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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적 길이 좋은 길이다 렘6:6-21 2008년
서론
6: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가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가지 않겠노라 하였으며’
위 구절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는 길에 서서”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길’은, 보통 가는 길이 아니고 갈림길(두 길)을 말합니다.
갈림길에 섰을 때는 이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데레킴, 데렉(길)의 복수, ‘길들, ways’
우리 인생에 수많은 갈림길이 있습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아니면 돌아갈까 선택을 해야 됩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학교, 전공, 결혼상대, 직업, 친구, 교회 모두다 선택을 해야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옛것과 새것이 있으면, 주로 새것을 선택합니다.
왜냐면 대부분 새것이 좋기 때문입니다.
벤츠 자동차와 달구지 중에 벤츠를 선택하지 않고 달구지를 선택할 사람은 없을 겁니다.
또 고성능 컴퓨터와 구식 전동 타자기 중에 구식 전동 타자기를 갖겠다는 없을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시, 신앙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다릅니다.
신앙문제에 관해서 만큼은 새것이라고 좋은 것이 아니라, 옛것이 좋은 것입니다.
16절에 “옛적 길 곧 선한 길”이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신앙문제에 관해서 누가 새로운 계시를 받았다면, 그것은 십중팔구 이단입니다.
왜냐면 새로운 계시가 필요치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 66권, 2000년 전에 이미 우리에게 주신 계시,
벌써 수많은 사람들이 읽고 듣고 믿었던 이 계시, 이것이 바로 ‘옛적 길’인 것입니다.
현대신학이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신신학도 읽고 현대신학도 읽습니다만
별 은혜를 못 받습니다. 역시 신학은 옛 신학이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렘6장 말씀을 통해서, 신앙에 관해서는 ‘옛적 길이 좋은 길’이라는 것을
가르치고자 하신 것입니다.
▲예레미야 시대에 거짓 선지자들이 수없이 나타났습니다.
이들은 백성들의 여론에 아첨을 했습니다.
14절에 보니까 거짓 선지자들은 거짓 여론에 굴복합니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하나님과 유다백성들의 관계가 평강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거짓 선지자들은 나타나서 “평강하다. 모든 게 괜찮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온다 하지만 그것은 별 거 아니다.”라고 심상히 말을 합니다.
다시 말해 사소한 것으로 여기고 평강하다고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강단에 서서 설교하는 자의 책임이 크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 말씀과 상관없는 것을 사람들의 여론과 인기에 맞추어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신신학이나 따르고 새것만 좋아하며 현대신학을 얘기하면
큰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설교자들에게만 이런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 청중, 성도들에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우리는 책임을 제 삼자에게 돌릴 수 없습니다.
개신교의 원리는 로마가톨릭과 달리 우리 각자의 영혼이 어느 누구나 중간 개입자의 방해,
상관, 개입 없이 직접 하나님께 접근(access to God)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거짓이고 무엇이 진리인지를 교황이나 제삼자가 판단해 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가 판단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본문 16절 말씀을 통해서 갈림길에 서있는 유다백성들과
오늘날의 평신도들에게 세 가지 책임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십니다.
◑1. 서서 보라 (Stop and Look)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16
등산을 할 때 길이 둘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나오면, 무조건 아무데로나 가서는 안됩니다.
갈림길이 나오면 잠깐 서야 됩니다. 본래 아는 길이 아니면, 잠깐 멈추어 서서
이 길로 가야 하나, 저 길로 가야 하나, 아니면 뒤돌아가야 하나 살펴봐야 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인생은 갈림길을 반드시 만나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7:13~14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많은 사람이 가는 넓은 길이라고, 그냥 따라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가면 많은 사람이 간다 할지라도, 결국은 낭떠러지요 멸망으로 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좁고 찾는 이가 적다 할지라도, ‘생명으로 가는 길’이라는 팻말이 붙어 있으면
그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삼거리 길에 섰을 때에는
반드시 잠깐 서서, ‘이 길로 가야 하나 저 길로 가야 하나’ 살펴봐야 됩니다.
▲현대인들은 너무 바쁘게 살아갑니다. 사람들이 대화하는 걸 보면 이렇게 전개됩니다.
“요사이 바쁘시죠?”
“아, 예. 바쁩니다. 그런데 선생님도 바쁘시죠?”
“아, 그럼요 바쁘죠. 정신 못 차리게 바쁩니다.”
한 30초만 들어도 바쁘다는 말이 적어도 다섯 번은 나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바빠도 잠시 인생 가던 길을 서야 합니다.
시간을 내야됩니다. 그리고 내가 가는 길이 바른 길인가 살펴봐야 됩니다.
‘내가 가는 길은 하나님과 참된 평화를 누리는 길인가?
나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을 가고 있는가? 나는 선한 길을 가고 있는가?
내가 진리의 길을 가고 있는가?’ 살펴봐야 됩니다.
사람들은 그저 많은 사람이 가면 따라갑니다.
등산을 할 때도 앞 사람과의 거리가 떨어지면 안 되기 때문에
보통 앞 사람 발뒤꿈치만 보고 걷습니다.
그런데 신앙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앞 사람 발뒤꿈치만 보고 가면 안 되고
반드시 자기가 서서보고 옳은 길을 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옛적 길이 옳은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적 그 선한 길’을 찾아야 됩니다.
▲우리가 삼거리(갈림) 길에 서면 두 가지를 봐야 됩니다.
첫째, 경고판을 잘 보아야 합니다. 산에 가면 ‘여기는 반달곰이 있는 곳입니다.
들어가지 마십시오.’‘여기는 방울뱀이 있는 곳입니다. 들어가지 마십시오.’ 등 경고판이 많습니다.
경고판을 보지 않고 함부로 들어가면 죽을 수도 있습니다.
막다른 골목이라 써있는데도 계속가면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회를 해야 되는 길인지, 속도 제한은 얼마인지 경고판을 봐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유다백성들에게 예레미야를 통해서 수없이 많이 경고하셨습니다.
‘너희는 예루살렘을 아름답고 묘한 성이라 하지만 나는 벌 받을 성이라 하겠다.’
왜 벌 받아야 되느냐?
렘6:10b절에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 그걸 욕으로 여겨 ‘왜 나한테 욕하느냐?’고 한다는 것입니다.
13절에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욕을 부리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리고 15절에는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하였느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또한 17절에 “파숫군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하였도다”,
16절에는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나 그들의 대답이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하였으며”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런 명확한 이유와 함께 북방에서 심판이 와서 멸망할 것이라고
유다백성들을 경고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다백성들은 경고를 듣지 않아
결국은 주전 587년에 북방에서 온 바벨론에 멸망당하고 만 것입니다.
△신약성서에도 수없이 많은 경고판이 있습니다.
목사님이나 설교자가 아니라 할지라도 이 경고판을 보아야 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막16:16
또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갈6:7
지금 악을 심는 사람은 악을 거두게 됩니다.
죄를 심는 사람은 심판을 거두게 됩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겁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고전6:9~10
그런데도 요즘에는 사람들이 이런 경고를 무시합니다.
등산길에서도 경고판을 무시하면 조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길에서도 하나님의 경고를 무시하는 자는 결국은 조난을 당하고
심판을 받게 되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경고판을 잘 보아야 됩니다.
▲둘째, 안내판을 잘 보아야 됩니다.
이 길로 가면 어디로 가는 건지, 저 길로 가면 어디로 가는 건지를 잘 보아야 됩니다.
처음 갈라질 때는 별로 큰 간격이 아닌 것 같지만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간격과 거리는 커지는 겁니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말씀에 불순종하면
그 길은 “심판과 멸망”의 목적지로 갑니다.
인류역사는 지금 최후심판을 향해 가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시면 최후심판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현세심판은 최후 심판의 예고편입니다.
중국에 지진이 난 것, 인도네시아 미얀마에 쓰나미가 난 것, 전쟁이 일어나는 것,
북한에 기근이 심하다는 것은 예고편입니다.
결국 인류역사는 최후심판, 그리스도의 재림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렘6:29~30 “풀무를 맹렬히 불면 그 불에 납이 살라져서 단련하는 자의 일이 헛되게 되느니라
이와 같이 악한 자가 제하여지지 아니하나니 사람들이 그들을 내어버린 은이라 칭하게 될 것은
나 여호와가 그들을 버렸음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은을 제련할 때에는 원광석을 갖다가 불을 때 가열을 합니다.
그래서 불순물을 제거하는 건데, 그냥은 제거되지 않기 때문에 거기에 납을 넣습니다.
그러면 납이 녹을 때에 불순물을 같이 빼내는 겁니다.
그래서 순은이 남게 되는 건데, 이것을 잘못 가열하게 되면
납덩어리만 싹 녹아내리고 불순물이 있는 원광석이 그대로 남게 됩니다.
유다백성들이 이렇게 됐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유다백성들의 불순물이 제거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결국은 그것을 내어버렸다는 겁니다.
유다백성들은 내어버린 은이 되었고, 마치 맛 잃은 소금처럼 내어버린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불순종과 거역의 인생길을 가는 사람은 길가는 도중에는 현세의 심판을 당하게 되고
결국은 최후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거역하고 살면 현세 심판과 최후 심판, 두 가지가 옵니다.
그래서 지옥, 영원 불 못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은
그 길이 좁고 협착하게 보여도 결국은 구원과 영생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오류 없는 하나님 말씀인 성경은 인생의 경고판과 안내판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아무리 바쁘셔도 잠시 서서 성경을 보는 시간을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헌법, 상법, 불경, 사서삼경은 몰라도 괜찮지만 성경은 알아야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우리를 지으시고 인생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경고판을 찍어 버리고 안내판을 뽑아 버린 사람은
조만간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가까이 하면 축복이 가까워지고
성경을 멀리하면 축복이 멀어집니다.
그러므로 삼거리에 서서 안내판과 경고판을 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물어보라 (Ask)
본문 16절에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알아보고 라는 말은 영어로 ‘ask’ 즉, 물어보라는 뜻입니다.
“옛적 길이 어딥니까? 우리 조상들이 다닌 길이 어딥니까? 선한 길이 어딥니까?”
물어보라는 겁니다.
물론 옛적 길이라고 해서 다 좋은 길은 아닙니다.
욥22:15절에 “네가 악인의 밟던 옛적 길을 지키려느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옛적에 산적들이 다닌 길, 도적들이 도적질 하려고 다닌 길은
옛적 길이라 해도 좋은 길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본문6:16절이 말하는 옛적 길은 믿음의 조상들이 가던 길을 말합니다.
▲성경에는 위대한 슈퍼스타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가리켜 믿음의 조상이라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다윗, 히스기야, 요시야, 이사야, 예레미야, 다니엘, 호세아 등이 가던
길이 있습니다. 이런 길이 옛적 길이요 선한 길입니다.
교회 역사 속에도 위대한 스승들이 있습니다.
사도바울, 400년 경에 아프리카 히포의 감독이었던 어거스틴,
1517년 종교개혁을 일으킨 마르틴 루터,
그리고 1536년부터 제네바의 종교개혁을 한 존 칼빈,
침례교회의 위대한 설교자 찰스 스펄젼, 20세기 설교자 마틴 로이드 존스 등이 있습니다.
이들이 걸었던 신앙의 길은 검증되고 인정된 길입니다. ‘옛적 길, 선한 길’입니다.
당대의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후대의 인정을 받은 길인 것입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를 준비하는 목회자 후보생들에게
현대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고전신학을 먼저 공부하라는 말을 해주고 싶습니다.
20세기에 나온 신학 중에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은 돌아가셨다는 사신신학이란 신학이 있습니다.
그리고 민중신학, 해방신학, 에큐메니칼신학, 근본주의신학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신신학을 공부하기 전에, 먼저 위대한 슈퍼스타인 어거스틴, 루터, 칼빈을 읽고 배워야 합니다.
저는 침례교 목사입니다. 교회와 국가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정교분리
신앙은 개인적인 것이고 국가의 맡은 사명은 공적인 것입니다.
또한 침례는 믿는 자가 받는 것입니다.
유아세례는 성서에 근거도 없고 모범도 없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침례교 정신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런 정도의 차이를 제외하고는
루터나 칼빈의 개신교 신학에 조금도 이의를 갖지 않습니다.
칼빈신학이 옛적 길입니다. 신학체계로서는 칼빈신학만한 체계가 없다고 믿습니다.
성서의 무오론을 믿고 하나님의 주권을 믿으며 인간의 전적타락을 믿고
성령론의 극단적인 신비론을 피하며
7년 환란, 천년왕국과 같은 근본주의 종말론의 불건전한 체계를 거부합니다.
하나님께서 인류역사에 가르치신 가장 최고의 옛적 길은 역시 루터, 칼빈 선생이 가르친 길입니다.
물론 옛날에도 아리우스, 오리겐, 펠라기우스, 소시너스, 아르미니우스와 같은 이단자도 있었고
오류도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이 걷던 길은 옛적 길이라 해도 산적 길, 도적 길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길을 가지 말아야 됩니다. 그러나 개신교 종교개혁을 일으킨 위대한 루터, 칼빈,
그리고 침례교의 위대한 설교자 스펄젼은 위대합니다.
설교자들도 성도들도 각자가 ‘올바른 옛적 길이 무엇인가?’
구약의 신앙 거성들과 역사속의 위대한 교회 스승들에게 물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세지말이 될수록 박수 무당 같은 자들이 많이 일어나서
거짓된 표적과 기사를 보이며 택한 자라도 미혹하여 잘못된 길로 이끌어 가려 합니다.
우리는 기적 좀 일으킨다고 좇아가서는 안됩니다.
사람을 쓰러뜨렸다고, 꽃향기 하니까 꽃향기가 난다고, 손바닥을 치면 금가루가 떨어진다고,
이빨을 금이빨로 바꾼다고 쫓아다니지 마십시오.
기적도 죽은 자가 살아난다거나 문둥병자가 낳았다 혹은 암환자가 낳았다면 믿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기적이 아니고 쓸데없는 기적, 말도 안되는 기적이 왜 필요한 겁니까?
도대체 기독교에 그런 것이 무슨 쓸데가 있느냐는 말입니다.
그런 거짓된 기사와 표적을 따르지 마십시오. 우리는 옛적 길을 가야 됩니다.
성경, 루터, 칼빈, 스펄전, 로이드존스는 훌륭합니다.
저는 신학을 오래 공부할수록, 오래 가르칠수록 그리고 설교를 하면 할수록
‘옛적 길이 옳은 길’임을 확신하게 됩니다.
성도님들도 옳은 길을 찾으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걸으라 (Walk)
렘6:16b절에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walk in the old path)”고 기록되었습니다.
옛적 길이 선한 길이고 구원과 영생으로 이끄는 길임을 알았으면
그 길로 ‘걸어가라’ (행하라, 살라는 뜻의 관용어)는 것입니다.
요즘에는 설교 잘하는 데를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설교를 들으며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돌아가서는 예전과 다름없이 죄 가운데 삽니다. 그러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간음하지 마라”하면 ‘참 그거 옳은 말이네’하고 돌아가서는
또 죄를 범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말입니다.
옳은 길을 알면 그 길로 가야 됩니다.
눅6:46절에 “너희는 나를 불러 주여 주여 하면서도 어찌하여 나의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느냐”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주여 주여, 주님 주님이십니다.” 하고서는 또다시 엉뚱한 길로 가서 우상을 섬기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잘못된 길입니까? 옳은 길을 알면 그 길로 걸어야 됩니다.
▲성경을 읽고 공부하는 사람은 영혼의 축복을 받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에 성공하는 사람은 인생에 성공합니다.
예배에 실패하는 사람은 인생에 실패합니다.
기도하면 성령 충만을 받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습니다.
또 십일조 생활을 충실히 하면 물질의 고통을 평생에 받지 않고 물질의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봉사를 하면 하나님께서 상급을 주십니다.
그리고 날마다 말씀으로 자신의 죄악을 씻으면 경건의 성장이 있게 되는 겁니다.
이런 길이 다 옛적 길이고 검증된 길이며 축복된 길입니다.
십일조 생활과 예배 생활과 기도 생활, 이 세 가지만 잘해도 그 사람은 성공합니다.
그게 검증된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길을 걸어야 됩니다.
유다백성은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고 대답하여 결국 멸망했습니다.
그 길이 비록 좁고, 많은 사람이 찾지 않는 길이라 해도
우리 성도님들은 옳은 길을 찾아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우리는 살다보면 갈림길에 서게 됩니다. 갈림길에 서서는 옛적 길을 택해야 됩니다.
그 길은 선한 길이며, 심령에 평강을 주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욥8:8절에 “청컨대 너는 옛시대 사람에게 물으며 열조의 터득한 일을 배울찌어다”
옛길이 선한 길입니다. 옛길이 선한 길인 이유가 뭐냐?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과도 평화를 누리고 나 자신의 양심과도 평화를 누리며
다른 사람과도 평화를 누리는 길이, 바로 옛적 길, 선한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요즘 어느 중학교에서는 한자를 안 가르친다고 합니다.
대한민국 국어의 뿌리가 한자에 있는데, 우리의 말 자체가 한자에서 나온 건데,
우리 말의 뜻글자인데, 그 뜻을 안 가르치면, 우리말을 어떻게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 말은 모르고 영어, 독일어, 일본어를 배우는 것이 무슨 교육입니까?
우리 자녀들이 한자를 모르니까 고전을 안 읽습니다.
그리고 요사이에 나온 새 책만 읽습니다. 내용도 없는 아주 빈약한 새 책만 읽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아이들이 사상에 뿌리도 없고 인격의 깊이도 없게 됩니다.
저는 우리 신앙인들 그리고 우리의 자녀들도
옛적 길, 선한 길을 알고 배우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