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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의 목적지

LNCK 2013. 1. 1. 17:46

88. 고난의 목적지 (창39:20-23) (tistory.com)

 

◈고난의 목적지            창39:20-23              ☞ 창세기

 

김성수 목사 창세기 88강에서

 

아담 안에서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인간들에게 공식처럼 적용되는 특징이 있습니다.

항상 남의 것이 나의 것보다 더 커 보인다는 것입니다. 죄인들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성경에서 죄와 사망의 뿌리라 제시되고 있는 인간의 욕심이라는 것이

그렇게 끊임없이 남의 것을 크게 보이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특징은 자신이 이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옛 아담 적 속성을 여전히 ‘오염(macula)’이라는 형태로 간직하고 있는

우리 성도들에게조차 여지없이 적용이 되고 있는 듯싶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나의 것이 남의 것보다 커 보이는 것이 있는데, 그게 바로 ‘고난’입니다.

고난만큼은 이 세상에서 내 것이 제일 커 보입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분명 내 옆에 태산에 깔려 있는 사람이 있음에도

나의 손톱 밑에 들어있는 가시가 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제가 지금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인가요? 아니요.

안타깝게도 그건 일반적이며 보편적인 사실(fact)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 그 반갑지 않고, 버거우며,

지긋지긋한 고난을 필연적 통과의례로 명시하고 있습니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 이니라

 

(벧전4:12-13)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벧전5:8-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 이니라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감당할 시험’이라고 번역된 부분을 원어로 보면 ‘such as is common to man’

‘누구나 다 겪는 시험‘이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성도가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 할 통과의례로 고난을 꼽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모든 성도에게 공히, 그리고 필히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유일한 것은

만사형통, 소원성취, 입신양명, 전도양양이 아니라 고난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도 지금 그 고난에 동일하게 던져져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요셉의 고난을 통하여, 성경이 제시하고 있는

그 성도의 고난의 목적지가 과연 어디인지에 대해 공부를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창세기 39장에는 요셉의 고난이 구체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형들에게 팔려 애굽의 시위장관 보디발의 집 노예가 된 요셉은

본격적인 노예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에게 가장 사랑받던 자식이

자신의 생사여탈을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준 노예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그는 정말 열심히 일을 했던 모양입니다. 그는 얼마 안가서 주인의 집 제반 일을

모두 맡아하는 집사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그의 외모가 출중했다고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출중한 외모와 성실한 삶이 주인마님의 눈에 들었습니다.

성경은 그 주인마님이 ‘날마다’ 요셉에게 동침을 요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하나님께 득죄하는 것이 두려워 그 주인마님의 청을 완강히 거절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로 요셉이 상을 받은 것이 아니라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모든 과정의 끝에 ‘범사에 형통’ ‘만사형통’이라는 어구를

마치 결론처럼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편의 말씀처럼, 요셉의 그런 삶은, 그의 영혼이 쇠꼬챙이로 뚫리는 듯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의 고통스러운 삶을 만사형통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형들에게 팔려서 노예가 되고, 모함을 받고, 감옥에 갇히고 하는 모든 일이

만사형통의 과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만사형통이라는 단어가 함의하고 있는

구체적인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을 하면 무엇이겠습니까?

 

시104편에 요셉의 고난이 담고 있는 만사형통의 의미가 정확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105:17~19)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 하였도다

 

이렇게 요셉의 고난이 담고 있는 만사형통의 의미는 한마디로 연단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 그가 그 말씀에 의해 단련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가 고난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도의 만사형통은 한마디로 고난을 통한 연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연단은 무엇을 위한 연단입니까?

그것은 그가 받은 계시의 말씀이 무엇인가를 보면 알게 되겠지요?

그 계시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길에 요셉에게 고난이 온 것이니까요.

 

요셉이 무슨 계시를 받았습니까?

요셉은 지금 야곱의 축복을 성취하는 자로 서 있음을 늘 기억하셔야 합니다.

 

따라서 지금 요셉이 성취하고 있는 야곱의 언약을 보면

요셉에게 임한 하나님의 계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창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미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네게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네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요셉이 자신의 삶으로 성취해 가고 있는 하나님의 계시는,

그가 만민의 섬김을 받고 형제들의 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 길에 고난을 통한 연단이 필요했다는 것입니다.

 

피상적으로 그 이야기를 해석하면 시위대장 집에서의 집사생활과

왕의 신하들이 갇혀있는 감옥생활에서 얻은 정보와 지식 등이

그의 총리생활을 향한 준비과정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 계시는 사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될 계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만민의 왕으로, 열국의 지도자로,

모든 이들의 주로 서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수난이 필연적이었지요?

 

그러니까 요셉은 애굽의 총리라는 자리가 상징으로 담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상징하는 13년간의 고난을 통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다른 말로 요셉이 예수의 승리와 같은 승리를 얻기 위해

성도가 실제화하여 살아내야 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았다는 말인 것입니다.

 

성도의 삶 속에 예수의 삶이 반복하여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

요셉의 삶을 통하여 메시지로 던져지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것을 단련이라 부릅니다.

 

▲생각해 보세요. 요셉은 요셉 자신의 잘못으로 애굽의 종으로 팔려간 것이 아닙니다.

아울러 요셉의 감옥생활 또한 자신의 죄가 아닌 세상의 유혹과 모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자기를 공격한 상대방의 죄를, 노예의 삶으로,

감옥생활로 대신 대속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형들의 죄는 노예 생활로, 주인마님의 죄는 감옥생활로. 그게 바로 예수의 삶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이신 당신을 마치 종처럼 취급하며,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대상이 하나님일 지라도 죽여 버리겠다는, 악독한 죄인들에게 떨어질 형벌을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시는 ‘수난의 예수’의 모습이 요셉의 삶에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도의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명명을 하는 것입니다.

 

(골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여기서 ‘남은 고난’이라는 것은 예수님이 당하실 고난이 무언가 부족했다는 말씀이 아니라

머리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예수님의 지체들인 성도들의 삶에 필연적으로

재현되어야 하기 때문에, 현실 속에서 지체들이 당하는 고난을 가리켜,

머리이신 예수님의 남은 고난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성도의 고난은 예수님의 고난과 닮은 고난이라는 뜻입니다. 그건 필연적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하나님 백성들의 탄생이라는 목적지를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성도들의 고난 또한 하나님의 뜻의 완성이라는 동일한 목적지를 향하고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당하신 수난과 십자가의 삶, 그리고 그 십자가의 삶을

자신의 현실 속에서 고난이라는 모양으로 직면하고 있는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뜻의 완성 즉 ‘선’이라는 목적지를 향한 사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은, 나의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에게 혹은 세상에게 하실 일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은 성도가 당하는 그러한 고난을 가리켜 ‘시험’이라고도 부르는데,

그것은 성도가 고난, 즉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지 않고는

절대 ‘선’이라는 완성지점에 도달할 수 없음을 고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가 없이 예수의 부활과 승귀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입니다.

 

▲야고보는 그 이야기를 이렇게 표현을 합니다.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으로 향하는 길에 시험이 있고,

그 시험에서 옳다 인정함을 받아야 하는 필연적 과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성도들에게 고난으로 닥쳐오는 시험에서

하나님께 옳다 인정하심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냥 무작정 이를 악물고 참으면 되는 것인가요? 그러면 ‘옳다’ 인정해 주시나요?

 

아니면 그러한 고난 속에서도 늘 하나님의 자녀다움을

가시적으로 드러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까?

 

성도가 고난을 통과하며 힘든 기색이라도 보이는 날에는 ‘옳다’ 인정함을 받을 수 없습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옳다 인정하심을 받다’라고 번역이 된 ‘도키모스 기노마이’라는 말은

‘연단이 되다’라는 뜻입니다. 의역을 하면 ‘목적한 연단의 자리에 서다’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고난, 즉 시험의 목적은 하나님이 그 시험 당사자에게 목적하시는

분량만큼의 연단의 성취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험을 참는다는 말은 우리가 연단을

받아야 하는 기간 동안에 우리에게 닥치는 시험이 끊임없이 쏟아지게 된다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고난을 통하여 연단을 받게 되고

그 연단이 다른 이들에게 구원의 방법으로 쓰여 지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후략

 

▲저는 며칠 전에, 간암 말기로 병원에 입원을 했다가

그야말로 처절한 사투 속에서 자기의 생을 마감한 한 성도의 임종을 함께 했습니다.

 

지난주에 그 분을 심방했을 때, 그 분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분노 속에서 내뱉었던 말이 ‘난 태어나서 지금까지 40년 이상 예수를 믿었는데

한 번도 행복해 본 적이 없어’였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두 시간여 동안, 복음에 대한

설명을 들으시고는, 그 자리에서 주님을 영접했고 예수님을 꼭 붙잡았습니다.

 

그 분이 임종 직전에 저를 마지막으로 꼭 한 번 더 만나보고 싶다고 해서 서둘러 나갔는데,

제가 도착했을 때 그 분은 이미 코마상태였습니다. 의사들이 아직 청각은 살아있으니

마지막 할 말이 있으면 하라고 해서, 제가 그 분의 손을 잡고 이마에 손을 얹었습니다.

 

그리고 그 분의 귀에 대고 물었습니다.

‘자매님, 이제 천국 가셔서 좋으시겠어요, 무섭지 않지요?

제 말을 알아듣고 계시면 손가락을 움직여 보세요.’

그 분의 검지가 ‘까딱’하고 살짝 제 손바닥을 스쳤습니다.

 

‘그동안 많이 힘드셨지요? 이제 이런 질병도, 아픔도, 슬픔도, 가난도, 억지도,

업신여김도 없는 하나님나라에 가시게 되었으니 얼마나 좋아요. 정말 자매님이 부럽습니다.’

했더니 다시 손가락이 살짝 움직였습니다. 그리고는 숨이 멎었습니다.

 

어떤 이가 제 손을 잡은 채로 하나님을 실제로 만나는 그 영광스러운 상황이

제 앞에 펼쳐진 것입니다. 그 분이 숨이 끊어지는 순간

하나님은 그 분을 덥석 끌어안으셨을 것입니다.

 

‘내 자식 고생 많았다, 이제 넌 영원한 나라에 온 거야, 이제 진짜 안식 속에서 편히 쉬어라’

하셨을 것입니다. 그 순간에 제가 그 분의 손을 잡고 있었습니다.

마치 제가 그 분과 하나님과의 역사적 상봉 장면에 동참하고 있다는 생각에

온 몸에 소름이 끼쳤습니다.

 

‘그 손을 잡고 저도 그냥 그 길을 따라갈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과 함께요.

 

그 분은 분명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입니다. 죽음의 순간에도

그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며 ‘하나님을 만나러 가니 참 좋다’는 말씀을 하신 분이니까요.

그런데 그 분이 느끼시기에 그 분의 인생은 고난과 고생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도 지금 지병으로 고생을 하고 계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왜 예수를 열심히 믿는다고 하는 분들의 삶에도 그런 고난이 사라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