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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LNCK 2013. 8. 21. 13:44

 

2023 06 04 사도행전 강해 (69)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 YouTube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행19:1~7

우리는 지금 사도바울의 3차선교여행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바울이 안디옥 교회를 떠나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역을 두루 다녔었죠.  18:23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역은 1차선교여행 때 교회를 세웠던 곳들입니다.  
이제 바울은 에베소에 들어갑니다. 

에베소는 그 전에 아볼로가 있었죠. 
이 무렵 아볼로는 고린도 교회로 건너갔습니다.  18:27
아볼로는, 에베소를 떠나기 전에, 거기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서 
복음에 대해 정확히 가르침을 받은 후 고린도로 갔습니다.

◑19: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아볼로가 떠난 후에 에베소에 바울이 도착한 것이죠. 
이 에베소는 바울의 3차선교여행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3년간 길게 사역했습니다. 

'바울이 윗지방으로 다녀' 
18:23에서 끊겼던 바울의 3차 전도 여행 이야기가 다시 이어집니다. 
여기서 '윗지방'이란 일반적으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땅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 지역이 산지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오늘 본문 19:1~7절은 바울의 에베소 사역의 첫 번째 에피소드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에서 어떤 제자들을 만납니다. 

◑19:2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이르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하였노라'
3 '바울이 이르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그런데 제자(그리스도인)으로서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다는 것(:3)은 이상한 일입니다. 
이들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도(18:26) 무관한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이 그 부부와 관련이 있다면,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죠. 

그리고 아볼로 역시 이미 고린도에 가고 없는 터여서 
추측건대 이들은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를 만나기 전에 
성경을 가르칠 때, 그에게 영향을 받아 믿게 된 사람들일 것입니다.

어떤 제자들에 대한 소개가 본문에 나오는데요. 
이들은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았으며 :3
이들은 12명이었다고 말합니다. :7

'세례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건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배웠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해서 사도행전의 저자는 '제자'라고 기록합니다.   *마세테스
'제자들'이라는 표현은, 당시에 믿는 신자들을 가장 쉽게 표현할 때 쓰던 말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란 말은, 안디옥 지역에서 주로 쓰던 말이었고요.
'제자들' 말고, 당시 성도들을 일컫던 말로서 '형제들'도 있었죠.)

그런데 바울이 보기에는 뭔가 미심쩍었던 것 같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자들'이라고 말하는데, 그들의 믿음이 뭔가 좀 이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들에게 묻습니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2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님 진짜 믿어요? 예수님 정말 믿어요?' 라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에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라고 묻습니다. 

왜 성령과 믿음을 연결시킬까요?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예수를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전12:3절에 따르면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했죠.
여러분 믿음의 핵심은, 언제나 예수가 믿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그저 머리로 아는 게 아니라, 인격적으로 믿어지는 겁니다. 

그런데 이 일은, 사람의 노력이나, 이해나, 결단으로 되는 게 아닙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셔야만 일어나는 일입니다. 

물론 우리가 세뇌를 당해서, 또 교회문화에 너무나 익숙해서 
입술로는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는 있지만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오로지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이 오셔야만, 예수의 죽으심과 부활이 깨달아지고, 진짜 믿어집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과 믿음은, 떼래야 뗄 수가 없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이 고린도의 제자들을 보니까요. 바울이 이상한 겁니다. 
겉으로는 믿는 것처럼 보이는데, 대화를 좀 나누다 보니까, 뭔가 석연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이 진짜인지 물어본 겁니다. 

그 질문이 바로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라는 질문입니다. :2

그런데 이 2절의 질문을 다르게 해석하는 교단이 있습니다. 
오순절 교단은, 또는 일부 은사주의 교회는 이 부분을 다르게 해석합니다.      주1)
 

여러분 오늘 2절을 한번 다시 보십시오. '이르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2절에 보면 두 개의 동사가 나란히 나옵니다. 
'믿는다'라는 동사와 '성령을 받는다'라는 동사가 나옵니다. 

원문으로 보면, 이 두 동사의 시제가 같습니다. 
'믿는다' 라는 동사와, '성령을 받는다'라는 동사의 시제가 같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과, 성령을 받는 일이.. 서로 동떨어진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동시에 일어나는 동시적인 사건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를 믿을 때 우리는 성령을 받습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누구도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이미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또 한 번 더 받아야 할 성령세례(2nd blessing)는 없습니다. 

(*그런데 회심하지 않고 지적 동의로 예수 믿는 사람을,

'성령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한 것으로 보는' 데, 어떤 중대한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남은 평생의 과제는 
에베소서 5:18절의 말씀처럼 '오직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이렇게 성령 충만이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정말 예수를 믿습니까? 
네! 
그러면 여러분은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아멘이시죠?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로 시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제자들의 믿음은, 바울이 보기에 석연치 않은 겁니다. 
믿는다고 말하는데, 예수를 진짜 믿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2절에서 이렇게 묻는 겁니다.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그런데 제자들의 답이 무엇이죠? 
'우리는 성령이 계심도 듣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말은, 성령의 존재 자체를 모른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성령의 이름도, 그분에 대해서 듣지를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왜냐면 이들은 세례 요한의 가르침을 배운 자들입니다. 
세례 요한은 성령에 대해 분명히 가르쳤습니다. 

그 부분이 마3:11절에 나오는데요.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는 분'이라 했습니다. 
그러니까 세례 요한이 성령을 가르쳤다는 거죠.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제자들은, 성령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2절에 '성령의 계심도 듣지 못했다'는 대답은 어떤 의미일까요? 

'세례 요한이 예언한 그 성령이 실제로 오셨다면,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 
우리는 아직 경험하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아직 그런 성령의 세례를 경험하지 못한 겁니다. 
노골적으로 말하면, 예수를 진실로 믿는 믿음이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의심이 맞았던 것 같습니다. 진짜 제자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명목상의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다시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3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니라' 

여러분 요한의 세례는 또 어떠한 세례이죠? 
거기에 대한 힌트가 4절의 바울의 대답에 나옵니다. 

◑19:4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4절에서 바울은 요한의 세례를 '회개의 세례'라고 부릅니다. 

아시다시피 세례 요한은 회개를 외친 선지자였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게 세례 요한의 설교의 핵심 메시지였습니다. 

'예수님이 곧 오실 텐데, 너희들은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이 간다. 
그러니 회개하라'는 메시지가 세례 요한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의 세례'는, :3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하고 죄를 자백하게 하는 세례였습니다. 

그런데요, 회개만 가지고는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죄인이라는 걸 깨닫는다고 구원을 받는 게 아닙니다.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야 구원을 받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바로 우리의 죄를 씻으신 예수를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흔히 어떤 사람이 거듭나서 참된 성도가 되었다는 걸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여러분 많이 들어보셨죠? '회심'을 해야 진짜 성도입니다. 

이 회심에는 반드시 두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회개이고, 또 하나는 믿음입니다. 
이걸 합쳐서 우리가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붙어있어야, 진짜 믿음의 증거입니다. 
세례 요한도 이것을 가르쳤습니다. 

그는 회개의 세례를 베푼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동시에 예수를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죄를 깨닫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죄를 해결할 예수를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유명한 세례 요한의 외침이 있지 않습니까?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회개로 끝나지 않고) '어린 양을 보라'고 가르쳤습니다. 
어린 양 예수를 믿는 믿음의 자리까지 가야 됩니다.

 

그런데 자책이나 뉘우침이 아니라, 진정 성령으로 회개한 사람은,

믿음으로 자동적으로 오토매틱하게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것으로, 성도가 되는 게 아닙니다.

(만약 이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책한 것이지, 성령으로 회개한 게 아닙니다.)  
내가 고백했던 죄들을, 예수가 대신 짊어지시고 
나 대신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셨다는 그 사실이 믿어져야... 성도가 됩니다. 

그냥 '나는 죄인이지...' 그 정도가 아니라, 
그 죄, 내가 죄인이라고 여겨지는 그 죄들을 위하여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그 사실이 믿어지고, 
정말 그 십자가를 붙들 때, 성도가 됩니다. 

여러분 가룟유다를 한번 보십시오.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았습니다. 
팔고 나서 유다는 자기의 죄를 깨달았습니다. 
'내가 무죄한 사람의 피를 팔고 죄를 범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자백을 한 거죠. 

가룟유다도 자기가 죄인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다를 가리켜, 구원받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왜 그렇죠? 
그는 회개의 모습은 있어 보이지만, 예수를 돌이켜 믿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죄인이다'라고 고백은 했지만, 
'그 죄를 씻기 위해 나에게 예수가 필요.하다' 그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 죄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가는 대신에, 자기의 죄를 자기가 스스로 책임진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참된 회심에는, 두 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회개이고, 또 하나는 믿음입니다. 

'나는 죄인이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내가 지은 죄 때문에 나는 예수가 정말 필요한 사람이다. 
예수가 없으며 나는 지옥 갈 사람이다. 
그런데 예수가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다.' 
그게 보여지고 믿어져야 참된 성도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에베소의 제자들은 예수를 믿지는 않았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통해, '회개'까지는 했습니다. (자책, 뉘우침이었을 것입니다)

자기의 죄들을 고백하긴 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예수의 공로를 믿고, 진짜 의지하는 그 믿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바울은 그들에게 예수를 전합니다. 
그리고 5절에서 바울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풉니다. 

◑19:5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여러분, 이 지점이 굉장히 중요한 지점인데요. 
여러분 앞에서 살펴본 아볼로 기억나시죠? 

아볼로도, 이 제자들처럼, 요한의 세례까지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볼로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로부터 온전한 복음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아볼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다시 (바울이나 아굴라로부터) 세례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이미 예수를 믿는 성도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구약을 통해서 오실 예수님을 정확히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다시 받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이들은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의 의심이 맞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제자'라 불렸지만, 참으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믿는 사람처럼 보이는 종교적인 모습은 다 갖추었는데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었습니다. 왜 그렇죠? 
그들 안에는 예수를 믿는 믿음이 아직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대화나, 그들의 기도나, 그들의 신앙의 확신이나, 신앙의 동기나, 
그들의 회개에는 예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믿게 된 그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다시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때 그들에게 어떠한 일이 일어났죠? :6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이때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십니다. 성령 세례를 이제야 받은 겁니다. 
이때 그들은 진실로 예수님을 믿은 거죠. 

그런데 그때 동반된 현상이 무엇이죠? 
'성령이 임하심으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성령이 임하시자 방언도 하고, 예언을 했습니다. 
여러분 이 장면을 가지고 또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오순절주의자들처럼 '성령을 받으면 은사가 반드시 나타난다' 이렇게 해석하면 곤란합니다. 
('성령을 받으면 은사가 반드시 나타난다' 이 사실이 맞다/틀리다를 떠나서,
그게 본문의 주제가 아니라는 거죠.

 

성령의 은사가 나타난 것을 부정적으로 볼 필요 없죠.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마치 잘못된 것처럼 이해할 필요는 없죠.
다만 그 의미, 강조점은 아래와 같은 사실에 있습니다.)   

이렇게 에베소에서 성령의 은사가 나타나신 것은
사도행전 안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안에서 안에 보면, 집단적으로 성령을 받는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 마지막 장면입니다. 
오늘 본문을 끝으로, 다음부터는 집단적으로 성령을 받는 사건이 더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 안에 보면, 집단적으로 성령을 받는 장면이 총 몇 번 나올까요? 
네 번 나옵니다. 

1) 첫 번째 장면은, 행2장에서, 오순절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때 성령을 받는 대상이 누구였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었습니다. 

2) 두 번째 장면은 행8장에 나옵니다. 
8장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혼혈 민족이었죠. 유대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니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중간에 있습니다. 

3) 세 번째 장면은 행10장에 나옵니다. 
10장에서는 고넬료의 가족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고넬료는 팔레스타인에 사는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방인인데 유대 안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4) 네 번째 장면은 오늘 본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끝으로, 더 이상 성령을 집단적으로 받는 사건이 나오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에베소의 열두 사람이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누구이죠? 에베소라는 완전한 이방인 지역에 사는 완전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 성령을 받는 이 집단의 흐름이 딱딱 잡히시죠? 
2장의 예루살렘의 유대인, 
8장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중간인 사마리아인, 
10장에서는 팔레스타인 안에 사는 이방인, 
19장에서는 완전한 이방인 지역에 사는 완전한 이방인! 

여러분, 행1:8절의 말씀이 떠오르지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리라' 

이 1:8절의 예언이 지금 하나씩 완성되고 있는 겁니다. 
예루살렘, 온 유대, 사마리아, 땅끝의 지점을 통과할 때마다
집단적으로 성령을 받는 사건을, 누가가 의도적으로 이렇게 기록해 놓은 겁니다. 
일종의 이정표와 같은 거죠. 

그렇게 사도행전 1:8절의 약속이 성취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점마다 보여주는 겁니다. 무엇을 통해서? 
집단적으로 성령을 받는 사건을 통해서요. 

그리고 이 성령은, 하나같이 동일한 성령입니다. 
오늘 본문의 에베소라는 완전한 이방인 지역에서, 
이방인들이 받은 성령과, 유대인들이 오순절 날 받은 성령은 같은 성령입니다. 

그 증거가 바로 방언과 예언입니다. 
여러분 오순절 성령 강림때에도, 유대인들이 방언과 예언을 받았습니다.  행2장

그런데 오늘 본문의 에베소 사람들도 성령을 받자 방언과 예언이 나타났습니다. 행19장
무슨 얘기죠? 

오순절에 유대인들이 받은 성령과, 
오늘 에베소의 이방인들이 받은 성령은 동일한 성령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루살렘부터 이방 땅 끝에 모든 교회는 
한 성령을 받은 하나의 교회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에베소 사람들에게 나타난 방언과 예언의 의미입니다.
(이 외에도 다른 의미들이 있겠죠)

◑적용

오늘 본문 1절에서 우리는 제자라는 이들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흐름을 보면서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이들은 참 제자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제자로 보였지만, 이름뿐인 명목상의 제자였습니다. 
진짜 구원받은 성도가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이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은 자들이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건,  :3
세례요한의 가르침을 받았던 자들이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세례요한이 누구죠? 누구보다 청빈한 삶을 살았던 선지자였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사역도 광야에서 했고요. 
음식도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살았습니다. 금식과 기도도 열심히 했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이 본문의 제자들은, 세례요한의 가르침대로 
매우 훌륭한 종교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합니다. 
세례 요한의 세례까지 받았으니까요. 

아마 금식과 기도에 헌신한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의 세례도 받았습니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자백하는 세례도 받았습니다. 

어쩌면 종교적으로 필요한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봐도 에베소 지역에서 '이 사람들은 제자이다' 라고 불렀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딱 하나, 예수를 인격적으로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딱 하나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본문은, 그들은 참 제자가 아니었다, 구원받은 성도가 아니었다... 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 것, 그 딱 하나가 믿는 
우리에게는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주변에 보면, 예수를 믿어도 변화되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마치 '나는 예수를 믿어도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 결심하고 교회를 다니는 것처럼 
삶의 열매들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무리 오래 보아도 삶의 변화들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들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었지만, 그런데 성령의 체험이 없어서 그렇게 무기력하게 사는 거라고' 말합니다. 
'또 한 번의 성령의 체험을 받아야 한다' 그렇게 가르칩니다. 

이런 말은 '그 사람이 구원 받았다'는 걸 전제하고 말하는 거죠. 
그러나 여러분, 오늘 본문의 이름뿐인 '제자들'을 보십시오.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또 한 번의 성령의 체험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를 믿는 믿음이 나타나지 않았던 게 아니었습니다. 
처음부터 이들은 예수를 믿는 믿음이 없었습니다. 
처음부터 회심을 하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에, 삶의 변화가 없었던 것입니다.

종교적인 모습은 있었지만, 믿음의 열매가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것은,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중생하여 거듭난 생명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즉 회심하지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영적으로 자랄 수 있습니까? 
일단 생명으로 태어나야.. 그 다음에 자라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고 거듭나야만, 회심해야만, 여러분 신앙의 성장이 시작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우리에게 동일하게 묻습니다. 
너무나 중요한 질문이라서, 오늘 본문의 제자들과 같이 
우리에게 또다시 묻습니다. 

'너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라고 시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진짜 성령 체험인 거죠. 

그렇다면 여러분은 정말 성령 체험을 하셨습니까? 
정말 예수를 믿고 있느냐? 하고, 본문은 우리에게 또다시 묻습니다. 

△마지막으로 일화를 하나 나누려고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분이 고등학교 때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분이, 모태 신앙인이었다고 합니다. 
교회를 다니던 어머니에게서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교회를 다니던 어머니 밑에서 자랐지만 
단 한 번도 어머님을 통해서, 예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지, 
그런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계신다..' 그런 말은 들었지만, 
그리고 '헌금은 어떻게 하고, 교회 생활은 어떻게 하고...' 그런 것들은 배웠지만 
정작 중요한 복음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는 듣지를 못했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자기를 교회에 데리고 다니셨지만 
예수님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분이 나이가 들어서 생각해 보니까, 자신이 정말 예수님을 믿고 나서 뒤돌아보니까 
'왜 어머니가 예수님 이야기를 안 하셨는지' 그때 이해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머님이 교회를 다녔지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었던 것입니다. 
어머님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어머니 본인이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다 보니까, 
구원에 대해, 예수님에 대해 할 말이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십니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은 그토록 알려주고 계십니까? 

그 예수님을 믿을 때, 죄인들은 자기 죄를 회개하게 되고,
내적인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면서, 삶의 변화가 자연스레 뒤따르게 된다고 알려주십니까?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예수님을 가장 알려주고 싶은 마음의 소원이 
여러분의 신앙의 중심에 있습니까? 

여러분이 누군가를 교회에 전도하려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믿지 않는 가족들에게나 친구들에게 들려줄 
'내가 만난 예수님'의 이야기, 그 회심의 간증이 있으십니까? 

'다른 어떤 도움 때문이 아니라 
바로 내 죄 때문에 
나는 예수가 필요한 사람이다' 이게 믿어지고 계십니까? 

그 예수가 정말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났다는 그 사실 때문에 
여러분은 기쁨과 평안과 확신을 정말 삶 가운데 누리고 계십니까? 
여러분에게는 진짜 회심의 은혜, 회심의 이야기가 있습니까? 

여러분 저는 단순히 우리 교회가, 본문의 에베소의 제자들처럼 
종교인으로 가득 찬 교회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우리 교회가 종교인이 늘어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 나오는 분들이, 단순히 공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물론 이것들도 너무나 귀한 것이지만요. 
그러나 그것들을 다 하고도, 
여러분이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정말 회심한 참된 제자인지, 
아니면 그저 종교인인지 아무 상관 안 하는 
그런 목사나, 그런 비참한 교회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회심하지 않은 분들을 보면서도 가슴 아파하지 아니하고, 
서로가 용인하고 있다면, 여러분 어쩌면 이유는 하나입니다. 
자기도 그와 같이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기도 그와 같이, 정말 내 죄를 위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목사도 예외가 아닙니다. 
자기도 거듭나지 않았는데, 회심하지 않았는데, 설교할 수 있습니다. 
(그 설교를 듣고 누군가는 회심할 수도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로 회심하는 거죠)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설교를 듣고서, 사람들은 회심하지 못합니다.
왜냐면 죄의 권능에 대해서 강력히 설교하지 않고, 회개에 대해서,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믿음에 대해서 그저 이론적으로만 설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저와 여러분에게 다시 묻습니다. 
'너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성령이 아니고서는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받아 예수를 나의 구주로 진짜로 믿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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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너희가 믿을 때 성령을 받았느냐?' 19:2

 

(※성령론에 대해 교단적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일부 사람들은 '성령을 정말 받고, 진짜 성령의 사람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

성령론에 대한 견해 차이로, 왈가왈부 하는 것은 덕이 안 된다.. 라고 말하는데, 옳습니다.

 

교단적 해석의 차이는, 큰 그림은 일치하는데, 지엽적인 각론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것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다만 흑백논리로 A가 틀리고 B는 맞다고 접근하는 것은 극단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위 설교에서 지적하듯이, 장로교는 고전 12:3절에 의거

'누구든지 성령이 아니고서는 주라 시인할 수 없다' 이 말씀을 엄격히 적용하면,

그럼 회심하지 않은 수많은 majority 신자들은, 성령을 안 받는 게 되는 거죠.

오순절파는 그들을 일컬어 '성령 받지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큰 그림으로는 일치합니다/주)

 

그러면 2절에서 어떤 부분이 논쟁이 되었느냐? 
바로 '믿을 때'라는 표현입니다. 

오순절 교단은, '믿을 때'라는 말을 '믿은 후에'로 해석합니다. 
'너희가 믿은 후에 성령을 받았느냐?'로 해석합니다. 

'믿고 나서도 또 한 번 더 성령을 받아야 한다.' 이렇게 2절을 해석합니다. 
처음 예수를 믿으면 성령을 받습니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하는 거죠. (명목상의 신자들이 많으니까)
또 한 번의 성령체험이 있어야,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왜 교회 안에 비실비실한 신자들이 이렇게 많은가? 
왜 예수를 믿어도 능력이 나타나지 않은가? 
왜 죄를 끊지를 못하는가?' 
이건 모두 성령을 한 번 더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성령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했다는데, 명목상으로 이름뿐이라는 거죠. 그래서 한 번 더..)

예수 믿은 후에, 성령을 한 번 더 진하게 체험을 해야 능력이 임한다는 거죠. 
이걸 '두 번째 축복 2nd blessing' 이라고 부릅니다. 
또는 '성령 세례'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 성령 세례의 증거를 방언이라고 말합니다. 

그 증거를 본문 6절에서 찾습니다. 
6절에 보면, 이 에베소의 제자들이 성령을 받습니다. 
그때 방언이 터지고 예언도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봐라, 성령의 두 번째 체험을 해야 된다. 그래야 이렇게 능력이 나타난다.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라고 말합니다. 
이게 오순절주의자들의 성령론입니다. 성령을 두 번 받아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예수를 믿고 나서, 세례를 받고 나서, 산으로 올라갑니다. 
전부 다 나무 하나씩 붙잡고 기도합니다. 두 번째 성령 받기를 구하는 거죠. 
그래서 방언도 받고 은사를 받아야, 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이런 교회들을 보면요. 수련회 끝나는 마지막 날에는 꼭 은사 집회를 갖습니다. 

서로 어깨에 손을 대고, 또는 등에 손을 얹고 은사받기를 기도합니다.

(성령 받고 명목상의 신자에서 탈피하라는 거죠)

여러분 이렇게 성령을 가르치면, 실제로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이렇게 되면 성도와 성도 간의 계층이 생깁니다. 

두 번째 성령을 받아서 은사를 체험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성도로 계층이 생깁니다. 
두 번째 축복을 받지 못하면, 예수를 믿어도 열등한 신자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다 보니까, 그렇지 못한 성도들은, 은사받은 쪽을 부러워합니다. 
'왜 나는 이런 극적인 체험이 없는가?' 나중에는 신앙적인 열등감을 느낍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사를 체험하기까지 간절히 오래 기도합니다. 
그러다보면 교회는 신비주의로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자연스럽게 말씀의 궤도에서 교회가 벗어납니다. 
여러분 이게 가장 큰 위험 지점이죠.