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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의 원인과 시험 승리의 원인

LNCK 2013. 1. 1. 17:46

https://blog.naver.com/karamos/220309819625

 

◈축복의 원인과 시험 승리의 원인     창39:7~12      2014.04.13.

 

서론

 

제가 여러 번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의 어느 구절을 읽든지 주제를 찾기 위해서는

본문 속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나 자주 반복되는 표현을 살펴봐야 합니다.

 

본문 창39장에 가장 많이 등장하고 있는 표현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입니다.

2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절에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21절에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3절에도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이렇게 창39장에 4번이나 반복해서 나오는 내용은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입니다.

 

▲신론에 대해서 공부를 하다보면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배우게 되는데,

그 가운데 ‘하나님의 편재성’(Omnipresence of God)이라는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초시간적으로 존재하시며, 계시지 않은 곳이 아무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것은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편재하고 계신데, 요셉과 함께 하신 것이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재성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임재’(General Presence)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적인 임재’(Covenantal Presence)를 의미합니다.

“하나님이 택한 백성과 특별히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며 복을 주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적인 임재’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적인 임재는, 모든 사람이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누리는 복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도 이런 언약적인 임재를 약속하신 바 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창 28:15).

 

하나님은 야곱에게 언약적인 임재를 약속하시며

너를 지키고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겠고 성공적인 인생이 되게 해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적인 임재입니다.

 

사도행전 7장을 보면 스데반이 순교 당하기 전에 했던 설교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스데반이 그 설교에서 요셉의 생애를 간략히 요약했는데,

여기서 강조한 점도 바로 이런 하나님의 언약적인 임재였습니다.

 

사도행전 7:9절에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스데반도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셨던 언약적인 임재가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언제 요셉과 함께하셨습니까?

창39장의 스토리는 요셉의 나이 17세~27세가 되기까지

10년 동안 총 3단계로 그 인생이 아주 빠르게 전개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단계는 39:1~6로, 요셉이 애굽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로 팔려가지만

그 가운데서도 출세하여 보디발 집의 제반 사무를 담당하는 가정 총무가 되었다는

‘축복의 상태’입니다.

 

2단계는 7~12까지로,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을 유혹한 ‘유혹의 상태’입니다.

 

3단계는 13~23절로, 요셉이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물리친 후 중상모략을 당해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에 갇혀서 죄수의 몸이 된 ‘고난의 상태’입니다.

전옥에게 은총을 받고 감옥의 제반 사무를 맡은 사람이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창세기 39장은 축복의 상태, 시험(유혹)의 상태, 고난의 상태의 3단계가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고,

하나님은 이 세 가지의 상태 모두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내용이 창세기 39장의 내용입니다.

 

◑1. 하나님은 <축복의 상태>에서 요셉과 함께 하셨다

 

요셉은 넷째 형 유다의 제안으로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은 20개에 팔렸고,

애굽 왕 바로의 시위대장 보디발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시위대장은 오늘날 편제로 보면 청와대 경호실장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요셉은 경호실장 집의 노예가 된 것입니다.

보디발 가정의 노예가 되었다는 것이 비참한 일 같아 보이지만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당시 애굽의 노예는 두 가지 종류가 있었는데

하나는 ‘국가 노예’(State Slave)였고, 다른 하나는 ‘가정 노예’(House Slave)였습니다.

 

국가 노예는 대부분 전쟁 포로들로, 대대적인 국가의 공사에 투입되거나

극심한 노동에 시달리다 죽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요셉은 국가 노예가 아니라

가정 노예가 되었습니다. 가정 노예는 비교적 좋은 노예자리에 해당하였습니다.

주인의 사랑만 받게 되면 아들처럼 대우를 받을 수도 있는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런 가정 노예가 되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복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축복의 상태’입니다.

 

▲보디발은 요셉을 눈 여겨 보았습니다. 창39:3절에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보디발은 무관심한 척하며 보지 않는 척해도 다 보고 있었습니다.

노예들이 어떻게 행동하나 언행심사를 주인이 다 주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젊은 나이에 노예로 팔려왔어도

신세를 한탄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주인을 극진히 섬겼습니다.

 

그러니까 주인인 보디발이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았습니다.

가정 총무는 아주 높은 자리였습니다. 주인의 식료 이외에는 간섭하는 것이 없고,

주인의 아내 이외에는 금지하는 것이 없는 엄청난 권한을 가진 사람이 되었습니다.

 

요셉은 비록 노예가 되었지만 왕실 경호실장의 집에서 경호실장 다음으로 높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노예 가운데서도 가장 높고 편안한 위치로 승진이 된 것입니다.

 

어떻게 요셉이 이렇게 승진하고 형통할 수 있었습니까?

그는 근면했고, 성실하였으며, 명석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애굽의 언어를 신속하게 배워서 듣고 말하는 일에 어려움이 없었고,

조직적인 두뇌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정의 다반사를 지혜롭게 처리하였습니다.

이 모든 일을 보디발이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요셉이 이런 인간적인 탁월함을 가지고 있었다고 해도

요셉 정도의 인간적인 조건은 요셉 이외에도 얼마든지 가질 수 있습니다.

요셉만큼 근면한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요셉만큼 똑똑한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적인 요인보다, 더욱 결정적인 요인은 바로 신적인 요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방인이었던 보디발 조차도 요셉과 함께 하신 하나님의 언약적인 임재를 보고 알았다는 것은

요셉이 여호와라는 신과 항상 함께 하고 있음을 알았고,

그래서 그에게는 무슨 일을 맡겨도 믿을 만하고 정직하고 확실하게 일을 처리해 낸다는 것을

알았다는 말입니다.

 

▲창12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허락하신 언약의 복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 12:3).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축복하니까 하나님도 보디발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창 39:5).

요셉으로 인해 보디발이 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요셉은 지위의 승진과 안전함을 얻는 복을 받았고, 더불어 잘생긴 용모의 복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임재가 그의 얼굴과 신체에도 미친 것입니다.

 

6절 후반절에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10년 동안 가정 총무 역할을 하면서 어느 덧 27세의 건장한 청년이 되었습니다.

용모도 준수하고, 건장한 체격도 갖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키가 크고, 어깨도 벌어지고, 탄탄한 근육을 가진 미남자였습니다.

 

◑2. 하나님은 <시험의 상태>에서도 요셉과 함게 하셨다.

 

그러나 이런 복은 두 번째 단계인 ‘시험의 단계’로 넘어가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가운데서도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 후에 그 주인의 처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창 39:7).

7절이 ‘그 후에’로 시작됩니다. 조금 불길한 느낌을 주는 단어입니다.

 

주인인 보디발만 요셉을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보디발의 아내 역시 계속 요셉을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요셉이 지나갈 때마다

“그 녀석 키도 크고 얼굴도 잘 생겼다”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애굽은 성적인 윤리감이 대단히 결여된 나라였습니다.

애굽에서 발견된 석비에 새겨진 글 가운데는 ‘애굽의 여인들’을

‘수치를 모르는 여인들’(Shameless)이라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적인 교류가 아주 난잡한 여인들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오늘날 이집트의 여인들이 정숙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아주 오래된 이야기입니다.

 

창39장의 시대적 배경을 고려해 봤을 때, 보디발의 아내도 예외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용모가 잘 생긴 27세의 노예 청년을 자기 집의 가정 총무로 두고 있었으니

주인의 아내가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고 강력한 유혹의 추파를 던진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이 지나갈 때마다 윙크를 했을 것입니다.

말로 유혹하는 것도 모자라 요셉의 옷을 잡고 늘어지는 ‘유혹의 프로’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향한 마귀의 궤계는 수시로 작전이 바뀝니다.

요셉의 형들을 사주해서 그를 죽이려고 하다가 노예로 팔려와

가정 총무로 승진을 하고 복 받는 모습을 보더니.. 마귀가 작전을 바꿨습니다.

 

보디발의 아내를 충동질을 하여 요셉을 유혹하게 만든 것입니다.

요셉이 은혜를 받으니까 사단이 유혹이라는 태클을 걸어온 것입니다.

 

사단은 성도들이 죄를 지을 때 굳이 유혹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사단이 원하는 것을 다 하고 있는데, 무엇하러 사단이 에너지를 쓰겠습니까?

그냥 내버려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으면 사단이 직접적인 유혹을 해옵니다.

그러므로 사단이 성도를 시험하고 유혹하고 있다면

그것은 성도 삶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다는 반증인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해적이라면 쓰레기를 싣고 가는 배를 공격하겠습니까?

보물을 싣고 가는 배를 공격하겠습니까? 답이 뻔합니다.

사단도 마음속에 죄가 가득한 사람을 유혹할 필요가 없습니다.

죄를 잘 지어주고 있으니까 공공연히 유혹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영혼 안에 은혜가 가득하면 사단은 반드시 태클을 걸어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은혜와 복을 받은 이후에 더욱 경계하여 사단의 시험을 물리치시기 바랍니다.

은혜와 복을 받고 이만하면 됐다고 안심하는 순간 바로 공격이 들어옵니다.

 

▲요셉이 받은 유혹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는 강력한 유혹이었습니다. 이 유혹은 물리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요셉은 27세의 나이로 독신이었습니다. 거기다가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고,

타국으로 멀리 팔려온 노예 신세였으니 제재를 가하거나 간섭하는 부모도 없었습니다.

 

ㅗ더구나 애굽이라는 나라는 성적인 부도덕을 개의치 않는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설령 요셉이 유혹에 넘어갔다 해도 그를 향해 돌을 던질 사람이 없었습니다.

 

요셉을 유혹하는 상대는 보디발의 아내였고 권력자였습니다.

그의 요구를 거절하면 그 동안 누려온 모든 복을 한 순간에 다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저항하기 어려운 강력한 유혹이었습니다.

 

둘째는 반복적인 유혹이었습니다. 창39:10절에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하루 이틀이야 어떻게 물리치겠지만, 한 달, 두 달, 일 년 내내 날마다 유혹하고 옷을 붙들면

넘어갈 수밖에 없지 않겠습니까? 이 여인은 완전히 정욕에 사로잡힌 여인이었습니다.

 

셋째는 은밀한 유혹이었습니다. 11절에 “그러할 때에 요셉이 시무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은 하나도 거기 없었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 상황에 다가 온 유혹이었습니다.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만 서로 입을 다물고 무덤까지

가지고 갈 비밀로 하면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거기서 유혹에 넘어가면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은밀한 유혹인 것입니다.

 

넷째는 간접적인 유혹이 아니라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유혹이었습니다.

옷을 붙잡고 늘어지는 노골적인 유혹입니다. 27세의 요셉이 이런 유혹을 받고도

물리치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유혹이 강하고 노골적이라도

요셉은 절대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요셉이 유혹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는 인간적인 이유도 있고, 신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인간적인 이유는 요셉의 마음이 올바른 마음이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시57:7절에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영어로 “My heart is fixed.”(내 마음이 확정되었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득죄하는 짓을 하지 않겠다는 확정된 마음, 단호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도님들도 마음을 올바르게 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삐뚤삐뚤하면 안 됩니다. “나는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고 살겠다!”는

확정된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마음이 그랬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어떻게 그런 마음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은 신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특별한 언약적인 임재로 요셉과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유혹 가운데 있는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의 마음을 지켜주시고,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렘32장 40~41절에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영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마음에 경외하는 마음을 두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적인 임재가 있으니까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을 경외하게 되는 것입니다.

 

요셉은 언약적인 임재로 인해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요셉이 유혹을 단칼에 거절하자 고난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3. 하나님은 <고난의 상태>에서도 요셉과 함께 하셨다.

 

창세기 39장 13~23절은 요셉이 경험한 ‘고난의 상태’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의 상태에서도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축복의 상태에도 함께하시고, 유혹의 상태에도 함께 하시고,

고난의 상태에서도 함께 해 주신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의 옷을 붙들고 동침할 것을 요구하였지만

요셉은 그 여인의 손에 옷을 버려두고 도망갔습니다. 한 성경 주석가는

“요셉이 옷을 잃어버릴지언정 양심을 잃어버리지 않으려 했다.

옷보다는 양심을 더 중요하게 여겼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거절당한 보디발의 아내가 가지고 있었던 불붙는 정욕은

곧 사악한 분노로 변화되었습니다. 정욕은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분노가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잘못을 저질러도 분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정욕은 분노로 변합니다. 그래서 보디발의 아내 속에 생긴 사악한 분노가

요셉을 모함하고 중상모략하도록 만들었습니다.

 

14~15절에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도다 그가 나를 겁간코자 내게로 들어오기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그가 나의 소리질러 부름을 듣고 그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히브리 사람이라는 인종차별적인 표현을 사용하며

자신을 겁간코자 하였다고 모함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주 교활한 여자입니다.

소리를 질렀는지 안 질렀는지 아무도 들은 사람이 없는데,

어떤 반박과 부인도 할 수 없도록 만들었습니다. 교활하고 영리한 중상모략입니다.

 

이 여자는 남편 보디발에게도 똑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보디발은 아내의 말을 100% 믿지 않습니다.

아내가 아무리 그랬다고 말해도 다 믿지 않습니다.

 

애굽 시위대장의 아내를 겁탈하려고 한 노예는 현장에서 즉결 사형대상입니다.

그러나 보디발이 모함하는 아내의 말을 듣고 취한 행동은 사형집행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아마도 요셉에게 “10년 동안 내게 충성하여 이렇게 큰 복을 받았는데,

아내가 너를 이렇게 모함하니 죽일 수는 없고, 감옥에 들어가야 하겠다”고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이 들어간 감옥은 감옥 중에서도 왕의 죄수만 갇히는 감옥이었습니다.

강도나 살인과 같이 흉악한 범죄를 저지른 자들과 함께 옥살이를 한 것이 아니라

큰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는 높은 레벨의 감옥으로 들어간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되었겠습니까? 보디발이 아내의 말을 반신반의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죄수의 몸이 되어 고난을 당하게 되었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절묘한 섭리였습니다.

왕의 죄수들을 만나 바로 왕과 연결될 수 있는 직접적인 상황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또한 보디발의 아내를 더 이상 만날 일이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보디발의 아내를 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자리로 그를 인도하셨습니다.

참으로 절묘한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요셉이 감옥에 갇혀 고난을 당하는 중에도 하나님은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교도소장의 은혜를 받아 감옥 내에서 제반 사무를 처리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영화 “쇼생크탈출”을 보면 억울한 누명을 쓴 죄수가 교도소장의 돈을 모두 관리해 주다가

나중에 탈옥해서 그것을 다 가로채지 않았습니까? 요셉이 쇼생크탈출의 죄수처럼 되었습니다.

감옥의 제반 사무를 모두 처리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는 감옥에서도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행정능력이 탁월해서 그 자리에 올라갈 수 있었겠습니까?

물론 보디발의 집에서 가정총무로 행정적인 훈련을 받았으니까

행정능력도 있기는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의 죄수를 가두는 감옥이니까

그곳에는 행정전문가, 행정학 박사들이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요셉이 선택을 받은 이유는 아주 명확합니다. 신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23절에 “전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돌아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셨더라”

 

형통은 영어로 ‘성공’(Success)입니다.

요셉은 감옥에서도 하나님이 언약적인 임재로 함께 하시므로 성공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결론

 

요셉의 삶은 축복의 상태, 유혹의 상태, 고난의 상태와 같이 다양하면서도 빠른 속도로 변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요셉의 상태와 관계없이 늘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땅에 태양 빛만 내려 쪼이면 사막으로 변해버린다”는 말이 있습니다.

상태보다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임재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이 어떤 상태에 처해도 함께 하심으로 요셉을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 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신 것같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언약적인 임재로 함께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마28:20절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함께 하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사람과 언약적인 임재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아직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있는 분들은 확실하게 예수님을 믿고

확정된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미 믿은 우리는 상황이 어떠하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유혹에서 건져주시고, 고난 중에도 우리를 형통케 하시며,

성공하는 인생이 되게 해 주십니다.

 

창38장에 요셉의 넷째 형 유다도 택한 백성이고 하나님이 함께 한 백성이었고,

창39장의 요셉도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고 하나님이 함께한 백성입니다.

그러나 유다는 마음이 올바르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동생을 팔아먹고 바람피우며 다닌 사람입니다.

그래서 유다에게 임한 언약적인 임재는 ‘징계’로 나타났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죽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은 유다는 복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결국 복을 받긴 하였지만 그 과정이 얼마나 괴롭습니까?

이처럼 유다같이 삐뚤어지면 하나님의 임재는 징벌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요셉처럼 올바르면, 하나님의 언약적인 임재는 ‘복과 승리’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라는 질문이

우리의 인생에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지,

아니면 하나님의 형통을 누리게 될 것인지를 결정하는 중요한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항상 요셉처럼 바르고 확정된 마음으로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