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서 두 발 떼기 행7:9~53 스크랩
제가 미군부대에서 근무할 때 헬리콥터를 정비했습니다.
헬리콥터를 정비하고 나면 늘 test fly를 합니다.
test fly를 할 때 제일 긴장되는 순간, 그러니까 그 포인트를 만족시켜야
정비가 잘되었다고 하는 확신을 갖기 시작하는 결정적인 포인트가 있습니다.
그 포인트가 뭐냐 하면, 헬리콥터 밑에 스키처럼 달려있는 발을 랜딩기어라고 하는데,
랜딩기어가 땅에 붙어 있다가 시동을 걸면
헬리콥터의 뒷날개와 윗날개가 돌아가기 시작하고,
레버를 잡아서 움직이게 되면 땅에서 뜨게 됩니다.
그렇게 땅에서 뜨게 되는 포인트가 제일 중요하다는 거예요.
일단 땅에서 떠서 일정시간, 아무 지장 없이 30초고 1분이고 2분이고 떠있는 상태가
확인이 되고나면, 그 다음부터 전진하거나 좌우회전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헬리콥터가 정비되어 test fly를 하게 될 때 제일 중요한 포인트는,
땅에 붙어있는 랜딩기어가 땅에서 떨어져서 공중에 떠있는 상태가 안정적으로 유지되고 있는가
하는 점이라는 겁니다.
그게 되고나야 그 다음부터 공중에서 움직임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발을 뗀다는 것, 랜딩기어가 땅에서 떨어진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라는 거예요.
▲복음을 받아들여서 사는 것을, 우리가 신앙의 삶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신앙의 삶의 요체는 무엇이냐,
신앙의 삶의 가장 핵심이 되는 본질적인 내용이 뭐냐?
땅에서 발 떼기라는 얘깁니다.
이 스데반 설교의 앞부분, 아브라함에 관한 언급이 나오는 부분에 대해서 함께 나누면서
‘구름타기’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이 구름타기를 실제 어떻게 하느냐를 오늘 말씀으로 같이 나누는 거예요.
우리가 마음의 발로 땅을 딛고 있습니다.
땅을 딛고 있다는 것은, 이 땅에서 성공하고 싶어 하고,
이 땅에서 안정적인 삶의 기반을 구축하고 싶어 하고… 등등.
근데 신앙이라는 것은, 땅에서 발을 떼는 겁니다.
마음의 발을 떼게 되면
하나님 품에 안기는 것을 비유적으로 구름타기라고 표현했습니다.
하나님 품에 안겨서 우리 마음이 구름 타듯이 가려고 하면, 발을 떼는 것이 중요하다는 얘기에요.
발을 떼는 것에 대한 이야기가 중요한 이유는,
발을 떼는 것이 신앙과 종교 안에서 일어나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우리 삶 전체영역을 다 포함하면서, 그 질을 바꿔버리기 때문입니다.
굉장한 사건이에요.
땅에서 발 하나 떼는 거거든요, 땅에서 발을 떼는 건데 다 바뀌어버리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사업가라도, 사업을 잘하는 것이 내 과제가 될 필요가 없어요.
사업이 땅에 있잖아요.
그래도 내가 할 일은 businessman이 아니라 발 떼기 맨이 돼야 된다는 거예요.
‘사업에서 발 떼기 맨’, 마음에서 발을 떼는 겁니다.
내가 지금 아빠라고 하면, 아빠로서 자식을 잘 키우는 게 아니라
자식에서 마음의 발을 떼면 되는 겁니다.
공중부양을 하면 되는 거예요, 마음의 발 떼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이렇게 발 떼기를 할 때, 지난 시간 우리가 나눴던 것처럼,
우리가 발 뗀 땅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계획을 갖고 계시고,
그 계획을 하나님 스스로가 이루어 가신다는 내용,
이게 바로 스데반 집사님이 하신 설교의 주 내용이 된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오늘은 지난 시간에 아브라함 얘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전반적으로 다시 한 번 그 내용을 살펴봅니다.
내용이 긴데, 우리가 얘기한 그 내용을 풀어낸 것이고,
그 내용을 다시 한 번 짚어본다는 얘기에요.
여러분, 스데반 집사님의 생애 마지막 설교입니다.
근데 특이해요, 분명히 복음을 전하는데, 복음의 내용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에 관한 언급이 직접적으로 한 마디도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설교된 내용의 의미가 무엇이냐?
아브라함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되는 이유는
아브라함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똑같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면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일이 똑같이 일어나도록 돼있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라 얘기합니다.
그러므로 스데반 집사님이 지금 보시는 관점은
복의 근원인 아브라함에게 일어난 일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의 일이 되었다고 보시는 그런 관점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아브라함에게서 발 떼기가 일어난 겁니다, 땅에서 발 떼기 사건이 일어난 거예요.
아브라함에게 집이 있었고, 밭이 있었고, 친척이 있었고,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을 떠나라고 하셨는데.. 떠나게 됩니다.
그게 가능했던 이유가 뭡니까?
아브라함의 마음에 하나님이 영광의 하나님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영광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마음에서 1등 했다는 뜻입니다.
이 하나님이 1등 했다는 것이 땅에서 발 떼기와 연결이 돼있다는 얘기에요.
자, 사업이 지금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그 사업 때문에 걱정을 하는 이유는, 그 사업에 내 마음이 가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도 비즈니스가 있었어요, 밭을 가꿔야 되고 집을 돌봐야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거기에 닿아 있다가 하나님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내 비즈니스가 잘되건 잘못 되건 간에 마음이 사업보다 먼저 하나님께 가닿습니다.
이게 발 떼기라는 거예요, 땅에서 발을 뗀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집을 떠날 때, 사라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을 따라 이 땅을 떠나는데, 떠난 후에는 당신을 지킬 수 없다,
예쁜 당신을 힘 있는 사람마다 탐을 낼 텐데, 내가 지킬 수가 없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아내라고 하지 말고 누이라고 하겠다.’
즉, 아예 마음에서 사라를 떼어내고서야 출발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사라를 내 아내로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으면 못 떠납니다.
그래서 떠나기 전에 미리 버린 거예요.
‘사라’라고 하는 땅에 있는 아내로부터 발을 뗀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먼저 마음이 가닿았고,
먼저 마음이 가닿은 하나님께서 떠나라고 하시니 떠나야겠는데, 사라가 걸립니다.
여러분, 헬리콥터가 기계적인 문제가 없어서 땅에서 잘 떴더라도,
전깃줄 같은 데에 걸리게 되면 균형을 잃고 땅으로 떨어지고 맙니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께로 마음이 향해서 이 땅에서 뜨려고 그럴 때,
아내 사라 라는 줄이 매어져 있으면 못 뜨는 거예요.
결국 마지막에는 100세에 얻은 아들이삭까지도, 하나님께로 마음이 가닿기 위하여
이 땅에서 발을 떼기 위해 제단에 놓고 칼을 들어 죽이려 합니다.
이삭을 마음에서 버린 거예요, 땅에서 떼는 겁니다.
땅에 있는 것이 아내면 아내, 아들이면 아들, 사업이면 사업,
그 어떤 것이든지 발을 떼는 것이 신앙이라는 거예요.
이렇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발 뗀 땅이 나타납니다, 아브라함의 인생 속에서 아브라함이 발을 뗀 땅이 등장을 합니다.
그 발 뗀 땅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계획을 갖고 계시고 그 계획을 수행해나가시는데,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을 말씀하시면 그것이 약속이 됩니다.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으시고 이루어 가시면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져 가는 것인데,
그 계획을 말씀하실 때는 그것이 약속이 됩니다.
▲그래서 오늘 스데반의 설교에서 요셉이 나타나고 모세가 나타납니다.
모세 말고도 야곱도 있고 이삭의 이야기도 있고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요셉이야기에서 건너뛰고
모세이야기로 스데반의 설교 속에서 주로 이 두 사람의 이야기가 집중되어 소개됩니다.
이것은 요셉과 모세의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요셉의 이야기와 모세의 이야기 속에서도 신앙적인 진리가 풍부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 집사님이 요셉과 모세 이야기를 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뭐냐 하면, 아브라함이 발 뗀 땅에 대해서 하나님이 갖고 계신 계획을 드러내 보여주셨는데,
그 약속하신 것이 어떻게 이루어져 나가는가를
요셉과 모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즉, 요셉과 모세를 조명하기 위한 의도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에게 해주셨던 그 약속, 아브라함이 발을 뗐기 때문에 해주셨던 그 약속,
자기가 딛고 있던 땅에 대해서 발을 떼고 제일 먼저 마음의 발을 하나님께로 딛었으니까,
하나님께 마음을 드렸으니까, 하나님이 품에 안으시고
아브라함이 발 뗀 땅에 대해서 계획을 갖고 계셨는데,
그 계획을 어떻게 이루어 가시느냐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요셉과 모세가 등장한다는 거예요.
그 다음의 이야기가 모세를 통해서 출애굽하고 광야로 나갔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거역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왜 이 이야기가 등장할까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를 거역하고 하나님을 거역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가 뭡니까?
목이 말라서, 또 만나만 먹으니까 음식에 대해 불평을 합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에요, 마시는 것과 먹는 것.
불편합니다, 짜증납니다, 고기도 좀 먹고 싶고 맛있는 부추도 먹고 싶고.
그런데 먹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불평을 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광야로 끌어내셨을까요?
지금 스데반 집사님이 보고 있는 관점이 뭡니까?
왜 광야로 끌어내서 고생을 시키는 것이라고 이해하고 있습니까?
발 떼기 시험이라는 거예요.
육체를 갖고 이 땅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는
육체가 느끼는 결핍에 대해서 마음이 가닿고, 불평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등장을 하십니다.
‘자, 육체의 필요가 있고 내가 있다, 마음이 어느 것에 먼저 가닿을 것이냐?’라고 물으시며
시험하시는 거라는 얘깁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애굽에서의 찬란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열 가지 재앙을 통해
나타나는 역사를 보고 홍해가 갈라져서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먼저 마음이 가닿지 않고,
다시 말해서 이 육체가 속해있는 이 땅에서 발을 떼지 않고, 마음을 이 땅에 붙이고 있으면서
그 붙인 땅의 상황에서 느끼게 되는 마음의 불편함을 그대로 다 토로하며 살았다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서.
땅에서 마음을 떼고 하나님께 마음을 먼저 붙이면 애굽에서부터 역사하셔서 홍해를 가르고
애굽군대를 멸절시키면서 자기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을 텐데,
마음이 지금 주어져 있는 이 땅의 상황에 가닿다 보니까,
그 상황에서 느끼는 느낌을 그대로 갖고 하나님과 모세에 대해서 불평과 원망을 했다는 얘깁니다.
▲똑같은 시험을 주님이 당하십니다.
광야에 나가서 40일 금식하신 뒤에 ‘돌로 떡을 만들어 먹으라’ 떡이라는 게 가장 급한 필요입니다,
이때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하나님께 마음이 가닿도록 마음을 보내드립니다.
이게 발 떼기라는 거예요.
그런데 잘 안 돼요, 안 될 때 나타나는 일이, 이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읽어보면,
금송아지를 숭배하게 되고, 암몬 자손들의 신인 몰록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자식을 제단에 바치는 몰록을 숭배하게 됩니다.
앗수르 사람들이 숭배하고 있는 토성을 뜻하는 레판의 별과 하늘의 군대, 일월성신입니다.
그러니까 땅에다 발을 붙일 때 나타나는 게 하늘을 쳐다보는 거예요, 하늘을 숭배하는 겁니다.
우상을 숭배하게 됩니다, 초월자라고 믿으면서 우상을 숭배하게 되는 거예요.
이게 바로 땅에다 발을 붙이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거예요.
우상숭배를 하고 종교를 만들어내고, 자기계발서를 읽고…
이런 것들이 땅에 발을 딛고 있는 사람들의 특징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뿌리 깊은 죄악, 땅에다 발을 붙이고 하나님이 앞에 나타나도
하나님께 마음을 드리지 못하게 되는 이 죄악, 하나님보다 이 땅을 더 사랑하는 죄악,
헬리콥터가 이 땅에서 뜨지 못하는 고장 난 상태인 것 같은 죄악의 상태,
이 상태를 고치시기 위해서 성막을 주시고 성전을 주셨다는 얘기를 스데반 집사님이 하시는 겁니다.
▲성막과 성전이 뭐하는 곳입니까?
땅에다 마음의 발을 붙인 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름에도 불구하고,
사업에 무슨 일이 생기면, 사업의 상황에 마음을 먼저 갖다 붙여서,
사업이 안 되면 거기서 나오는 걱정, 사업이 잘되면 거기서 나오는 기쁨을 가지고
먼저 마음이 다 사업 때문에 오리엔테이션 된 뒤에 하나님을 만나는
이 죄악 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성전에 들어가서 번제를 드리면서 다 죽이는 겁니다,
그런 기능으로 성전을 주신 거예요.
그러므로 성전의 기능이 발 떼기 기능입니다, 이 땅에서 발 떼기 기능.
마음이 하나님보다 먼저 이 땅에 붙어있는 상태로 땅의 상황에 대해서 느끼고 판단하는 대로
하나님께 나오는 이 죄악 된 상태, 이것을 죽이기 위해서 번제를 드리도록
장치를 만들어주신 게 ‘성전’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내 죄악 된 본질 때문에 땅에 마음이 닿고 있다는 이 현실을 내가 안타까워하면서
성전에 들어가 제사를 드려야 성전을 주신 이유에 맞게 제대로 성전을 활용하는 건데,
성전조차도 미신이 돼버립니다, 미신의 대상이 되어버려요.
‘성전이라는 건물을 갖고 있으니까 우리나라가 안 망할 거야,
성전이라는 건물에 내가 가서 제사를 드렸으니까 내 인생이 괜찮을 거야,
내가 마음을 땅에 붙이고 있는데, 사업에 붙이고 자식에 붙이고 있는데
성전에 가서 제사를 드리고 나면 내 마음이 발붙이고 있는 사업과 자식이 잘 될 거야!’
이렇게 성전의 기능과 본질을 자기 마음대로 곡해해서 뒤바꿔버렸습니다.
그래서 스데반 집사님이 얘기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안에 거하시는 게 아니다’
이제 성전도 본래의 하나님이 주신 의미를 다 상실하고 미신의 대상으로 바꿔서
성전의 의미가 아무것도 없게 돼버렸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분이 주님이시라는 거예요.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 발 떼기를 실제로 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을 안 받아들였다는 얘기에요.
왜? 발을 땅에서 떼고 싶지 않기 때문에, 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마음의 발을 땅에 붙이고는 이 땅에서 뭔가가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갖고
하나님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절했는데,
예수님을 거절하는 그 죄악 된 너희의 본성이 광야에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보여주었던
그 본성과 이어져 가면서 그만큼 뿌리 깊은 죄악의 본성이 지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왜 예수를 안 받아들이느냐? 성전의 기능이 완성된 사건인 복음사건,
십자가사건을 왜 안 받아들이느냐? 그렇게 깊은 죄악의 뿌리가 너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
라는 것을 설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스데반 집사님이 한 마디도 십자가 이야기를 안 하셨어요,
부활이야기, 승천이야기도 안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과 요셉과 모세, 그리고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역하고 우상숭배 하던 모습,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막을 주시고 성전을 주셨고,
그리고 그 성전이 미신의 대상이 되어버린 이 모든 것, 왜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까?
지금 십자가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유가 이렇게 긴 역사에 뿌리를 갖고 있는
죄악의 뿌리 때문이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스데반 집사님을 돌로 쳐 죽이는 거죠.
▲우리가 스데반 집사님의 설교를 통해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구름타기, 구름타고 사는 삶을 지금 우리에게 웅변적으로 갈파하고 계시는 겁니다.
구름을 타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땅에서 발을 떼야 됩니다.
땅에서 발을 떼려면 하나님이 내 마음의 관심에 1등이 돼야 되요.
그러기 위해서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을 때, 내가 죽었다는 고백을 할 때,
내 마음을 잡아당기는 모든 땅에 있는 대상들에 마음이 잡아당겨짐을 느낄 때마다,
‘아, 나는 십자가에서 죽었다! 주님과 함께 죽어서 지금 내 마음을 끌어당기는
땅에 있는 대상을 향해 갈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가서
하나님이 내 마음에서 영광을 받으셔야 된다, 1등을 하셔야 된다,
내 마음의 관심에 첫 번째 대상이 되셔야 된다!’
이것 하나, 발 떼기만 하면 하나님이 품에 안으셔서 구름타고 가는 인생,
발 뗀 땅에는 하나님의 계획이 이루어지는 그런 삶이 아브라함에게서처럼
우리의 것이 된다는 이야기를 설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발만 떼게 해주시옵소서.
할 줄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무능한 사람일지라도, 스펙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할지라도,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 발만 잘 떼면 잘살 수 있습니다.
반대로 모든 걸 잘해도 땅에서 발을 떼지 못한다면, 우리는 결국 죽고 망할 것입니다.
날마다 순간마다 땅에서 발 떼기에 능수능란한 자들이 되기를 바라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