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te[#pg_il_#

카테고리 없음

창42장, 회개의 열매

LNCK 2012. 12. 31. 10:42

https://blog.naver.com/karamos/80205176517

 

◈회개의 열매            창42:37            2012-10-21

 

창세기 본문에 요셉은 ‘구원자, 그리스도의 예표’로 등장합니다.

본문 42장에서, 그 구원자의 모습은 어떻게 그려지고 있나요?

‘자기 백성들을 회개로 인도하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습니다.

 

본문을 잘못 읽으면, 요셉이 형들을 못 살게 굴고, 자꾸 괴롭히는 것 같습니다.

그냥 빨리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형들에게 양식을 줘서 돌려보내면 될 것을,

형들을 심문하기도 하고, 시므온을 가두기도 하고,

베냐민을 데려오라는 무리한 요구까지 합니다...

 

이 모든 것의 가장 첫 번째 이유는.. 요셉이 형들을 회개로 인도하고 있다..입니다.

형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만약 형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이스라엘 12지파의 족장들이 될 수 없습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자기 백성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는, 회개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

 

여러분, 회개를 아십니까? 언제 무엇을 회개 해 보셨습니까?

회개라는 가장 아름다운 단어가 오늘날 더렵혀져 있습니다.

 

그래서 뱀파이어 기독교인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졌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속죄만을 바라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는 싫어하는

얄팍한 거짓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창42장 말씀은 팔레스틴 지역에 몰아닥친 가뭄으로 양식을 구하려

요셉의 형들이 애굽에 가서 총리로 있던 요셉을 만난 내용입니다.

 

요셉은 자신을 종으로 팔았던 무정한 형들에게 어떻게 할까요?

요셉과 그 형들의 만남을 보면서 “회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살펴보고자 합니다.

 

◑회개라는 것

 

요셉은 식량을 찾아 애굽에 온 앞에 엎드린 형들을 보면서

자신이 요셉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조금은 황당한 일을 꾸밉니다.

요셉은 형들을 정탐꾼으로 몰았습니다.

코너에 몰린 형들은 자기들이 정탐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자신들은 한 형제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요셉은 그들에게 그것을 증명할 수 있도록

나머지 한 형제를 데리고 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결국 둘째인 시므온을 남겨두고 다른 형제들은 가나안으로 떠나게 합니다.

 

요셉은 왜 이런 일을 꾸몄을까요? 그 이유가 참 궁금하고 이상합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전개를 잘 살펴보면, 그러한 일을 꾸민 이유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그러한 일을 꾸민 것은 최소한 그의 형들을 골탕 먹이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형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기회일까요? 그들의 죄를 만회할 기회입니다. 회개할 기회입니다.

 

이전에 그 형제들은 요셉의 절규를 무시하고 종으로 팔았습니다. 너무 매정한 형들입니다.

지금도 그들이 그러하다면 그들은 요셉의 그늘에서 편안히 살 자격이 없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그들이 그를 팔았던 과거에서 돌이킬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므온을 포로로 잡아 둡니다.

그들이 형제인 요셉을 매정하게 버렸듯이, 이번에도 시므온을 버리는지를 두고 보는 것입니다.

 

베냐민이 애굽에 내려가야 했던 것도,

베냐민이 요셉에게 도둑으로 몰려서 요셉의 종이 되어야 했고,

가나안 땅에 돌아오지 못하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상처나고 삐뚤어진 야곱의 아들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요셉에게 범한 잘못들에 대한 대가를 이제야 치르게 되는구나’하며

회개하고 관계를 개선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계속해서 형들을 시험합니다.

요셉이 형들을 시험한 방식은 20년 전에 자기가 당했던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었습니다.

 

20년 전 당시 17세였던 요셉은 형들에게 ‘아버지의 스파이(염탐꾼)’로 몰려서

벌겨벗겨진 채 구덩이에 던져지게 되었고 겨우 목숨은 부지하여

은 20개에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노예로 팔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애굽에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요셉은 스파이로 몰려 억울하게 구덩이에 들어갔었고

결국 은 20개에 노예로 팔렸었는데, 요셉은 이 방식을 거꾸로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먼저 형들을 스파이로 지목하였습니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아니라 너희가 이 나라의 틈을 엿보러 왔느니라

그들이 가로되 주의 종 우리들은 십이 형제로서 가나안 땅 한 사람의 아들들이라

말째 아들은 오늘 아버지와 함께 있고 또 하나는 없어졌나이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정탐들이라 한 말이 이것이니라” 42:12~14

 

너희가 모두 정탐꾼이라는 것입니다. 요셉이 20년 전에 형들에게 스파이로 몰렸기 때문에

요셉도 형들을 스파이로 몰아세운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형들에게, 자기를 스파이로 몰아세운 죄를 생각나게 하고,

돌이키고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당시 애굽 사람들은 앗수르 사람들이나 헷 족속을 원수로 생각하였는데,

그래서 그들이 보이면 일단 스파이로 의심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그랬더니 형들은 변명을 합니다. “우리는 한 아버지의 아들들입니다.

우리가 원래는 열둘이 있었는데 한 아들은 없어졌고, 막내는 집에 있습니다.

아버지가 양곡 얻으라고 열 명인 우리만 보내었습니다. 우리는 신실한 아버지의 아들들입니다”

라고 대답했던 것입니다.

 

요셉은 그들을 스파이로 간주하고 그들을 3일 동안 감옥에 구금하였습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구덩이에 들어갔던 것처럼

그들도 아무 죄가 없지만 3일 동안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과거에 자기를 구덩이에 던진 형들이, 자기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3일 후 요셉이 가서 다시 이야기를 합니다.

“너희 말째 아우를 데리고 오면 너희가 스파이가 아닌 것으로 인정해 주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니 형들이 “괜히 말째 아우 이야기를 해서 사서 고생하게 되었도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요셉은 그 가운데서 둘째 형인 시므온을 인질로 잡아 놓고

아홉 명의 자루에 곡식을 가득 채워서 그 곡식에 곡식 값으로 낸 은돈도 집어넣고

돌려보냈던 것입니다. 가서 풀어보니까 은돈이 그대로 다 있는 것입니다.

 

자루에 있는 은돈 때문에 무엇이 떠올랐겠습니까?

“20년 전 우리가 요셉을 은 20개에 팔아먹었도다.”

 

하나님은 우리가 범죄하면 그 죄를 깨닫게 하시기 위해

그것과 거의 동일한 장면을 연출해 가시면서 스스로 죄를 깨닫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예를 들면 베드로가 숯불 곁에서 예수님을 세 번 저주하고 부인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갈릴리로 가서 똑같이 숯불을 피워놓고

떡과 생선을 굽고는 베드로에게 물어보셨습니다. “(숯불 곁에서)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몇 번 물어 보셨습니까? 세 번 물어보셨습니다. 숯불 세 번하니까 떠오르는 것은

닭 울기 전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자신의 잘못이었습니다.

 

요셉의 형들이 드디어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인하여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 르우벤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너희더러 그 아이에게 득죄하지 말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래도 너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의 피 값을 내게 되었도다” 42:21~22

 

20년 전에 저질렀던 죄가 생각난 것입니다. 우리의 양심은 죄를 잊지 못합니다.

30년 전에 10만원 떼어 먹은 거 잊어버리셨습니까? 잊어버릴 수 없습니다.

 

양심에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30년 전에 저질렀던 허물이 잊혀집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는 죄가 우리를 끝까지 추적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양심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20년 전 요셉을 팔고 괴롭혔던 사실들이 생각나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엄청난 죄였음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형들이 드디어 하나님을 인식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괴로워하며, 회개를 자세를 취하기 시작합니다.

 

요셉은 그들이 자신들의 말을 알아듣지 못하는 줄 알고 서로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것을 다 알아 듣지 않았습니까? 요셉은 그들의 말을 전부 다 알아듣고

그들을 떠나 방성대곡을 합니다.

 

‘형들이 나를 팔아먹은 것이 죄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고 있구나!’

실컷 울고 다시 돌아와서 말을 합니다.

 

“시므온만 결박하고 너희는 돌아가라! 그리고 가서 말째 아우를 데려 와라.

그러면 스파이가 아닌 것을 인정해 주겠다.”

그리고 많은 양곡을 주고 양곡 값으로 낸 은돈도 자루에 같이 넣어서 보냈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둘째인 시므온을 남겨두고 다른 형제들은 가나안으로 떠나게 합니다.

요셉은 왜 이런 일을 꾸몄을까요? 그 이유가 참 궁금하고 이상합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전개를 잘 살펴보면, 그러한 일을 꾸민 이유를 유추할 수 있습니다.

 

그가 그러한 일을 꾸민 것은 최소한 그의 형들을 골탕 먹이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형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떤 기회일까요? 그들의 죄를 만회할 기회입니다. 회개할 기회입니다.

 

요셉의 형제들은 과거에 분명히 너무 큰 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에서 회개하여야 했습니다.

회개의 한문적 의미를 살펴보면 “잘못을 뉘우치고 고침”입니다.

이것은 회개의 본래 의미를 잘 표현하는 말입니다.

 

회개는, 죄라는 것을 깨닫고 애통해 하는 마음을 가지며

그래서 전인격적인 삶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뉘우치지 않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고치지 않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뉘우치지 않고, 고치지 않고 그저 잘못한 것에 대해 혼나지만 않으려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벌만 받지 않고 여전히 제 멋대로 하려는 잘못된 회개가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 사람들이 하고 있는 회개를 보십시오. 그것이 회개입니까?

회개가 죄책임만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죄를 미워하고 죄와 싸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죄와 싸우지 않으면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회개하고 나면 필연코 죄와 싸워야 합니다.

죄는 여전히 나를 잡아 두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회개하였으니 그 죄와 싸웁니다.

 

때로는 여전히 그 죄를 따르려는 내 안의 유혹과 싸워야 합니다.

죄를 즐기면서 회개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죄를 미워하십시오.

죄에서 돌아서지 않았으면서 회개한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죄에 대해 철저히 애통해 하면서 죄에서 돌아섰을 때 회개가 됩니다.

 

죄책만 씻어내고 죄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죄의 혜택을 즐기면서 죄책만 면하려는 사람은 그것이 바로 커다란 죄입니다.

 

나의 회개는 어떤 회개입니까? 죄의 좋은 것은 내가 즐기고,

죄값은 예수님의 피로 씻는 그런 회개는 아닙니까? 진정한 회개가 되어야 합니다.

 

회개를 더럽히는 사람이 아니라 회개를 아름답게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회개가 사람들 앞에 아름다워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의 열매

 

회개가 회개 되기 위해서는 회개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물론 죄값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만 씻을 수 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죄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모든 죄의 값이 치루어질 수 있습니다.

 

속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만 되어집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를 씻는다고

우리가 속죄의 마음과 속죄의 행동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자신의 죄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속죄의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속죄 되었으니 이제 끝났다는 자세가 아니라

더욱 속죄하는 마음으로 한 평생을 살아야합니다.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을 죽이는 큰 죄를 지었습니다.

결국 그는 무거운 형벌을 받고 감옥에서 오랫동안 살고 나왔습니다.

그래서 법적인 죄의 형벌을 다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자신이 죽인 사람의 유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지지 않아도 됩니까?

 

아닙니다. 그는 평생을 자신의 죄를 씻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입니다.

미안한 마음이 없다면 사람이 아닙니다. 어떤 것으로도 죄를 다 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평생 속죄하는 마음과 행동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마음으로 살 때 회개의 열매가 나타날 것입니다.

 

요셉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날 드디어 형들이 자신 앞에 나타났습니다.

얼마나 기다렸던 순간일까요? 이 순간을 몇십년 동안 수 없이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은 복수의 기회가 아니라 속죄의 기회입니다.

그래서 요셉은 형들에게도 회개의 기회를 줍니다.

 

회개를 눈물로만 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땀방울도 함께 흘려야 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그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눈물만 흘리는 회개 때문에, 회개가 심각하게 오염되었습니다.

 

때로는 회개가 경멸의 단어로 사용되기도 합니다.

“회개만 하면 된다”는 말이 참으로 밉게 보일 때도 있습니다.

 

사람 죽이고 “미안해”라고 말하면서 돌아서서는 웃으며

“회개 했으니 이제 됐다”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회개의 진정한 모습이겠습니까?

 

눈물을 탓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개의 눈물은 보석보다 귀합니다.

그 어떤 것보다 더 귀합니다.. 그러나 땀방울은 바로 그 보석 진위 감정평가서입니다.

진품이 아니면서 진품인체 하면 그것은 사기입니다.

 

그것처럼 회개도 진품이 아니면서 말로만 번듯한 사기꾼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은 지옥에서도 가장 심한 지옥에 가야합니다.

어찌 회개를 더럽힐 생각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요셉의 형들도 요셉의 일 때문에 마음이 많이 아팠던 것 같습니다.

애굽의 총리 앞에서 일이 어렵게 되자

그들은 20년 전에 있었던 동생 요셉의 절규를 떠 올렸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우리가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도다

그가 우리에게 애걸할 때에 그 마음의 괴로움을 보고도 듣지 아니하였으므로

이 괴로움이 우리에게 임하도다”(21절)

 

그들은 그렇게 죄책감을 가지고 살았던 갓 같습니다.

그러나 죄는 그렇게 죄책감을 가지고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회개는 가슴에 품고 사는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회개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회개의 열매를 맺으며 살아야합니다.

그것이 진정 죄라는 것을 안다면, 이제 그 죄에서 돌이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알아야합니다.

 

과거에 어떤 죄를 범하였는지요? 그 죄 때문에 괴로워 몸이 피곤할 때면 악몽을 꾸는지요?

이제는 그 악몽에서 벗어나십시오. 그 악몽은 아직도 그 죄를 가슴에 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제는 행동에 담으십시오.

하나님께 철저한 회개의 기도를 하고 회개의 열매를 맺으면서 사십시오.

그러면 그 죄는 결코 악몽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죄 때문에 무너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용서와 회개로 인해

우리는 더 앞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괴수 중의 괴수인 것을 기억하며 살았던 바울에게 그 기억은

악몽의 이유가 된 것이 아니라 더욱더 열심히 사랑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회개의 열매를 이루면서 살고 있습니까? 과거의 죄에서 이기십시오.

오늘 더욱더 의의 열매를 맺으면서 사십시오. 평생 속죄의 마음으로 더 많이 사랑하며 사십시오.

 

회개의 열매. 요셉이 그를 찾아온 형들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회개의 기회를 주는 것을 통해

회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 순간을 요셉과 그 형들이 잘 통과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스라엘의 조상이 됩니다.

믿음의 조상이 됩니다.

 

우리도 살면서 죄에서 자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어렸을 적은 더 많은 죄가 있습니다.

죄는 짓지 말고 이기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였을 때는 이제 회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야곱의 아들들도 심각한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평생의 한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 당사자인 요셉이 회개의 기회를 주고

그 기회를 잘 살려 요셉의 형들은 진정한 회개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의 조상의 자격을 얻게 됩니다.

 

이제 우리도 회개를 잘 하여야 합니다. 죄에 대해 그것으로 끝나지 말고

기회 있을 때마다 힘을 다하여 회개하십시오. 회개는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함과 진실함으로 해야합니다. 회개의 열매가 있어야 진정한 회개입니다.

 

형제를 잔인하게 팔아먹었던 과거에서

이제 형제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사람으로 변하여야합니다. 그것이 진정한 회개입니다.

 

요셉은 형들에게서 그것을 보고자 하였고 그것을 보았을 때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에게 그것을 보고자 하십니다. 인생을 헛살지 말고

이렇게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합니다. 나의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그것을 회개하십시오. 구체적으로 최소한의 회개의 열매를 맺으며 사십시오.

 

과거에 누군가의 돈을 훔친적이 있다면 이웃의 누군가에게

그 만큼의 돈을 무조건적으로 베푸십시오. 물론 물가인상분을 계산해서.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면 이제 누군가의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회개의 열매를 맺으십시오.

 

인생은 길지 않습니다. 빨리 회개의 열매를 맺으며 사십시오.

인생이 길다고 따분하게 여기지 말고 회개의 열매를 맺으며 사십시오.

 

인생의 절반을 사십이라면, 사십이 넘어 놓고도 아직도 인생에

죄의 흔적만 남기면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인생을 살수록 더 많은 죄의 흔적만 남기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 그 죄를 주어 담으며 사십시오. 우리가 할 수 있는바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