다는 증거임과 동시에

애굽으로 갈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이 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야곱은 더 이상 애굽으로 갈 것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야곱의 영혼이 이것들을 보고 소생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수레의 영적인 의미는 무엇입니까?

수레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다는 증거이며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필요한 영적 자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주일예배가 수레와 같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가 첫째로 주일예배는 예수님이 부활하셔서 살아계시다는 증거고,

둘째는 성도들이 인생을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은혜를 입을 수 있는 영적인 수단이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영국의 탁월한 설교자 존 그리어는 ‘주의 만찬이 수레’라고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성령과 성경이 수레’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성도는 성경을 부지런히 읽어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의 말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므로 천국에 가는 여정에 필요한

모든 영적인 자원을 우리에게 공급해 주신다”는 점입니다.

 

우리는 수레를 타고 가야 합니다. 제일 중요한 영적인 자원은 성경입니다.

영혼이 눌린 사람과 밤에 자꾸 신음 소리를 내며 끙끙 앓는 사람은

성경을 많이 읽으셔야 합니다. 성경만 읽어도 귀신은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너는 언제 죽은 귀신이냐?” “떠나가라!”고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귀신은 성경만 읽어도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저주와 질병도 떠나가고,

영혼의 눌림도 사라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수레를 보내주셨는데, 왜 걸어 다니냐는 것입니다.

 

먼저는 성경을 많이 읽으시고 기도를 많이 하셔야 합니다.

기도 역시 수레를 타는 것입니다. 기도는 복잡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필요를 아뢰는 것입니다. 불쌍히 여겨주세요! 병들지 않게 해 주세요! 고쳐주세요!

기쁨을 주세요! 라고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원하시고 진솔한 언어를 원하십니다. 미사여구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기도함으로 수레를 타고 애굽으로 가는 것입니다.

 

◑3. 야곱의 영혼이 ‘만족’하게 되었다 (28절)

 

45:28절에 “이스라엘이 가로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았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곱의 나이 130세가 되어 드디어 참다운 만족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이스라엘(하나님의 황태자)이라고 불러주셨지만

그는 그만한 만족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황태자와 같은 만족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수레는 황태자가 타는 것 아니겠습니까? 수나귀, 암나귀 스무 필을 통해 온갖 필요가 제공되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우리에게서 난 것 같이 생각하여 스스로 만족할 것이 아니니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 (고후 3: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 103:5).

“저가 사모하는 영혼을 만족케 하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 (시 107:9).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채우실 때 가능합니다.

세상 그 어떤 것도 우리의 만족이 될 수 없습니다. 권력, 재물, 명예도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를 만족케 하십니다.

 

▲그러나 야곱은 만족했다고 해서 경솔해 지지 않았습니다.

창46:~7절은 야곱이 헤브론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장면을 기록해 주고 있는데,

가나안 땅 최남단 브엘세바에 이르러, 그 아비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을 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제 이곳 브엘세바를 지나가면 애굽이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데,

이곳에서 다시 한 번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겠다는

노인의 지혜와 신중함이 엿보입니다. 경솔해지지 않은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이 생각하기를 우리 아버지 이삭도 애굽에 내려갔다가 망신을 당했고,

우리 할아버지 아브라함도 애굽에 내려갔다가 망신을 당했는데,

내가 지금 애굽에 내려가는 것이 합당한 일인지 하나님께 물었던 것입니다.

그러자 46:3~4절에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하나님이라 네 아비의 하나님이니 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내가 거기서 너로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 요셉이 그 손으로 네 눈을 감기리라 하셨더라” (창 46:3~4).

 

야곱은 이 말씀을 듣고 소생될 뿐 아니라

확신에 차 온 가족 70명과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430년 동안 200만 명이라는 대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130세에 내려가 147세에 죽었습니다. 애굽에서 17년을 살았는데,

이 시간은 참으로 부요하고 평안하고 안전하고 행복한 시기였습니다.

 

야곱의 노년기는 복된 시간들로 채워졌습니다.

우리 성도들의 노년기도 야곱의 노년기처럼 복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실 때, “하나님! 내 노년기가 평안하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젊을 때는 모든 것을 다 가진 것처럼 살다가

노년기에 보기 안쓰러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야곱은 노년기가 참으로 복된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혼이 만족하게 되었습니다.

 

결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야곱처럼 갈등과 두려움으로 인해 영혼이 기색한 상태가 되었다면

그것은 불신앙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시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고 예배에 참여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는 여러 가지 은혜의 방편들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소생될 것이며, 우리가 소생되면 비로소 참된 만족이 찾아올 것입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의 영혼이 소생되고 만족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