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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령, 생기, 결혼을 통해 회복된 인간

LNCK 2012. 12. 30. 09:39

13 아담과 하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창2:18‐25) (tistory.com)

 

◈생령, 생기, 결혼을 통해 회복된 인간          창2:7~24

 

김성수 목사 창세기 13강 P2

 

◑생령 living soul의 의미

 

창2:7절을 보면

최초의 사람은 흙으로 지어진 후에 생기를 받습니다.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여기서 ‘생령’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하이 네페쉬 하야’입니다.

‘살아있는’(하야) ‘산 존재’(하이 네페쉬)라는 의미가 됩니다.

 

그런데 비슷한 단어가

즉, ‘하이 네페쉬’라는 단어가, 창2:19절에는 ‘생물’로 나옵니다.

 

(창 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여기서 ‘각 생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하이 네페쉬‘입니다.

그 각 생물들 역시 흙으로 지어졌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는 ’생기‘라는 것을 불어넣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짐승들은 ‘하이 네페쉬 하야’가 아니라 그냥 ‘하이 네페쉬’입니다.

반면에 생기를 부여받은 인간은 ‘하이 네페쉬 하야’, ‘살아있는 산 존재’가 된 것입니다.

 

 

◑생령에게 부어진 ‘생기’는 무엇입니까?

 

(창 2:7)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그렇다면 생령(인간)에게만 부어진 ‘생기’는 무엇일까요?

그 단어는 히브리어로 ‘니스마트 하임’입니다.

 

그 ‘니스마트 하임’이라는 똑같은 단어가 잠언에 나옵니다.

(잠 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 사람의 깊은 속을 살피느니라”

(주님은 사람의 영혼을 환히 비추시고, 사람의 마음 속 깊은 곳까지 살펴보신다.)

 

여기서 ‘영혼’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가 ‘니스마트 하임’입니다.

그 ‘니스마트 하임’이 무엇을 하는 기능이 있다고 합니까?

‘사람의 깊은 속’을 살핀다고 합니다.

 

거기서 ‘사람의 속’이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자궁, 생명’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니스마트 하임’ 즉 ‘생기’는

‘생명을 알아보고 생명을 지각하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창2:7절의 ‘생기를 받은 생령’이 의미하는 바는

‘짐승들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생명의 기운을 받아

생명을 감지하고 생명을 알아볼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면 쉽게 말해서 ‘성령’ 아닙니까? 아닙니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마른 뼈들에게 들어간 생기는 성령이 맞습니다.

거기서 ’생기’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루아흐’입니다.

 

그 단어는 우리가 공부했듯이 창세기 1장 2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신’이라는 단어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나 창2:7절에서의 ‘생기’와

에스겔37장에 나오는 마른 뼈들에게 들어간 ‘생기’는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좀 더 확실한 증거는 70인 역과 신약 성경도

첫 사람 아담을 ‘성령의 사람’으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 역은 그 창2:7절의 생령이라는 단어를

헬라어 ‘프쉬켄 조산’으로 번역을 합니다.

그 ‘프쉬켄 조산’은 성령을 의미하는 헬라어 ‘프뉴마’와 완전히 다른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창세기 2장 7절의 ‘생령’이라는 단어를

고린도 전서 15장에서 ‘산 영’이라는 단어로 옮기는데

그 단어도 ‘프뉴마’가 아니라 ‘프쉬켄 조산‘입니다.

 

(고전 15:45)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산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었나니”

 

바울이 첫 사람 아담을 묘사하는 단어로 ‘프쉬켄 조산’이라는

70인 역의 번역을 따랐다는 것은

첫 사람 아담은 그저 살아서(living being),

생명이 무엇인지 감지하고 알아 볼 수 있는 존재였지만

 

생명나무의 실과인 살려주는 영,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거듭나지 못하면

영생을 소유한 자로 살아남을 수 없는 존재였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아담은 영생하도록 성령을 받은 자가 아니라

단지 생명의 기운을 받아 생명을 알아보고 지각하고 추구할 수 있는 존재였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하나님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타락을 함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자

인간은 그 ‘생명의 기운’마저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들은 생명의 주관자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알아 볼 수 없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생명을 알아보고 지각하고 추구할 수 있는 ‘생명의 기운’

‘니스마트 하임’을 인간에게 주심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차버린 인간에게

죄책을 물으실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신 것이고,

 

타락하여 죄를 지은 인간들에게 이제는 생명의 기운 정도가 아닌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부어주심으로

영원한 하늘나라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실 것임을

창세기부터 계속해서 언약으로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바는 첫 사람 아담은 ‘생기’, ‘니스마트 하임’

‘생명을 알아볼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기운’을 받아서

생명을 알아 볼 수 있고 감지할 수 있고 추구할 수 있는 존재였고

 

나머지 짐승들은 생명이 무엇인지 알아 볼 수도 없고 감지할 수도 없으며

그 생명을 추구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는 사람과, 짐승의 차이>를 아시겠지요?

 

왜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게 될 교회의 탄생을 예표 하는

하와의 창조 사이에 갑자기 짐승들을 등장시키고

아담이 그 짐승들의 이름을 짓는 장면을 삽입시켜 놓았는지 아시겠지요?

 

 

◑돕는 베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는,

하나님을 알아볼 수도 없고

그 분이 주시는 생명을 추구할 수 도 없는

세상과는 완전히 다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알아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을 추구하며

땅에서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자들이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탄생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알아보고 지각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남편이 되셔서, 우리와 연합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와 내가 감히 동등한 위치에 올라서게 된 것입니다.

 

▲본문 18절에 나오는 ‘돕는 배필’ ‘에제를 크나긋도’는 ‘그에 상응하는 도움’

혹은 ‘그에 상응하는 돕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 말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상응하는 존재로 보아주시겠다는 말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라는 신랑 안에서 나온 예수의 갈비뼈로 만들어진 교회는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성분과 속성을 지니고 있어야 하지요?

 

(창 2:23‐24)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성경은 분명 교회는 짐승들과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아담) 안에서 나온 예수 그리스도의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때문에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원리인 십자가의 삶을 추구해야하며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과 원수들의 유익을 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부인의 삶을 살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는 성분이 같기 때문입니다.

 

비록 성숙의 정도가 다르긴 하지만

우리의 세계관과 가치관이

정말 이 세상의 힘의 원리와는 정반대의 십자가의 삶의 원리로 바뀌어 있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정말 우리가 하늘의 생명을 알아보고 지각할 수 있는 존재들이라면

우리에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이 나와야 하고

적어도 그러한 삶을 위한 분투가 우리의 삶 속에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전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짐승입니다.

 

▲(사1:3)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 하는도다 하셨도다”

 

하나님을 말씀하십니다. 소나 나귀도 주인을 알아보는데

하나님을 떠나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과 그 분께서 주시는 하늘의 생명에 대해 전혀 알아보지 못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생기’ ‘니스마트 하임’이 없는 그저 ‘흙’이기 때문에

생명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생명을 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그저 흙으로서 흙에 속한 것, 다른 말로 땅에 속한 것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마치 타락한 짐승인 뱀이 흙 속에서 흙만 먹으며 살도록

하나님께 저주를 받은 것처럼

 

이 땅의 수많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는 짐승들이

흙 속에서 흙이 주는 것들로만 배를 불리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에이 세상 사람들도 착하게 사는 사람들 많은 데요’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생명을 알아보거나 지각하지 못하고

그 생명을 추구하지도 않고 생명을 원하지도 않는 세상 사람들이 하는 모든 일은

다 저주받아 행하는 일인 것입니다.

 

아무리 그들이 하는 일이 이 세상의 윤리와 도덕의 잣대로 재었을 때

한없이 선하고 훌륭한 일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은 모두 저주받은 흙의 일인 것입니다.

 

◑적용

 

(눅 17:26‐30) “노아 시대에 일이 벌어진 것과 같이, 인자의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는 날까지,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고 하였는데,

마침내 홍수가 나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롯 시대에도 그와 같은 일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팔고 나무를 심고 집을 짓고 하였는데,

롯이 소돔에서 떠나던 날에, 하늘에서 불과 유황이 쏟아져 내려서,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그러할 것이다.”

 

여기 보시면 멸망의 날에 멸망 받은 사람들이 하던 일이

전부 우리의 일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뭐 나쁜 일입니까?

 

그런데 왜 그들이 멸망의 물과 멸망의 불 속으로 떨어졌습니까?

생명이 없었던 것입니다. 생명이 없는 자들은

제아무리 선하게 보이는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을 전부 자기 자신의 자랑과 높임을 위해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알아보고 지각하며 생명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이 흙의 세상에서의 높아짐이나 흙에 속한 사람들로부터 받는 찬사나 인기를

배설물처럼 여기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이제 ‘생명이신 성령’이 들어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들은 그렇게 이 땅에서 오로지 흙만 쳐다보던 삶에서

돌이켜 생명을 추구하는 십자가의 삶 속에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중국의 거장 장예모 감독을 아주 좋아합니다.

중국의 제 5세대 감독으로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는 그런 감독입니다.

 

가장 최근의 ‘황후 화’를 비롯해서 ‘붉은 수수밭’이라든지

‘국두‘’귀주이야기‘같은 초창기 작품들을 보면

적어도 그는 인생이 무엇인지는 이해하고 있는 사람 같습니다.

 

그는 거의 그의 모든 작품에서 이 세상의 힘을 추구하고

자신만을 위해 서슴없이 남에게 해를 입히고 손해를 주는 이기적인 삶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아주 적나라하게 표현을 합니다.

 

’국두‘같은 영화에서는 인간의 쾌락을 향한 잘못된 추구와

이기적인 욕심이 결국 어떠한 결말을 맞게 되는지

양서방네 염색공장이 모두 불에 타는 장면으로 보여줍니다.

 

그 속에서 쾌락과 이기의 인물들이 하나하나 타 죽습니다.

거의 20여 년 전 영화인데도 저는 그 마지막 장면이 생생하게 기억이 납니다.

그 때 제가 ’저게 바로 지옥이구나‘하고 그 장면을 보고 두려움에 떨었거든요.

 

세상 사람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삶인 ‘자기 부인의 삶’과 반대되는

오로지 흙에만 몰두하는 짐승들의 삶인 ‘자기만을 위한 삶’이

어떠한 결과로 막을 내릴지 잘 압니다.

 

하물며 생명을 인식하고 지각할 수 있게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신부들인 우리 성도들이

여전히 짐승들처럼 남들을 밟아 세상의 힘만을 추구하고

흙의 일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그게 어찌 가당한 일이겠습니까?

생명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왜 그렇게들 영원한 생명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까?

 

 

◑결혼 생활에 적용하면,

 

이렇게 우리는 최초의 결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결혼이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며 어떠한 삶으로

그 결혼 생활을 채워야 하는지가 자명 하게 드러나지요?

 

하나님은 천국에는 있지도 않은 ‘결혼’이라는 제도를 우리에게 주심으로

그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필연성과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를 체험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서의 삶을 잘 훈련하라고

우리에게 결혼이라는 것을 허락하신 것입니다.

 

(고전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사도 바울이 고린도 전서 6장에서 음행에 대한 경고를 하고

마지막 결론으로 던지는 것이 ‘음행으로 몸을 더럽히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입니다.

그러니까 결혼 생활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지금 고린도 전서 6장은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세상을 사랑하는 음행을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경고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결혼 생활을 통해서 바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께만 영광이 되는 삶을

두 사람이 구현해 내기를 힘쓰는 것입니다. 그게 결혼입니다.

 

▲남자는 자기에게 주어진 아내를 신랑이신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듯이

목숨 걸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자는 하나님께 순종하며 전적으로 자신의 삶을 의뢰하고 의존해야 하는

교회의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잘못 생각하면 남편과 아내의 역할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오해하실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아내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어주는 신랑의 삶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무엇입니까? ‘십자가, 자기 부인’입니다.

 

신랑에게 전적으로 순종하며 내 뜻과 고집을 죽이고

신랑의 뜻에 순종하며 전적으로 그에게 의존하는 신부의 삶을 한 마디로 줄이면 뭡니까?

역시 ‘십자가, 자기 부인’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결혼 생활을 통해서 남편은

예수의 역할에 충실하고 아내는 교회의 역할에 충실하면서

모두가 참 신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며 복종하는

‘그리스도의 신부’로 지어져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그리스도의 신부로 지어져 가는 남편과 아내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인 사랑과 온유와 인내와 용서의 삶이 나오는 것이고

그 삶을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이 사랑과 인내와 용서와 온유와 절제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드러내낼 수 있도록,

여러분의 배우자가 전부 성인군자가 아니고

조금 모자라거나 답답하거나 포악하거나 표독스러운 것입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배우자를 보면서

‘내가 어쩌다가 저런 인간을 만나 가지고 이런 고생을 하나?’하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실수가 없으신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가장 알맞은 배우자를 주신 것입니다.

그 속에서 사랑과 인내와 용서와 온유와 절제를 훈련하라고요.

 

처음부터 살신성인의 자세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겠습니까만

만일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부부 사이에서 무슨 인내와 용서와 온유가 나타납니까?

 

원수가 있어야 사랑이 있는 것이고

나에게 해코지하는 사람이 있어야 용서가 있는 것이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이 있어야 인내가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부부관계를 통해 바로 그러한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목숨은커녕 물 한바가지 떠다 주는 것도 귀찮아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를 대속해 주시지 않았으면 난 어떡할 뻔 했는가’

하고 십자가의 필연성을 배우는 것입니다.

 

순종은커녕 남편이 자기 뜻대로 따라주지 않으면

언제든지 손톱을 치켜세우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역시 십자가의 필연성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간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뒤로 숨다보면

어느새 아내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남편으로

남편을 위해 목숨을 걸고 순종하는 아내로 지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부부가 그들의 관계 속에서 지향해야 할 목표지점인데

다른 것에 관심들을 두니까 평생을 원수처럼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한국의 한 신학교에서 자기 학교 출신 목사님들 1,000명에게

무기명 설문 조사를 했다고 합니다. ‘만일 다시 결혼할 수 있다면

지금의 사모님과 또 결혼하시겠습니까?’ 라는 질문에

90%가 ‘아니오’에 체크를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원래 부부는 우리가 오늘 본문에서 보았듯이 한 몸이어야 합니다.

 

‘네가 나고 나가 너인 관계’가 부부입니다.

부부는 원래 서로를 향해 내 살 중의 살이요 뼈 중의 뼈라는

진실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왜 이 모양이 되었습니까?

 

죄가 들어오자 인간은 서로에게 핑계를 대기 시작했습니다.

남자는 여자에게 핑계를 대면서 ‘당신께서 만들어 내게 주신 여자’라는 말로

그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의 권위까지 타고 넘어들어 왔습니다.

 

그 말은 자신의 머리 위에 그 어떠한 통치권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 후로 타락한 인간들의 부부 관계 속에서는 하나님의 통치권도 상실이 되었고

서로에 대한 순종과 사랑도 상실이 된 것입니다.

 

이제 부부는 한 몸이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상대방을 갉아먹고 싶어 하는 거머리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창 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서 사모하다라고 번역이 된 단어는 테슈카’ ‘장악하다입니다.

그 말은 인간이 타락을 하고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게 되자 부부관계가

여자는 남자를 장악하려하고 남자는 여자를 다스리려는 관계로 변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면서

그 상대방이 자기의 짐을 덜어주거나 자기의 삶에 보탬이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요구하는 순종이나 목숨을 건 사랑은 도대체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쌍방이 모두 그 상대방을 ‘자기 존재의 확장‘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배우자가 많이 배우고 잘 생기고 예쁘고 돈이 많으면

마치 자기 존재의 크기가 그마 만큼 확장이 된듯하여 매우 흡족해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상대방이 자기에게 유익이 되기는커녕

못 생기고 무식하고 가난한 사람이면

자기 존재에 피해주는 주는 인물로 간주해서 미워하게 되는 것입니다.

나에게 도움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아닙니다. 그러한 이기적인 삶은

상대방이 어떻게 되든 말든 서로에게 핑계를 대었던 타락한 죄인들의 삶입니다.

생기를 잃어버린 짐승으로 추락한 아담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상대방을 위해 내가 손해보고 내가 죽어주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상대방을 이용해서 내가 유익을 보려는 생각을 버리고

’나로 인해 상대방을 어떻게 유익하게 해줄까’를 고민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나의 배우자가 조금 모자라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부족한 사람일지라도

‘너는 왜 나의 얼굴에 먹칠을 하냐’고 함께 손가락질을 하시면 안 됩니다.

 

적어도 나만은 그 배우자의 편에 서서

온 몸으로 그 배우자에게 쏟아지는 화살을 맞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벌거벗은 부끄러운 아담이 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듯이

우리도 우리의 배우자의 부끄러움을 지는 것입니다. 그게 성도인 것입니다.

 

온 세상사람 모두가 여러분의 배우자에게 등을 돌려도

여러분은 그 배우자의 편이 되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가르치고 권면하며 눈물로 기도하면서

그 상대방의 거룩을 위해 희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내 배우자가 예수를 보게 되고 그의 삶이 바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게 부부 생활인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세상에서 저의 아내를 가장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의 남편이나 아내가 아무리 부족하고 못났어도

여러분은 그 상대방의 편을 들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관계 속에서 사랑과 온유와 인내와 절제를 보여 주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배우자가 여러분의 희생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로 변해 가는 모습을 지켜보십시오.

 

다른 집안의 부부관계를 부러워하지 마세요.

다른 집 떡이 커 보이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죄성입니다.

 

다른 집은 전부 나보다 행복해 보이시지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모두다 문제를 가지고 있고 어떤 가정도 다툼이 없는 가정이 없습니다.

 

자신이 불행한 모습을 남에게 들키는 것이 부끄러워서

전부 연극하고 있는 것이지 다들 그 결혼 생활을 통해 거룩의 훈련을 받고 있습니다.

 

속에서 묵직한 것이 울컥하고 치솟아 오를 때

나를 탄생케 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옆구리에서 살과 피를 모두 쏟아내신 우리 주님을 떠올리십시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 나 같은 죄인을 위해 털 깎는 자 앞에서의 어린양처럼

묵묵히 수난을 당하셨던 우리 주님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그 주님께서 우리의 신랑이 되셔서

우리가 하루 속히 정결한 신부로 완성이 되어 영원한 부부로 살고 싶으셔서

우리에게 그러한 훈련의 장을 허락하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잘 견딜 수 있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