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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질문있습니다 합1장 1~13 2012.02.26.출처
◑서론
하박국 1장은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질문하는 내용입니다.
하박국은 ‘포옹하고 씨름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출생 배경은 전혀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하박국이 쓴 글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성전에서 노래하는 음악가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 가정이 맞다면 하박국은 레위 사람일 것입니다.
하박국이 예언하던 시대에 유다는 바벨론 침략을 받아 멸망하기 직전이었습니다.
그는 요시야 왕, 여호아하스 왕, 여호야김 왕 시대에 예언했습니다.
요시야 왕의 아버지는 아몬이었습니다.
아몬은 대단히 악한 왕이었지만, 요시야는 선한 왕이었습니다.
요시야는 8살에 왕이 되어 어린 나이 때부터 바른 신앙으로 성장하여
31년을 통치했습니다.
성전 수리 중 신명기를 발견하여 읽다가, 유다 나라가 겪고 있는 문제가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는 깨닫고
종교개혁을 일으켰습니다.
하지만 왕이 종교개혁을 일으켜도 백성이 따라오지 않았습니다.
백성은 여전히 우상숭배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유다는 바벨론의 포로가 되고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요시야 왕의 뒤를 이어서 여호아하스 왕이 3개월간 왕 노릇을 하다가
애굽으로 끌려가게 되고
그 뒤를 이은 여호야김 왕이 11년을 통치하였는데
그는 대단히 악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예레미야가 예언한 것을 바룩이라는 사람이 기록하였는데
그 책을 칼로 잘라서 화롯불에 던져 태워버린 사람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살던 시대는 악한 시대였습니다.
하박국의 시대와 우리가 사는 21세기는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하박국 1장 2~4절까지 나타난 시대상은 한 가지도 좋은 것이 없습니다.
강포, 간악, 패역, 겁탈, 변론, 분쟁, 율법의 해이, 공의의 왜곡이
하박국의 시대적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질문하는 것입니다.
하박국 1장에서만 ‘어찌하여’라는 단어가 3번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들은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박국 3장 17~19절을 보면 불평으로 시작된 질문이
기쁨과 확신으로 끝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
(합 3:17~18)
하박국 1장에서는 ‘어찌하여’라고 불평하던 사람이
3장에 가서는 ‘없을지라도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어떻게 이렇게 변할 수 있었느냐?’ 이것이
하박국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도 하박국과 같은 변화를 체험할 수 있기 바랍니다.
▲“선지자 하박국의 묵시로 받은 경고라” (합 1:1).
묵시라는 말은 KJV 성경에서는 ‘짐 burden’이라고 번역되었고
NIV 성경에는 ‘신탁 oracle’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두 가지 의미가 다 들어 있는 것입니다.
첫째, ‘부담 burden’입니다.
선지자 하박국이 부담을 느낀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옛날 유대인들이 무거운 짐을 측량하는 단어로 사용한 것은 약대입니다.
‘낙타 몇 마리에 실을 수 있는가?’ 이것이 측정의 단위였습니다.
그런데 하박국이 마음에 느꼈던 부담이
낙타 한 마리에 실을 수 있는 무게의 부담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의 마음에 그런 무거운 부담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낙타 한 마리에 실을 정도의 짐 무게를 느낀다면, 상당한 무게이죠.
둘째, ‘신탁 oracle’입니다.
하박국이 지고 있는 짐은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탁하신 부담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1. 첫 번째 부담: 하나님의 무응답
하박국에게는 하나님께 기도해도 설명도 해주시지 않고
응답도 해주시지 않는 부담이 있었습니다.
“여호와여 내가 부르짖어도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니 어느 때까지리이까
내가 강포를 인하여 외쳐도 주께서 구원치 아니하시나이다” (합 1:2).
우리가 아무리 부르짖고 외치며 기도하고
점점 강도를 더해서 간구해도 잠잠하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계속 기도해도 무관심하신 것 같고 듣지 않으시는 것 같을 때
그것이 우리 마음에 얼마나 부담이 되고 짐이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응답하지 않으시고 무관심하시는데
점쟁이에게 가면 어떻습니까?
점쟁이는, 물어보는 것을 금방 그 자리에서 대답해줍니다.
점쟁이들은 바로 대답해주니까 얼마나 속이 시원합니까?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불러도 대답이 없고 물어봐도 응답이 없으니
사람들이 점쟁이한테 가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성경에서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할 때 너무 괴로워서
“하나님, 살려주십시오. 바로 왕을 없애주시고
우리를 노예에서 해방시켜주십시오.”라고 4백년을 기도했는데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까? 4백년 동안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1백년, 2백년, 3백년을 기도해도 응답이 없다가
4백년 기도하니까, 응답으로 모세 한 명을 보내신 것입니다.
또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인 말라기가 예언을 마치고
예수님께서 오시기까지 400년 동안 선지자도 보내지 않으시고
아무런 응답도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무리 부르짖어도 침묵하시다가 4백년이 지나서야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는 말씀대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신 것입니다.
400년 동안 응답이 없었을 때 백성의 마음은 얼마나 부담스러웠겠습니까?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네 몸에서 자식이 나올 것이다.”고 말씀하셨지만
10여 년을 기다려도 아무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이나 주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창17:18
자식을 기다려도 생기지 않으니까
첩에서 나온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한다고 했는데
이스마엘도 하나님 앞에서 살지 않았습니다.
이삭과 리브가도 쌍둥이 아들을 낳았는데 형 에서로 인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근심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갈릴리 바다에서 제자들이 큰 풍랑을 만나 죽게 되었지만
예수님께서는 베개를 베고 잠만 주무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시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가로되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막4:38
▲성경을 봐도 예수님과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오랫동안 무관심하게 응답하지 않으신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창12:3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창15:5
그럼에도 유다는 내적으로 부패하고
외적으로 이방 세력의 침략을 받고 있었습니다.
유다를 저주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저주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박국은 질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왜 이런 때에 침묵하고 계십니까?
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까?
이것이 하박국의 질문이었고 마음에 있던 부담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기도해도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때
마음에 큰 부담을 갖게 됩니다.
이런 문제는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뿐만 아니라
우리들도 공통적으로 느끼고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2. 두 번째 부담: 예상하지 못했던 응답
하박국이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결국 응답하셨는데
자신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왔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55:8~9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다고 합니다.
하나님 생각은 하늘이고 우리 생각은 땅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 생각으로 맞추려고 합니다.
“내 생각에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셔야 될 것 같습니다.”라며
하나님께 윽박지르는 경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행하시는 방식은 우리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우리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하나님이시라면
지금 일어나고 있는 간악과 패역과 겁탈을 없애주시고
악한 자를 처벌하셔서 정의로운 사회가 되도록 해주셔야 한다고 생각했죠.
당시 유다의 율법은 해이해졌습니다. 추운 날씨에 맨손으로 밖에 나가면
손이 얼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마비가 됩니다.
유다의 공의가 이처럼 마비가 되었고
재판 시스템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돈이 있는 악인은 무죄가 되고, 돈 없는 의인은 유죄가 되어
억울하다고 호소할 곳도 없어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악한 재판장을 처벌해주시고
이 땅에 공의가 제대로 세워질 수 있도록 역사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박국은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응답도 하지 않으시고, 놀고만 계시냐는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도 내 백성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
사납고 성급한 바벨론 군대를 일으키고 있다.
그들은 표범처럼 빠르고 이리처럼 사나운 존재들이고
그 힘으로 자기 신을 삼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와서 너희 유다 백성을 죽이고 산 사람은 포로로 잡아가게 될 것이다.
그래서 행악하는 사람이 모두 없어지게 될 것이다.”
이런 응답을 받으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기절초풍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에는, 악인을 멸하시고 의인을 세워 공의롭게 하실 줄 알았는데
자신들을 모두 죽이고 포로로 잡아가겠다고 하시니 놀란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도 놀랄 줄 알고 계셨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열국을 보고 또 보고 놀라고 또 놀랄지어다
너희 생전에 내가 한 일을 행할 것이라
혹이 너희에게 고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리라” 합1:5
하박국 선지자는 자기가 예상하던 대로 응답이 되지 않고
엉뚱하게 응답되니까, 마음에 부담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1:12~13절은 예상치 못한 응답에 대한 하박국 선지자의 반응입니다.
“선지자가 가로되 여호와 나의 하나님 나의 거룩한 자시여
주께서는 만세 전부터 계시지 아니하시니이까
우리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리이다
여호와여 주께서 심판하기 위하여 그를 두셨나이다
반석이시여 주께서 경계하기 위하여 그를 세우셨나이다” 합1:12
하나님께서 바벨론 군대를 통해 우리를 심판하고
경계하려고 세우신 것은 알겠지만
한 가지 신학적 질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질문이 1:13절입니다.
“주께서는 눈이 정결하시므로 악을 참아 보지 못하시며
패역을 참아 보지 못하시거늘
어찌하여 궤휼한 자들을 방관하시며
악인이 자기보다 의로운 사람을 삼키되 잠잠하시나이까”
바벨론 군대가 유다 백성을 죽이고 포로로 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과는 어울리지 않는 일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인의 패역을 보지 못하시는 분이신데
어찌하여 악인을 사용해 악인보다 의로운 사람들을 죽이는 일을
행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유다 백성이 바벨론 군대보다 더 의롭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다 백성은 바벨론 군대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역대하 33;9절을 보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더라” 대하33:9
바벨론 사람도 우상숭배를 했지만
유다 백성이 더 심하게 우상숭배를 했다는 것입니다.
바벨론도 악하지만, 유다가 더 악했다는 것이 하나님의 평가입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유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의로워서 베푼 것이 아니라, 악해도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입니다.
하박국과 유다 백성은 자기들이 의로워서
은혜 받을 자격이 있다고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과거 1백년 전에, 북한과 남한을 볼 때
북한이 의로운지 남한이 의로운지 물어보면 대답하기 어렵습니다.
솔직히 기독교 부흥은 북한에서 먼저 일어났습니다.
평양 장대현 교회도 북한 사람들이 세운 것이고
또 북한 사람들이 내려와 영락교회를 세워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했습니까?
남한 사람들은 신앙에 있어서는 북한보다 앞서 가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는 남한에는 은혜를 베푸시고
북한에는 혹독한 시련을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의로워서 그런 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북한에게도 베풀어주시기를 위해 간구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하박국이 불평하는 것은 옳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더 의로운데 악인을 통해 우리를 징계하시느냐는 질문은
전제 자체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 백성의 부흥과 개혁을 위해 기도하는 하박국에게
하나님의 방식으로 응답하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유다 백성은 70년간 포로생활을 하였습니다.
우리는 일제 36년 고통의 역사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방의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우리 땅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유다 백성은 끌려가서 70년 동안 이국땅에 살면서
얼마나 서러웠겠습니까? 타향살이 10년도 서럽다는데 타향살이 70년입니다.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시137:1
우리가 우상숭배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우상숭배의 본거지로 보내셨고
있어보니 왜 쓸데없고 무의미한 우상숭배를 하였는지 후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70년 포로생활을 하면서
비로소 우상숭배가 얼마나 악하고 무의미한 것인지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생활 이후 유다 백성에게
더 이상 우상숭배로 인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기도하던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방식으로 응답하신 것입니다.
▲결론
저는 가끔 장로님들을 따라 등산을 가는데
도봉산과 설악산 모두 멀리서 보면 그냥 언덕 하나 있는 것 같습니다.
멀리서 보면 한걸음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은데
버스를 타고 가까이 갈수록 산이 점점 높아지는 것입니다.
버스에 내려 등산을 시작하면, ‘이렇게 힘들 줄 몰라서 왔지
알았으면 안 왔을 것이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설악산, 도봉산에 가면 열차바위라는 것이 있습니다. 바위 높이가 100m쯤 되고
거기 줄이 하나 달려있는데, 그 줄을 잡고 올라가야 됩니다.
50m쯤 올라가 뒤를 바라보니 정신이 아득해지고
‘처자식 있는 사람이 왜 여기를 따라왔을까?’라고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한걸음에 올라갈 수 있을 것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하염없이 멀고 위험한 길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가까이 갈수록 더욱 높게 느껴지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태산 같은 분이십니다.
하나님을 향해 많은 질문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묵묵히 아무 설명도 안 하십니다.
응답을 하셔도 내가 원하는 응답이 아니라
상상도 못했던 바벨론 군대를 보내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그 섭리를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하박국도 다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유익한 목적을 가지고 계신 줄로 믿습니다.
유다 백성 중 바벨론 군대의 포로로 끌려가면서
그 목적을 다 이해했던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어찌 우리를 이렇게 대하시냐며 별소리를 다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가 지나가고 보니까
과연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처럼 높으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질문이 많습니다.
왜 내가 오랫동안 기도했는데도 들어주시지 않느냐는 질문,
내가 기도했는데 왜 엉뚱하게 응답하시느냐는 질문 등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다 듣지 못해도
한 가지 진리만큼은 확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무관심하지 않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이 몇 개 빠졌는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그 정도로 우리 문제에 관심을 갖고 계십니다.
참새 한 마리도 그냥 떨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 우리 성도들에 대해서
결코 무관심하지 않으신 분이십니다.
하늘같이 높은 생각으로 우리를 돌보고 계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내가 기도해도 병이 낫지 않느냐?’,
‘왜 내가 남편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도 지금까지 응답하지 않으시느냐?’
모두 하나님의 선한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8:32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관심을 가지고 계시며
지금도 돌보고 계시다는 한 가지 사실은 확신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